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35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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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프 카파키의 일지 - 7
지난 코메트들과의 싸움에서 죽은 원주민들의 부검 자료를 확인하던 중에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문제는 60대로 추정되는 한 남자의 치아 사진이었다. 시체는 화염방사기의 화염에 절반 이상 훼손되어 있었지만 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의 외모는 누가 보아도 분명 노인이었다.
그렇지만 희한하게도 치아 상태만은 몇 개의 충치를 빼면 놀랄 만큼 양호했다. 내가 치과 과목을 제대로 공부한 일은 없지만, 아무리 보아도 노인의 치아는 아닌 것 같았다. 처음에는 사무 착오로 다른 시체와 치아사진이 뒤바뀐 것 같았다.
나는 치과를 공부한 단원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그의 소견을 물었다. (물론 희생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의 첫 대답은 아주 황당했다.
- 이 새끼 결혼하면 마누라한테 충치 제대로 옮기겠네요. -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 못한 나는 그 친구에게 [과거형]인지, [미래형]인지를 다시 물었고, 그 단원은 치아 주인의 나이가 아마도 10대 후반, 많아야 20대 같다고 아주 분명하게 대답했다.
내 생각이 확인된 이상, ‘노인의 치아사진을 달고 있는 젊은이’를 찾아내 들이대고 서류정리를 엉터리로 한 담당자 녀석을 혼구멍 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 상황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 노인(?)처럼 젊은 치아를 가진 건 한 명이 아니었다. 40대 중년 여성은 마모조차 거의 없는 완벽한 치아를 갖고 있었고,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이의 영구치는 이제 갓 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들 대부분은 제대로 관리를 못 해 충치와 치주질환이 심했지만, 치아 자체는 놀랄 만큼 새것 그대로였다.
이것도 어떤 돌연변이였을까?
우리는 다른 모든 작업을 미뤄두고 그들의 부검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미 시체는 코메트들이 소각해 버린 터라 우리는 부검 당시 남긴 서류와 약간의 표본만 가지고 이 돌연변이가 대체 뭘 뜻하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밤새워 서류를 뒤지고 토의를 했어도 이들 모두가 나이에 비해 턱도 없이 어린 치아를 갖고 있다는, 작지만 기이한 미스터리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는 치과 간판 내려야겠어.’라는 단원들의 푸념 섞인 농담을 들으며 일단의 조사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저 돌연변이였을지도 모르지. 물론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급히 지운 글씨 : 카히나도 이들처럼 예쁜 치아를 가지고 있을까?)
이마 388년, 트라카의 달, 4일 새벽.
수확 없는 밤샘조사를 끝낸 후.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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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년을 코앞에 둔 코메트 특무상사의 비밀스런 방문을 받았다. 트라에타오나 교단 헤네티 부대에서 파견된 그는 이곳에 처음으로 온 선발대 일원이다 보니 이곳에만 1년을 훨씬 넘게 머문 사람이었다.
그는 범죄자와 부적응자들이 넘쳐나는 저 무뢰배 무리 속에서도 헤네티다운 자제력과 품위를 유지하는 훌륭한 전사였다. 지난번 수로에서 500명이 무더기로 타 죽었을 때도 이성을 잃은 병사들을 앞장서 다독여줄 만큼 자제력이 있었고, 마을의 회색 재가 짙어지고 정체불명의 실종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공포의 와중에도 ‘성직자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겁낼 필요 없다’며 아무 보호장구도 없이 밖을 다니며 솔선수범하기까지 했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도 이젠 후방에서 서류, 보급품과 씨름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지만 어딜 가도 군인 아니냐는 말을 들을 만한 당당한 체구와 절제 있는 태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독실한 신자로서, 군인으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그는 말 그대로 모범답안 같은 남자였다.
그렇게 평생을 전사로서 교단에 헌신해 온 이 68세의 노병도 이제 본토에 돌아가면 모든 헤네티의 꿈인 ‘50년 근속 명예전역’과 함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나를 찾아와서는 ‘상관들에게는 절대 알리지 말아 달라’는 신신당부를 하며 날 바싹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가 내 앞에서 보인 첫 행동은 깊은 한숨이었다. 그는 여전히 몸이 좋았지만 처음 보았을 때의 황소 같은 기세에 비해서는 눈에 띄게 늙고 여위어 있었다. 찻잔을 잡는 그의 떨리는 손에서, 나는 그가 ‘환자로서’ 찾아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이 40대부터 파킨슨 병을 앓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퇴행성 질환은 희귀병도 아니고, 불치병이라는 딱지를 뗀 것도 이미 옛날이다. 그런데도 그는 무려 20년 가까이를 암시장 약으로 악화만을 막아가며 병을 감춰 왔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바보짓의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그 병이 유전적 완벽함을 요구하는 헤네티에게는, 아니 헤네티 혈통에게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사가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그에겐 자신처럼 헤네티가 되어 마구스 근위병으로 있는 두 아들과 손자가 있다고 했다.
-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늙어죽으면 없어질 몸뚱이인데……. -
상사의 깊은 한숨은 듣기도 미안할 만큼 무거웠다. 자신의 명예는 물론이고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고작 4달 남은 50년 명예전역은 그에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다. 그렇지만 감정 기복이 있을 때 그의 손은 마주앉은 사람이 당황할 만큼 심하게 떨렸고, 말하던 도중 두 번이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었다.
-두 달 전부터 갑자기 증상이 심해졌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약을 서너 배나 더 먹어도 듣지 않습니다. 윗사람들도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
마지막 말은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의사가 아니어도 누구나 의심을 할 만큼 그의 상태는 나빠 보였다. 그가 온 이유를 직감한 나는 그의 괴로운 고해를 더 들어주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 상사는 몇 달 전에 혼자서 순찰하다가 넘어져서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지. 그렇지 않나? -
- 예? 아뇨, 그런 일 없습니다, 신관님. -
- 있어. 아니, 있어야만 하네. -
상사는 입을 다물고 그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상관들과 교단에 보낼 소견서를 쓰기 시작했다.
- 당 사관은 근무 중 외상으로 인한 뇌손상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사지 떨림 증세를 보이고 있음. 본토 후송 및 5개월의 요양이 요망됨. 완치 가능하며 이후 현역 근무에는 지장 없음. -
소견서를 받아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상사는 입가와 턱에 잔뜩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타르서스에 오시거든 연락 주십시오. 술 한 잔 꼭 사고 싶습니다, 신관님. -
그 무뚝뚝한 군인은 이 한 마디만 남기고는 그대로 휙 돌아서서 내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코앞도 거의 보이지 않는 짙은 재 속으로 평소처럼 마스크조차 쓰지 않은 채 모습을 감추었다.
엉터리 소견서를 써 주었지만 내 맘은 어느 때보다 홀가분했다. 이제 그는 [근무 중 외상] 사유로 휴가를 받을 테고, 다음 프리깃 편에 고향으로 돌아가 명예전역 축하행사 통지가 올 때까지 가족과 함께 지내면 될 터였다. 마구스께서 몸소 내리시는 ‘50년 근속 메달’의 명예와, 고향마을 신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옛 무용담을 늘어놓는 평화롭고 소박한 말년도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웃음을 보이며 뒤돌아서던 늙은 군인의 당당하고 널찍한 등판이 내 기억에서 하루 종일 잊혀지지를 않았다.
이마 388년, 에시마의 달, 7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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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부검은 내게는 지옥 같았다.
부검대에 누워 있는 노병의 몸은 내 기억에서보다 훨씬 늙고 여위어 있었다. 내게서 소견서를 받아들고 웃으며 돌아서던 크고 넓적한 등판이 혹시 나 혼자만의 왜곡된 기억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나는 부검실 구석에 모아놓은 그의 유품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잠옷이 있었고 헤네티 동기반지와 결혼반지도 함께 놓여있었다. 지금 저 반지들은 가늘어진 손가락에서 실수로 빠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헌병들에게서 전해들은 내용은 간단했다. 병가를 얻은 그는 조용히 책이나 읽겠다며 열흘이 넘게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고 있었다. 동료들도 병사들을 시켜 식사를 숙소에 가져다주는 것 외에는 귀향을 앞두고 모처럼 여유를 즐기는 이 노병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점심 식사를 들고 숙소에 찾아간 병사는 아침에 놓고 간 식사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규정에 따라 비상 열쇠로 문을 열었다. 상사는 평상시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으로 침대에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침입자의 흔적도, 외상도 전혀 없었다.
시신의 곁에는 영내 도서실에서 빌려 온 책들과 아내에게 보내는 미완의 편지가 놓여 있었고, 마치 죽음을 예상했던 듯 가슴에는 평생을 함께 해 온 낡은 ‘가타스’ 경전이 보물처럼 안겨 있었다. 생애 대부분을 교단과 마구스를 지키고, 이단들과 치열하게 싸워 온 늙은 성(聖)전사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귀향 프리깃의 도착까지는 고작 이틀이 남아있을 뿐인데 그는 이렇게 가고 말았다.
단원들은 평생을 교단에 바친 이 망자에게 짧은 경의를 표하고 부검을 시작했다. 나는 차마 메스를 잡을 수 없어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부검하는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상사는 완벽한 혈통, 신체조건을 겸비한 지원자들 중 선발되어 평생을 훈련과 극도의 절제된 생활을 해 온 헤네티였다. 당연히 비슷한 연배보다 훨씬 강건한 몸을 가졌으리라 생각되었었다.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
- 90살은 된 것 같군. -
나를 대신해 집도를 맡은 부단장이 다 들어낸 복강과 뇌를 들여다보며 허탈하게 꺼낸 첫 마디였다. 내심 100살 이상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많이 깎은 것이겠지만.
그는 부검 보고서에 [고령으로 인한 자연사]라고 써 넣고는 한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아마도 자신의 생각이 정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 검사의학이 첨단을 달리고, 평균수명이 100세를 넘었다며 환호하는 시대에 60대의 [이유 없는 자연사]가 과연 말이 되는 것인지 확인을 받고 싶었던 것이리라.
- 안 될 건 없지. -
나는 그에게 수고했다고 손짓을 하고는 부검실을 빠져나왔다. 헤네티 제명 사유에 ‘단명(短命)’이라는 어이없는 항목은 없으니 상사의 자녀들이 피해를 입을 일은 없을 터였다.
상사는 ‘회색 재는 해롭지 않다.’는 멍청한 성직자들의 연구 나부랭이를 누구보다 철석같이 믿었었다. 그는 재가 기분 나쁘다며 순찰을 기피하던 젊은 병사들 앞에서 누구보다 앞장서 마스크를 벗었던 사람이었다.
병원 건물로 쓰이는 간이 건물 밖으로 나서던 나는 눈앞을 덮고 있는 회색빛 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평소 짧은 거리를 다닐 때에는 거의 쓰지 않던 방독 마스크를 꺼내 혹시 구멍이라도 없는지를 확인했다. 그것도 마치 히스테리 환자처럼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상사에게 너무도 미안하다. 미안해 죽고만 싶다.
검게 변색되어 있던 상사의 기관지와 폐, 온통 쪼그라들어 있던 내장들, 구멍투성이였던 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 앞에서, 갑자기 눈앞이 먹먹해지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노인으로 알았던 원주민들의 지나치리만큼 젊은 치아.
잘 관리되던 퇴행성 질환의 갑작스런 악화.
과도하게 빠른 노화와 돌연사.
(혹시 몇 달만에 어른이 되어 나타났던 카히나도?)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미쳐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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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 마나 파투브, 신이여 부디 나를 지켜주소서.
아니, 이 부족한 종을 버리시고 저 헌신적인 영혼을 대신 품에 거두어 주소서.
이마 388년, 에시마의 달, 18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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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킨슨병, 혹은 파킨슨씨 병은 무하마드 알리, 마이클j폭스가 앓고 있는 병으로, 사지떨림, 언어장애를 동반하는 대표적인 퇴행성 질환입니다.
지난번 예고한대로, 이번 회부터 새로운 파트가 시작됩니다.
이번 파트의 전개는 고향행성의 비밀(?)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 이야기와 함께 나가게 됩니다.
타리프의 일지는 이번 파트까지 나옵니다.
다음 파트부터 나오는 과거 이야기에는 익숙한 인물(?)이 훨씬 어린(?) 모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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