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36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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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아래 가시덤불에 파묻힌 코리온은 여전히 온전치 않은 의식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마비되었던 사지의 감각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코리온은 굴러 떨어지며 양쪽 다리가 심하게 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지만 설상가상으로 검은 재가 낮 동안 햇볕을 가리면서 이 고원의 기온까지 급락한 것이 문제였다.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다리의 통증에 뼈마디를 쑤시는 추위까지 그를 계속 괴롭혔다.
‘고원과는 악연이야.’
코리온은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며 검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30년 전 제위 전쟁이 있던 때, 그가 보좌관 하심과 함께 고립되어 죽음만을 기다렸던 칼릴의 [두딘카 시]도 이런 고원이었다.
‘하긴, 그때가 더 추웠던가 ……엇.’
이런저런 잡생각으로 어렵게 의식만을 유지하고 있던 코리온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눈을 번쩍 떴다. 이번에 다가오는 사람은 랜턴도 휘두르지 않았고, 무기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둔중한 발소리도 내지 않았다. 코리온은 상대가 굉장히 조심조심 다가오고 있는 것을, 그리고 조금 전의 그 ‘검은 기병’들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코리온은 도와달라고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일단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먼저 반응을 보인 건 그쪽이었다.
“당숙부?”
잔뜩 겁에 질린 듯 들리는 여자아이 목소리에 코리온의 어깨가 움찔했다.
“옹주?”
억지로 고개를 가누던 코리온의 눈앞에 크고 예쁜 암갈색 눈동자가 불쑥 들어왔다. [두딘카 시]에서 그를 구해주었던 그 얼굴을 그대로 빼닮은 작은 소녀가 덤불들을 헤치고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 있었다.
“어찌된 거냐……도망가지 않았었나?”
지친 코리온의 딱딱한 물음에 마리안은 난데없는 포옹으로 답을 해 주었다.
“무서웠어요.”
“…….”
코리온은 왜 바보같이 돌아왔냐며 혼을 내려 했지만 살갑게 목을 안는 이 소녀의 체온에 결국 하려던 말을 꾹 참고 말았다.
“모퉁이를 막 돌았는데 앞이 넓고 뻥 뚫린 길이었어요.”
코리온은 그제야 이 소녀가 왜 혼자 도망치지 않고 이대로 돌아왔는지를 직감했다. 그 뒤는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지만 여전히 공포에 질린 채 울먹이는 소녀를 굳이 막지는 않았다.
“그런 길에선 말 탄 군인이 나보다 훨씬 빠를 거 아니에요. 그래서 군인들이 절 보기 전에 길 옆으로 도망쳐서 바위틈에 숨었어요.”
코리온은 열 살도 되지 않은 이 소녀의 빠르고 정확한 판단에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길로 달려갔다면 마리안의 발이 아무리 빨라도 곧 잡혔을 터였다.
“잘……했구나.”
“일으켜 드릴까요?”
“네가?”
코리온은 마리안의 물음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마리안은 그의 이런 대답을 놀리듯, 코리온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고 낑낑 소리까지 내어가며 당기기 시작했다. 나이가 나이라서 X다운 강한 힘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덤불 사이에 쓰러져 있는 어른 한 명을 잡아당길 만큼은 되는 것 같았다.
“엄마가요, 저도 10살이나 11살 되면 힘이 세질 거라고 하셨어요.”
“너도 그렇구나.”
코리온이 혼자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황제를 포함해 황실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성장 단계가 보통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걸음마도, 말을 트는 것도 늦었고, 10살을 넘길 때까지는 동년배보다 몸집도 작았다.
황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카이나 주페도 10살 무렵까지는 ‘황제께선 저리 크신데 태자들이 왜 이리 비실비실하냐.’는 뒷말을 들어야 했고, 황제의 엄청난 체력이 무색할 만큼 힘도 보통 아이들보다 ‘약간 나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었다.
바위에 기대어 앉은 코리온이 힘없이 물었다.
“그런데 날 어떻게 찾았지?”
“숨소리가 들렸어요.”
“지금 여기서?”
마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리온이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본 이 꼬마는 몇 시간 전 경호대 군인에게서 받은 [군용 영양바] 2개를 품에서 불쑥 꺼내 하나를 내밀었다.
“드세요.”
“지금?”
“배 안 고프세요?”
마리안은 덩치 큰 군인들이나 먹는 고열량의 영양바를 숨 쉴 새도 없이 씹어 먹기 시작했다.
“지금 배가 고픈 거냐?”
코리온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분명 배고플 시간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 상황에서 무언가 먹을 생각을 하는 꼬마의 모습에 코리온은 내심 기가 찰 지경이었다.
“배가 고파서 못 뛰겠어요. 점심 먹고 지금까지 굶었어요.”
“꼭 누구 같구나.”
코리온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연회에서 페로가 황제의 어린 시절을 말하면서 ‘밥 없으면 밥상이라도 씹어 먹을 것 같았다.’고 말하는 것을 얼핏 들은 일이 있었다.
황자들은 그런 면에서도 피를 못 속였다. 2년쯤 전 라마단 금식 기간에는 굶주린 황자들이 작당을 해서 공용 주방의 잠긴 냉장고 문짝을 뜯어내고 내용물을 몽땅 훔쳐간 일까지 있었다. 힘센 장태자가 문짝을 뜯고, 귀 밝은 막내 마리안은 망을 보고, 다른 황자들이 번갈아 음식을 옮겼다는 보고에 황제는 ‘딴에 작전들은 제대로 짰구나.’라며 기가 막혀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 일이 있은 뒤로 황자들에게도 황제처럼 ‘금식 예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행길에 코리온이 주페를 위해 특별한 간식을 손수 마련해 왔던 것도 혹시나 또 먹을 것을 찾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마리안이 입 안에 먹을 것을 가득 담은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배가 차야 힘을 내서 당숙부님도 옮기죠.”
“네가 날 옮긴다고?”
“그럼 누가 옮겨요.”
마지막 조각까지 꿀꺽 삼킨 마리안은 그때까지도 한 손에 영양바를 들고는 먹을 생각도 않고 있는 코리온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배 안 고프세요?”
“난 괜찮다. 이건 너한테 더 필요할 것 같구나.”
코리온은 바를 다시 마리안에게 돌려주었다.
“업히세요.”
“얘야, 넌 날 업기에 너무 작아서…….”
“된다니까요.”
마리안은 두 다리를 다쳐 걷지 못하는 코리온을 억지로 등에 업었다. 코리온의 키가 크다보니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체중의 몇 배는 되는 어른을 등에 업은 이 꼬마는 끄응 소리를 내며 가파른 비탈을 한 발 한 발 힘들게 내딛기 시작했다.
“아휴. 헥헥.”
한참 걸려 오솔길까지 되돌아 올라온 마리안이 그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닦아냈다. 적들이 되돌아간 길에는 한쪽 다리를 창에 찔려 넘어졌던 주페의 말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지만 탈 수는 없어보였다.
“잠깐만요.”
코리온을 눕혀놓은 마리안이 다시 오솔길 아래로 후다닥 달려 내려갔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난 마리안의 어깨에는 어딘가에서 풀어낸 말 안장과 마구가 얹혀 있었다.
“내가 탔던 말에서 풀어냈구나.”
무거운 안장을 지고 올라온 이 꼬마는 세 다리로 비틀거리는 말의 뒤에 방금 가져온 안장을 길게 끈으로 엮었다. 그리고는 급조한 말 썰매를 가리키며 코리온을 힐끔 돌아보았다.
“제가 앞에서 말 끌고 갈게요. 다친 말도 살려줘야죠.”
“희한하게 반복되는구나.”
코리온은 제대로 앉아 갈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안장썰매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가 말하는 의미를 이해 못 하는 마리안은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코리온을 부축해 안장에 앉혀주고는 말 앞으로 달려가 고삐를 잡았다.
“가요, 뒤로 넘어지지 마세요.”
마리안이 고삐를 잡아끌면서, 뒤에 탄 사람만큼이나 심하게 다친 말이 또각거리며 비틀비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단단한 안장이 흙바닥에 끌리며 듣기 싫은 소리가 났지만 바퀴라는 아주 원시적인 발명품조차 동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수단은 없어 보였다.
“저 위가 지진관측소입니다.”
호드르 산 정상의 칼데라 초원을 여기저기 빙빙 돌아서 온 제네르의 앞에는 마지막 고비인 가파른 비탈길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맘이 급해진 제네르는 길안내를 맡은 기병이 앞장서기도 전에 성급히 비탈길에 말을 들여놓았다.
“이크.”
비탈 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덩이에 놀란 제네르가 얼른 말을 뒷걸음치게 했다.
“앗.”
길안내를 맡은 분견대 기병이 뒤늦게서야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제네르가 품에서 랜턴을 꺼내 켜 보았지만 여전히 잘 켜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제네르는 랜턴을 안장에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다시 랜턴을 켜 보았다. 한 대 얻어맞고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는지, 랜턴이 껌벅거리며 빛을 뿜기 시작했다. 제네르는 희미하나마 켜진 랜턴으로 바닥을 비춰 보았다.
“뭐가 이래.”
제네르가 화들짝 놀랐다. 기병이 가리킨 [지진관측소]까지 오르는 비탈은 주먹만한 것부터 어른 머리통만한 것까지 이런저런 모양의 거친 화산암 쇄석들이 빽빽한 밭을 이루고 있었다.
“저 위까지는 계속 이렇습니다. 돌덩이 때문에 말 타고 올라가기는 버겁습니다.”
길안내를 맡은 기병의 한 박자 늦은 조언에 제네르가 슬쩍 눈꼬리를 흘렸다.
“퍽이나 일찍 말해주는구나.”
머쓱해진 기병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이용하는 외곽 오솔길을 이용했다면 측면을 돌아서 바로 저기로 통했겠지만…….”
“안다. 우리야 일부러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왔으니까.”
제네르가 툴툴대며 말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밟을 때마다 돌들이 굴러 내려가는 그 위험천만한 쇄석 비탈을 밑바닥에서부터 엉거주춤 네 발로 기어 올라가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인기척이 없는데?”
다친 몸으로 돌밭을 기어 제일 먼저 관측소 앞에 도착한 네피가 당혹스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함께 온 2명의 분견대 기병과 4명의 근위기병, 가디언 5명도 속속 이곳에 올랐지만 제네르와 함께 온 그들이 이곳에 있는 사람의 전부였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더 나아가던 제네르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철조망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막사 한 동(棟) 정도 되어 보이는 단층의 벽돌건물 주변으로 철조망이 빙 둘러 쳐 있고, 여느 군 시설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팻말이 달려 있었다. 랜턴이 또 꺼져버리자 제네르가 이번에도 신경질적으로 철조망에 후려쳤다.
[지질 탐사시설. 발더 분견대 제7임시초소 ----- 황실 재산이니 접근을 엄금함.]
“학장 일행이라도 와 있어야지?”
제네르는 누구 좀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며 당장 꺼질 듯 말 듯 껌벅거리는 랜턴을 흔들어 보았다. 마자리크가 이끄는 50여명의 보병대는 부상자까지 보호하고 있으니 어차피 조금 늦을 테고, 자말 일행은 제일 늦게 올 것이 뻔했지만, 가장 먼저 와 있으리라 예상했던 황태후와 학장 일행의 흔적이 눈을 씻어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그럼 마리안도?”
네피가 비명처럼 소리를 꽥 질렀다. 그에겐 까칠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황태후와 학장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도 없었고, 페로의 피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태자 주페도 내심 탐탁지는 않았다.
“잠깐.”
언덕 아래에서 쇄석들이 우르르 굴러 내려가는 소리를 들은 가디언 한 명이 가지고 있던 칼집을 탁탁 치며 ‘경계’를 알렸다.
“엇.”
바람처럼 무기를 쳐든 가디언들 앞에 다행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황태후 일행은 아니었다.
“먼저 와 있었군.”
말에서 내려 올라온 마자리크는 이 한 마디만을 남긴 채 비틀거리며 제네르 옆을 스쳤다. 이 강인한 제후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손과 얼굴에도 누군가의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마자리크는 먼저 와 있던 남편 네피를 보자마자 아무 말 없이 그의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안아 줘, 제발.”
마자리크가 남편에게 기대며 휘청거렸지만 이번에도 아랫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내어 울지는 않았다.
“무슨 일…….”
자초지종을 물으려던 제네르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런, 맙소사.”
제네르가 입을 가렸다. 마자리크가 걸어서 끌고 올라온 말 등에는 그 주인의 망토로 덮여진 무언가가 실려 있었다.
“후우.”
망토를 살짝 걷어보았던 제네르가 한숨을 내쉬며 도로 덮어놓았다. 그 밑에는 인상 좋고 잘 웃던 이그나토 가의 젊은 후계자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호드르 시내에서 자객에게 가슴을 찔렸던 마자리크의 장남 윌더 이그나토 경은 결국 이곳까지 오는 먼 길을 버티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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