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23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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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피스와 코리온 일행을 다시 행궁으로 돌려보낸 제네르는 자말에게 줄 붉은 준마를 돌아보며 이번엔 한숨부터 내쉬었다.
‘무슨 일은 없겠지?’
가족 걱정에 이번엔 자말 걱정까지 얹히면서 그의 맘이 가슴에 쇳덩이라도 올려놓은 듯 무거웠다. 이곳에 내려올 때의 느긋함은 이제 완전히 날아가 버린 후였다.
“빨리 가자.”
그는 거친 말굽소리로 탁한 대기를 울리며 말에 최대한 속도를 붙였다. 산자락 제일 아래, 1번 초소 인근에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얼마간 황급히 내려간 제네르는 뾰족한 바위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황실군의 작은 초소에 다가갔다. 이 초소 역시 호드르 산을 지키는 자말 휘하 [발더 분견대] 관할이었다. 120명의 분견대에서 20기의 기병은 행궁에 대기하거나 주변을 순찰하는 것이 임무였고, 100명의 보병들은 3일 간격으로 이런 초소와 본부를 오가며 교체 근무를 하고 있었다.
“상장군님?”
초소 안에 있던 4명의 병사들이 행궁 쪽에서 달려오는 제네르 일행을 발견하고는 얼른 나와 아래에 대고 경례를 올렸다. 평상시 근무와는 달리 지금은 4명 모두가 마치 전투에 출정하는 것처럼 각종 군장에 칼과 창, 석궁까지 완전히 갖춘 모습이 제네르에게 퍼뜩 불안감을 던져주었다.
“3번 초소장입니다. 저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기계들이 다 먹통이 된 거?”
초소가 있는 바위 아래 말을 세운 제네르가 위를 올려보며 되물었다. 사관도 그 말에 놀란 듯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다른 곳도 그런 겁니까? 황태후께서 지나가실 것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측정 장치도 다 먹통이고 말을 듣지 않아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초소장인 제 판단으로 일단 완전 무장하고 대기 중이었습니다.”
초소장이 손에 든 석궁을 가리켰다. 지금의 석궁은 6년 전 출혈열 사태가 끝날 무렵, 난데없는 황제의 명으로 황실군과 친위군 모두에 ‘기본 무장’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제위 전쟁이 끝난 이후 3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여러 번의 개량을 겪고 난 지금은 이전 것과는 모양도, 쓰는 볼트도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무기가 되어 있었다.
“그래, 잘했다. 수상하게 어슬렁거리는 자들은 없고?”
“아뇨, 이 도로는 제일 위의 6번이나 제일 아래 1번 초소에서 신고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습니다.”
“자말 하크로딘 비장이 좀 전에 내려가지 않았나?”
“조금 전에 각 초소들 경계태세를 확인하면서 1번 초소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시계가 없어 정확히는 몰라도 대략 20분에서 30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20분?”
별 생각 없이 시계를 보려 했던 제네르는 눈가를 찌푸렸다. 다 먹통이 된 판에 그의 시계라고 움직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봐, 여기 유선으로 된 비상 통신장비 있지? 혹시 행궁이나 다른 초소하고 연락이 되나?”
“몇 번 시도했지만 잘 켜지지도 않고 잡음만 심합니다.”
“계속 시도해 봐. 자말 하크로딘 비장이 어디에 있는지.”
“아까 속도대로 계속 내려갔다면 1번 초소에 거의 도착해 있을 겁니다.”
“나도 1번 초소로 내려갈 테니까 그쪽에도 미리 알려 둬.”
제네르는 3번 초소의 병사들에게 뒤를 맡겨두고 다시 말을 달려 내려갔다. 산 아래로 정신없이 속도를 붙이던 그는 무심코 하늘을 다시 올려보았다.
“날씨가 대체 왜 저러지?”
점점 어둡고 침침해지는 하늘을 올려보며 제네르가 얼굴을 찡그렸다. 산전수전 다 겪고 사막의 모래바람에까지도 익숙한 그였지만 분화구 반대편, 북쪽에서부터 점점 검게 변하는 하늘은 어딘지 굉장히 낯설었다.
길을 재촉한 제네르는 2번 초소도 확인하고 마침내 1번 초소에까지 도착했다. 이곳은 호드르 시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보니 평소에도 6개의 초소들 중 가장 많은 20명 이상의 병사들이 상주하는 제법 큰 검문소였다.
“다들 어디 갔나?”
말 위에 앉은 제네르는 초소에서 나온 병사들에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명색이 황실군 최고 지휘관의 행차라면 새파랗게 군기가 든 장병들이 헐레벌떡 달려나와 줄을 맞춰 서곤 했지만 지금 모습을 드러낸 건 고작 3명의 병사들이 전부였다.
“자말 하크로딘 비장은?”
제네르가 채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병사들의 다급한 외침이 먼저 공기를 울렸다.
“잘 오셨습니다! 지금 다른 곳과 연락이 안 되어서 당황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선임병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초소 동쪽을 가리켰다.
“하크로딘 대장이 잠깐 볼일이 있다고 상장군님 본가로 갔는데 조금 전 그쪽에서 갑자기 연기가 보였습니다! 할룩스도 말을 안 들어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고……저희 초소 병력 대부분을 일단 보내 놓았습니다!”
병사의 손끝이 향한 곳을 본 순간, 제네르는 이들이 왜 이리 당황했는지, 무엇을 뜻하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바위언덕 너머, 짙고 검은 연기가 무섭게 솟구치고 있는 모습이 무언가에 잔뜩 흐려진 대기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
“맙소사!”
반쯤 이성을 잃은 제네르는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머리를 휙 돌렸다. 저곳에 있는 건 부모님, 동생들, 조카들이 함께 살고 있는 그의 본가 뿐이었다.
“따라와!”
파랗게 질린 제네르는 본가와 이어진 황무지의 좁은 비포장길을 허겁지겁 가로질러 말을 몰았다. 평소 이곳에 올 때마다 몇 번이나 지나 온 익숙한 길이었고, 먼 거리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만은 눈앞 길의 풍경이 마치 스틸사진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장군님! 조심하십시오!”
함께 달리던 근위기병이 마지막 고개를 헐레벌떡 달려 오르려던 제네르의 앞을 황급히 막아섰다.
“앞에 누가 옵니다!”
“누가?”
그때까지도 앞뒤 전혀 가리지 못하고 있던 제네르는 짙은 회색 장막 사이로 갑자기 나타난 여러 개의 시커먼 그림자들에 비로소 멈칫거리며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어머니? 아버지?”
제네르가 작은 소리로 물었지만 들릴 리가 없었다.
“누구시냐고요! 저 젠이에요!”
제네르가 그림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지만 주변의 무거운 공기가 그의 목소리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여러 형상들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상장군의 가족이라고 하기는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을 눈치 챈 근위병들이 얼른 무기를 쥐고 상관의 앞을 막아섰다.
“기마 군인들입니다. 물러나 계십시오.”
거리가 가까워지고 잿빛 장막이 엷어지면서, 비로소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십여 기의 기병들, 그리고 그 뒤로는 1초소에 있던 보병 20여명이 맥 풀린 걸음으로 초소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보병들이 무언가 큰 것을 끌고 오는 듯 보였지만 아직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자말이냐?”
안도한 제네르가 조심스레 물었다. 일행의 선두에는 그을음을 온통 뒤집어쓰고 더러워진 몰골의 한 남자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안장에 힘없이 앉아있었다. 말랐지만 다부져 보이는 몸, 다정다감한 인상은 아니어도 매섭고 야무진 눈빛의 사내였지만 지금은 저승에라도 다녀온 듯 절망감에 사로잡힌 표정이었다. 누군가와 싸웠는지, 그의 옷자락 곳곳이 그을리거나 찢겨 있었고 손과 팔에는 자잘한 상처까지 나 있었다.
“자말?”
제네르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소리를 들은 그 남자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어, 엇.”
제네르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자리에 멈춘 채 잠시 벌벌 떨고 있었다. 그의 길고 가는 눈동자에 일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죄, 죄송합니다.”
그 청년, 자말 하크로딘 비장은 밑도 끝도 없이 이 말부터 꺼냈다. 그리고 제네르 역시도 말 위에서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제네르의 시선은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병사들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군인들이 끌고 오는 수레에는 무언가 붉고 검은 형체의 것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자말이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삐를 쥔 자말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면서 핏줄이 곤두섰다.
“못 지켜냈습니다…….”
자말이 뺨을 타고 주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쳐냈다. 제네르는 안장 위에 앉은 채 여전히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갑자기 통신이 끊겨서 확인차 갔었는데 이미 폭도들이 집을 에워싸고 불을 지른 후였습니다. ……폭도들이 너무 많아서 저 혼자서는…….”
자말이 말을 차마 끝맺지 못한 채 더러워진 얼굴에서 다시 눈물을 훔쳤다. 그 사이 보병들이 끌고 온 여물 수레들이 제네르의 앞에 멈췄다. 이곳에서 종마장을 관리하던 그의 부모님, 남동생 부부, 조카들. 하인들의 시체가 여러 대의 손수레에 가득 실려 있었다. 유일한 생존자는 피가 배어나는 배를 움켜쥔 채 마지막 수레에서 신음하고 있는 마야 한 명 뿐이었다.
“상장군님?”
수레를 끌고 온 보병 사관이 제네르의 눈치를 힐끗 보았지만 그는 말 위에 앉은 채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하니 있기만 했다. 푸른 눈을 평소보다 두 배는 크게 뜬 그는 몰살당한 가족들의 끔찍한 몰골을 우두커니 응시하고만 있었다.
“이쪽이 부모님들로 보이고 이쪽은…….”
설명을 하려던 사관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하인들은 팔다리가 꺾였거나 몸 어딘가가 베이기는 했어도 겉모양만은 대충 온전했지만 가족들 시체, 아니, 그렇게 보이는 것들은 그 정도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불에 타고 시커먼 검댕이까지 뒤집어쓴 채 화재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뭐야 이게 다 뭐냐고.”
고개를 젓던 제네르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조금씩 앞으로 기울었다. 놀란 호위병들이 급히 다가와 붙들어주지 않았다면 바로 안장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졌을 판이었다.
“이건 아니라고.”
호위병들이 받쳐주고 있는 제네르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축 처진 그의 고개를 따라 비로소 눈물이 주르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왜 이 따위 장난을 치는 거냐고, 자말?”
“어머니…….”
자말이 말꼬리를 흐렸다.
“눈앞에 이게 다 뭐냐고.”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선 제네르는 비틀비틀 수레에 다가가 시체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았다. 이름만 남은 가난뱅이 귀족으로 태어난 맏딸이 이렇게 출세한 것을 지켜보며 누구보다 기뻐하던 부모님은 불에 타고 일그러진 시체가 되어 더러운 여물수레에 실려 있었다.
“이게 뭐냐고요, 아버지.”
제네르는 부모님의 얼굴을 만지고 툭툭 쳐 가며 어릴 때 쓰던 탈라스 방언으로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웅얼거렸다. 끈적거리는 체액과 검댕이로 덮인 그들의 마지막 모습에서는 당연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제발.”
제네르는 결국 비틀거리며 자리에 꿇어앉고 말았다. 힘없이 고개를 돌린 제네르는 후미의 병사들이 밧줄로 묶어 끌고 오던 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저놈……저놈이냐…….”
제네르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저자는 부모님이 최근에 이곳에서 채용한 작업반장이었지만 제네르가 알기로 문제를 일으킨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자말이 더듬거리며 설명을 이었다.
“1백이 넘는 폭도들이 작업장의 하인들을 먼저 공격하고 집 밖에서 불을 지른 것 같습니다. 집에 있던 가족 분들은 폭도들 때문에 못 나오고 결국…….”
자말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 폭도들은 이미 도망친 후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생존자 수색을 우선하다가 폭도들은 거의 놓치고 말았습니다.”
자말이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다시 제네르의 눈치를 보았다.
“저놈은 침실에서 돈과 패물을 훔쳐내고 뒤늦게 도망치던 걸 운 좋게 잡았습니다.”
“이 찢어죽일 새끼!”
제네르가 갑자기 귀청이 찢어지는 것 같은 높은 톤의 고함을 지르며 붙잡힌 관리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말리려는 호위병을 힘으로 떨쳐내고는 그 관리인의 멱살을 움켜쥐고 주먹으로 일격에 턱을 산산조각내버렸다.
“우웁!”
입에 재갈이 채워진 채 바닥에 동댕이쳐진 관리인은 자말과 병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듯 버둥대며 그들을 애타게 쳐다보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제대로 재판을 받게 해야 합니다’ 따위의 말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왜! 왜 그랬는데! 왜!”
쓰러진 관리인을 바닥에 질질 끌고 수레 옆으로 끌고 온 제네르는 쓰러진 다시금 얼굴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말해! 이 씨발놈아! 네놈한테는 칼날도 아깝다!”
“제발! 제발 진정하세요!”
보다 못한 자말이 관리인을 짓밟고 미쳐 날뛰는 제네르를 덥석 붙들었지만 그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
“비켜! 너도 비켜! 대답 좀 들어야겠다! 왜! 왜 저랬냐고! 돼먹지 못한 짐승 새끼!”
제네르가 자말에게 붙들린 채로 인정사정없이 계속 발길질을 퍼부었다. 관리인은 발에 채여 목이 옆으로 돌아간 채 공포와 피에 온통 젖어버린 큰 눈으로 제네르를 빤히 올려보기만 했다. 제네르는 쓰러진 그자의 입마개를 확 벗기고는 멱살을 움켜쥐었다.
“주둥이 있으면 떠들어 봐!”
제네르가 쓰러진 그자의 표정이 파랗게 질리도록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어떤 놈들이 짓이냐! 왜! 왜 그랬냐고!”
이성을 잃은 제네르의 분노어린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입안에 피와 부러진 이를 머금은 관리인이 뭉개진 발음으로 힘겹게 대답했다.
“우, 우리는…….”
“뭐? 크게 말해!”
제네르가 핏발선 눈을 부라리며 그자의 입가에 귀를 가져갔다. 순간, 지금까지 완전히 기가 죽은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웅얼대던 관리인의 눈이 무언가 사냥감을 찾은 짐승처럼 갑자기 커졌다. 기회를 잡은 관리인은 갑자기 입을 쩍 벌리며 제네르의 목에 번개같이 송곳니를 가져갔다.
“조심하세요!”
배신자의 마지막 저항보다 놀란 자말의 칼끝이 더 빨랐다. 자말이 내려찍은 칼끝이 그자의 쇄골을 번개같이 뚫으면서 제네르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관리인의 목이 맥없이 뒤로 홱 꺾였다.
“뭐야, 뭐냐고.”
당혹감에 잠시 얼어붙었던 제네르가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 급소에 치명상을 입은 관리인은 부들부들 떨며 바닥에 축 늘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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