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32화 (827/1,132)

< -- 832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

.

.

“이놈을 어떡할까요?”

세네피스에게 다가가던 아스탈에게 헤네티 한 명이 눈치 없이 물었다. 헤네티 기병들에게 붙잡힌 한 소년이 눈과 입이 가려지고 손발이 묶인 와중에도 계속 무어라 소리를 지으며 바닥을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주페라고 했던가? 이놈은 임자가 있었지?”

“그렇습니다.”

“됐어, 그럼. 그쪽에 줘 버려. 알아서 하겠지.”

아스탈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주페는 이들 중 제일 윗사람의 말투에서 그가 자신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와중에도 뭐라 분노를 표하고 싶었지만 지금처럼 온몸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그를 짐짝처럼 말에 실었고, 어딘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대체 자신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이들이 말하는 ‘임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숙부…….’

그는 자신을 구하려다가 절벽 밑으로 떨어져버린 코리온을 떠올렸다. 그의 희생이 무색하게 이렇게 붙잡혀 버린 무능한 자신이 미워서 미칠 것 같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그는 지금 자신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였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귀찮게…….”

주페를 실은 기병이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모습에서 아스탈은 바로 관심을 끊어버렸다. 주페가 느낀 그대로, 아스탈은 저 꼬마 따위는 어찌되건 별반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남부 실권자 세데스 델루지에게 이번 일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저 어린 태자를 넘겨줘버리면 끝이었다.

세데스야 저 태자의 ‘사용처’를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 중이겠지만, 애당초 아스탈은 황실 자체를 남겨둘 생각이 없으니 말 그대로 동상이몽이었다.

그때, 꺼지라며 외치는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에게는 듣기 싫게 악 쓰는 소리겠지만 아스탈에게는 정신을 확 차리게 하는 음악소리 같았다.

바닥에 쓰러진 세네피스에게로 시선을 돌린 아스탈은 입을 반쯤 벌린 채 잠시 숨을 멎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저 매혹적으로만 보이는 ―실제로는 다정한 눈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두 개의 그레이오팔 눈동자가 무지개빛 광채와 함께 반짝거리고 있었다.

“뮤.”

아스탈은 눈을 가린 보안경을 홱 벗고 맨눈으로 세네피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행복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파란 시선이 세네피스의 그레이오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네피스 빈트 다하카르.”

귀에 거슬릴 만큼 부드러운 아스탈의 음성과는 정반대로, 세네피스는 마스크를 쓴 이 남자를 노려보며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감히 누구 이름을 멋대로…….”

세네피스가 앙탈을 부리건 말건, 아스탈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이 표적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눈웃음도 잠깐이었다.

“누구 짓이냐.”

조금 전까지 새파랗던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핏빛에 가까워졌다. 일순간 돌변하는 이 남자의 눈 색깔에 놀란 세네피스의 표정이 창백하게 얼어붙었지만 여전히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은 채 분노를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스탈이 피가 흐르는 세네피스의 팔과 다리를 가리키며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누구 짓이냐고 물었다.”

그의 손짓에 겁을 먹은 건 세네피스가 아닌, 그를 붙들고 있는 기병들이었다. 조금 전, 세네피스를 향해 실수로 창을 내질렀던 슈라가 아스탈의 말 앞에 납죽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어둠 속에서……누구인지 미처 보지 못했나이다.”

아스탈은 말없이 눈만 부라리고 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윗사람의 비위를 절대 건드리지 않던 이 눈치 빠른 헤네티가 평소답지 않게 어설픈 짓을 한 모양이었다. 벌벌 떨던 슈라가 갑자기 허리춤에서 칼을 빼들 때까지도 아스탈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책임지겠사옵니다.”

이자의 돌발행동에 세네피스가 기겁을 하고 입을 가렸다. 그자가 서슴없이 자신의 목젖에 칼날을 들이대는 모습에 당혹스러워진 세네피스가 고개를 저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슈라가 손에 힘을 주기 전, 주인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그만.”

세네피스의 공포어린 낯빛을 본 아스탈이 창끝으로 그의 칼을 툭 쳐냈다. 아무래도 저 여인에게 처음부터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건 현명치 못할 것 같았다.

“저 아름다운 눈동자에 핏빛이 비치는 건 어울리지 않겠다.”

“예?”

세네피스 덕분이든 혹은 머뭇거린 덕분이든, 어쨌든 목숨을 건진 슈라가 아스탈에게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고는 이번엔 세네피스에게 휙 돌아서며 바닥에 이마를 가져갔다.

“존귀한 분께 이 비천한 것이 감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나이다.”

“뭐라고?”

세네피스는 이들이 자신의 앞에서 대체 무슨 수작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저 이들이 자신을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짐작이 전부였다.

“돌아가자, 준비해.”

아스탈의 손짓을 받은 기병들은 말에 있던 노끈을 꺼내 가져와 세네피스의 손목에 들이대며 이 포로 아닌 포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이놈들이 정말.”

아스탈은 품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어 회색 재를 탁탁 털어서는 슈라에게 건넸다. 손수건을 받아든 슈라는 노끈 대신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그의 손목을 단단히 묶어 억지로 말에 태웠다.

“직접 끌고 가십시오. 소장 뒤따라가겠나이다.”

눈치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슈라가 지시도 받기 전에 알아서 고삐를 대신관에게 올렸다. 아스탈이 과묵하다 못해 속 터지는 여단장 사카 대신 항상 이 남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자신의 속을 귀신같이 파악하는 재주 덕분이었다.

고삐를 받아든 아스탈은 세네피스가 탄 말을 조금 앞장서 이끌며 어둠 속을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도 원하던 여자를 드디어 손아귀에 넣은 그의 당당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세네피스는 입술을 악물고 그의 시선을 철저히 외면한 채 정면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내가 몇백 년을 기다렸는지 아나.”

아스탈은 옆에서 따라오는 세네피스를 몇 번이나 돌아보며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샅샅이 확인했다. 다른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할 이들만의 페로몬이 이미 그의 정신까지 완전히 빼앗아간 후였다. 열 번을 보고, 백 번을 보아도 또다시 보고 싶은 맘에 그는 도저히 시선을 앞으로 고정할 수가 없었다.

“미치겠군.”

아스탈이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시선을 앞으로 돌렸지만 제정신은 아니었다. 이 여인과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던 그는 갑자기 아찔해지는 느낌에 말에서 휘청거렸다.

“이익.”

아스탈이 가슴을 움켜쥐며 말 위에서 파르르 떨었다. 기겁을 한 슈라가 얼른 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대신관님?”

‘대신관’이라는 말을 들은 세네피스가 지금까지의 의도적인 무관심을 깨고 비로소 아스탈을 휙 돌아보았다. 그가 사교에 대해 아는 건 그들 중 일부 극단세력이 지난 전쟁 막판에 사오시안트에서 황제를 공격했던 정체불명의 자살공격대였다는 것과, 아직 살아남아 적대세력을 이루고 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이상은 황제가 알려주지도 않았고, 알려 해도 알 도리가 없었다.

아스탈이 슈라를 밀어내며 말에 속도를 붙였다.

“너무 괜찮아서 미칠 지경이다. 빨리 가기나 해.”

말갈기에 기댄 아스탈이 숨을 몰아쉬며 다시 세네피스를 돌아보았다.

“빨리 가, 빨리 행궁으로 돌아가자고.”

묶여 있는 세네피스를 노려보는 그의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옆의 기병들, 짜증날 만큼 혼탁한 대기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이 여인을 품에 안고 그 아름다운 눈가를 쓰다듬으며 달콤한 살내음을 만끽하고 싶어 몸이 까맣게 탈 지경이었다.

어쨌든, 이 여인을 품고픈 그의 꿈이 비로소 손에 가까워오는 것 같았다.

주페 태자와 세네피스 황태후가 괴한들에게 붙잡히고 마리안이 홀로 도망칠 무렵, 오솔길 아래 낭떠러지에는 또 한 명의 생존자가 힘겨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냐, 아니라고.”

오솔길 옆 가파른 비탈로 말과 함께 떨어진 코리온은 바싹 말라죽은 가시덤불 속에 내동댕이쳐진 채 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의 눈과 귀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마치 누군가의 설명을 듣고 상상하는 것처럼 그대로 그려내고 있었다.

“이건 아니라고…….”

그는 자신의 육감을 철저히 부정하고 싶었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상황은 너무도 생생했다. 그는 몇 번이나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목이 부러진 것인지, 일시적인 쇼크인지 몰라도 그의 몸은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의 고운 얼굴과 손발도 덤불에 긁혀 피투성이였다.

그의 주변으로 괴한들이 비추는 환한 랜턴 불빛이 맴돌았고, ‘빨리 찾아!’라는 고함이 몇 번 오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불빛은 얼마 나아가지 못했고, 괴한들은 도움을 청하는 자신들의 동료는 찾아냈지만 가시덤불에 숨죽여 파묻힌 코리온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그들은 ‘시간 없으니 수색대 불러.’라는 말과 함께 오솔길 위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절벽 위에서 주페가 무어라 울부짖는 것을 느낀 그가 눈을 번쩍 뜨며 억지로 고개를 가누어 보았다.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그는 주페의 도와달라는 외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멍한 기억 속에 10여년 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첫 태자 카이를 낳으며 극심한 임신중독에 난산으로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황후 아메스는 ‘내 앞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기는 안 낳겠다.’고 선언해 황실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고, 결국 둘째 주페는 황후의 자궁 대신 캡슐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란 주페가 캡슐에서 떠난 직후, 코리온을 은밀히 내의원에 부른 황제는 아직 강보에 싸인 둘째태자를 난데없이 품에 안겨주며 ‘이름 좀 지어주시오.’라며 진지하게 물었었다.

그가 ‘아들이니 주페라고 하시죠.’라고 했을 때, 황제는 ‘내 그럴 줄 알았소.’라며 미리 써놓은 [제2태자 주페 카파키 리쿠 인정 교시]를 불쑥 내보여 그를 허탈함에 웃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 이후, 황제는 태자에 관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묻곤 했지만 ―지난번 주페와 세데스와의 약혼 문제를 물었던 것처럼― 코리온은 겉으로는 황제를 난처하게 만들 행동을 절대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소년과의 특별한 교감에서, 그는 당시 황제가 자신에게 아기를 안겨준 이유를 이미 깨닫고 있었다.

또다시 소년의 외침을 느낀 그가 움찔했다.

“주페?”

기를 쓰고 일어나려던 코리온은 도로 힘이 빠지며 덤불 위에 늘어지고 말았다. 소년의 격렬한 저항의 외침이, 그의 느낌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는 자신을 미치도록 원망하고 있었다.

가늘게 뜬 코리온의 두 눈에서 피가 섞인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내 아버지 자격도 없었구나…….”

아들을 못 구해낸 아버지의 슬픈 탄식 위로, 짙어진 회색빛 재가 모래바람처럼 강풍을 타고 맴돌았다.

이곳에 온 4명의 황실 귀빈들 중 황태후와 태자가 저들에게 붙잡혔고, 대군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덤불에 처박혀 조금씩 삶의 끈을 잃어가고 있었다. 괴한들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빠져나간 건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모두가 가장 작고 약하다고 생각했던 어린 소녀 하나뿐이었다.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에서 이 모두가 누구도 감히 상상 못할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지만 짙은 어둠과 무질서, 힘과 본능이 다스리는 이 ‘세 번째 겨울’에는 더 이상 제국의 법도, 도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제국민들, 아니 콜로니 이주민들의 먼 친척들의 최후가 그랬던 것처럼.

++++++++++++++++++++++++++++++++++++++++++

원래 내일 연재 예정이지만 주말에 다른 일이 있어 이번엔 하루 일찍 올립니다. ^^;;

반응이 좋으면 앞으로는 연재 주기를 조금 짧게 줄일까 생각중입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www.tasawwuf.pe.kr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