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17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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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기근 문제는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언뜻 들었습니다만.”
세네피스의 목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제네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비록 명목뿐인 종마장 주인이지만 어쨌든 그도 이곳 페스트에서는 나름대로 ‘대지주’ 신분이었다.
“델루지 가가 같은 남부와는 방제 기술을 공유한 것으로 압니다만? 그러면 좀 나아지지 않았나요?”
“델루지 가요? 그네들을 뭘 보고 믿는답니까.”
마자리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잎마름병에 강한 종자를 넘겨받았지만 비엔의 토양 외에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듣기로도 델루지 가와 호지 가를 제외한 다른 가문들은 크게 나아진 게 없습니다. 종자도 거의 쓸모가 없었고요.”
일단 불이 붙은 마자리크가 한숨을 연발하며 계속 푸념을 늘어놓았다.
“저희 본거지인 일리안은 산악이라 농업이 어렵고, 페스트는 개척단계에서 날벼락을 맞아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다행히 이곳 호드르 인근은 화산에서 내려오는 물 덕분에 어렵사리 농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2년간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았다고요.”
“올해는 제법 풍작이 들었다고 들었는데요?”
제네르의 물음에 마자리크가 화산 아래의 농지를 가리켰다.
“다행히 서부의 한 종자회사에서 우리 토양에도 맞고 멸구에도 강한 옥수수와 감자를 찾아냈습니다. 탈라스나 수베르같이 이번에 기근으로 큰 타격을 입고 농지가 오염된 곳에서도 대대적으로 심었다더군요. 그 중에 우리 지역이 첫 수확이라 기대가 큽니다.”
마자리크 경이 화산자락 아래로 보이는 노랗게 물든 옥수수 농지를 응시하며 짧게나마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2달 이내에 팔뚝만하게 자라는 개량종이라길래 정말 그런 게 있나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영글었지 뭡니까. 대단하죠?”
“2달만에요? 허어, 거 세상 좋아졌네.”
제네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농지를 응시했다. 행궁이 있는 봉우리가 워낙에 고도가 높아 세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드넓은 농지는 분명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개척지고 해서 기근에 굉장히 힘든 줄 알았는데……저도 여기 분위기가 흉흉하다고 전해 들었고요. 그런데도 황실에 구호요청을 안 하시더니……소문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던 모양입니다?”
제네르의 물음에 마자리크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낫긴요, 새 작물을 키우는 동안 한 구호단체가 무상 식량 원조를 해 준 덕분에 겨우 버틴 겁니다.”
“무상원조요?”
제네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북부와 서부 재력가들이 갹출해 만든 [아수르 재단]입니다. 그 재단에서 약 3개월 동안 곡물을 무상 지원해 주어서 개척민들의 집단 아사를 겨우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제네르는 표정이 찡그려질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마자리크는 제후 지역에의 영향력 강화를 호시탐탐 노리는 황실에 손을 벌리느니 아예 민간 재단에서 무상지원을 받는 쪽을 택한 모양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고운 목소리가 그 톤과는 정반대의 내용으로 마자리크를 비수처럼 찔렀다.
“돈을 아끼려고 제후의 위신을 팔아먹은 것이 아니고요?”
옆에서 듣던 제네르도 코리온의 독설에 가까운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랐다. 평소 꼴도 보기 싫던 저 외골수가 자신이 차마 내놓고 못 한 말을 시원하게 쏘아내자 내심 ‘웬일이냐.’ 싶었다.
순간 얼굴이 붉어진 마자리크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오, 오해이십니다. 아시다시피 가문이 그리 부유하지도 못할 뿐더러 극단적인 기근이 2년이나 지속되어 금고는 텅텅 비었고 비상용 식량밖에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염가라 해도 곡물을 사들일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마자리크가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평소 누구보다 당당하던 그였지만 지독한 가난 앞에서는 일단 무릎을 꿇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때, 코리온의 입술이 귓가에 다가오는 느낌에 제네르가 흠칫 놀랐다. 공적인 사안이 아니고서는 웬만해서는 대화조차 나누지 않던 이 남자가 그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무언가 이상하군, 가난한 군소 제후들이 모두 황실의 원조를 거절하고 있지 않나.”
코리온의 속삭임에 제네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국 전체가 엄청난 기근에 흔들리고, 평소 큰소리를 치던 상위제후들은 황실에 곡물을 팔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정작 가장 곤경을 겪고 있을 몇몇 군소 제후들, 특히 지난 제위 전쟁에서 카렐의 편을 들었던 가문들 중 상당수가 거의 극한의 상황에 몰려서도 이상하게 황실에는 손을 벌리지 않고 있었다.
“어째 오늘 행사에 참석하는 게 그리 즐겁지만은 않을 것 같군.”
세네피스의 뼈 있는 말에 난처해진 마자리크는 할아버지의 부재에 실망한 의붓손녀 마리안 옹주를 어깨 위로 번쩍 안아주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네피 장군이 소인의 장남 윌더와 함께 산 아래 ‘호드르 시’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실 손님들의 안전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 가 있으니 빨리 준비하고 나서시죠. 옹주 마마. 할아버지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럼 빨랑 가요. 저 셔틀 타고 가는 거죠?”
어른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챈 마리안이 큰 프리깃 옆에 있는 작은 승용셔틀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마자리크가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어, 셔틀 대신 차를 타고 가셔야 하겠습니다.”
“차요? 셔틀 두고 갑자기 차라뇨?”
이번엔 제네르까지 짜증을 냈다. 네피가 안 나와 가뜩이나 마리안에게 면목 없던 차에 일정까지 바뀌면서 성격 좋은 그의 목소리도 갑자기 높아지고 말았다. 세 명의 큰 손님들에게 계속 공격을 당하면서 궁지에 몰린 마자리크가 평소 침착한 그답지 않게 머리까지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게……셔틀이 고장이 난 것 같습니다. 누가 손 댄 일도 없고 별 문제도 없었는데 방금 전 지진 때문에 그런 지도……바로 산 밑이라 차로 금세 도착할 수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거의 폭발 직전까지 갔던 제네르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목적지인 마을과의 거리가 먼 것도 아니었고, 이전 같은 위험 상황이나 전시도 아니었다. 적지 않은 호위 병력도 함께하고 있으니 천재지변 때문이든 아니든 고작 셔틀 고장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자말은?”
애써 성질을 죽인 제네르는 구석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행궁 책임자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의 양자인 ‘자말 하크로딘’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갓난아기 때부터 누구보다 정을 들여 키웠다보니 이제는 진짜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지금은 황실 군사학교까지 졸업한 늠름한 초급장교가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도 그의 ‘진짜 남편들’이 저 놈 때문에 애 안 낳는 거냐며 똑같은 불평을 합창하게 만든 주범이기도 했다.
“하크로딘 비장은 개척도시로 가는 도로 주변에 혹시라도 불순 세력이 있지 않나 선발대로 다급히 순찰을 나갔습니다.”
“하여간…….”
제네르가 혀를 끌끌 차며 프리깃을 돌아보았다. 프리깃의 캐빈에는 오지에서 고생하는 양자를 위해 그가 맘 먹고 가져온 큰 선물이 실려 있었다.
“도시 주변에서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곧 만나실 겁니다.”
개척도시인 [호드르 시]에서 열리는 개척민들의 첫 수확 행사에 참석한 이그나토 가 제후군 사령관 네피는 사람들이 마시는 술을 보며 침만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사실 그가 술을 좋아하는 주당은 아니었지만 축제장에서까지 절주를 할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여태 술을 입에도 안 대고 있는 건 곧 행궁에서 이곳에 올 손님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조식량 비축분과 첫 수확물을 나눠준다는 행사 목적이 무색하게 어딘지 살벌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에휴, 재미도 없고.”
단상 구석에서 서성대던 네피가 마을 뒤로 보이는 화산을 올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흔한 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마리안 옹주가 저곳의 행궁에서 곧 여기 올 것을 생각하니 별의별 재미있는 행사도 도무지 관심이 가지를 않았다.
그때, 누군지 몰라도 아는 척 인사를 하는 사람에게 네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더 올 사람 없지?”
네피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이곳의 유지들, 사업가들이 앞을 다투어 ‘제후의 남편’에게 얼굴도장이라도 찍으려 했지만 워낙 사교성은 빵점인 남자다보니 윗사람인 그가 도리어 사람들을 죽어라 피해 다니는 꼴이었다.
“그나저나, 내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참 마을 꼬라지 하고는.”
옆 사람을 돌아본 네피는 행여 주변 사람들이 들을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끝도 없는 푸념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던 바로 옆의 곱슬머리 청년이 이 눈치 없는 사내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며 슬쩍 눈짓을 보냈다. 곱슬머리에 소년처럼 앳된 인상의 남자는 군인이라기보다 정치가 혹은 행정가 느낌을 주는 밝은 인상의 사내였다.
“여기 아무도 없어,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네피가 그 청년에게 입을 삐죽거렸다. 이곳 ‘호드르 시’는 말이 도시지 몇몇 관공서만 빼면 대부분이 급조한 조립식 건물들, 빈민들이 사는 천막집으로 이루어진 최악의 집단 거주지였다.
“그런데 이 도시 주민들이 이렇게도 많았나? 윌더?”
광장은 물론이고 좁은 골목골목까지 터질 듯 들어찬 사람들을 보며 네피가 청년에게 다시 물었다.
“오늘 온 사람들한테는 남은 원조식량도 다 나눠주고 이틀이나 식사를 공짜로 제공한다는데 누가 안 오겠습니까. 인근에서 소문 들은 사람들까지 머릿수 채우려고 갓난아기까지 다 긁어서 데려왔겠죠.”
마자리크의 장남이며 이그나토 가 후계자인 윌더 이그나토 경이 이 순진한 의붓아버지에게 웃음을 지었다.
이 인상 좋은 청년의 친아버지는 지난 제위전쟁 마지막 사오시안트 혈전에서 카렐 황제를 죽이겠다며 남부 기병대를 이끌고 덤볐다가 말단 북부보병들의 도끼에 어처구니없이 참살당한 류한 델루지 경이었다. 부모 모두가 무골이었지만 최소한 생김새만 봐서는 친자식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이그나토 가의 후계자인 이 청년이 부모를 따라 무장이 되지 않은 건 친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내 마자리크의 피가 섞인 장남을 미래의 정적으로 철저히 견제한 친아버지 탓에 결국 칼과는 담을 쌓고 옛 문헌이나 뒤적이는 유학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행정가로는 제법 인정을 받아 지금은 페스트의 개척 사업을 총괄하고 있었다.
“가문에 그럴 돈이 어디 있어서? 전략 비축식량도 거의 바닥나서 휘청거릴 판이라며?”
네피가 눈을 크게 뜨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가문에서 따로 낸 건 아니고요, 전에 아수르 재단에서 무상원조한 식량 중에 남은 것들 다 처분하는 겁니다. 어차피 올해 대풍이라고 하니 인심도 쓸 겸 창고에서 묵은 식량들도 치우고요.”
“이거, 참 가문이라고 체면이 말이 아니구먼.”
네피가 가슴과 어깨를 조이는 비단포에 다시 몸을 뒤척거렸다.
“솔직히 좀 쪽팔리지 않냐고. 제후 체면에 민간에서 무상원조가 뭐야. 차라리 나중에 갚는다고 싹싹 빌고 나서 황실에서 사는 게 낫지.”
윌더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눈을 흘겼다. 가문의 현실을 중시하는 마자리크나 윌더와는 달리, 네피는 ‘황실하고 잘 지내야지’라는 순진한 생각이 아직 머릿속에 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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