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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840화 (835/1,132)

< -- 840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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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앞이 안 보여서 성냥불을 켰는데……내용물이 새어나왔는지…….”

충격을 받은 자말이 횡설수설하며 계속 고개를 저었다. 팔뚝만한 작은 연료탱크였지만 종잇장처럼 찢겨 바깥으로 뾰족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딱히 탈 것이 없어 큰 불로 번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야는? 마야는 괜찮은 거냐?”

자말이 몸으로 감싼 덕분에 봉변을 피한 마야가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네르는 동생과 양자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이젠 다른 것이 문제였다.

“이걸 어쩌지.”

낙담한 제네르가 자리에 꿇어앉으며 빈 깡통이 되어버린 탱크를 주워들었다. 바깥에 구조를 청할 수 있었던 가장 믿음직한 수단이 폭음과 함께 날아가 버린 꼴이었다.

“죄송해요, 탱크가 새는 줄 모르고 성냥을 켰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창백해진 자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을음을 잔뜩 뒤집어쓴 그의 눈가에 눈물까지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씨발! 미치겠군.”

제네르를 뒤따라 달려 들어온 마자리크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거칠게 짜증을 냈다. 그는 고철이 되어버린 발사대를 힘껏 걷어차며 계속 언성을 높였다.

“대체 뭐냐고! 이제 어떻게 여기 사정을 알리려고!”

당장 잡아먹을 듯 험악한 마자리크의 눈길이 자말을 향하고 있었다. 제네르가 그를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일렀다.

“그만하세요.”

저 제후가 양자를 의심하고 있는 것을 제네르도 잘 알고 있지만 그쪽에서 대놓고 먼저 따져들지 않는 상황에서 앞장서 화를 낼 상황은 아니었다.

제네르는 더 이상의 감정 폭발을 꾹 눌러 참으며 동생에게 다시 물었다.

“이거 고칠 방법은 없니?”

“1차 발사 장치가 날아갔는데 어떻게 쏴요.”

마야도 크게 절망한 듯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폭발로 그의 옷도 군데군데 탔고, 파편에 긁힌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런 동생에게 책임을 따지며 몰아붙일 엄두가 차마 나지를 않았다.

“이제 어쩌라고…….”

제네르는 이젠 쓸모도 없어져버린 로켓을 옆에 툭 던져놓고 힘없이 일어섰다.  그리고는 성난 얼굴로 자말을 노려보고 있는 마자리크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지만 지금 당장은 좀 참아주시죠.”

마자리크가 여전히 험악한 눈길로 제네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도 생각 좀 할 수 있게.”

제네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자리크의 입을 막아버렸다. 둘은 퍽이나 어색하게 서로 마주보며 서 있어야 했다.

둘 사이의 이런 팽팽한 대립각을 깬 건 바깥에서 들려온 사람들의 고함이었다. 제네르는 사람들의 외침 사이에 섞인 ‘옹주 마마’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할아버지!”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된 마리안이 근위기병의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서는 네피에게 달려가 그의 우람한 품에 와락 안겼다. 그리고 양 다리에 부상을 입은 코리온도 병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말에서 조심조심 내려졌다.

“옹주께서 대군을 말 뒤에 싣고 함께 오솔길로 오고 계셨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뭐? 잠깐, 주어와 목적어가 뒤바뀐 게 아니고?”

제네르가 무언가 잘못 들은 것 같은 생각에 귀를 후비고는 재차 물었다.

“맞습니다. 옹주께서 코리온 대군을 구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군께서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허.”

제네르는 저 콩알만한 어린 옹주를 새삼 다시 쳐다보았다. 마리안은 들것에 누워 있던 세네피스에게도 달려가 무작정 껴안고 뺨에 뽀뽀를 하는 중이었다. 평소 ‘황태후’의 앞 두 글자만 들어도 기겁을 하며 도망을 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세네피스는 이 꼬마의 난데없는 애정공세에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마지못해 안아주는 정도였지만.

“태자는?”

제네르의 물음에 근위기병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적들이 납치해 간 것 같다고 합니다.”

“제기랄.”

계속 이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 제네르의 두 다리에서 힘이 쫙 빠지는 것 같았다.

“왜, 왜 내게…….”

제네르의 흐려진 머릿속으로 지난 몇 시간 동안의 끔찍한 영상이 차례로 스쳤다. 몰살당한 가족들의 시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복잡하고 꼬인 상황들,  ―비록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딘지 의심스럽게만 행동하는 양자 자말, 더도 없는 평화라고 생각했던 순간 맞닥뜨린 절망스런 전투까지, 이 모든 것이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곳의 군인들을 모두 이끌어야 하는 상장군이라는 지위만 아니라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차라리 도망이라고 치고픈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비틀거리던 그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이건 너무하잖아.”

어처구니없이 세네피스를 놓친 아스탈은 참담한 심정으로 일단 행궁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네피스가 북쪽 어딘가로 방향을 틀어 도망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고작 헤네티 기병 서넛을 데리고 ‘가디언이 섞였을지도 모르는’ 50명의 정예 병력을 쫓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냥 돌아가느니 미행이라도 붙이셨으면 낫지 않았을까요.”

함께 가던 슈라가 조심스레 말을 붙여 보았지만 돌아온 건 험악한 반응뿐이었다.

“멍청한 놈. 그쪽에 뮤가 있다는 걸 생각 못 했나.”

“그, 그렇군요. 그레이오팔이니…….”

자신의 생각이 바보 같았다는 것을 깨달은 슈라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오팔인 세네피스가 상대방에 있다면 들키지 않고 접근하거나 미행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돌아가서 헤네티들을 좀 더 데리고 다시 치면 돼.”

아스탈이 입가에 잔뜩 힘을 주며 오기를 드러냈다. 그때, 앞에서 나아가던 헤네티가 창끝으로 바닥을 툭툭 쳐서 ‘정지’를 알렸다.

“앞에 누가 옵니다.”

“음?”

아스탈은 슈라에게서 건네받은 망원경으로 얼른 전방을 살폈다.

“저 정도 숫자면 우리 편이군.”

잔뜩 일그러졌던 아스탈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감돌았다. 부실한 망원경이었지만 지평선을 꽉 채우고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분명 구분이 되었다.

“그런데 군대라기보다는 인파에 가깝습니다만.”

슈라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아스탈은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죽으러 오는 건데. 아니, 도리어 많이 죽을수록 좋던가.”

“전멸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슈라가 살짝 말꼬리를 붙였지만 기분이 나아진 아스탈은 이번엔 뭐라 핀잔을 주지 않았다. 그는 가슴을 곧게 펴고 그 ‘인파들’을 향해 나아갔다. 슈라가 옆구리에 걸고 있던 나팔을 길게 불어 [대신관의 행차]를 크게 알렸다.

“여기 계셨군요.”

인파를 이끌고 오던 바에자가 나팔소리에 말을 재촉해 다가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모여들었지만 짙은 어둠 덕분에 아스탈의 눈에는 그 중 일부만 보였다.

“기다려도 안 오셔서 일단 출발한 참입니다.”

바에자와 지휘부가 얼굴에 쓴 마스크를 벗고 일단 아는 척을 해 보였다.

“그나저나, 뮤는 어딨습니까?”

바에자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지만 아스탈은 못 들은 척 자기 할 말만 꺼냈다.

“모두 몇 명이지?”

“호드르 시에 모여 있던 3만 중에 1만 7천 정도가 우리의 제안에 호응했습니다. 어린아이나 체력이 심하게 처지는 자들은 빼고 아직 몸 상태가 쓸 만하고 사고체계도 제대로 완성된 성인 3천 정도만 데려왔습니다. 나머지는 시내에 남겨두었고요.”

아스탈은 큰 곡괭이를 짊어지고 바에자의 뒤에 서 있는 청년들을 쳐다보며 눈가에 살짝 힘을 주었다. 말이 청년이지 잔주름이 자글자글 진 얼굴에 바싹 여윈 손이 이미 그들의 인생에서 [황금기]가 도둑맞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뭘 그리 놀란 얼굴이십니까. 옛날 사람들처럼 수명개조가 해제된 것뿐입니다.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니까요.”

“수명개조 없던 시절에도 단 몇 년만에 이 꼴이 되도록 늙어버리지는 않았다던데.”

“물론 속도가 ‘아주 조금’ 빨라졌지만요. 이것도 있고.”

바에자가 검은 하늘을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키득거렸다.

“이대로 시간 끌어봤자 며칠 못 가 황천행이죠. 새 몸을 받을 수 있다면 지 가족들이라도 잡을 겁니다.”

“죽을 걸 알면서 호응 안 한 놈들은 또 뭐요?”

“골수 황실 추종자들이거나, 결단을 못 내린 것뿐이겠죠. 어쨌든 우린 완성된 성인의 사고와 기억만 있으면 되니 싫다면 별 수 있습니까. 놔두면 죽어 없어질 텐데.”

“이 많은 놈들 기억을 그새 다 카피한 건 아니지요?”

“카피한 놈들을 우선 투입해야죠. 군 경험이 있던 자들을 우선 카피해서 투입할 참입니다.”

“그런데 사카가 안 보이는군?”

아스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코런덤 여단장의 행방을 물었다. 워낙 재미없고 말도 없는 사내라 바로 곁에 두는 일은 드물었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말재주 좋은 슈라나 야투 박사보다도― 굳게 신뢰하는 부하였다. 아스탈은 입 발린 말과 충성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에자가 산 남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행성에 주둔하던 이그나토 가 제후군 중에서 2백 정도가 호드르 시에 진주하려 했다더군요. 자기네 제후와 연락이 끊겨서 자의적으로 출동한 모양입니다.”

“허, 제후군께서? 허허, 첫 진압군 환영식이라도 해 줘야 하나.”

아스탈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어찌하라 했소? 사카가 헤네티 1백을 데리고 있지 않았던가?”

“비싼 헤네티까지 투입할 필요 있습니까? 어차피 건강한 새 몸을 받으려고 몸을 내던질 농민 놈들이 한둘이 아닌데요. 거기도 군 경험이 있는 자들을 먼저 카피해 투입해 죽게 하라고 했습니다. 지금쯤 끝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바에자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마 적들도 자기네가 죽이는 만큼 상대방에 더 강한 병력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모를 테지요. 사카 여단장에겐 계속 거기 주둔하면서 쓸데없는 놈들의 접근을 막고 있으라 했습니다.”

“잘 하셨소.”

아스탈이 시커먼 하늘을 올려보며 웬일로 바에자에게 칭찬의 말을 던졌다.

“그런데 이그나토 가 후계자 그자는 죽었을까요?”

걱정스레 끼어든 건 뒤에서 듣고 있던 쿠베였다.

“글쎄, 프락치 놈 쪽지대로라면 칼에 찔려 위중하긴 한데, 제대로 치료를 받았을 턱이 없으니 지금껏 살았겠나?”

바에자는 프락치가 남겨놓고 갔다는 구겨진 쪽지들을 번갈아 들쳐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젠 둘째 놈이 형과 어머니를 대신해 이그나토 가 실권을 잡았겠지? 진압군이 고작 2백만 온 것도 그 새끼 작품일 거야.”

바에자가 앞니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어머니가 ‘너무 오래’ 장수를 하고 자리를 안 비켜줘서 그 새끼 많이 배가 고팠던 것 같던걸요. 그 정도 헐값에 바로 넘어갈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바에자 옆에 있던 루토가 실실거리며 웃었다.

“새아버지로 들어온 네피도 맘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았고요. 아버지 다른 동생이라도 태어나지 않나 노심초사하는 눈치더군요.”

그새 굶주리고 비실거리는 농민 반란병들을 죽 둘러보고 온 아스탈이 본론으로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죽은 놈들에게 줄 ‘진짜 정예병’ 몸뚱이는 언제 도착하는 거요?”

“북부에서 곧 출발할 겁니다. 당장 준비된 건 5천 개 뿐입니다. 이번에 전사하는 놈들한테 순서대로 줄 겁니다. 근위대 유전자로 만든 몸이니 조건은 최고지요.”

바에자는 뒤에 선 ‘인파’들 들으라는 듯 뒷부분에 갑자기 힘을 주어 크게 말했다. 자신들을 위해 준비된 새 몸이 충분치 않다는 말에 그들의 여윈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지금까지는 작은 규모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일단 시작만 되면……순식간에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우리 병력에 황제도 크게 당황하겠죠.”

아스탈은 문제의 ‘지진관측소’가 있는 북쪽을 향해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손을 쳐들고 목청을 높였다.

“내 이곳 호드르 산을 새로운 성지로 선언한다!”

대신관의 외침에 헤네티들이 일제히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경의를 표했다. 그렇지만 정작 주변에 모여 선 수많은 인파들은 대체 무얼 말하는 것인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신도도 아니었고 자신들이 감히 황실과 제후를 향해 무기를 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의 땅이다.”

아스탈이 온통 검게 물든 세상을 향해 팔을 벌렸다. 비록 그가 한때 지배했던 화려한 수도 아케메니아와는 거리가 멀지만, 황제의 권력이 감히 얼씬할 수 없는 이 검은 공간이야말로 그의 첫 왕국으로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니 이 땅에서는 그놈들이 반역자다.”

아스탈이 북쪽을 가리키며 기계손에 힘을 꽉 주었다. 방금 전 놓쳐버린 세네피스를 다시 떠올린 그는 가슴이 타다 못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년을 다시 잡으면……그게 어디든 그 자리에서 품어서 내 것으로 만들고 말 테다.”

슈라가 북쪽을 가리키며 진격나팔을 불었다. 거의 3천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병력, 아니 아직은 잡다한 무리가 지진관측소가 있는 북쪽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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