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20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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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옥수수와 감자를 들고 망연자실해 있던 윌더가 자신을 향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건 그때였다. 패닉 대신 분노를 택한 몇몇 사람들이 맥없이 서 있던 윌더에게 사뭇 공격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문에서 이 따위 종자를 줬으니 책임을 지라고요!”
“아, 아니 이런 건 우리도…….”
놀라고 당황한 윌더가 말을 더듬거렸다. 농학자도, 농부도 아닌, 그저 유학만 공부했던 그로서는 멀쩡한 씨앗을 심어 자란 작물이 왜 난데없이 이리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연구소에 따르면…….”
윌더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도 유학자였지만 분노한 사람들 앞에서 이런 장황한 설명 따위가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를 만큼 실없는 서생은 아니었다. 그리고 결과는 그의 불길한 예상대로였다.
“이런 걸 심어서 먹고 살라고 한 게 가문 아닙니까!”
“굶어죽게 생겼으니 가문에서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고요!”
몇몇 사람들이 윌더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당황한 윌더가 기겁을 하며 일단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이미 그의 주변은 분노한 빈민들이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이놈들이!”
칼을 빼들려는 2명의 경호원에게 윌더가 경거망동하지 말라며 얼른 손짓을 했다.
“아, 알겠소. 내 본가에 돌아가서 어머니와 이 문제를 상의해 보겠소. 그리고 가능한 해결책을…….”
“상의? 지금까지도 해 준 게 없는데 이제와 상의 따위 해서 뭘 한다고!”
“말해 보시오! 가문 후계자니까 뭐라고 말 좀 해 보라고!”
흥분한 빈민들의 어투가 점점 격해져갔다. 누군가가 윌더의 옷자락을 거칠게 붙들고 잡아당기면서 그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도련님!”
놀란 경호원이 빈민들에게 칼집을 휘두르려는 것을 윌더가 다시 손을 저어 저지했다. 급히 일어난 그의 비단포자락이 어느새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아, 알겠소, 우리도 위기를 인식하고 있으니 새로 대책을 세워서…….”
윌더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으려 했지만 2년간의 기근으로 굶주리고, 또다시 끔찍한 현실과 마주한 사람들은 그럴 만큼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달려들어 윌더를 지키려는 경호원과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일행들, 주변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나가는 게 좋겠어, 이건 아냐.”
고립된 윌더가 겁에 질려 두리번거렸지만 사방으로 분노한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도 광장에서 군중들을 차단하며 질서를 유지하던 자경단 청년들은 지금 어디로 가 버렸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좀 나가야 해결책을 찾던지 할 것 아닙니까.”
윌더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군중들을 달래려 했다. 그렇지만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벽을 쳐버린 군중들은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차라리 이놈을 잡아서 본가에 식량을 달라고 하는 게 나아!”
누구인지 몰라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하는 고함을 지르면서 군중들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저놈 잡아! 저놈 잡아놓고 마자리크 경한테 책임 안 지면 알아서 하라고 해!”
“씨발! 미쳤어!”
“그만! 그만해!”
“빌어먹을! 다 굶어죽는다고!”
군중들 모두가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호응하는 건 아니었지만 몇몇 과격한 사람들이 그와 경호원을 밀어붙이면서 사방에서 격한 몸싸움, 제후가문에 대한 욕설과 이대로는 못 산다는 처절한 절규가 썩은 곡식의 악취, 분노한 빈민들로 가득한 광장을 중심으로 무섭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아닌데.”
광장 한쪽의 단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네피도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도 자기들끼리 뭐라 쑥덕대던 아수르 재단 사람들은 무슨 묵념이라도 하듯 잔뜩 굳은 얼굴로 광장의 혼란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놀라지도, 겁에 질리지도, 않은 모습으로 지나치리만큼 침착해 보였다.
“빌어먹을! 자경단 놈들은 어딨어!”
네피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주변은 통제 불능 상태였다.
“윌더, 윌더 괜찮은 거냐?”
보다 못한 네피가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고함을 질렀지만 수많은 인파와 이런저런 혼란에 뒤섞여 들릴 것 같지도 않았다. 네피는 주변에 흩어진 직속 수하들을 부르려 급히 할룩스를 빼들었다.
“엉?”
할룩스가 먹통이 된 것을 본 네피가 화들짝 놀랐다. 그는 홧김에 할룩스를 몇 번 테이블에 두들겨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윌더와 경호원의 모습이 곡식 더미를 에워싼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윌더!”
비단포를 벗어 내던진 네피는 앞뒤 가릴 것도 없이 그 수많은 인파 속에 무작정 몸을 던졌다. 그의 거구에 깔린 몇몇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사람들을 마구 힘으로 밀어내며 윌더가 있던 곳을 향해 나아갔다.
“마자리크 남편놈 여기 간다! 잡아!”
네피를 발견한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막아서라는 뜻이었겠지만 그의 용명을 아는 사람들이 겁을 먹고 혼비백산해 흩어지는 역효과만 나고 말았다.
“윌더! 윌더! 괜찮으면 대답해!”
네피는 눈앞에서 막을까 말까 어물거리던 거구의 청년을 거칠게 밀어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나동그라지는 청년을 훌쩍 뛰어넘어서는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사이를 홀홀단신 파고들었다.
“으, 으읍! 여기! 여기요!”
썩어 짓밟힌 옥수수 사이에서 쓰러져 짓밟히고 있던 윌더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싸움도 전혀 할 줄 모르는 이 젊은 유학자는 몇몇 격앙된, 혹은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린치를 당한 후였다. 대다수의 빈민들은 아수라장을 이루고 고함만 질러댈 뿐 손찌검까지 퍼부을 만큼 공격적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곳의 누군가가 그를 짓밟고 폭행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길래 왜 혼자 잘났다고 튀어나와!”
네피가 버럭 화를 내며 쓰러져 있던 윌더와 경호원들을 번쩍 일으켜 세웠다.
“젠장, 일단 나가고 보자!”
윌더를 부축한 네피는 다시 사람들을 헤치며 단상 쪽으로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몇몇 사람들이 뒤를 쫓아와 발길질을 하려 했지만 눈을 부라리며 휙 돌아보는 네피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개새끼들, 내 주먹에 으깨어져 볼래?”
네피가 털이 숭숭 돋은 큰 돌주먹을 내보이자 대번 겁을 먹은 사람들이 꽁지를 내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지만 네피가 다시 휙 돌아선 순간, 빼곡한 인파 사이에서 누군가가 확 튀어나와 네피와 윌더에게 거칠게 삽을 휘둘렀다.
“이놈이!”
네피가 윌더를 얼른 몸으로 막아서고는 삽자루를 손을 확 붙들었다. 그의 거친 완력에 꺾인 삽날이 공중으로 날아갔지만 같은 시간, 뒤쪽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내리치는 곡괭이가 윌더의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으잇!”
네피는 윌더를 다시 등 뒤로 당기며 곡괭이를 휘두른 청년을 발길로 힘껏 걷어차 버렸다.
“씨이! 누가 나쁜 놈인지 알 수가 있나!”
네피가 떨어지는 곡괭이를 얼른 낚아채며 소리를 질렀다. 사방이 모두 적이라면 차라리 도끼라도 뽑아 무작정 휘둘러댔겠지만 주변을 에워싼 보통의 민간인들 사이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폭도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는 건 그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빨리 따라와! 윌더!”
빼앗은 곡괭이를 들고 휙 돌아서던 네피의 눈에 사람들의 틈새에서 무언가 번쩍하는 빛이 들어왔다.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지금까지 일행을 공격했던 둔탁한 농기구는 분명 아닌 것 같았다.
“이크!”
네피가 다시 윌더를 뒤로 피하게 하려 했지만 이번은 앞의 두 번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아니, 이번 공격은 일반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빨랐다.
“아익!”
윌더의 짧은 비명과 네피의 고함이 잔뜩 흐려진 공기 속을 울렸다. 인파 속에서 튀어나온 칼날에 가슴을 베인 윌더가 순간 휘청거리며 네피의 가슴에 쓰러졌다.
“이놈이다!”
윌더를 확 당겨 안은 네피가 사람들 사이로 달아나려는 그 괴한의 손목을 부러질 정도로 덥석 움켜잡았다. 흥분한 네피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셌는지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옆 사람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괴한이 비명과 함께 칼을 떨어뜨린 순간, 네피가 이제 됐다 생각했지만 그의 오판이었다.
“으아아악!”
이번엔 사방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네피에게 손목을 붙들린 누군가―네피는 얼굴조차 보지 못한―의 몸에서 푸른 불꽃이 확 터져 사방으로 튀었다. 놀란 인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흩어졌지만 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얼떨결에 불꽃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고, 무서운 열기에 놀란 사람들이 혼비백산 사방으로 달려가고 엎어지며 광장에는 조금 전보다 더한 난장판이 연출되었다.
“아, 아악!”
네피는 불이 붙은 채로 몸에서 떨어져 나온 괴한의 손목을 바닥에 휙 내던졌지만 오른손에 옮겨 붙은 불꽃은 여전했다. 30년 전, 제위전쟁 때 보았던 그 끔찍한 불꽃이 일순간 네피의 뇌리를 스쳤다.
“이런! 맙소사!”
놀란 네피는 불 붙은 손을 흙바닥에 마구 문질렀지만 불이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무시무시한 불이 얼마나 빨리 번지는지를 잘 아는 네피는 그때까지도 팔에 안고 있던 윌더를 옆으로 휙 밀쳐내고는 옆에 있던 싸구려 술통을 왼손으로 힘껏 후려쳐 박살을 내 버렸다.
“미쳤어요! 불이 더 커지면…….”
윌더를 따라온 경호원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손이 타들어가고 있는 네피에게는 앞뒤 보이는 것도 없었다. 씁쓸한 냄새를 풍기는 물 섞인 저급 술이 그의 어깨 위로 와르르 쏟아져 내려 흙바닥을 온통 적셨다. 큰 술통에서 쏟아진 술과 바닥의 흙이 뒤섞이면서 그 일대가 온통 진창이 되어버렸다.
“아, 아윽.”
네피는 불에 타 물크러진 오른손을 움켜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행히 불은 꺼졌지만 거의 어깨까지 타 버려 말을 듣지 않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던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것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광장에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냐, 이건 아냐.”
조금 전 몸에 불을 붙여버린 괴한의 주변에서 10명이 넘는 사람들―아무 죄 없는 빈민들이었을―이 이미 거의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네피는 빠른 대응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저들에게는 그만큼의 행운조차 따르지 않았다.
“불이야! 불!”
“뭐냐고! 이게 다 뭐냐고!”
당장이라도 네피와 윌더 일행을 죽일 듯 몰려들었던 그 수많은 인파들도 불꽃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처음 감자와 옥수수를 가져가겠다고 몰려들 때 벌어졌던 아수라장이 또다시 광장과 도시 일대를 휘감았다.
“윌더? 윌더?”
네피가 마비된 한쪽 팔을 끌며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윌더에게 다가갔다. 가슴을 베인 윌더는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덜덜 떨고 있었다. 네피의 빠른 대처 덕분에 칼이 심장이나 허파까지는 닿지 않은 것 같았지만 겉에서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었다.
“괜찮니? 숨 쉴 수 있어?”
네피가 옷을 벗어 윌더의 가슴을 꽉 눌러주며 다급히 물었다.
“그, 그럼요.”
윌더가 괜찮다며 손가락으로 O자를 그려 보였지만 치명상인 건 분명했다. 경호원이 가슴에 셔츠를 묶어주는 와중에도 윌더는 몇 번이나 거친 신음을 토해내며 일행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구급차! 구급차! 아, 아니 셔틀 불러! 빨리! 여기 병원이 어디 있어?”
네피가 다시 할룩스를 들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 전처럼 여전히 먹통이었다. 자신의 할룩스를 확인한 윌더의 경호원 역시도 고개를 저으며 ‘불통’이라고 표시된 화면을 내보였다.
“에이, 씨발! 빌어먹을 통신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팔을 다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네피가 거칠게 짜증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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