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37화 (832/1,132)

< -- 837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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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더가 내 품에서……약도 못 주고……숨도 못 쉬고 고통스러워하는데 난…….”

네피의 품에 안긴 채 이를 갈며 흐느끼던 마자리크는 결국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떤 놈이 자객을 보냈는지 내 꼭 잡아…….”

마자리크가 바들바들 떨며 바닥의 흙을 움켜쥐었다. 고개 숙인 그의 코끝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네피의 포옹도, 다른 무엇도 지금의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없어 보였다.

동병상련 처지가 되어버린 마자리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네르는 동생 마야를 뒤늦게야 떠올렸다. 막 도착한 보병들을 둘러보던 그는 한쪽 구석에서 ‘다행히 산 채로’ 누워있던 동생을 발견했지만 차마 대놓고 기쁜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동생에게 조심조심 다가가 손을 뻗었다.

“이제 괜찮니?”

몇 시간 전까지도 반쯤 미쳐 있었던 마야는 언니의 얼굴을 힐끔 돌아보았다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는 수건으로 돌돌 말은 옆구리를 움켜쥔 채 텅 빈 눈으로 암흑 속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제네르는 섣불리 동생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가 조금 전처럼 욕을 퍼부으며 날뛰지 않은 것만으로도 일단은 안심이었다. 다행히 정신은 온전한 모양이었다.

“조금 있으면 자말이 올 거다.”

‘자말’이라는 말에 마야의 무뎌졌던 시선에서 잠깐 빛이 보였다. 제네르는 언니인 자신보다 사랑하는 약혼자의 이름에 더 반응하는 동생의 모습에서 내심 섭섭함도 느꼈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질 여유도 없었다.

‘나도 남편들 이름에 저럴까?’

약혼자의 도착을 고대하는 동생과, 남편의 품에 안겨 울먹이는 마자리크를 번갈아 돌아본 제네르는 가족들의 참사로 잠시 잊고 있던 세 남편들을 떠올렸다. 황제는 종종 그에게 ‘남편복 터졌네.’라며 악의 없이 놀리곤 했지만 셋이나 되어 봤자 지금 당장은 아무도 곁에 없고, 당장은 올 가망도 없어보였다.

“그래, 빨리 나가야지.”

제네르가 잡생각을 툭툭 털고 [지진관측소]를 향해 돌아섰다. 이곳의 최상급자로서,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그의 어깨에 걸려있었다.

“여긴 우리의 마지막 보루다.”

제네르는 관측소 주변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 경호대 장병들에게 일렀다. 소식이 끊긴 세네피스 일행을 제외하면 50여명의 경호대는 일단 제대로 집결해 있었다. 물론 그들 중 15명 정도는 부상이 심해 주변의 손길이 필요한 처지였다.

“황태후 일행은 대체 어찌된 건지.”

제네르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일행들을 새삼 세 보았다. 그에게 분견대 기병이 조심스레 말했다.

“사관이 이곳 지리에 익숙하고, 일행 숫자가 많지 않았으니 아마도 지름길인 순찰로로 오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내 근위기병들과 함께 확인해 봐라. 절반 정도 갈 때까지 못 만나면 길이 어긋난 것일 수 있으니 바로 돌아오고. 연락이 어려우니 더 이상 멀리 흩어지면 안 된다. 알았나.”

제네르의 손짓에 분견대 기병 한 명과 제네르의 중무장 근위기병들이 급히 말을 몰아 ‘황태후 일행이 왔어야 할 길’을 거슬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몸 성한 놈들은 주변 감시하고 바람이 차니까 환자들은 건물 주변으로 옮겨 놔. 시간이 없으니 빨리 구조신호부터 보내야겠다. 너희 좀 따라와.”

제네르는 분견대 기병들을 데리고 관측소 문을 열었다. 그가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안 그래도 불안불안하게 켜져 있던 랜턴이 또 꺼져버렸다. 이번엔 벽에 후려쳐도 별 반응이 없었다.

랜턴을 내던진 제네르는 습관처럼 조명 스위치부터 찾았지만 그 역시도 작동은 하지 않았다. 늦은 오후 햇빛까지 저물어가면서 바깥도 깜깜했고, 설상가상으로 실내는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기병 한 명이 안장에 달려있는 [군용 비상 팩]을 들고 와 안에 있던 작은 성냥갑을 꺼냈다.

“세상에, 이런 걸 다 쓰게 될 줄이야.”

치익 소리를 내며 켜진 노란 불빛에 깜깜하던 실내 구조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이런 저런 계측 장비가 있고, 식수와 비상식량, 응급약품과 침구류도 갖춰져 있었다.

“여기 계측 자료는 에너지부 지질학자들이 관리합니다. 아시다시피 이곳 페스트가 황량하고 살기 안 좋은 곳이지만 이 부근은 지열하고 온천 덕분에 날씨도 좋고 에너지도 얻고 있습니다. 산에 걸리는 구름 덕분에 강수량도 제법 있는 편이고 풀도 잘 자라서 말도 키우기 좋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여기 지질구조가 아니고 ‘외부에 연락’을 하는 방법이야.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제네르의 짜증 섞인 물음에 사관은 구석에 있는 큼직한 통신장비 앞에 다가갔다.

“이건 아까 지나오신 6개의 우리 초소들과 유선으로 연결된 장비입니다. 워낙에 단순한 장비라서 이 통에도 작동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사관이 기계의 송화장치를 켜들고 1번 초소와 연결된 회선을 작동시키자 연결을 뜻하는 파란 불빛이 들어왔다. 다행히 이번엔 기계를 후려칠 필요는 없었다.

“저희 부대장이 1번 초소에 병력을 남겨두고 온다고 했으니 거기 있는 동료들을 도시 밖으로 멀리 내보내서…….”

“호드르 시가 폭도들에게 점령당했는데 가능하겠나?”

제네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가 산 아래로 퇴각하지 못하고 그 반대편인 이곳으로 도망친 것도 호드르 시의 폭동 때문이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1번 초소는 산길 제일 아래쪽에 위치해 있으니 시가지를 거치지 않고서도 산자락을 타고 돌아서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부대 병사들은 다들 이곳 지리에 익숙하니…….”

웃음을 지으며 송화기를 켰던 사관의 표정이 일순간 파랗게 굳었다.

“왜 그래?”

사관은 아무 대답 없이 송화기를 제네르에게 불쑥 내밀었다.

- 씨발! 뭐해! 빨리! 빨리 태워버려! 계속 몰려오잖아! -

- 갑자기 연락이 와서 -

- 닥치고 빨리 태워버려! 폭도들이 군용 무기를 가져갔다가는……. -

뒤이어 누군가 송화기를 동댕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함성, 어딘가 무너지는 굉음과 비명이 들렸다.

- 조금만 버텨주세요! 볼트가 아직 덜 타서 -

- 코앞이야! 더 어쩌라고! -

- 벽이! 뒤쪽 벽이 무너져요! -

- 닥치고 기름이나 더 부어! -

뒤이어 정말로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조금 전까지는 배경으로만 깔리던 거친 함성이 갑자기 바로 옆처럼 가깝게 들렸다. 침입자로 추정되는 이들의 외침, 중간중간 [빨리 들어가] 혹은 [무기]라는 말을 반복하는 목쉰 소리가 섞인 것도 같았다.

- 다 태웠어요! 이제 어쩌죠! -

- 통신기! 그것도…… 아악! -

한 명의 찢어지는 비명을 끝으로, 두 병사들의 끔찍한 대화는 끝을 맺었다. 치익거리는 잡음과 함께 통신 두절을 뜻하는 붉은 등이 들어왔다.

제네르는 침통한 얼굴로 송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들이 뭐라고 그랬었지?”

“호드르 시민 수천이 산악도로를 타고 이곳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우의 죽음을 직감한 발더 분견대 기병 사관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천 명이 넘는 폭도가 어둠을 틈타 주변을 갑자기 에워싸서 초소 무기고에 불을 놓고 도망칠 새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투항을 거부하고 무기에 불을 놓은 것 같습니다. 폭도들에게 정규군 무기가 넘어가서는 안 되니…….”

“그래……, 그랬나 보더군.”

제네르는 쓸데없는 감정이입을 잊기 위해 잠시 심호흡을 했다. 어쨌든 그는 이곳의 지휘관이었다.

“황상께선 저들의 용감한 행동을 절대 잊지 않으실 거다.”

“나머지 초소들은 무사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깐, 폭도들이 점거한 도로와 호드르 시가지를 거치지 않고 이 산을 빠져나가는 게 혹시 가능하냐?”

“쉽지 않습니다. 워낙 가파른 바위산이라 조금만 길을 벗어나도 막다른 낭떠러지를 만나곤 합니다. 별다른 랜드마크도 없어서 나침반이나 계측장비가 없으면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시계(視界)까지 이런 상황에서…….”

깜깜한 창밖을 내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던 기병이 입술에 굳게 힘을 주었다.

“이곳에서 장기간 근무한 전우들도 있으니 일단 시도해 보라고 하겠습니다.”

“직권으로 비상 면책특권을 주겠다. 강도짓을 해서 말을 훔치든, 뭘 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산을, 아니 불통지역을 벗어나라고 해라. 무장을 했거나 저항하는 민간인은 선제공격하거나 사살해도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깥에 이곳 사정을 알려야 한다.”

제네르가 마지막 말에 최대한 힘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사관이 나머지 초소들에 황급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동안, 네피가 눈이 퉁퉁 부은 마자리크를 데리고 관측소 안에 들어섰다. 제네르가 그들에게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폭도들이 이곳으로 올라오는 모양입니다. 우리 1번 초소가 뚫린 것 같습니다.”

“그 개새끼들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올라와!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순간 격앙된 마자리크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한때 그의 영지민들이었던 호드르 시민들, 아니 폭도는 지금 이 순간만은 소중한 장남을 죽인 공범이었다. 네피도 아내를 토닥여주며 함께 울분을 터뜨렸다.

“그놈들 배후에 ‘몸에 불 붙이는 놈들’이 있는 게 분명해. 틀림없다고. 빌어먹을! 무슨 재단? 곡물 무상원조 준 그놈들도 뭔가 이상했어!”

“내가 지네들을 위해서 별의별 못 볼 꼴까지 다 보고 얼마나 애를 썼었는데……내가 이곳에 얼마나 정을 주었는데……빌어먹을 농사 한 번 망쳤다고 감히 내게 칼날을 겨누다니…….”

“잠깐, 잠깐만요.”

분노에 떨고 있는 마자리크를 제네르가 얼른 무마했다.

“고작 곡물이 썩은 것 때문에 지금까지 불평 없이 기근을 버티던 선량한 이주민 수천이 난데없이 무기를 든 건 어딘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사이좋게 지내던 황실 분견대 초소까지 공격해 병사들을 죽인 것도 말이 안 되고요. 그리고…….”

“빙빙 돌려 설명 안 해도 아니까 요점만 말하게. 아니, 내가 말할까?”

마자리크가 눈가에 살기를 드러내며 냉큼 대답했다.

“생각해 보게. 이번 기근으로 제일 큰 곤경에 처해서 그 썩어문드러진 옥수수와 감자를 심은 지역들을 말이야. 탈라스, 수베르, 샤레이…… 모두 황제에게 가장 충성했던 제후지역들이야.”

“황실은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궁핍한 제후들에게…….”

“알아, 황상을 원망하자는 건 아니니까. 무슨 재단인지 뭔지가 식량을 무상 원조하겠다고 나서고, 금세 수확된다는 ‘신품종 종자’까지 들이대니까 내가 뭔가에 씌웠던 게 분명해. 그게 아니었다면 황상의 지원을 바닥에 엎드려서라도 받았겠지.”

텅 빈 마자리크의 눈동자에 지독한 후회가 번지고 있었다.

“그게 독이 든 선물이었던 것을 몰랐으니.”

마자리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를 지켜보는 제네르의 입가에는 ‘나라도 그랬을 겁니다.’ 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다.

“누가 이런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몰라도 그네들의 진짜 표적은 아마 나 같은 자잘한 제후가 아닐 거야.”

마자리크가 눈을 부릅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폭도들이 자네 가족을 왜 공격했다고 생각하나? 상장군을 딸로 뒀다는 걸 빼면 고작해야 촌구석에서 말이나 돌보던 선량한 촌부들을 말이야.”

제네르는 갑자기 말이 막히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정작 자신의 가족들을 왜 해쳤는지 냉정한 가슴으로 따져 본 일이 없었다. 제3자인 마자리크가 그의 혼란을 일깨워 주었다.

“제 본가를 공격한 시점도 뭔가 이상합니다. 그땐 호드르 시에서 썩은 곡물로 소요사태가 벌어지기 이전이었죠.”

“그것도 자네가 지나갈 시간에 딱 맞춰서.”

“……절 노렸겠죠.”

제네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자네의 동선까지 파악하고 있던 자들이 사가 부근에 황실군 소초가 있다는 걸 계산하지 않았을까? 불까지 질러서 공격받고 있다는 걸 대놓고 알리면서 말이야?”

어둠 속에서 부릅뜬 마자리크의 두 눈이 어딘지 살벌해 보였지만 제네르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황실군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충분히 의심할 상황 아닌가. 근위기병들이 곁에 없었다면, 아니 네피 일행을 못 만났다면 자네도 당했을지 몰라.”

“설마 자말을…….”

또다시 발끈할 뻔했던 제네르는 들것에 실린 동생 마야가 안에 들어오자 일단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상장군님.”

초소들에 모두 연락을 끝낸 기병 사관이 송화기를 내려놓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5번과 6번 초소는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적이 이미…….”

“후우.”

제네르가 헝클어진 금빛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다행히 2, 3, 4번 초소에 2명씩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병사들에게 지시하신 내용을 빠짐없이 전했습니다. 모두 초소를 불태우고 산을 빠져나갈 겁니다. 그들 중 한 팀이라도 성공하면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

“병사 6명의 발에 우리 운명이 걸린 건가.”

제네르는 시커먼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상의 용안을 다시 뵐 수 있을까.”

제네르의 이 한 마디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도시에서 올라오는 폭도들에 쿠베가 이끄는 정체불명의 무장병력까지, 사방이 온통 적이었다. 그들이 이곳을 찾아내기 전에, 아니, 그들에게 몰살당하지 않고 저항하는 동안에라도 부디 외부에서 도움의 손길이 도착해 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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