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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841화 (836/1,132)

< -- 841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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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상태를 확인할 겸 관측소 안에 들어온 제네르는 텅 비어있는 마야의 매트리스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마야는?”

“냄새도 나고 갑갑하다고 해서 밖으로 옮겨드렸습니다.”

조금 전의 폭발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실내를 정리하고 있던 병사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몸도 성치 않은 게 왜 그 추운 데로…….”

투덜거리며 돌아서던 제네르는 관측소 반대편 구석에서 이곳 관측소의 기록지 더미들을 보고 있던 코리온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항상 그랬듯이, 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이 남자의 시선은 이번에도 상대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다.

“제가 부탁한 걸 보고 계셨군요. 다리는 좀 괜찮으십니까.”

상투적인 물음이었지만 어딘지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기는 충분했다. 이 천재님은 그새 손재주를 발휘했는지, 기계에 쓰던 기름과 부서진 부품 조각, 옷에서 풀어낸 면 솔기로 작은 램프를 만들어 옆에 켜 놓고 있었다.

“제대로 치료만 한다면 금세 나을 것 같다. 상황이 나쁠 뿐이지.”

“의사 면허도 있으셨죠? 다리만 성하시다면 임시 군의관 역할도 하셨을 텐데…….”

“종이무더기에 파묻힌 거 빼고는 별 밥값도 못 하고 있군.”

반쯤 심통이 섞인 대답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의 표정에 그리 악의가 보이지는 않았다. 가시덤불에 긁히면서 그의 곱던 얼굴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마치 전장의 부상병 같아 보였다.

“앉아있을 수는 있고 두 팔은 아직 성하니 급한 환자가 생기면 데려와 봐.”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진계는…….”

코리온에게 감사를 표하려던 제네르는 그가 보고 있던 긴 지진파 기록지 한구석에 놓인 압축연료 탱크를 발견했다. 조금 전 자말의 실수로 폭발하면서 방 반대편의 발사관 옆에 떨어져 있던 물건이었다.

탱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제네르에게 코리온이 먼저 물었다.

“자네도 같은 생각인가.”

“……마자리크 경이 부탁했습니까? 사고를 조사해 달라고?”

“연료탱크는 분명 밖으로 터졌지만 그 이전에 바깥에서 안쪽으로 파손된 흔적이 있었어. 갑옷을 입었다 해도 이 정도면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등만 다치고 멀쩡했다지?”

“다른 이유로 원래 손상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자네도 의심하고 있지 않은가? 겉으로 차마 인정 못 할 뿐이지.”

“방금 제 속을 읽으셨습니까.”

“그 정도는 일부러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네.”

코리온이 눈을 번득이며 제네르를 쳐다보았다.

“그 젊은이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도 느꼈고,”

“아뇨, 틀리셨습니다.”

제네르가 갑자기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내 눈은 틀린 일이 없네.”

코리온의 공세에 일순간 표정이 험악해진 제네르는 평소에 그토록 피하던 코리온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 아들입니다. 그 애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제가 더 잘 압니다.”

“어차피 피도 안 섞인…….”

“입조심하십시오!”

제네르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이 무례한 언사를 내뱉은 제네르 자신이 순간 더 당황했을 정도였다.

상대의 격한 반격에 잠시 입가를 씰룩거렸던 코리온이 다시 퉁명스레 반응했다.

“그 청년은 황상의 묵인 하에 불법으로 재생시킨 아기 아니었나? 사망한 사람을 원형 그대로 재생시키는 건 황실법으로 금지되었을 텐데.”

“…….”

“왜 그 태아 시체에 그렇게 집착했지? 세상 빛도 못 보고 뱃속에서 죽은 핏덩이에 대한 싸구려 동정심 때문이었나? 아니면 유학자로서의 도덕관념과 죄책감과의 갈등 때문이었나?”

코리온의 모진 공세에도 제네르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 친아비가 어떤 자였지? 부대와 상관을 배신하고, 일신의 출세를 위해 부인을 두 번이나 내버렸던 인간말종 아니었던가. 듣자하니 그 윗대도 마찬가지였다고 들었네만? 저 젊은이의 피에는 어쩌면 사이코패스나 정서장애의……”

“다시 말하지만, 자말은 제 가슴으로 키운 제 아들입니다.”

제네르가 목소리에 다시 힘을 주어 반복해 말했다. 그렇지만 코리온은 여전히 그를 가차 없이 몰아붙였다.

“자신의 생부가 전장에서 자네 손에 죽었다는 걸 저 젊은이도 아나?”

“학장님은 이해 못 하십니다.”

제네르가 코리온에게 보란 듯 눈을 바싹 들이댔다.

“죽어가던 그 남자의 눈을 봤습니다. 비록 개차반 같이 산 남자였지만, 나약해서일 뿐 사이코는 아니었습니다. 찌른 저도, 죽은 히르직스도, 칼을 마주한 그 순간만은 서로를 이해하는 같은 군인이었습니다. 자말도 곧 그걸 알게 될 겁니다. 학장님 같은 백면서생은 평생 이해 못하시겠지만요.”

제네르가 가슴에 손을 대고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의 그 별난 재주보다 군인으로서의 본능이, 어머니로서의 직감이 더 강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제네르가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그 애가 정말 배신자라면……그땐 제 손으로 목을 벱니다. 약속드리죠.”

제네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코리온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혀를 찼다.

“눈이 멀고 귀가 먹었군. 자네 이 정도밖에 못 되는 사람이었나.”

“제가 책임자니 알아서 합니다. 그러니 제가 아까 여쭤 본 지진계 이야기나 하시죠. 뭐 이상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제네르는 코리온의 손에 들린 지진계 기록지에 억지로 관심을 돌려버렸다.

“문외한들이 그런 걸 봐서 뭘 알겠습니까.”

할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코리온은 떨떠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이건 화산 정상 일대에 설치한 10여개의 센서들에서 발신된 정보를 취합해서 보여주는 거라네. 그런데……파형이 아주 이상해.”

“이상하다뇨?”

“아무리 봐도 인공지진 같네.”

“예?”

“이 검은 물질들이 덮기 전에 있었던 지진 말일세.”

“지진도 인공으로 만듭니까? 화산지대의 일상적인 지진이 아니고요?”

“뒷부분은 연쇄반응으로 생긴 ‘진짜 지진’이었지만 그 시작은 분명 인공적인 폭발일세.”

코리온이 희미한 램프불에 지도와 지진파를 가리켜 보였지만 제네르가 본다고 알 내용도 아니었다.

“가디언 네피가 도시에서 이번 지진을 느낄 때 뭔가 이상하다고 그랬다지? X가 다르긴 달라. 지진 직후에 검은 물질이 퍼진 걸 봐선 뭔가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큰 지진이 끝난 후에도 작은 지진이 오래 이어진 건 뭐죠? 제가 그걸 묻지 않았던가요?”

“진동은 맞지만 지진은 아닐세.”

“지진이 아니라고요? 누가 센서 위에서 춤파티라도 벌였답니까?”

제네르의 살짝 꼬인 대꾸에 코리온이 눈을 흘겼지만 대답은 진지했다.

“동북쪽의 두 개 센서에서 일정한 패턴의 저주파가 잡혔을 뿐이야. 파형을 봐서는 무언가 거대한 기계가 내는 것 같네. 뭔지는 몰라도 이전엔 없다가 지진과 동시에 진동이 시작되었지.”

코리온의 손끝이 호드르 화산 주변을 죽 훑었다.

“산의 동북쪽……그 정도 진동을 일으킬 시설이라…….”

코리온의 손끝은 동북쪽 산 중턱에 위치한 한 발전소 표시에 딱 멎었다. 바로 이 관측소가 있는 언덕 바로 뒤편이었지만 [위험지대-폐쇄]라고 표기가 되어 있었다.

“이봐! 이봐!”

무언가 중요한 내용임을 직감한 제네르는 급히 문 밖으로 나가 이곳 지리에 익숙한 기병을 불러들였다. 자말을 부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잠재워놓은 감정싸움을 또 일으킬 수는 없었다.

부름을 받고 바로 달려온 기병이 코리온이 가리킨 위치를 보고는 바로 대답했다.

“주변 일대에 에너지를 공급하던 민간 지열 발전소입니다. 십년쯤 전에 큰 지진으로 산사태가 나면서 폐쇄되었습니다. 일대 지형이 다 무너졌고 다리까지 끊겨서 지금은 완전히 폐허입니다.”

“거기 말고 다른 큰 시설은 없나? 큰 진동을 낼 만한 게?”

“아뇨, 없습니다. 유일한 게 이 지진관측소 겸 초소입니다. 이 초소도 당시엔 유사시 발전소를 경비하려고 만든 거였습니다. 그곳이 폐쇄되면서 지금은 보시다시피 지진관측소로만 쓰이고 있습니다.”

코리온의 눈이 잔뜩 가늘어졌다.

“민간자본이라 했지? 그 발전소를 누가 운영하나?”

“이름은 길어서 잘 몰라도……북부의 무슨 큰 광업회사였다고 들었습니다.”

“북부라.”

코리온이 검은 눈동자를 매섭게 빛내며 제네르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 속물들은 안 끼는 곳이 없는 것 같네만.”

코리온의 증오 섞인 한 마디에 북부 혼혈인 제네르는 발끈하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병부대신으로서, 제네르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난 제위전쟁 말미에 북부가 갑작스레 등을 돌려 황제를 거의 몰락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는 것도, 지금까지도 황제가 북부, 특히 그쪽의 재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는 것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복잡한 기계는 모조리 먹통인데 발전소에 있는 기계라고 잘 돌아갈 리가 있나요?”

“거꾸로 생각해 보게. 다 먹통이 되었는데 혼자 돌아가는 기계라면 그게 뭘 뜻할지.”

코리온은 마치 ‘네가 알아내 봐라.’라고 묻는 선생님마냥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런.”

그제야 속뜻을 간파한 제네르가 당혹스런 얼굴로 입을 가렸다.

“설마……그 발전소가 검은 재의 근원지일까요?”

코리온은 여전히 신중한 표정으로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디언 네피가 검은 구름이 산 북쪽에서부터 천천히 하늘을 덮었다고 말했던가. 점점 짙어진 걸 보니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퍼뜨리고 있겠지.”

제네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코리온의 말을 들었다.

“지열발전소면 지하에 고압의 수증기층이 있겠지? 그곳과 다시 연결만 시키면 굳이 복잡한 장비를 동원하지 않아도 단순한 기계로도 이 시커먼 오염 물질을 사방에 쉽게 뿌릴 수 있겠지. 나라도 거길 택했을 걸세.”

“지진은 그럼…….”

“글쎄, 내 짐작이네만 처음엔 그냥 천공만 하려던 것이 주변 지층까지 연쇄적으로 반응하면서 진짜 지진이 이어져서 생각 외로 규모가 커졌던 것 같군. 지금처럼 과할 정도로 사방이 새까맣게 뒤덮인 건 그들이 처음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그자들도 예상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굳은 얼굴로 돌아서는 제네르에게 코리온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찌할 참인가?”

“전 군인입니다.”

제네르가 허리에 찬 칼을 쥐어 보이며 분명하게 대답했다.

“상께서는 어둠 속에서 처량하게 구조만 기다리라고 절 상장군에 봉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제겐 100명이나 되는 병사가 있습니다.”

제네르는 ‘100명이나’라는 단어에 어색하리만큼 힘을 주어 말했다.

“잠깐.”

문 밖으로 나가려는 제네르를 코리온이 다시 불러 세웠다. 그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 보였지만 결국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병사들을 모두 모아주게.”

“왜요? 미리 제사라도 지내주시게요?”

제네르의 냉소적인 대꾸에 코리온이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잔말 말고. 모두 각자의 석궁을 갖고 이 앞에 모이게 해. 자네도 마찬가질세.”

“그 ‘황상의 장난감’ 석궁은 왜요?”

제네르의 퉁명스런 반응에 코리온도 이번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알았다고요.”

제네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섰다. 밖에서 ‘석궁 지참하고 전원 집합’을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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