< -- 816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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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복 많은 분이시지요.”
남부 페스트의 대기권에 막 접어들고 있는 프리깃 창밖을 힐끔 내다보았던 상장군 제네르는 역사책을 무릎 위에 놓고 초롱초롱 눈을 뜨고 있는 두 명의 어린 황자들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두 황자들은 이번에 생일 축하를 하러 가는 부담스런 친척 어른보다는 오늘 머물게 될 곳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여기가 페스트인가요?”
“예, 여기부터는 황제령이 아니고 제후지역입니다. 5제후 이그나토 가가 영주로 있습니다.”
제네르는 창 쪽으로 고개를 조금 더 내밀고는 구름 밑으로 막 드러난 누렇고 군데군데 푸른 이곳 대지를 응시했다. 사실 이곳은 얼마 전까지 [남부 공동령] 이었지만 지난 제위 전쟁 때 카렐이 남부 5제후 마자리크 이그나토 경에게 전향의 대가로 넘겨준 곳이었다.
마자리크 경이 당시 그런 모험을 감수했던 건 [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남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저개발과 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유일한 영지였던 일리안은 거친 산악뿐인 황무지였고, 그의 가문은 빈곤한 제후 중 하나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네피와 결혼해 황실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져놓은 그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새 땅에 30년간 차근차근 주민들을 이주시켰고, 이제 그 장기간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려는 참이었다.
“왜 여긴 황제령이 아닌데요? 전쟁 전에는 주인도 없었다면서요?”
둘째 태자 주페가 다시 물었다.
“페스트를 준 건 양쪽 다 손해 볼 건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태자 저하.”
“왜요? 어차피 폐하께서 승리한 전쟁이었는데 그냥 차지하는 게 더 낫지 않고요?”
“그러게요. 황실에서 결정하면 말 들었을 것 같은데요?”
같은 책을 들고 오빠 옆에 나란히 앉은 여동생 마리안도 똑같은 호기심을 보이며 눈을 크게 떴다.
“힘만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면 그렇겠지요.”
제네르가 똘똘한 질문을 하는 두 황자들을 돌아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이 보고 있는 보통의 역사책에는 당시 벌어진 일만 나와 있을 뿐 당사자들의 의도까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어느 분야에서든 지도자가 될 사람답게, 이 두 황자들도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를 습관처럼 먼저 물었다.
“그 때는…….”
이 꼬마들에게 당시 배경을 설명하려던 제네르는 말을 멈추고는 프리깃 귀빈실에 동승해 있는 다른 두 사람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황태후 겸 대제학인 세네피스와 파예드 학장이며 태자들의 대부인 코리온은 서로간의 해묵은 적대감을 나타내듯 사각형 귀빈실 양 모서리 극단에 최대한 뚝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들은 황자들과 제네르의 대화에 짐짓 관심 없는 척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다 하필 이 셋이 가게 되었누.’
지금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되새기며 제네르가 고개를 저었다.
‘대공주 생일만 아니면……젠장.’
제네르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에서 나름대로 높은 서열의 황족들이 이런저런 정변의 와중에 몰살당하고 몇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남은 최고 서열인 레곤 대공주의 10년 주기 생일은 나름대로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보통은 황제 혹은 황후가 직접 참석해 축하를 해 주곤 했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이번엔 황제도 자리에 없고, ―물론 표면적으로는 아들이 죽는 흉사(凶事)로 참석을 고사했다고 되어 있었지만― 장태자는 외출도 못 하고, 아메스 황후는 황제를 대신해 궁을 지켜야 했고, 산후 조리도 채 끝나지 않은 채 갓난 아들을 잃은 네페티 황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황실 축하사절로는 어린 태자 주페, 그리고 ‘바람이나 쐬고 오라’는 말에 함께 나선 동생 마리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공주의 오랜 친구인 세네피스 황태후, 대공주의 장남인 코리온, 그리고 내각 축하사절로 가는 제네르가 한 프리깃을 탔으니 제국의 3대 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가 얼떨결에 한 프리깃에 오른 셈이었다.
게다가 이 셋 모두 서로에게 ‘묵은 감정’ 한두 건씩은 품고 있으니 이들이 함께 앉은 프리깃 귀빈실 분위기는 더더욱 어색했다.
“가 보면 아시겠지만 페스트는 황제령이나 수베르만큼 좋은 땅이 아닙니다. 게다가 황실에 적대적이었던 강력한 델루지 가와 호지 가 사이에 끼어 있기까지 하죠. 여기를 황제령에 편입해서 효율적으로 통치하려면 필연적으로 대규모 황실 군대가 주둔해야 합니다.”
“아, 그러면 황실에 친한 이그나토 가에 거기를 줘서 대신 지키게 한 거군요.”
이번엔 마리안이 오빠보다 먼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이그나토 가의 수도 일리안은 가난한 곳이니까 탐나는 게 당연하고요. 우리 황실에는 꼭 필요한 곳이 아니지만요.”
“잘 보셨네요.”
제네르가 똘똘하게 대답하는 이 자그만 소녀에게도 바로 대답을 주었다. 갓난 남동생의 죽음으로 며칠을 이불 속에서 울며 지냈던 이 소녀도 다행히 공부 앞에서는 그 생각을 잠시나마 잊은 모양이었다.
“마마의 외할아버지인 네피 대장군이 마자리크 경과 결혼까지 했으니 이제 이그나토 가는 황실의 친구랍니다.”
“실익이 있는 한에는요.”
“예에?”
나름 어린아이 눈높이에 맞는 대답을 해 주었던 제네르는 옆에 있는 오빠 주페의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에 일순간 화들짝 놀랐다.
“마자리크 경이 네피 대장군에게 청혼한 건 종전 직후였어요. 황실이 승리를 했으니 자진해서 신뢰를 보여서 이전에 황실에게서 받은 약속을 더 확실히 보장받으려는 정치적인 결정이었을 거예요.”
“흐, 음.”
난처해진 제네르가 헛기침을 하며 마리안의 눈치부터 힐끔 보았다. 주페의 지적은 어린아이 대답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확했지만 네피의 외손녀이고 마자리크 경을 ‘외할머니’라며 따르고 있는 마리안에게는 한편으로 껄끄러울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마리안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토론 내용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리안이 태연한 표정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어쨌든 네피 할아버지하고 외할머니하고 굉장히 사이좋게 잘 사세요. 할아버지도 날 사랑하고요. 반대로 보면 황실도 저하고 어머니하고 할아버지를 통해서 이그나토 가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거잖아요.”
“역시 폐하를 닮아 대단하십니다.”
제네르가 다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제네르는 똘망똘망한 두 황자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탄복하며 한편으로는 오싹한 느낌까지 받았다. 10대 초반에 불과한 주페의 현실 인식도 놀랍지만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꼬마 마리안이 바로 네피와 마자리크의 변호를 해 주는 것도 철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아니었다.
재차 같은 방의 ‘두 사람’ 눈치를 보던 제네르는 순간 이쪽을 쳐다보던 세네피스와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세네피스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세상을 보는 황자님들의 혜안이 대단하십니다. 흐뭇하시겠습니다, 황태후 폐하.”
“누구의 피를 받았는데.”
손자들을 향한 칭찬에도 황태후의 대답은 놀랄 만큼 싸늘했다.
“황상의 현명함을 생각한다면 저 정도가 그리 놀라운가.”
황태후의 냉담한 태도에 제네르는 내심 ‘괜한 소리 했군.’ 싶었다. 세네피스가 장태자 카이를 제일 싫어하기는 했지만 다른 황자들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네피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황제 뿐이었고, 비빈들이 낳은 황자들에게는 예외 없이 냉담했다. 심지어 공식 석상이나 가족 모임에서조차 황제가 자녀들에게 애정을 보일 때마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그렇다보니 어머니 베아트릭스를 닮아 수더분하고 성격 좋은 엘룬 옹주만 빼면 황자들도 이 아름답지만 무서운 황태후를 피해 다니는 게 보통이었다.
난처해진 제네르는 무심결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상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페스트의 넓은 황무지가 점점 또렷해져갔다. 아무래도 개척 초기여서인지, 사람이 사는 곳이나 개간이 된 농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자리크 경 고생이 바가지겠네.’
그때, 조종실 쪽에서 방송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3분 후에 착륙합니다. 방금 전 행궁 일대에 미진(微震)이 있다고 해서 잠시 착륙을 미뤘습니다만 일상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날씨는 약간 쌀쌀하다고 하니 따로 외투를 챙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방송 내용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마리안이 창에 얼굴을 가져갔다.
“지진이요? 우와, 지진도 나요? 책에서만 봤는데? 위험한 건 아니죠?”
마리안이 창을 짚은 채 호기심에 찬 얼굴로 제네르에게 쉴 새 없이 물었다.
“행궁 터가 옛날에 화산이 있던 지역이라 작은 지진이 종종 있습니다. 큰 지각활동은 없는 곳이니 염려 마십시오.”
“지금 가는 행궁이 상장군 목장에 있다면서요?”
“목장이라기는 좀 그렇고요, 사재 털어 만든 종마장입니다.”
“그런데 왜 황실 행궁(行宮)이 거기에 있어요?”
마리안이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야 페스트가 황제령이 남부와 연결되는 워프루트 2개 중의 하나니까요.”
난처해진 제네르가 교과서적으로 대답했다. 제네르 소유의 종마장은 페스트 저위도 평원의 [호드르 산] 정상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황제가 남부로 행차할 때 머무는 행궁이 분화구 외곽에 마치 망루처럼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말이 행궁이지 그곳은 황실이 ‘합법적으로’ 황실 조직을 상주시키기 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했다. 그곳에 주둔하는 소규모 황실군 부대 [발더 분견대]의 역할은 누가 보기에도 뻔했다. 이곳은 페스트가 다른 남부제후의 침입을 받았을 때 황실이 개입할 명분을 주기 위한 인계철선이었고, 한편으로는 황실이 남부의 정보를 모으고 관리하는 최일선 아웃포스트이기도 했다. 또한 남부가 다른 지역과 주고받는 통신을 감청하기 위한 보안국 비밀부대도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곳이 ‘제네르 소유의 종마장’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저 영주인 이그나토 가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서류놀음일 뿐이었다.
“소인의 미천한 가족들이 관리하고 있는 작은 종마장일 뿐입니다.”
제네르가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금 웃음을 보였다. 한때 탈라스에서 종마장 말단 노무자로 일했던 그의 가난한 부모들도 잘난 딸 하나 둔 덕분에 딸 소유 종마장에서 관리인 노릇이라도 하게 되었으니 벼락출세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신세가 풀린 셈이었다.
“종마장 덕분에 행궁의 풍경이 좋아진 정도로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네르가 평소 거의 쓰지 않던 농담으로 황자들의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슬며시 돌려놓았다.
“우와, 멋있어요.”
마리안이 종마장의 초원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었다. 종마장이 자리한 타원형 초원 중앙에는 먼 옛날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큰 칼데라 호수가 있었고, 주변은 높은 화산암 언덕이 마치 병풍처럼 빙 에워싸고 있었다.
“지금 내리면 말도 타고 구경도 할 수 있는 거죠? 이번에 폐하한테서 말 타는 것도 배웠어요.”
바깥 풍경에 넋이 팔린 마리안이 창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 채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제네르가 난처한 얼굴로 이 꼬마에게 대답했다.
“오늘은 일정이 있어 조금 어렵고요, 내일 조찬 후에 말을 타고 구경하실 수 있을 겁니다.”
“왜요, 당장 못 나가고요? 아직 환하잖아요.”
“황실 공식 사절단이 제후지역을 지날 때는 인근 주민 시찰을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인근 개척 도시에 지금 프리깃이 내릴 만한 사정이 아니라고 하니 작은 셔틀로 갈아타시고 그곳부터 다녀오십시오.”
“하지만…….”
실망감이 그득해 보이는 마리안에게 제네르가 얼른 다음 카드를 내놓았다.
“아참, 네피 대장군이 와 있을 겁니다.”
“네피 할아버지가요?”
갑자기 표정이 확 풀린 마리안이 창에 다시금 얼굴을 바싹 붙였다. 이 꼬마가 황실의 엄격한 예법에서 벗어나 해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우락부락하지만 속정 넘치는 할아버지의 품 안에서 뿐이었다. 고도가 낮아지고 초원의 풍경이 점점 선명해지면서 그 위에서 떼 지어 뛰노는 건장한 군마들의 모습도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프리깃이 다가가면서 행궁의 상공에 드리워 있던 공중 에너지장벽이 풀리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행궁이라는 이름은 붙어 있지만 워낙에 궁전 목적으로 만든 곳이 아니다보니 2, 3층 정도의 시골풍 목조주택 몇 채와 경비 막사 몇 개로 이루어진 아담한 별장에 불과했고, 원래 목적인 군부대가 그보다는 훨씬 큰 규모로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행궁이 산의 거의 정상에 위치해 있다 보니 한쪽으로 종마장이 있는 안쪽 분화구가, 반대편으로는 외곽의 이그나토 가 개척 농지를 동시에 내려다보였다.
황실 사절단,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는 50여 명의 호위부대 일행이 탄 소형 프리깃은 한낮의 햇살이 드리우는 행궁 앞 연못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할아버지!”
프리깃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마리안이 호위병들의 다리 사이를 쑥 빠져나가서는 어른 키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서 서슴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맙소사, 다칩니다!”
깜짝 놀란 호위병들이 엄청나게 빠른 이 소녀를 붙들려 했지만 그저 꼬마여도 워낙에 피가 남다르다보니 어른들로서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우루루 쫓아 뛴 호위병들이 열린 문 아래에 줄줄이 떨어지고 넘어지며 한바탕 난장판이 벌어졌다.
“잡았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은 병사 한 명이 몸을 날려 이 소녀를 꽉 붙들었다. 하지만 이 꼬마가 제 발로 멈춰 있어서였지 병사들의 걸음이 빨라서는 아니었다.
“어, 할아버지 오신다면서요?”
호위병에게 붙들린 이 번개 소녀가 혼자 기다리고 있는 남부 5제후 마자리크 경에게 실망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마자리크 경이 어린 옹주에게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제가 먼저 왔습니다. 옹주 마마.”
“무슨 급한 일이 있길래 황실의 큰 손님을 맞아주는 중요한 자리에서 옹주를 실망시킨다는 말인가.”
옹주 뒤에서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마자리크의 표정이 바싹 얼어붙었다.
“황공하옵니다.”
황자들에게 무관심하기로 유명한 세네피스 황태후가 난데없이 옹주 타령을 하는 모습에 마자리크의 입가에도 대꾸하고픈 말들이 근질거리며 맴돌았지만 일단은 참았다.
“안전을 확인할 겸 오늘 가기로 하신 마을에 먼저 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주민들 분위기가……아시다시피 제국에서 기근이 제일 먼저 터진 곳이 여깁니다. 2년째 기근을 겨우 넘기고 이번이 3년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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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부터 [파트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이 시작됩니다.
3부 전반부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말 하면 맞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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