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18화 (813/1,132)

< -- 818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

.

.

“단기간엔 갚을 가망이 없으니 문제죠.”

윌더가 여위고 골골해 보이는 주민들 모습에 후계자로서 내심 맘이 무거운지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관개도 되지 않은 땅뙈기에 내 땅이라고 말뚝만 박고 씨만 뿌린다고 좋은 농지가 되는 게 아니라고요. 2년 연속 가뭄에 기근까지 들었는데 황실에서 돈이나 식량을 꿔도 어느 세월에 그걸 갚을 수 있을지 알고요.”

“그래도 도시 꼴이 이게 뭐야.”

네피는 손녀를 만나기 위해 맘 먹 신고 온 고급 가죽신발에서 뽀얗게 앉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래도 이 도시는 도로나 치수 시설도 되어 있고 행궁의 황실군들이 도적떼도 막아주잖아요. 꼴은 이래도 페스트에서는 그나마 살 만한 곳이니 개척민 절반이 이 일대에 모여든 것도 당연하죠.”

“허, 여기가? 사람들 꼬라지 좀 봐, 무슨 좀비들만 모여 사는 유령도시 같잖아.”

네피가 마을을 꽉 채운 ‘유령 같은’ 주민들을 보며 쯧쯧거렸다. 오늘 나눠줄 배급식량을 노리고 호드르 시에 모여든 이 수많은 사람들은 숫자만 엄청나게 많을 뿐 하나같이 죽었다 살아난 좀비같이 보였고,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시내도 머릿수만 많지 마치 새벽녘 공동묘지 같았다.

“뭐 볼거리라도 좀 있어야지 말이야.”

단상 아래에서 가지고 올라온 술―이곳의 일반인들에게 공짜로 주어지던―을 처음으로 입에 댔던 네피가 기겁을 하며 잔을 입에서 떼었다.

“ㅤㅌㅞㅅ, 무슨 술맛이 이래?”

“왜요? 이상해요?”

뒤따라 술을 마셔보았던 윌더도 얼굴을 찡그리며 술을 옆으로 뱉어버렸다.

“양 늘이려고 물 잔뜩 섞은 모양인데요.”

물 탄 엉터리 술을 옆으로 치워놓은 네피는 같이 단상에 모여 앉은 ‘주최측’ 사람들을 슬쩍 흘겨보았다.

“가만, 저 새끼들 먹는 술은 이게 아닌데?”

네피가 그들 앞에 놓인 술병을 확인하고는 발끈했다. ‘운영위원’ 딱지를 단 그들은 이곳 개척민들이 세운 자치정부의 관리들, 운 좋게 비옥한 땅을 선점한 대지주들, 그리고 이번에 개척민들에게 줄 식량을 지원해 주었던 [아수르 재단] 사람들이었다.

“고작 유령마을 뚱보괴수 주제에.”

네피의 독설을 들은 윌더가 하마터면 다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네피가 가리키고 있는 건 주최측 사람들 중간에서 이리저리 얼굴도장 찍고 다니기 바쁜 호드르 민선 시장 ‘벨’이었다.

두둑한 살집 때문에 목에는 살이 몇 겹이나 접혀 있고 눈도 단춧구멍만한 것이 네피가 보기에는 게을러터진 비만증 환자에 불과했어도 이곳에서는 나름 인간관계와 로비능력 좋은 마당발로 유명했다. 이 남자가 이주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면서도 개척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표가 된 것도 [아수르 재단]의 무상 식량지원을 얻어내는 깜짝 놀랄 요술을 부린 덕분이었다.

“주민들은 저 모양인데 혼자 뭘 처먹은 거지.”

시장의 기름기 줄줄 흐르는 외모와 바싹 곯은 보통 주민들을 비교하며 네피가 살짝 낯을 찡그렸다. 저 남자의 유별난 활력과 생기 때문인지,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어슬렁거리고 있는 ‘좀비 주민’들의 모습이 더 안쓰러워 보였다.

한참을 몸이 근질거려 어쩔 줄 몰라 하던 네피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내빈용 테이블’에 다가갔다.

“이걸 먹어? 말아?”

단상의 테이블에 놓인 구운 통돼지, 흰 빵과 과자, 과일을 쳐다보며 먹을까 말까 고심하던 네피는 단상 아래에서 보리빵을 찢어 나눠먹고 있는 행사장 자원봉사 청년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 젊은이들에게 공짜로 제공되는 음식도 비축 식량을 탈탈 털어 만든 기울이 섞인 보리빵과 찐감자, 돼지비계나 싸구려 술 정도가 전부였지만 2년을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맛이나 질 따위를 따질 판국이 아니었다.

“젠장.”

머뭇거리던 그는 큼직한 통돼지구이가 얹힌 큰 파티 테이블을 통째로 번쩍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그리고는 궁상맞게 빵을 먹고 있던 ‘좀비 젊은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건 둘러앉아 같이 먹어야 제격이지.”

그는 젊은이들이 깜짝 놀랄 만큼 쿵 소리가 나게 테이블을 내려놓았다. 그는 돼지 갈비뼈를 뚝 부러뜨려 입에 덥석 물고는 뒷다리 하나를 뜯어 그들에게 내밀었다.

“생긴 건 비실비실해도 좀 산 사람처럼 굴어 봐라. 배에 기름기도 좀 채우고.”

“저희 먹으라고요?”

그들은 이 부담스런 윗사람 앞에서 잠시 눈치를 보았지만 결국 그 중 하나가 뒷다리를 덥석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고삐가 풀린 젊은이들은 돼지의 큰 살점 하나씩을 잡아 뜯어서는 앞 다투어 쩝쩝거리며 입에 넣기 시작했다.

‘맙소사, 태어나서 고기도 생전 안 먹어봤나.’

이들의 엄청난 먹성에 내심 놀란 네피는 자신이 먹으려고 입에 물었던 큼직한 갈빗살도 슬쩍 한 부분만 떼어먹고는 그들 앞에 도로 내려놓았다. 먹을 것 앞에서는 그 누구 앞에서 양보하지 않는 그였지만 여윈 청년들 앞에서는 차마 배고픈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영 찔리네.’

그는 입에 들어있지도 않은 고기를 씹는 척 하며 이들의 외모를 재차 살폈다. 움푹 팬 뺨과 눈 밑, 입가의 자글자글한 잔주름을 보아서는 이 사람들이 정말 수명개조 후 태어난 젊은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굶어서 그러냐? 얼굴들이 왜 이리 푹 삭았냐?”

“2년을 기근에 시달렸어요.”

네피의 뻔한 물음에 청년들도 뻔한 대답만 돌려주었다.

“그동안 구호식량만 먹었다고요. 앞에 1년 정도는 그 전년도 저장식량이 있어서 제후가에서 준 배급으로 살 수 있었지만 작년은 그나마도 없어서…….”

있는 그대로 털어놓던 청년은 옆 사람이 쿡 찌르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옆을 둘러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 있으면 좀 해 봐. 나도 뭘 좀 알아야 하니까. 내가 그런 말에 삐질 정치적인 놈팽이로 보이냐?”

네피가 소스 묻은 손가락을 쭉쭉 빨며 그들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그제야 다른 청년이 조심조심 말을 이었다.

“작년 봄부터 배급량도 줄어서 저희 마을에서만 수십 명이 죽던지 쓰러졌어요. 다행히 그맘때 [아수르 재단]에서 식량원조가 들어와서 구사일생했지만 수명개조 당대 어르신 다섯 분은 원조식량 받고서도 결국은 돌아가셨죠.”

“그 빌어먹을 원조식량은 왜 그리 먹어도 먹어도 계속 배가 고픈지.”

“누가 그러대? 초강력 소화제라도 섞어놓은 게 아니냐고.”

“누군 정력 없애는 약이라고 하던데?”

“그런데 희한하지? 그거 먹다가 다른 데서 들여온 밀가루로 빵을 만들었더니 이상하게 싱거운 게 맛이 영 없는 거 있지?”

“얼씨구? 무슨 꿀이라도 발라 놨다던?”

이 청년 같지도 않은 겉늙은 청년들이 농담과 진담, 웃음을 뒤섞어가며 요란스레 떠들어댔다.

그들의 수다를 말없이 듣던 네피가 조심스레 다시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굶어 나자빠져 죽을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얼굴 꼴들은 다 왜 이 모양이야.”

네피가 혀를 차며 청년들의 꺼칠해진 얼굴을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원조식량 덕분인지 청년들도 약간씩 마르기는 했어도 심하게 야윈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거친 피부와 잔주름, 움푹 빠져버린 얼굴 윤곽선은 이 젊은이들을 마치 초(初)중년의 수명개조 당대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이번에 감자하고 옥수수만 수확하면 일단 배고픔은 면할 테니까 고생 다 끝났구나. 남은 고기는 너희 다 먹어.”

네피는 고기를 모두 청년들에게 넘겨준 채 그들이 먹던 돌덩이 같은 보리빵을 대신 집어 들고 다시 단상에 올랐다. 그곳에서는 ‘유령마을 뚱보괴수’와 아수르 재단 사람들이 난데없이 사라져버린 귀빈용 테이블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고기 찾으쇼? 저기 있수다.”

네피가 고기 주변에 벌떼처럼 모여 있는 청년들을 가리키자 시장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곳에는 2년 가까이 고기라고는 구경도 못 해 본 청년들이 돼지 한 마리를 중간에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네피는 ‘댁은 1년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은데?’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었지만 일단 입방정은 꾹 눌러 참았다.

“귀한 손님들 술안주로 놓은 것이었는데…….”

벨이 슬쩍 불평을 풀어놓자 네피는 밑에서 집어 온 거친 보리빵을 절반 쭉 찢어서는 그들에게 불쑥 내밀었다.

“술맛 아는 사람은 안주 탓 안 하는 법이라오.”

네피가 넉살좋게 내민 보리빵을 받아든 그들이 잠시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 덩치 큰 사내가 강권하는 눈짓을 보내며 자기도 빵을 큼직하게 떼어내 입에 집어넣자 눈치를 보던 시장도 마지못해 빵을 아주 조금만 뜯어 입에 넣었다.

‘음?’

상대의 입을 쳐다보던 네피는 그가 빵을 씹는 시늉만 한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챘다. 가디언 시절, 독살을 피하기 위해 몸에 배도록 훈련받은 습관 아닌 습관 덕분에 그는 저 재수 없는 남자가 입에 넣은 빵을 씹지 않고 뺨 한쪽으로 슬쩍 밀어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아예 먹지 않은 채 손에 쥐고 휙 돌아서 버린 아수르 재단 사람들보다는 나았지만.

‘어라? 이 새끼들이?’

덜컥 불안해진 네피는 방금 입에 넣은 빵을 삼키지 않은 채 이 뚱보 시장과 재단 사람들을 재빨리 살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비단포를 똑같이 차려입은 재단 사람들은 공식 행사에 끌려나온 공무원마냥 경직된 표정들이었고, 부유함과 오만함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 있었다. 네피가 상상했던 정 많고 선량한 자선가의 미소 따위는 그들에게서는 별로, 아니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이 수많은 사람들이 다 먹는 빵에 독을 넣을 삼류 악당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너무 예민했나?’

네피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상대방이 먹지 않는 음식은 나도 먹지 않는다.’는 것이 싸움꾼으로서 몸에 밴 철칙이었지만 지금은 전쟁은 고사하고 정치적인 분쟁이 있는 때도 아니고, 아내 마자리크의 ‘조용한’ 영지인 이곳에서 그의 목숨을 노릴 사람도 있을 리 없었다.

네피는 단상 아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곳에서는 보리빵 무더기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아무 문제없이 빵을 찢어 잼이나 기름에 찍어 깔깔대며 먹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거품을 물며 쓰러진 것도 아니었다.

‘재수 없는 뚱돼지 새끼.’

여전히 빵을 삼키지 않고 있는 돼지 시장을 슬쩍 흘겨보았던 네피는 천천히 돌아서서는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빵을 퉤 뱉어버렸다. 그는 혼자 툴툴거리며 다시 윌더의 옆으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왜요? 뭐 잘못 드셨어요?”

윌더가 맹물로 입을 몇 번이나 씻는 네피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봐봐, 저 시장 새끼 뭔가 좀 이상……엉.”

윌더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네피가 갑자기 하던 말을 뚝 멈추었다.

“왜 그러세요?”

윌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진 네피는 마치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슴마냥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윌더가 네피의 팔을 붙들었다.

“뭐 안 이상해?”

바들바들 떠는 네피의 모습에 윌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겁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 보였던 남자 중의 남자 네피가 이렇게까지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어디 아프신 거 아니고요?”

“아니, 아니, 뭐 이상한 거 안 느껴지냐고?”

네피가 벌벌 떨며 옷깃을 와락 붙들었지만 윌더에게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네피가 갑작스레 놀라고 나서 1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짧을지도 모르는 이상한 시간이 지난 후, 광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군데군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봐, 이것 보라고.”

네피가 난데없이 의자의 손잡이를 꽉 붙들며 입을 벌렸다. 소름이 온통 곤두선 그의 살갗을 타고 미세한 진동이 땅바닥에서, 그리고 공기를 타고 전해져 올라와 그의 머리털까지 온통 곤두서게 했다.

“지진?”

그제야 바닥의 흔들림을 깨달은 윌더 역시 잠시 얼어붙었지만 반쯤 이성을 잃은 네피만큼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가볍게 흔들리는 잔과 놀라 주저앉은 주민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 울림도 테이블을 약간 떨리게 했을 뿐 딱히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은 채 바로 잠잠해졌다.

고작해야 20초, 혹은 30초 정도의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최소한 그가 느낀 ‘지진’은 이 정도로 끝이었다.

“휴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굳어있던 네피는 짧은 진동이 잠잠해진 후에야 비로소 의자 손잡이에서 손을 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평소 붉고 혈색이 가득하던 그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변해 있었다.

“끝난 거야?”

“아휴, 덩치는 황소만한 양반이 이 정도에 놀라요? 무슨 대지진도 아니구먼.”

그제야 안심한 윌더가 잔뜩 겁에 질린 이 의붓아버지를 낄낄대며 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30초가 30분 같았던 네피에게는 그냥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아냐, 뭔가 기분이 나빠. 좀 이상하다고.”

“그냥 지진이라니까요.”

윌더가 갑자기 예민해진 네피를 달래려 했지만 평소 사람 좋던 그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띤 윌더에게 눈을 부라리며 분명히 말했다.

“이봐, 나도 지진을 여러 번 겪어 봤어. 너 같은 보통 사람한테 설명하기는 어려운데……뭔가 달랐어. 분명히 달랐다고.”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