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47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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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렸다.”
마자리크는 짧은 순간, 적이 달아나기 전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다. 그는 뒤에 있는 20여명의 경호대 장병들을 휙 돌아보았다. 그의 칼끝이 막 돌아서서 물러나려는 아스탈과 그 무리들을 향해 휙 돌았다. 그리고 20여명의 경호대가 즉시 석궁을 들었다.
“사격!”
네피가 손녀를 얼른 품에 끌어안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경호대의 일제 사격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아스탈과 슈라 일행을 향해 날카롭게 뿜어나갔다.
“이런!”
위험을 직감한 슈라가 아스탈의 앞을 반사적으로 막아섰다. 놀라움과 공포감에 눈이 확 커진 아스탈은 슈라의 건장한 몸이 마치 등 뒤에서 몽둥이질을 당하는 것처럼 몇 번이나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세네피스라는 환영에 온통 사로잡혀 있던 그의 정신이 비로소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슈라?”
“제게서……물러나십시오…….”
끝까지 대신관을 지켜낸 슈라의 상체가 말 옆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미, 미안하다…….”
창백해진 아스탈은 죽어가는 그의 목에서 띠를 확 낚아채 뒤로 휙 돌아섰다. 몇 발이나 되는 볼트에 무자비하게 찢겨나간 슈라의 등 뒤로 이미 내장이 쏟아지고 있었다.
“빨리요…….”
엉망이 된 슈라의 몸뚱이가 아직 앞을 막고 있는 동안, 아스탈이 황급히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가 멀어지기가 무섭게 이 충성스런 헤네티의 몸이 거센 불길을 내뿜으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함께 몸이 찢겨나간 여러 명의 헤네티들도 그 옆에서 무섭게 열을 내뿜으며 불타올랐다.
“슈라, 미안하다, 나 때문에…….”
아스탈이 슈라의 목에서 떼어낸 줄을 손아귀에 꽉 쥐고 말에 무작정 속도를 붙였다. 함께 왔던 열 명의 헤네티 보병들 중 옆에 남은 건 절반 뿐이었다.
“공격! 공격해! 저놈을 잡아!”
마자리크와 경호대 가디언들이 숨어있던 곳에서 뛰어나와 뒤를 쫓으려 했지만 죽은 헤네티들이 뿜는 거센 불길에 놀라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적을 묶으려던 좁은 길목이 이젠 추격하려는 경호대의 앞을 막고 있었다.
“사격! 가디언들은 뒤를 쫓아가!”
어둠 속으로 희미해지는 형상을 향해 경호대가 다시 사격을 가했지만 명중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암흑 속에서 불꽃이 솟는 것을 보아 누군가 맞기는 한 것 같았지만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대충 피해서라도 빨리 따라가! 빨리!”
불길에 막혀 우왕좌왕하는 장병들을 위해 힘센 가디언들이 슈라의 말 시체를 힘껏 밀어 불타는 헤네티들의 잔해를 옆으로 치워냈다. 어렵게 길을 냈지만 이미 아스탈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뭡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이곳까지 아스탈을 유인했던 제네르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모습을 나타냈다. 애마 아타르로 갈아탄 그의 뒤로는 세네피스도 당혹스런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배신자! 그 씹어 먹을 놈만 아니었어도!”
코앞에서 적 수괴를 놓친 마자리크가 땅바닥의 흙을 쥐어 내던지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의 짧은 설명, 아니 악다구를 들은 제네르는 즉시 말을 돌려 아스탈이 갔음직한 길을 뒤쫓기 시작했고 눈앞에서 표적을 놓치고 악에 받친 경호대 가디언들과 보병들도 그 뒤를 쫓았다.
“적이 보이십니까! 폐하!
제네르가 뒤따라오는 세네피스에게 물었다.
“언덕 위로 다시 돌아가고 있구나! 그런데 거리가 이미…….”
세네피스는 일행이 넘어온 남쪽 고개를 가리켰다. 저 똑똑한 대신관은 이미 발전소까지 넘어간 것을 눈치 채고 자신들의 본대가 있는 곳으로 달아나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세네피스가 무언가에 깜짝 놀라며 옆을 달리던 제네르의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피하게! 상장군!”
“예?”
제네르가 영문도 모른 채 말을 옆으로 휙 돌렸다. 그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그의 얼굴 옆을 휙 스쳤고, 뒤에서 함께 달려오던 경호대 장병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휙 날아가 쓰러졌다.
“반격이다! 피해! 피해!”
아스탈만을 노리고 흥분 속에서 뒤를 쫓던 경호대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까운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다. 운 좋게 살아 아스탈을 따라갔던 소수의 헤네티들이 주군의 뒤를 막아선 채 시간을 끌고 있었다. 양쪽 짧은 사격전이 오가는 사이, 건장한 준마에 탄 아스탈은 언덕 위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끝이다.”
숱한 절망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살아남은 제네르였지만, 이번만은 이 한 마디가 입가에 맴도는 것을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시간을 벌던 소수의 헤네티들을 재빠른 가디언들이 제압하려 나아갔지만 이미 아스탈을 따라잡을 가망은 없어보였다. 망원경으로 앞을 확인한 세네피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놈이……고개를 넘어가 버렸구나.”
“곧 돌아올 겁니다. 부하들을 데리고요.”
제네르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머리칼을 꽉 움켜쥐었다.
“면목 없습니다.”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제네르의 어두운 표정에 맘이 약해진 세네피스는 평소답지 않게 그의 어깨까지 어루만져 주었다. 무슨 이유엔지, 그토록 강인하던 제네르의 표정이 저승과 맞닥뜨리고 있는 것처럼 창백했다.
“괜찮아. 배신자 때문이 아니었나.”
세네피스가 주변을 재차 확인했지만 이번 일을 망쳐놓은 배신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네르가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마자리크 경이 뒤따라오는 대로 언덕 위에서 적이 오는지 살펴 주십시오. 전 먼저 발전소에 돌아가 퇴각 준비를 하겠습니다. 적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면 무조건 도망쳐 오십시오. 제 근위병들이 지켜드릴 겁니다.”
제네르는 서두른다 싶을 정도로 황급히 말을 돌려 발전소로 향했다. 세네피스는 그의 태도가 어딘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일단은 그가 원하는 대로 보내주기로 했다.
이번 일 모두를 계획한 코리온은 훈훈한 열기가 있는 고압 터빈 건물 한쪽에서 줄곧 바깥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친 다리 때문에 걸을 수가 없다보니, 그는 ‘검은 물질’ 이 든 거대한 박스에 기대앉아 계속 긴장된 시간만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자를 잡았을까.”
그는 몇 번째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아직까지 살아 버티고 있는 사교 잔여세력의 수장을 없애버릴 수 있다면 자신을 포함한 이곳의 황실 일행 모두가 몰살당한다 해도 전혀 억울할 것이 없다며 두려움을 달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이미 몇 번이나 위험천만한 생각의 경계를 오가는 중이었다.
“그래, 없어져야 해. 마구스의 핏줄이라니…….”
코리온은 항상 품고 다니는 단검을 뽑아 다시 날을 만지작거렸다. 이번만 세 번째였다.
“대신관을 없앴다면……그 쌍벽도 없어져야지. 당연하지.”
아스탈을 잡기 위해 나가 있는 군인들에게서 정말로 ‘대신관을 처치했다.’라는 소식만 전해진다면, 그 다음으로 ‘마땅히’ 없어져야 할 존재는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존재가 그와 아주 가깝다는, 아니 너무 가깝다는 점이었다.
“트라카 마구스……후계자.”
자신의 손목에 슬며시 칼날을 들이대 보았던 그는 날에 새겨져 있는 [카렐 대제]라는 문장에 멈칫하고 말았다. 아름답게 빛나는 날과 그곳에 아른거리는 황제의 환영(幻影)을 빤히 쳐다보던 그는 낮은 한숨과 함께 칼을 도로 집에 꽂고 말았다.
원래는 경호대 병사 한 명이 그의 곁을 항상 지키고 있었지만 혼자 남고 싶었던 그는 ‘작전에 한 명이라도 더 투입해라.’ 라며 본대에 억지로 등 떠밀어 보내버린 터였다. 자말의 발더 분견대도 그들 중 배신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마자리크의 옹고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깥의 작은 공터에 빠짐없이 모여 서로서로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엇.”
그는 줄줄이 세워진 큰 검은 상자들 사이로 잠깐 스친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칼을 품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지도들, 조금 전 적에게서 탈취한 신형 무기를 주변에 정돈해 놓았다.
그때, 누군가가 다시 박스 사이를 스쳐 걸어가는 모습이 짧게 스쳤다.
“상장군?”
언뜻 본 금발머리에 코리온이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예.”
가까스로 알아들을 정도의 아주 짧은 대답이었지만 어쨌든 제네르의 목소리였다.
“성공했나? 사교의 수괴를 잡았는가.”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상자들 사이로 뚜벅거리며 다가오는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줄지어 늘어선 거대한 박스 틈새로 금발 여자가 쓱 지나가는 모습이 잠깐잠깐 보일 뿐 정확히 어디로 움직이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코리온이 버럭 신경질을 냈다.
“죄송합니다.”
이번 대답은 어딘지 어색했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든 코리온은 다시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지만 역시 상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젠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 코리온이 양옆을 번갈아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제네르가 혼자 있는 그를 맘먹고 조롱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어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상장군!”
소리를 지르며 왼쪽을 휙 돌아보았던 코리온은 자신의 오른편으로 누군가 불쑥 나타난 것을 느꼈다.
“응?”
막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옅은 금발, 새파란 눈을 한 큰 키의 다부진 여자가 확 들어왔다. 놀랍도록 닮았지만, 제네르는 아니었다. 그는 손에 기병용 검과 노끈 뭉치를 쥐고 두 다리, 맨발로 굳건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옆구리에 칼을 찔린 사람이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런, 맙소사.’
눈앞의 광경이 무얼 뜻하는지 바로 깨달은 코리온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마야는 다리도 못 쓰는 이 서생을 순식간에 제압해 입을 막고 바닥에 내리눌렀다. 코리온이 나름대로 저항을 하려 했지만 최정예 동부 중장기병대 출신의 베테랑 탈라스 전사를 싸움으로 당해낼 수는 없었다.
“우, 웁.”
노끈 뭉치에 턱이 짓눌린 채 바닥에 널브러진 코리온은 팔을 꺾으려는 마야의 손을 힘으로 기를 쓰며 떨쳐냈다. 비록 싸움은 할 줄 몰라도 힘만은 시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상대의 힘에 당황한 마야는 손날로 코리온의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윽!”
충격을 받은 코리온의 고개가 뒤로 툭 떨어졌지만 눈은 여전히 마야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딘지 소름이 끼치는 그의 시선에 전율한 마야는 이를 악물고 같은 곳을 다시 내리쳤다. 부르르 떨리던 이 고운 미남자의 검고 매서운 눈동자에서 그제야 빛이 꺼지며 천천히 바닥으로 기울었다.
“휴.”
코리온을 일단 제압한 마야는 그의 손발과 입을 노끈으로 단단히 묶고는 발소리를 숨기려 잠시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은 이 남자와 ‘탈취한 신무기’를 어깨에 불끈 짊어지고 자리에서 힘껏 일어섰다. 장신의 남자 체중만도 상당했지만 맏언니 못지않게 군인으로, 전사로 다져진 그에게는 그리 부담스런 정도는 아니었다.
코리온을 짊어진 마야는 터빈 건물의 뒷문 쪽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분견대들은 반대편에 집결해 있고, 경호대는 달아나는 아스탈 일행에 붙들려 있으니 어차피 주변에 볼 눈도 없었다.
터빈 건물 밖에 나선 그는 주변을 재빨리 확인하고는 터빈 건물에 부속된 작은 창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기병들의 말 여러 필이 매여 있었다.
“아무도 못 봤군.”
말들의 숫자를 세 본 마야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분견대 기병 선임사관이 휘하 기병들에게서 넘겨받아 미리 감춰놓은 것이었다. 그가 전령으로 보낸 사관이 바에자가 이끄는 수천의 본대를 데리고 곧 돌아올 테니 말까지 잃은 기병들은 꼼짝없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말들을 모두 한 줄로 엮은 마야는 의식을 잃은 코리온을 실어 조심조심 끌고 나왔다. 창고 옆에는 몇 시간 전 제네르가 자말에게 선물로 주었던 히르직스의 붉은 준마도 세워져 있었다.
“워, 워.”
마야는 초조한 듯 발을 구르는 붉은 말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달래주었다.
“너도 여기 있어선 안 돼.”
불안해하던 말은 그의 손길과 속삭임에 감쪽같이 조용해졌다. 사나운 군마이었지만 마야 역시 언니처럼 말 다루는 일이라면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야 자말이 선봉에 못 서지. 우리 편이 거의 다 왔을 거야.”
마야는 거짓말처럼 순해진 말 등에 살며시 올랐다. 그리고는 기병들의 말을 모조리 끌고 발전소의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엔 몇 년 전 지진 때 담과 철조망이 무너졌던 곳이 있었다. 그곳은 조금 전 그가 사람들 눈을 피해 나갈 때도 꽤 유용했었다.
“자말을 사랑하긴 했던 거니?”
앞으로 나아가던 마야는 갑작스레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칼을 쥐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용하려고 접근했니?”
마야가 숨을 멎고 짙은 어둠 속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유일한 출구인 무너진 철조망 앞을 말을 탄 누군가가 딱 가로막고 서 있었다. 익숙한 실루엣과 금발머리, 파란 눈동자에서 상대가 누군지를 깨달았지만 그는 여전히 칼을 놓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로 서 있는 마야를 향해 상대방이 다시 입을 열었다.
“똑똑한 네가 탈라스의 말몰이꾼 휘파람을 불다니, 사교 수장을 살리려고 어지간히 급했었구나. 내가 동생의 휘파람 소리도 못 알아들을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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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파트의 제목을 [핌불윈터]로 삼은 이유입니다.
(눈치 빠른 분은 아셨을까요??? ^^;;)
핌불윈터의 의미는 815편에 나옵니다.
(보러 가시기 전에 코멘트나 추천은 잊지 마시고..... ^^;;)
그리고 몇몇 분들이 질문 주셔서 적습니다. ^^
3부 출판본 1,2권은 현재 원고 작업중에 있고요. 이번에도 부가 바뀌니 표지와 조판도 완전히 바뀝니다.
여름이 지나고 나면 3부 출판공지가 있게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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