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44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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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빨리 달려! 발바닥이 땅에 붙어있지 않게!”
제네르의 지시를 받은 근위기병들이 헐떡이며 뒤처지거나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는 보병들을 찾아내 사정없이 걷어차며 악다구를 썼다. 방금 전까지도 행궁으로 돌아가는 줄로 알았던 일행은 정신없이 달려가는 상장군을 무작정 따라가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여유가 없었다.
제네르를 따르는 기병들은 북쪽으로 난 가파른 비탈을 허겁지겁 말을 몰아 달려 올랐고, 후미의 보병들도 상장군의 엄포에 놀라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며 뒤를 쫓았다. 깜깜한 어둠 때문에 몇 발짝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제네르는 속도도 늦추지 않고 계속 말을 몰아붙였다.
“저 위는 능선입니다! 넘어가 봤자 길도 없고…….”
자말은 앞장서 말을 달리는 제네르를 따라 방금 받은 붉은 말에 필사적으로 속도를 붙였다.
“길은 없지만 시설은 있다!”
제네르는 지도 하나에 의지해 어둠 속을 마구 내달렸다. 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도상 지열발전소는 멀지 않은 인근에 있었다.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오른 제네르는 뒤를 따라오는 부하들을 향해 말을 휙 돌렸다. 그리고는 함께 말을 타고 온 세네피스에게 급히 물었다.
“발전소가 보이십니까!”
능숙하게 말을 몰아 뒤따라온 세네피스도 얼른 말을 세우고 한 곳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쪽, 멀지 않구나. 고작해야 3, 4스타디아 정도?”
“저기요?”
세네피스는 망원경을 눈에 대고 전방을 유심히 살폈다. 그 정도 거리에서 평상시라면 서로 상대를 알아보고 사격전을 준비할 때였지만, 적은 아직 이쪽을 포착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철조망이나 담도 거의 쓰러졌고 외양은 고치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이 여럿 보이는군. 노무자로 보이는 자들이 20명 정도가 뭔가 작업을 하는 중이고.”
“역시 예상이 맞았군요. 군인은 없습니까?”
“글쎄, 많아야 10명 정도 주변을 감시하는 것 같다. ……이런.”
고개를 치켜든 세네피스는 잠시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굴뚝에서 웬 파란 빛이 계속 나오고 있구나.”
“폐하께 파란 빛이고, 저희에겐 검은 암흑이지요. 인도해 주십시오!”
언덕을 뛰어오르느라 반쯤 탈진한 보병들이 능선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제네르는 이젠 반대편 아래의 발전소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보병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이번엔 언덕 아래로 죽어라 뛰어야 했다.
“돌격! 돌격! 시간을 지체하지 마라!”
가디언과 기병이 선봉이 된 100여명의 황실군이 진짜 목표인 지열발전소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타르를 무섭게 몰아붙여 상대가 채 대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돌진한 제네르는 지난 지진으로 거의 무너진 철조망을 훌쩍 뛰어넘어 발전소 안에 들이닥쳤다. 그의 옆에는 방금 선물받은 히르직스의 말에 탄 자말이 함께 달리고 있었다.
“엇!”
막 안으로 돌진한 제네르의 눈에 띈 건 부모님이 운영하던 종마장 작업복 차림의 민간인 인부들이었다. 기병들에 혼비백산해서 흩어지는 인부들을 본 순간, 혼란통에 잠시 잊고 있던 몇 시간 전의 참사가 그의 머릿속을 확 스쳤다. 바로 이들이 가족들을 몰살시킨 자들, 아니면 그 한패거리가 분명했다.
“네놈들이었구나!”
비로소 복수의 시간을 얻은 제네르는 바로 창을 빼들고는 도망치던 인부의 다리를 단칼에 베어놓으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살인자 폭도들이다! 멍청하게 놓치는 놈도 죽여 버릴 테다! 다 잡아!”
뒤이어 들어온 근위기병, 석궁을 든 분견대의 경기병, 가디언들은 놀란 토끼처럼 도망치는 작업자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칼날과 볼트가 이들이 저항하거나 도망치지 못하도록 팔과 다리, 발목을 절반 혹은 완전히 끊어내고는 그대로 바닥에 팽개쳐 놓았다.
아직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경비병들이 그제야 뒤늦게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이놈들 대체 뭐야? 어디서 온 거야!”
당황한 경기병들이 흩어진 채로 반격을 하려 들었지만 그들도 세네피스의 눈, 혹은 가디언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쪽에 경비병!”
세네피스의 날카로운 외침에 분견대 기병이 재빨리 ‘새 석궁’을 빼들고는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을 향해 한 발을 당겼다. 칼을 휘두르는 건 고사하고 석궁 한 발 쏘아보지 못한 경비병은 일격에 겨드랑이와 어깨가 떨어져나가며 즉사하고 말았다.
기병과 가디언들이 한바탕 휩쓸고 아수라장이 된 후에야 마자리크의 지휘로 제일 뒤에 도착한 보병들이 비로소 철조망을 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폐쇄된 발전소로만 알고 있던 곳에 정체불명의 인부들과 무장병력이 숨어있다는 데 놀란 이곳 영주 마자리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빌어먹을! 여기 이 버러지 새끼들은 또 뭐야!”
“뒤를 맡아 주십시오!”
보병들의 진입을 확인한 제네르는 기병과 가디언들을 재촉해 이곳의 발전소 단지를 계속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발전소를 점거해! 여기만 차지하면 우리가 이긴다! 빨리! 빨리!”
무주공산이 된 단지를 무섭게 가로질러 간 제네르와 자말 일행은 중앙에 위치한 고압 터빈 건물 앞에서 급히 말을 세웠다.
“뭐 이렇게 커?”
제네르가 위를 올려보았다. 발전소의 핵심 시설인 터빈 건물은 이런 작은 시골 개척지에 있기는 어색할 만큼의 큰 규모였다. 높이만 거의 5,6층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정방형 건물이었고, 모서리에 세워진 4개의 굴뚝은 어둠 때문에 꼭대기까지 보이지도 않았다.
“따라와!”
말에서 뛰어내린 제네르는 한 손에는 고삐를, 나머지 한 손에는 창 대신 석궁을 쥐었다. 사실 이전에 투창 실력이 형편없었던 것처럼, 석궁 사격도 별반 자신은 없지만 실내에서는 창이나 칼보다 이 무기가 더 나을 것 같았다.
“들어간다.”
그는 반쯤 열린 문 한 쪽을 온 힘껏 걷어차 열었다. 순간 뜨거운 열기, 그리고 빛이 일행의 얼굴을 때렸다.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시야를 괴롭혀 온 암흑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일행 모두가 낯을 살짝 찡그렸다. 두꺼운 금속 통에 든 인공조명이 군데군데 매달려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맙소사.”
말을 끌고 건물 안에 한 발을 들여놓은 제네르는 생각지도 않았던 낯선 광경에 움찔하며 석궁을 앞으로 겨누었다.
“내 몰라서 묻는 건데……지열발전소가 원래 이렇게 생긴 거였냐. 자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전에 왔을 때는 이런 게…….”
자말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거대한 내부는 사우나 못지않게 후끈거렸고, 거의 차량 크기만한 검은 저장고 수십 개가 줄을 맞춰 죽 늘어져 있었다.
그때, 저장고 사이로 작업복 색깔인 회색의 무언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도망간다!”
제네르가 얼른 말에 뛰어올라 그들의 뒤를 앞장서 쫓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5명 정도의 인부들이 놀라 도망치는 중이었다.
“저 새끼들 잡아!”
제네르가 악을 쓰며 줄줄이 늘어선 거대한 저장고들 사이로 말을 달렸다. 지금 그의 눈에는 도망치는 인부들은 모조리 가족들을 죽인 살인자로만 보였다. 격앙된 상태로 질주하던 제네르의 측면에서 무언가 번쩍 하는 형상이 나타났다. 분명 작업복 색은 아니었다.
“엇!”
깜짝 놀란 제네르가 얼른 말을 멈추고 옆을 향해 석궁을 번쩍 겨누었다. 순간적인 직감 그대로, 무기를 든 경비병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비병은 무언가 달랐다. 손목과 어깨에는 계급을 뜻하는 띠가 둘러져 있었고, 손에 든 무기도 익숙한 석궁이 아닌, 막대 모양의 낯선 물건이었다.
“투항하지 않으면…….”
양쪽이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제네르는 무작정 방아쇠를 먼저 당겼다.
“이런!”
흔들리는 말 위에서 가뜩이나 서툰 제네르의 사격은 엉뚱하게 저장고에 명중해 구멍을 크게 내놓고는 시커먼 내용물을 바닥에 흩어놓았다. 거의 동시에, 그의 몸도 무언가 강력한 것에 얻어맞은 것처럼 옆으로 휙 돌아갔다.
“아악!”
“어머니!”
다른 쪽에서 뒤따라오던 자말이 제네르의 비명에 고개를 휙 돌렸다. 제네르는 피투성이가 된 왼팔을 쥐고 자리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볼트가 꽂힌 것도, 투창에 맞은 것도 아니었지만 제네르의 팔을 감싸는 장갑이 무언가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일순간 눈이 뒤집어진 자말은 터빈 옆에 서 있던 경비병 장교에게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다. 상대도 팔뚝만한 막대 모양의 무기를 이번엔 자말을 향해 휙 돌렸다. 적의 무기에는 ―아마도 자동 조준장치로 보이는― 작은 모니터가 달려 있지만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딜!”
이번에도 자말의 석궁이 상대방의 신무기보다 조금 빨랐다. 음속을 능가하는 속도로 날아간 볼트 끝 탄두가 적의 귀 밑을 찢어내고 계속 날아가 바로 뒤에 있던 파이프 밸브를 꽝 소리를 내며 부숴놓았다.
“으, 으아아아아악! 으악!”
부서진 밸브에서 뿜어 나오는 초고온의 수증기와 열수(熱水)에 가슴 위가 순식간에 익어버린 남자가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뒹굴었다.
“이크!”
무서운 열기에 놀란 자말도 급히 말을 세워야 했다. 지상에서의 끓는 물보다 몇 배는 뜨거운 수증기와 화산수의 악취가 터빈 주변에 확 번졌다. 아무리 갑옷을 입었어도 지금 같아서는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저놈 무기! 무기!”
제네르가 피투성이가 된 팔을 쥔 채 자말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아, 알겠습니다!”
제네르의 뜻을 깨달은 자말이 일단 대답은 했지만 막막했다. 숨이 끊어져가는 남자의 손에는 여전히 낯선 신무기가 들려 있지만 바닥에 고인 열수에 합성수지로 된 부분이 조금씩 녹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묘안이 떠오른 자말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서는 바닥에서 뒹굴던 머리만한 빈 깡통을 내려놓고 발로 온 힘껏 내찼다. 군사학교 동기들이나 부대 장병들과 종종 공놀이할 때나 쓰던 재주였지만 지금은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좀 맞아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깡통은 죽은 적의 손에 들린 채 조금씩 녹아가던 무기를 한쪽으로 튕겨내고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됐습니다! 제가 꺼냈습니다!”
자말이 재빨리 달려가서는 긴 막대를 내밀어 바닥에 고인 열수 밖으로 무기를 끄집어냈다. 군데군데 녹아 흐늘거리는데다가 쓰기는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지만 아주 형태까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망토를 벗어 뜨거운 무기를 일단 챙겨들고 제네르에게 허둥지둥 돌아갔다.
“괜찮아요? 팔 괜찮냐고요!”
자말은 근위병에 기대어 신음하고 있는 제네르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의 손을 꼭 붙든 자말은 아랫사람이 아닌, 그의 품에서 자란 아들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
제네르가 아픔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자말은 갑옷이 박살나 있는 그의 왼팔을 조심스레 들쳐보았다. 팔꿈치 조금 아래로 살점이 찢겨 속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제네르는 자말의 뺨을 쓰다듬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마라. 그냥 스친 것 뿐이야.”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자말의 맑고 까만 눈동자에서 배신과 비열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학장이 말한 적의 무기가 이거였나.’
제네르는 자말이 내민 망토자락을 풀고 안에 든 무기를 펼쳐보았다. 열수와 수증기에 녹아 크게 훼손되었지만 대강의 모양은 남아있었다. 어른 팔뚝만한 길이에 손잡이와 방아쇠, 사각의 탄창까지는 코리온이 만든 석궁과 비슷했지만 길이가 좀 더 길고 무게도 좀 더 묵직했다. 그리고 위쪽에는 조준용으로 보이는 작은 회전식 모니터가 달려 있었다. 물론 지금은 작동하지 않지만.
“잘됐다. 황상께서 정말 기뻐하실 거다. 네가 정말 큰 공을 세웠다.”
“아니 전 공을 세우려던 게 아니고…….”
자말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제네르는 그런 그를 갑자기 품에 꼭 안았다.
“아니, 네 공이다. 네가 용감하게 돌진해서 잡았잖니.”
“그, 그건 그저…….”
양모의 느닷없는 포옹에 당황한 자말이 말을 더듬거렸다. 제네르가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난 언제든 네 편이란다.”
움찔한 자말이 제네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가늘게 뜬 채 어딘가를 쳐다보는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는 어떤 의심도, 미움도 없는 듯 보였다.
“저한테도 어머니밖에 없잖아요.”
자말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제네르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잠시 껴안고 있던 둘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여러 사람들의 인기척에 고개를 휙 돌렸다. 바깥의 상황이 그새 정리가 되었는지, 보병대를 이끌던 마자리크가 사람 머리 몇 개를 손에 움켜쥐고 개선장군처럼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마야 같은 부상자들도 하나 둘 따라 들어왔다.
마야는 언니 제네르의 손에 들려 있는 ‘적의 무기’와 그를 품에 꼭 안고 있는 약혼자 자말을 번갈아 쳐다보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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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화산지대 지하의 열수와 수증기는 섭씨 300~500도 이상입니다. 지상에서는 이미 증발해 사라졌을 온도지만 지하에서는 높은 압력 때문에 이 온도에서도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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