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45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
.
.
마자리크는 들고 온 머리들을 자말의 앞에 보란 듯 휙 던져놓았다.
“방금 이 건물에서 도망쳐 나오길래 잡았네. 밖은 대충 정리했고.”
마자리크가 던진 머리들은 제네르가 쫓다가 놓친 이곳 작업자들의 것이었다.
“그래, 배신자를 역이용하는 건 좋은 계획이었네. 누군지는 몰라도 우리 행선지를 행궁이라 알렸을 테니 지금쯤 놈들은 투덜대면서 행궁으로 돌아가고 있겠지. 잘 했네.”
평소 후덕하고 정 많은 제후의 이미지인 그였지만 조금 전, 장남의 죽음을 본 이후로 피에 굶주린 악귀마냥 두 손은 물론이고 눈빛 속까지 온통 핏빛이었다.
“그런데……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 했다지만……내가 속는 입장이 되니 썩 유쾌하지만은 않군.”
마자리크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제네르와 자말을 흘겨보았다.
“그나저나, 여기가 검은 재의 본거지?”
마자리크가 부릅뜬 눈동자를 양옆으로 굴렸다. 방금 제네르가 쏜 오발에 부서진 탱크에서는 여전히 검은 가루가 조금씩 쏟아지고 있었다.
“재를 더 안 내보내면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공기가 깨끗해져서 외부에 지원요청이 가능할까.”
“글쎄요. ……학장님은 혹시 아십니까.”
제네르가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코리온에게 물었다. 그렇지만 저 천재님도 지금 당장은 해답이 없는지 이 복잡한 파이프들만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고압의 수증기를 이용해 대기에 내보낸 것이라면……한 가지밖에는 없군.”
“예?”
“최소한 인공강우를 내릴 만큼의 수증기는 대기에 있으리라는 것 말일세.”
“그건 누가 밖에서 응결핵을 뿌리던지 번개를 만들어 주던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거 말고 당장 없애는 비법이 있냐는 말입니다.”
마자리크가 짜증을 내며 코리온을 몰아붙였지만 이번만은 이 천재님도 별 방법이 없는 듯 보였다.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들은 누군가 터벅거리며 들어오는 소리에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애들처럼 징징대지 말게. 이제 어찌할 텐가.”
마지막에 들어온 건 아스탈에게 쫓기느라 탈진한 상태에서 힘들게 군인들을 따라온 세네피스였다. 그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무장들을 한 번씩 노려보며 경고의 의미를 분명히 보냈다. 네피가 그의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옹주는요?”
“어린 손녀에게 이런 꼴을 다 보여 뭣 하게.”
황태후의 힐책에 마자리크와 네피 부부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바깥의 사무실에 들어가 꼼짝 말고 있으라 했네.”
“잘 하셨습니다.”
제네르는 자말이 감아 준 붕대를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랫사람들에게 모두 물러나 있으라며 눈짓을 보냈다.
“학장님, 여기만 차지하고 나면 그 다음 계획이 있다고 하셨죠? 이제 말씀하시죠.”
‘다음 계획’이라는 말에 일행의 눈이 동시에 확 커지며 코리온을 향했다. 코리온이 갑자기 황태후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우리 일행의 뒤를 덮쳤던 자를 기억하시겠죠?”
아스탈과의 끔찍한 기억을 순간 되새긴 세네피스가 갑자기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픈가? 그자가 내게 몹쓸 짓은 못 했다 하지 않았던가.”
세네피스가 발끈했지만 코리온은 인정사정없이 자기 할 말만 이었다.
“그자는 폐하를 쫓아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뭐라고?”
“잠깐, 학장님이 적에게 흘린 내용은 분명 [본대는 행궁으로, 황태후와 학장님, 부상자들은 발전소로 피신] 이 아니었습니까? 놈들은 우리가 행궁으로 간 줄로 알아야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것 아닙니까?”
마자리크가 뭐라 따져드는 것을 막으며 코리온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뭣 때문에 일행 일부는 이곳으로 올 거라는 내용을 쓸데없이 덧붙였겠나? 장담컨대 조금 전 나와 황태후 일행을 덮쳤던 적 수괴는 분명 황태후 폐하를 쫓아 이곳에 나타날 걸세.”
코리온이 턱을 꼿꼿이 치켜들며 세네피스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속이려 해도 그자는 황태후께서는 여기 있는 걸 어차피 알 겁니다. 그자가 ‘교감’ 운운하지 않던가요?”
‘교감’이라는 한 마디에 끔찍한 순간을 떠올린 세네피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네가 그걸…….”
“제가 그때 언덕 아래 있던 걸 잊으셨습니까? 지금도 그자의 머릿속엔 온통 황태후 폐하에 관한 생각뿐일 겁니다.”
“유학에 의학하고 병기공학도 모자라서 이젠 점치는 법까지 터득하셨나요.”
옆에서 듣고만 있던 제네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받아쳤다. 그런 그에게 코리온은 훨씬 무섭게 직격탄을 날렸다.
“자네 양자의 목을 걸고 나와 내기하겠는가.”
코리온의 폭탄발언에 일순간 창백해진 제네르도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일행 모두의 입을 단박에 막아놓은 코리온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세네피스를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황태후께서 한 번만 더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복수할 기회를 드리지요.”
“폐하?”
셔틀에 앉아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창밖만 내다보던 카렐은 루스탐이 어깨에 손을 댄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번쩍 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옆에는 서류를 든 내관 루스탐이 서 있고, 셔틀 구석에서는 북부의 광산에서 한바탕 일을 치른 우베와 자이납이 코까지 드르렁거리고 골며 잠들어 있었다.
“음? ……왜?”
“감히 옥체에 손을 댄 것을 용서하소서. 몇 번을 여쭈어도 내내 대답이 없으셔서.”
루스탐이 얼른 손을 떼며 머리를 조아렸다. 제국의 이번 기근이 누군가 악의로 뿌린 해충 때문이라는 것까지 알아냈으니 축배를 나누어도 부족할 상황이었지만 황태후와 두 자녀들까지 포함한 황실 일행이 남부에서 돌연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이 결국 좋던 분위기를 이렇게 뒤엎어 버렸다.
그리고 황제는 황실군의 남부 파견군 3천과 보안국장 사에나를 그리로 보낸 후 몇 시간째 줄곧 말이 없었다.
“내가?”
카렐이 여전히 멍한 눈으로 시계부터 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도 ‘투아렉 사장님’으로 부르라며 넉살을 부리던 황제였지만 지금은 ‘폐하’라 부르는 사소한 실수 따위를 지적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 카렐이 크게 기지개를 하며 물었다.
“지금 어디냐.”
“말씀하신 대로, 마사게타이 사의 광산에서 해충과 실험실을 통째로 싣고 떠난 화물 셔틀을 뒤쫓고 있는 중입니다. 방금 수베르의 워프게이트로 빠져나왔습니다.”
“수베르? 이번엔 서부로군.”
카렐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종석 쪽으로 터벅터벅 향했다. 베네루스가 조종하는 셔틀은 지금 웬 행성의 대기권 안으로 막 접어드는 중이었다.
“그래, 놈들의 셔틀이 어디로 갔나?”
“추적 결과에 따르면 수베르 2번 행성 저위도의 사막지대입니다.”
“사막? 거기도 마사게타이 사의 시설이 있나?”
“아뇨, 그곳엔 그 회사와 관계된 건 없습니다.”
“없다?”
카렐이 비로소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럼 그 많은 실험 기자재와 병충해 벌레가 든 병을 대체 어디로 가져갔다는 거냐.”
“세호 가 영지에 있는 한 농장입니다.”
“농장? 거기에 또 병충해를 뿌린다고?”
“아닙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거긴 일반 농장이 아니고 비영리 자선재단이 소유한 실험농장입니다. 서류에는 종자를 생산하고 가축을 개량하는 연구소로 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건…….”
“말 끌지 말고 한 번에 다 쏟아내라고.”
신경이 곤두선 황제가 갑자기 짜증을 내자 루스탐이 기겁을 하며 얼른 입에 발동을 걸었다.
“그 농장 소유주가 영 수상합니다. 이번에 기근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들에 신품종 감자와 옥수수 종자를 무상으로 지원한 [아수르 재단] 입니다. 화물 셔틀이 그곳에 착륙했다고 해서 일단 그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이상입니다.”
“식량을 무상 지원한 재단? 거기에 병충해를 만들어낸 시설들이 갔다고?”
카렐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루스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황제의 머릿속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정보가 일순간 처리되고 있음을 직감한 루스탐은 서류를 든 채 잠시 그에게서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리던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종자를 어디어디서 심었는지 당장 파악해라.”
카렐은 다시 조종석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막의 누렇고 밋밋한 지평선 가까이로 거대한 푸른빛 사각 카펫을 깐 것 같은 어색한 풍광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농장의 중앙에는 흰색의 큰 사각 건물이 또다시 이질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저기냐?”
“그런 것 같습니다.”
조종석의 베네루스가 스캐너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몇 시간 전, 마사게타이 사의 광산에서 보았던 화물 셔틀들이 농장 중앙의 건물 앞에 죽 늘어서 있었다.
“이 위를 선회하면 괜히 의심을 받을 테니 촬영만 하면서 그냥 스쳐가겠습니다.”
“잠깐, 저기 웬 수송선이냐.”
카렐은 방금 도착한 셔틀들 한쪽에 함께 세워져 있는 대형 수송선을 가리켰다. 베네루스가 방금 지나갈 때 포착한 영상을 얼른 보여주자 루스탐이 화면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실험실 기자재를 또 다른 곳으로 가져가려고 옮겨 싣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니, 방금 착륙한 화물셔틀은 아직 문이 닫혀 있다. 저 수송선에만 뭔가 싣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무슨 상자 같은데?”
“엇, 그 수송선이 이륙합니다. 북부에서 온 셔틀들은 안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조종사 베네루스가 후방 스캐너를 확인하며 재빨리 보고를 올렸다.
“벌써?”
“옛, 따라갑니다.”
베네루스가 급격히 셔틀 방향을 돌리자 뒤쪽 객실에 곯아떨어져 있던 자이납과 우베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바로 두 사람분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바빠진 카렐이 루스탐에게서 넘겨받은 서류들을 정신없이 뒤적거리며 말했다.
“수송선은 출발하면서 워프루트 사용승인을 냈을 거다. 루스탐 넌 당장 보안국에 행선지 파악을 명령하고 저곳에서 출발한 다른 수송선이 없는지도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저 농장은 어쩌죠?”
카렐이 멀리 지평선에 있는 농장을 노려보며 기이하게 웃었다.
“몸 달은 베흔에게 이제야 오락거리가 생겼구나.”
루스탐이 움찔했다.
“시라즈 여단 말씀이십니까? 그네들을 벌써 노출시키면…….”
“왜 베흔 같은 자에게 여길 맡기려 하는지 이해 못 했나?”
카렐은 손끝으로 황량한 사막을 가리키며 태연히 말했다.
“이런 데선 한 놈도 남기지 않으면 애당초 없었던 곳이 되지.”
“그, 그렇습니다.”
루스탐은 황제의 눈가에 흐르는 무서운 살기에 순간 주눅이 확 들고 말았다.
“에너지장벽 준비시키고 내 명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일러라.”
창백해진 루스탐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존명하옵니다.”
그때, 셔틀의 할룩스가 깜박거리며 누군가의 연락을 알렸다.
“쉐너 국장입니다. 방금 남부 페스트에 도착했습니다.”
검은 제복의 보안국 헌병들을 대동한 사에나가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자리에 무릎을 꿇은 모습이 나타났다.
“파견군 202연대 3천은 2시간 후 도착 예정입니다. 소인은 관례에 따라 영주 이그나토 가 측에 진입 승인을 요청하고 궤도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2시간?”
카렐이 낯을 살짝 찡그렸다. 파견군은 워낙 대규모의 정규군 병력이다보니 명령을 받자마자 초고속 셔틀편에 바로 튀어나간 사에나와 보안국 일행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당연했지만 당장 맘이 급한 황제의 속에 찰 리가 없었다.
결국 황제의 불만은 전혀 엉뚱한 데로 튀고 말았다.
“이그나토 가 놈들은 뭔데 황제의 병력이 들어가겠다는데 감히 늑장을 부리는 거냐.”
“가문 내부 정보원에 따르면 호드르 시 일대에서 민간인 폭동이 벌어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황실군보다는 제후군이 나서는 편이 정치적 부담이 적습니다.”
“황실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으니 문제 아닌가! 황태후와 황자들까지…….”
잠시 목소리를 쩌렁 높였던 카렐이 바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니다, 내 괜히 흥분했군. 네 말이 맞다. 쉐너 부장.”
카렐이 표정을 돌변하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일가의 행방불명으로 격분해 있는 황제 앞에서 이 정도의 합리적인 직언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잠시 창백해졌던 사에나도 그제야 안심을 하며 재차 머리를 조아렸다.
“옛 근위대장이 떠오르옵니다, 폐하.”
“짐에 대한 찬사로 알겠네.”
카렐이 타들어가는 속을 능글맞은 웃음으로 감추었다.
“파견군이 도착할 때까지 일단 대기하게. 그때까지 이그나토 가 쪽에서 대답이 없으면 내 자네에게 대리인 새끼 처리하는 특권을 상으로 주지.”
그때, 황제 뒤에 있던 루스탐이 화들짝 놀라며 할룩스를 켰다.
“폐하. 지금 이 말씀을 드려야 할지…….”
“감히 황제의 대화에 끼어든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지, 루스탐?”
카렐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긴장한 루스탐이 어깨를 움츠리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방금 떠난 수송선의 행선지가……남부 페스트라고 합니다.”
“페스트?”
카렐의 무지개빛 눈동자가 루스탐을 향해 휙 돌았다. 당혹스러움에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루스탐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재차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그 연구소에서 먼저 출발한 수송선이 또 있습니다. 그건 1시간 후면 페스트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카렐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스캐너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들이 온통 뒤섞여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와중에도 문제의 수송선은 워프게이트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워프게이트 들어가기 전에 저놈이라도 잡아야겠다.”
“예? 설마 몸소…….”
“닥치고 뒤에 두 놈 빨리 깨워라.”
카렐이 부조종석에 앉으며 [조종권 강제인수]를 확 눌러버렸다.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한 루스탐이 중심을 잃고 바닥에 뒹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일행이 탄 고속 셔틀이 무서운 속도로 뒤를 쫓기 시작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www.tasawwuf.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