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21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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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 구급차! 아, 아니 셔틀 불러! 빨리! 여기 병원이 어디 있어?”
네피가 다시 할룩스를 들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 전처럼 여전히 먹통이었다. 자신의 할룩스를 확인한 윌더의 경호원 역시도 고개를 저으며 ‘불통’이라고 표시된 화면을 내보였다.
“에이, 씨발! 빌어먹을 통신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팔을 다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네피가 거칠게 짜증을 내뱉었다.
“혹시 중계소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아까 지진 때문에 호드르 산의 중계소에 잠시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경호원이 윌더를 부축해 힘껏 일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의 살점이 타는 악취에 놀란 인파가 주변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면서 도리어 그의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시장과 이곳 자경단 사람들은 여전히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장군님! 장군님!”
어디로 갈지 갈팡질팡하고 있던 네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피가 주변에 풀어놓았던 사복 근위병들이 광장에서 도망치는 수많은 인파를 가로질러 네피에게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여기!”
경호원이 손을 저어 그들을 불러들였다. 사관 1명을 포함한 근위병 5명뿐이었지만 지금의 네피에게는 5백의 군대보다도 더 반가웠다. 게다가 저들은 지난 전쟁 때 치열했던 주류성 공성전에서 제후 마자리크를 지켜내고 근위병으로 전격 발탁된 야전군 보병 출신들이다보니 누구보다 든든히 믿을 수 있는 병사들이었다.
“이봐! 너희 할룩스…….”
손을 내미는 네피에게 그들이 먼저 선수를 쳤다.
“광장 외곽에 대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통신이 끊겨서…… 어찌된 일입니까!”
네피의 숨이 일순간 턱 막혀왔다. 통신이 끊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너희 통신장비는 직통 연결 아냐? 그런 게 왜 끊겨?”
네피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주변에 흩어놓은 근위병들은 아예 중계소가 필요 없는 군용 무전기를 갖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불통이라는 건 무언가 이상했다.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두 분 다 상태가 안 좋으니 빨리 따라오십시오. 차를 세워놓았습니다.”
사관의 손짓에 2명의 병사들이 덩치 큰 네피를 양쪽에서 힘껏 부축했다. 갑작스런 혼란, 사람이 타고 있는 불꽃에 수많은 사람들이 패닉 속에서 놀라 흩어지고 있었다. 네피 일행은 사람들을 거칠게 헤치며 차가 있는 곳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빨리! 빨리!”
그들은 네피와 윌더를 차에 태우고 급히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차에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건 또 왜 이래?”
사관이 계기판을 몇 번이나 두들겼다. 그렇지만 불이 켜지고 목표지를 입력하라고 나와야 할 계기판에서는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오른팔 화상의 고통을 참다못한 네피가 의자를 꽝 걷어차며 버럭 화를 냈다. 당황한 사관이 고철덩이가 되어버린 차에서 급히 뛰어내렸다.
“시간 없어! 그냥 걸어서 가야겠다! 넌 셔틀 있는 데로 달려가서 병원에 와 대기하라고 해! 응급처치만 하고 본토로 후송해야 할 테니.”
가슴에 중상을 입은 윌더와 화상을 입은 네피를 부축한 병사들이 다급한 걸음으로 사람들을 가로질러 광장에서 멀지 않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큰길은 물론이고 작은 골목들까지 일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빼곡했고 설상가상으로 광장에서 벌어진 불상사가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면서 사방팔방 조용한 곳이 없었다.
“뭐야?”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어렵사리 병원 앞에 도착한 네피와 일행들은 멍한 얼굴로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호드르 시에서 달랑 하나뿐인 병원은 문이 굳게 닫힌 채 썰렁한 모습을 서 있었다.
“병원도 문을 닫았고, 차는 고장이 났고…….”
당혹스런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사관은 병원 옆에 세워져 있는 차에 다가가 큰 돌로 창을 힘껏 부숴버렸다. 문을 억지로 열고 운전석에 앉았던 사관이 안에서 뭐라 마구 욕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이것도 안 돼!”
차에서 내린 사관이 문을 쾅 닫아버리며 화를 버럭 냈다.
“제일 가까운 다른 병원은 대체 어디에 있지?”
네피가 불에 탄 오른팔을 움켜쥐고 바들바들 떨며 물었다. 그의 옆에서는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윌더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중상자들은 황실군에서 운영하는 군 병원에서 위탁 치료해 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산 정상이라 셔틀이나 차가 있어야…… 움? 날이 왜 이러지?”
사관이 손으로 산 쪽을 가리켰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보았던 네피는 오후의 하늘이 어느새 먹구름이 낀 듯 거무튀튀하게 변한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직 태양이 중천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시커먼 하늘 너머 희미한 점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분대장님! 분대장님!”
조금 전 셔틀을 부르러 보냈던 병사가 사람들을 헤치며 숨 넘어갈 듯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셔틀을 불러오라고 했지 누가 달려서 오라고 했냐!”
“그게……셔틀도 고장이 났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아주 단순한 거라면 몰라도 좀 복잡한 전자장치가 들어간 기계는 거의 작동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길거리도 달리다가 멈춰버린 차들 때문에 온통 난리입니다. 간간이 움직이는 게 있지만 모두 제 상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전자장치’라는 말에 사관과 네피가 동시에 할룩스를 재차 확인했다. 이 병사의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몰라도 둘 다 여전히 먹통이었다.
“저기, 저기.”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네피가 손가락으로 큰길 너머를 가리켰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병사들이 그곳에서 본 건 말을 파는 상점이었다. 낮은 울타리로 둘러쳐진 그곳에는 화산의 종마장에서 군마로 불합격된 말들이 일반인에게 승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아하.”
네피의 의도를 눈치 챈 사관과 병사들이 무작정 달려가 울타리의 문을 때려 부쉈다.
“가문에서 보상한다!”
사관은 신분증만 내보이고는 그곳에 매여 있던 승용마 몇 마리를 무작정 끌어냈다. 영문도 모른 채 나온 관리인이 기겁을 하며 무어라 항의를 했지만 당장 다급한 병사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항의하는 관리인을 못 본 척 그곳에 매여 있던 말 5필을 모조리 끌고나와 네피에게로 향했다.
“이놈들은 ‘고장’은 안 났군요.”
사관이 고통에 떨고 있는 네피와 윌더에게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불에 탄 오른팔을 단단히 동여맨 네피가 힘겹게 말에 올랐고, 피를 많이 흘린 윌더도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관이 탄 말에 함께 올랐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어?”
네피가 윌더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물었다. 사관의 가슴에 안긴 윌더가 괜찮다며 손짓을 해 보였지만 가슴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리에 이곳으로 오고 있을 아내 마자리크와 손녀 마리안이 퍼뜩 떠올랐다.
“행궁에서 오는 황실 일행하고는 아직 연락 안 됐지?”
네피가 팔에 맨 옷자락을 이로 꽉 조이며 물었다.
“할룩스가 안 되니 당연히…….”
“행궁에서 이리로 오는 길은 몇 개냐?”
“육로는 산악도로 딱 하나뿐입니다. 중간에 황실군 초소가 몇 개 있는데 비상용 유선통신으로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그럼 가자.”
네피가 말고삐를 꽉 움켜쥐고 앞장섰다. 조금 전까지도 축제 분위기에 가까웠던 호드르 시가지는 이제 통제 불능의 상태였다. 그동안의 농사마저 모두 허탕이 되었다는 소식에 놀란 사람들 사이로 무서운 분노와 될 대로 되라는 패닉 분위기가 번지면서 곳곳에서 약탈과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지면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제기랄, 사람이 너무 많으니 손도 쓸 수가 없잖아.”
무정부상태가 되어버린 시내를 돌아보며 네피가 이를 갈았다. ‘식량을 나눠주겠다.’며 이곳 주민의 몇 배는 되는 인근 사람들까지 모조리 모아놓은 상태다보니 통제도, 치안도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어쩌죠?”
윌더가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농사는 엉망이 되었고……가문은 더 이상 먹여 살려 줄 돈이 없다고요.”
네피는 윌더의 눈에 글썽글썽하게 맺힌 눈물을 못 본 척 말에 속도를 붙이며 사관에게 물었다.
“행궁까지는 얼마나 걸리냐?”
“속도만 붙이면 1시간 이내에 가능합니다만 이래서야 원.”
사관이 앞에서 버글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에 놀라 본능적으로 말고삐를 당겼다. 이미 몇몇 가게들이 약탈을 당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들을 단속할 상황이 아니었다.
“비켜! 비키라고!”
사관이 길거리를 꽉 채우고 앞을 가로막는 민간인들을 매몰차게 옆으로 밀어내며 다급히 길을 뚫었다.
“첫 번째 황실 초소까지는 서두르면 30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사관이 가슴에 안은 윌더를 달래주었다. 5필의 말에 나눠 탄 일행은 무정부상태가 된 [호드르 시]를 다급히 빠져나가 화산에 있는 행궁으로 향했다.
세네피스와 코리온 일행을 앞서 내려 보낸 제네르는 10명의 호위기병―그리고 준마 한 필―과 함께 느긋하게 산길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는 ‘잠깐 가족들 얼굴만 보고 뒤따라 가겠다.’며 둘러댔지만 사실 집에서 최대한 오래 뭉갠 후에 호드르 시에는 막판에나 얼굴을 슬쩍 디밀고 생색만 낼 참이었다.
“사가(私家)에 들렀다가 도시에 가시려면 서두르셔야겠습니다.”
함께 가는 호위기병 사관이 눈치 없이 재촉을 하자 그가 짜증스레 눈을 흘겼다.
“넌 주변이나 살펴.”
어차피 쇼맨쉽 넘치고 외모까지도 출중한 세네피스 황태후가 주민들의 머릿속에 황실의 존재를 과할 만큼 각인시킬 테니 굳이 그가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끼어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좀 더 솔직히는 워낙 직설적인 성격 탓에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취향에 맞지 않았다.
사관의 입을 막은 제네르는 말 위에서 몸을 까딱거리며 계속 잡생각을 이어갔다.
‘웬일일까. 그 먹통이.’
그는 출발할 때를 재차 떠올렸다. 세네피스야 그렇다 치고, 코리온이 군말 없이 그 ‘원수’와 같은 차를 타고 출발한 건 뜻밖이었다. 물론 그 ‘먹통’은 황태후와는 대화도 거의 나누지 않았고, 상석을 세네피스에게 혼자 앉으라며 내주고는 부득불 주페와 함께 앉았지만 어쨌든 한 차에 탔다는 것부터가 신기한 일이었다.
게다가 배고프다며 불평하는 어린 주페에게 ‘직접 만들었다는’ 과자까지 주는 모습에 제네르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별꼴이지.’
제네르의 입가에서 픽 하고 짧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꼿꼿하다 못해 부러질 것 같은 그 대쪼가리 유학자 선생이 주방에서 반죽을 하고 과자를 굽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어색함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눈치 없는 사관이 상장군의 즐거운 상상을 다시금 깨 놓았다. 무어라 또 쏘아붙이려던 제네르는 ‘정말로’ 날씨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모래바람?”
제네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딱히 구름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하늘은 회색빛으로 뒤덮였고 해도 희미했다.
‘꼭 내 고향 같네.’
탈라스 3번 행성에서 보낸 제네르의 유년 시절 추억은 남들의 그것처럼 유쾌하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유년기는 낭만적인 기억으로 가득할지 모르지만 그의 고향은 가난하기로 말하면 제국에서 누구나 첫째로 꼽는, 자랑스럽지 못한 평판을 지닌 곳이었다. 게다가 1년의 반은 모래를 마시며 살아야 하는 고약한 날씨, 무법천지라고 해도 될 만큼 형편없는 치안도 그런 평판에 한몫 하고 있었다.
그가 ‘계속 말을 키우고 싶다’며 그런 곳에 부득불 남아있던 부모님과 동생들을 억지로 이곳에 이주시킨 것도 지옥과 현세의 중간쯤 걸친, 기억하기도 싫은 유년기 때문이었다.
“설마 원래 이런 곳은 아니겠지?”
가족들에게 잘못한 게 아닐까 싶어진 제네르가 호위기병에게 물었지만 그들도 이곳 사람들이 아니다보니 시원한 대답이 나올 턱이 없었다. 제네르도 이곳에서 서류상 ‘대지주’일 뿐, 바쁜 일상을 쪼개어 가족들을 방문할 때 빼고는 오래 머문 일이 거의 없었고, 지리에 관해 별반 아는 것도 없었다.
어쨌든, 이 정도의 ‘모래바람’은 그에게, 좀 더 정확히는 그의 가족에게 그다지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날씨 좋은 황제령에서 자랐던 양자 자말이었다.
‘왜 하필 이런 오지에는 지원해 와서…….’
잡생각에 파묻혔던 제네르는 자신이 군의 최고지휘관답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퍼뜩 죄책감을 느꼈다. 그도 황제령의 세련됨에 익숙한 그 혈기 넘치는 젊은이가 왜 이런 오지를 자원했는지 최근까지도 의아해하던 차였다.
하지만 생각 외로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며칠 전, 그 녀석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는 말로 제네르의 이런 궁금증에 답을 내 주었다.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의 동생 마야라는 사실 때문에 반쯤 까무러치기는 했지만.
‘왜 하필이면 마야였을까.’
자말에게서 고백을 듣고 난 후, 제네르가 내심 기겁을 했던 건 마야가 생김새는 물론이고 고집스럽고 학구적인 성격, 심지어 한때 동부 근위기병으로 있었던 경력까지도 맏언니 제네르를 가장 빼닮은 때문이었다. 그런 동생과 양자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들은 제네르는 언젠가 주워들었던 잡다한 심리학 이론까지 동원해가며 ‘이놈이 혹시?’하는 터무니없는 상상까지 했던 게 사실이었다.
부모님이 자말을 ‘사위로’ 어떻게 생각하실지 여쭤 본 일은 없지만, 양어머니의 입장을 떠나 한 명의 언니 입장으로 보아도 자말 정도면 동생의 배우자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다만 마야가 자말보다 5배나 세상을 더 살았고, 까다롭게 따지면 이모와 조카 사이가 된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차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니 그것까지 꼬치꼬치 따질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오늘은 기왕 지나는 김에 자말과 함께 부모님께 들러 두 분의 의사도 확인하고, 구체적인 결혼 계획도 잡아 볼 생각이었다.
“저 정도면 좋은 선물이 되겠지?”
제네르는 아타르의 뒤를 따라오는 붉은 준마―지난 제위 전쟁에서 그가 전리품으로 구했던―를 힐끔 돌아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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