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34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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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쪽 뺨이 맞아서 벌개진 아스탈은 세네피스가 자신을 이토록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헛간을 비추던 조명탄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네가, 네가 지금 날…….”
세네피스의 거친 반응에 발끈한 아스탈의 기계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왜 나와는 교감을 하지 않고…….”
격분한 아스탈이 갑자기 세네피스에게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멍하니 서 있던 그를 건초더미 위에 확 쓰러뜨리고는 위에서 무섭게 내리눌렀다. 일순간 이성이건 뭐건 내던진 그는 세네피스의 옷을 확 찢어내고 어깨를 드러내 놓았다.
“그렇게 싫으면 강제로라도 하게 해 줄까!”
세네피스의 짧은 비명과 아스탈의 무서운 협박이 뒤엉키면서 작은 헛간 안이 순식간에 공포의 공간으로 돌변해버렸다. 찢긴 드레스자락 뒤에서 드러난 뽀얀 젖가슴에 아스탈의 눈길이 딱 멎었다.
“내가, 내가 대체 뭘로 보이냐고!”
아스탈이 무시무시한 기계손으로 세네피스의 목젖을 사정없이 내리눌러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아, 아웁.”
목이 뒤로 꺾인 채 숨까지 막힌 세네피스가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힘을 내어 이 남자를 밀어내고 싶어도, 아니, 최소한 젖가슴이라도 가리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빌어먹을 수용소에서 조금만 일찍 널 빼냈어도…….”
“아아아악…….”
세네피스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끓는 신음소리를 냈다.
“넌 날 보자마자 피가 끓어야 한다고!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하고 내 품만 상상해야 정상이라고! 넌, 아니, 우린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이 남자의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에 세네피스의 눈이 확 커졌다.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하고 수치스런 상황을 상상해버린 그는 차라리 이대로 질식해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말해 봐라, 나와 교감하고 있다고 말해 봐. 빨리.”
아스탈은 무섭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 여자를 정말로 범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를 노려보며 이해할 수 없는 질문만 계속하고 있었다. 세네피스를 무섭게 쏘아보는 그의 눈이 마치 핏빛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대답하라고!”
목숨이 경각에 몰린 세네피스의 혀끝에 ‘나도 당신과 교감하고 있어요, 제발 놔주세요.’라는 말이 빙빙 맴돌았지만 그 별 것 아닌 거짓말이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빨리!”
아스탈은 그때까지도 눈을 부릅뜨고 저항하던 세네피스의 아랫도리까지 확 찢어내고는 훤히 드러난 그의 하얀 허벅지를 무릎으로 사정없이 벌려놓았다.
“몹쓸 꼴 당하기 싫으면……”
마지막 수치심까지 완전히 발가벗겨진 세네피스가 패닉 속에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아스탈이 목을 조이는 힘을 잠시 풀어주자 세네피스가 더듬거리며 짧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때, 누군가가 헛간 문을 쾅쾅 두들겼다.
“씨발! 뭐야!”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를 당한 아스탈은 세네피스를 여전히 깔아뭉갠 채 문 쪽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냐!”
“급한 일입니다. 빨리 나와 주십시오.”
멍청한 것인지, 용감한 것인지,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대신관의 시간을 무참히 깨어놓은 건 부여단장 슈라였다. 이 약삭빠른 헤네티는 아스탈의 비위를 건드리는 법이 지금껏 거의 없었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그를 긁어놓고 있었다.
“누가 오고 있습니다!”
“뭐?”
그제야 움찔한 아스탈은 입고 있던 회색 망토를 휙 벗어서는 거의 알몸으로 쓰러져 있던 세네피스의 몸 위에 휙 덮었다. 그리고는 급히 문으로 달려가 홱 열었다. 문 앞에는 당황한 얼굴의 슈라가 4명의 부하들과 함께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
“지금 뭐라고?”
“무장한 군인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50명 이상입니다. 무장(武將)도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냐? 그럼 우리 편이 아니라는 거 아냐?”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아스탈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슈라가 이번에도 그가 말하려는 것을 재빨리 앞서나갔다.
“혹시 저들이 적 상장군 일행이라면 가디언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숫자도 적고 선제공격하기는 지형이 안 좋습니다. 가파른 오솔길이라 기병의 기동도 어렵습니다.”
“알아, 아니까 떠들지 말고…….”
격앙되었던 아스탈의 관심이 잠시 세네피스를 떠나 ‘50명의 적들’에게 쏠렸다. 그 짧은 동안, 그는 헛간 안에 팽개쳐놓은 여인의 존재를 잠시 생각의 귀퉁이로 밀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똑똑한 여자는 이 허를 놓치지 않았다.
“움?”
뭔가 기척을 느낀 아스탈이 뒤를 휙 돌아본 순간, 옷 같은 것이 휙 날아와서는 거의 꺼져가던 노란 조명탄 위를 확 덮었다.
“익!”
헛간 안이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이면서 아스탈과 슈라는 물론이고 함께 있던 기병들까지도 짧으나마 장님이 되고 말았다.
“뭐야! 조명! 조명!”
당황한 슈라가 허겁지겁 조명탄을 빼들려다가 움찔 놀랐다.
“이걸 켜면 오고 있는 적들이 우리를 먼저 발견할지도…….”
“닥치고 빨리 켜!”
슈라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지만 아스탈에게는 세네피스를 놓칠지 모른다는 것이 더 시급했다. 그리고 급히 불을 켜서 비춰 본 헛간 안은 그의 걱정대로였다.
“맙소사.”
아스탈이 당혹스런 얼굴로 헛간 구석구석을 모두 확인했지만 자신이 조금 전 ‘비나’를 씌워주었던 그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쪽 구석의 작은 통풍구가 누군가의 손에 억지로 뜯겨나간 듯 덜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벗어놓은 듯, 신발까지 건초 사이에서 그대로 뒹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완전히 이성을 잃은 아스탈이 시뻘개진 눈으로 악을 썼다.
“찾아! 빨리 찾으라고!”
‘50명의 군인들’ 걱정을 일단 접어놓은 헤네티들이 이젠 세네피스를 찾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문가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아스탈은 헛간 안에 남아있는 세네피스의 찢긴 옷자락과 벗겨진 신발을 더듬더듬 주워들었다.
“보, 본심이 아니었어.”
아스탈은 자신이 해 놓은 짓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누구보다 소중한 그 여자를 이 따위 초라한 곳에서 겁탈한다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일 없었다. 그는 이제 들어 줄 사람도 없는 혼잣말을 계속 이어갔다.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고.”
그는 자신을 자진해 안고 사랑해주는 아름다운 신부 세네피스의 모습을 꿈꾸며 온 정성을 다해 화려한 신방까지 꾸며놓은 터였다. 이번엔 그저 세네피스의 싸늘한, 아니 모욕에 가까운 태도에 잠시 이성을 잃었을 뿐이었다.
“겁만 주려는 거였는데…….”
아스탈은 자리에 털썩 꿇어앉으며 세네피스의 벗겨진 신발을 품에 꼭 안았다.
“한 마디만 듣고 싶은 거였는데, 왜…….”
헛간에서 막 빠져나온 세네피스는 당황한 아스탈이 외치는 고함을, 놀라 흩어지는 헤네티들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암흑이라고 부르는 이 공간에서 대낮처럼 훤히 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이 순간만은 미치도록 감사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뿌린 재 속에서 눈이 멀어버린 저 바보 장님들은 여전히 헛간 주변을 뛰어다니며 그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맨발로 헛간 통풍구를 빠져나온 그는 오솔길에서 조금 떨어진 비탈을 헐레벌떡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오고 있다는 ‘50여명의 군인들’이 부디 제네르 일행이기만을 기원하며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발로 필사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찢겨 너덜거리는 옷자락, 아니 천조각만 남아버린 사이로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강풍이 그대로 들이치고 있었다.
“캬, 악.”
갑작스레 숨이 막힌 세네피스는 다리 힘이 빠지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누군가 머리를 사정없이 짓밟는 느낌이었고, 죽을 듯한 울렁거림에 뱃속의 내장까지 입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세네피스는 그자의 입술이 짧게나마 닿았던 이마를 미친 듯이 손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자의 사타구니가 잠시 닿았던 허벅지도 아무 것으로나 닦아내고 싶었다.
“카렐…… 오르 언니.”
바닥에 꿇어앉은 채 헐떡이던 그는 그때까지도 손에 꽉 쥐고 있던 다이아몬드 서클렛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조금 전 그 남자에 관한 모든 것, 심지어 몸에 밴 체취까지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그자가 준, 아니 그자의 손에서 되찾은 이 아름다운 서클렛만은 예외였다.
“제발, 제발 날 좀 지켜줘요.”
세네피스는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떠올리며 떨리는 다리를 딛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전의 해 직후, 민병대를 떠난 오르마즈와 단둘이 살던 무렵의 세네피스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었다. 그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올지 매일저녁 가슴 졸일 필요도 없었고, 혼자 식탁에 앉아 그의 빈 의자를 보며 눈물지을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영웅 카파키 장군보다는 손님도 없는 먼지투성이 술집의 한가한 주인장 ‘오르’가 그에게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오르마즈는 가끔씩 그에게 이 서클렛을 씌워주며 혼자 의미 없이 웃곤 했고, 어디서 났는지 모를 비싼 장신구들로 그를 치장해주고는 ‘이게 본모습인데.’라며 씁쓸한 표정을 짓곤 했었다.
유평을 임신하고 만삭이 된 유레트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둘만의 평화를 깨뜨릴 때까지, 오르마즈를 내내 독차지했던 그는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다.
“가야 돼, 가야 된다고, 세네피스.”
비나를 꼭 움켜쥔 세네피스는 훤히 드러난 어깨와 가슴을 감싼 채 어둠 속을―그의 눈에는 야속하리만큼 아름다운 파란빛 세상 속을― 계속 달렸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고 당장 쓰러질 것 같았지만 생각하기도 끔찍한 저 남자에게서 한 발짝이라도 더 떨어져야만 했다.
오솔길을 따라 다가오고 있는 긴 행렬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선두에 있는 말에는 긴 창을 움켜쥔 무장이 서 있었고, 그 뒤로 똑같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2열 종대로 줄줄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
화들짝 놀란 세네피스가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들은 제네르 일행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모두 황실군 정규 보병 차림새에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네피스의 존재를 전혀 모른 채 앞 사람의 어깨를 붙잡고 조심조심 길을 따라 나아가는 중이었다. 선두의 무장이 한 손에 랜턴을 들고 앞을 비추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자꾸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며 애를 먹이는 것 같았다.
“이걸…….”
세네피스는 뒤와 앞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조금 전 아스탈 일행도 저들이 누구 편인지 모르겠다고 말을 했던 데다가, 프리깃에서 황실 일행을 공격했던 것도 바로 저 차림새였으니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벗은 몸을 바위 틈새에 대강 가린 세네피스가 적당히 거리를 두고는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너희들 누구냐?”
어둠 속에서 들려온 난데없는 물음에 화들짝 놀란 선두의 무장이 급히 말을 세우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추격해오는 아스탈 일행을 의식한 세네피스가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누구냐고! 빨리 대답해!”
잠시 후, 무장의 짧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발더 분견대장 자말 하크로딘 비장이다. 우린 황실 소속 정규군이다. 누군지 몰라도 그쪽이 먼저 밝히는 게 예의 아니냐?”
세네피스는 다시 머뭇거렸다. 저들을 믿는 것도 모험이고, 이 상태로 혼자 추위 속을 헤매는 것도 자살행위였다.
“황실군이라는 걸 밝혀 봐라.”
말에서 훌쩍 내린 자말은 부하들을 뒤에 둔 채 창을 세우고 혼자서 조심조심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무장이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도, 세네피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지만 결국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바위 뒤에서 천천히 고개를 내밀어보였다. 그리고 그의 빛나는 그레이오팔과 이 젊은 장교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이런, 맙소사.”
자말의 눈이 확 커졌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건 양모 제네르를 따라 몇 번 참석했던 황실 행사에서 여러 번 보았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황태후 폐하?”
자말은 자신의 두툼한 망토를 황급히 벗어서는 반나체로 서 있던 이 아름다운 황태후를 얼른 감싸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하크로딘 상장군의 양자 자말입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긴장과 충격이 일순간 확 풀리면서 세네피스의 두 다리가 갑자기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를 쳐다보는 이 젊은 장교의 까만 눈빛이, 몸을 감싸는 따뜻한 체온이 분명 위장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이 길로 가지 마…….”
세네피스는 이 한 마디를 중얼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말의 팔에 안긴 채 힘없이 옆으로 기울었다.
“예?”
자말이 얼른 그를 추슬러 주었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황태후는 혼잣말만을 중얼거리며 조금씩 의식을 잃어갔다.
“빨리 나가라고…….”
자말의 가슴에 기대어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비나를 움켜쥔 그의 손에는 여전히 핏줄이 바싹 서 있었다.
“황상, 황상께선 대체 어디 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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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3. Fimbul Winter] 는 여기까지입니다. ^^
다음 편부터는 분위기의 반전이 있는 새로운 [파트4. 시간의 저주, 혹은 축복]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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