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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848화 (843/1,132)

< -- 848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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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체가 왜 탄로났는지를 비로소 깨달은 마야가 입술을 더 굳게 깨물며 언니 제네르를 노려보았다. 제네르는 적에게서 빼앗은 망원경을 안장 옆에 꽂고는 동생에게 조금 더 다가왔다. 짙은 재가 시야를 막고 있지만, 이제 둘은 서로의 모습과 움직임, 표정까지도 똑똑히 분간할 수 있었다. 제네르는 혼자 온 것이 분명했다.

“유학을 공부했던 네가 어쩌다 그런 무리와 어울리게 된 거냐.”

“부탁이야, 보내 줘, 언니.”

마야가 최대한 처량한 목소리로 언니의 무서운 시선에 답했다.

“난 언니의 유일한 혈육이라고.”

제네르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자극하려는 막내 동생을 노려보며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입으로는 애원을 하면서도 마야의 손은 여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게 너 아니었나?”

“아냐! 난 아니라고!”

가족들을 죽였다는 말에 마야의 목소리가 갑자기 확 높아졌다.

“내가 연구소에 간 동안 그 바보 같은 양반들이 빌어먹을 구호식량으로 만든 빵을 몇 달이나 드셨어! 드시지 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리 되어버렸다고!!”

마야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몸은 늙기 시작했고 교단에서 새 몸을 못 얻으면 끝장인데, 바보같이 그걸 언니한테 다 털어놓겠다고 하시잖아!”

“지금 무슨……말이냐.”

제네르는 동생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억울함에 얼굴이 붉어진 마야는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그걸 해결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가족들을 살리려고 제일 좋은 몸을 약속받아 놨는데……엄마아빠가 갑자기 변심을 해서 기억 카피하는 걸 거부하지만 않았어도……아니, 언니가 온다고 집사 놈한테 발설만 안 했어도 폭도들도 오지 않았을 테고…….”

“시끄러.”

제네르가 이를 드러냈다. 대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교단과 한패가 된 동생이 가족들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연계가 된 건 분명했다. 동생을 노려보던 그는 동생이 끌고 가던 말에 실려 있는 코리온과 조금 전 자말이 어렵게 탈취했던 ‘적의 신무기’를 발견했다.

“제발, 언니도 알고 나면 현신께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는 않을 거야, 제발, 나도 처음에는 언니 같았다고. 조금만 포용력 있게 받아들여 주면…….”

“허, 네가 포용력을 언급해? 내 살아있을 면목조차 없으니 여기서 같이 죽자.”

“미쳤구나!”

“남의 손에 끌려가는 걸 보느니, 내 손으로 직접 해결하러 온 거다.”

마야가 말을 몰아 다가오는 언니를 피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곧 피로 젖은 붕대를 감고 있는 제네르의 왼팔에 딱 멎었다.

“빨리 비켜. 내가 더 거칠어지기 전에.”

설득을 포기한 마야가 허리춤의 칼자루를 움켜쥐며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눈을 부라렸다.

“보내주건 말건, 난 갈 테니.”

제네르는 칼을 쥔 동생의 팔뚝에서 힘줄이 확 곤두서는 것을 보았다.

“내 시체를 밟고 가라.”

제네르도 질세라 허리춤의 칼을 쥐었다. 장태자 시절의 황제가 직접 이름을 새겨 그에게 하사했던 목숨 같은 보검이었다.

“어차피 주군께 바칠 목숨이다.”

“전령이 이미 현신께 갔어. 그분을 따르는 수천 명이 곧 여길 휩쓸 거야. 아니, 이미 포위를 시작했을지도 몰라.”

“잘됐구나, 전사(戰死)하는 게 덜 창피스럽지.”

제네르가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칼을 뽑았다.

“자말도 그리 생각할까?”

마야의 역습에 칼을 뽑던 제네르의 표정이 잠시 굳었지만 곧 허탈한 얼굴로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군인이라면 당연히.”

제네르가 칼끈으로 동생을 똑바로 겨누었다.

“내 아들은 내가 더 잘 안다.”

마야도 말 옆에 달린 방패로 가슴 앞을 가리며 당장이라도 싸움을 벌일 듯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왔다.

“학장님! 학장님 여기 계십니까!”

터빈 건물 쪽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에 마야가 멈칫거렸다.

“학장님!……어엇.”

없어진 코리온을 찾아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자말이 눈앞의 광경에 경악을 하며 자리에 멈췄다. 그의 앞에는 말에 오른 두 자매가 서로 칼을 겨눈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래도 못 간다고 고집을 피울 거야? 자말?”

마야가 그에게 힐끔 시선을 돌렸다.

“마야, 제발, 난 이걸 원한 게 아니었다고.”

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자말이 애원을 했지만 이미 터진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네르는 동생과 양자 둘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반역도를 체포해라, 하크로딘 비장.”

창백해진 자말은 발을 쉽사리 떼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자말이 막 움직이려 하자 마야가 이를 드러내며 그에게 칼끝을 휙 돌렸다.

“누구 편인지 말해. 그 전엔 다가오지 마.”

“마야, 제발.”

끔찍한 결정권을 쥔 자말의 눈가에 어느새 글썽글썽 눈물이 맺혔다.

“네가 감히…….”

발끈한 제네르가 막 언성을 높이려다가 말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약혼녀와 명령 사이에서 바들바들 떨며 흐느끼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본 제네르는 차마 그를 더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제네르의 손끝이 떨렸다. 먼 옛날, 명령을 내리는 최고제후와 임신한 부인 사이에서 끔찍한 갈등을 겪었을 히르직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존재조차 모르는 친아버지의 끔찍한 경험을 자말까지도 공유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동생과 양자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본 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러서 있어, 자말. 배신자는 내 손으로 죽일 테니 끼어들지 마라.”

자말을 저지한 제네르가 칼끝을 천천히 마야에게 돌렸다. 그는 조금 전 부상을 입어 쓰지 못하는 한쪽 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동생을 상대할 수 없는 몸이었다.

“학장을 구하고 내 시체나 거둬라. 명령이다.”

제네르는 자꾸 눈을 적시는 눈물을 억지로 감추며 큰 함성과 함께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는 호전적으로 칼을 겨누고 있는 동생 마야에게 무섭게 돌진했다. 마야도 그의 선제공격에 놀라며 반사적으로 맞서 돌진했다.

“싸우고 싶지 않다니까!”

마야가 돌격해 오는 제네르의 칼을 방패로 막아내며 칼을 일단은 몸 뒤로 감추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훨씬 악착같은 제네르는 수동적으로 반격하는 이 동생이 방패를 휘두르느라 턱이 드러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칼날이 방패에 맞아 미끄러졌지만 그는 대신 팔꿈치로 동생의 턱을 힘껏 후려쳤다.

“웁!”

이 정도로까지 공격적으로 나올 줄 미처 예상 못했던 마야는 기습적인 일격에 고개가 뒤로 홱 꺾이며 순간 휘청거렸다. 그의 입과 코에서 튄 핏방울이 제네르의 얼굴에까지 튀었다.

“날 죽여야 갈 수 있을 거다!”

동생의 피가 묻은 제네르의 눈가에는 누가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널 먼저 죽이고 내가 죽으마!”

제네르가 무디게 휘두른 칼이 당황한 마야의 얼굴 앞을 휙 스치며 뺨과 코를 베어놓았다. 선제공격을 당하고 피까지 흘린 마야는 언니가 정말로 자신을 ‘봐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러려는 게 아니었지만…….”

마야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피를 퉤 뱉어냈다. 코와 입 속에 피가 들어차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처음 시작할 때의 침착함도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뒤로 감추었던 오른손의 칼을 번쩍 들어 제네르를 힘껏 내리쳤다.

“어쩔 수가 없다고!”

둘의 칼이 맞부딪치며 노란 불꽃이 일었다. 찢어지는 마찰음이 울리며 힘에서 밀린 제네르가 휘청거렸다. 뒤이어 마야가 올려친 방패에 가슴과 얼굴을 차례대로 얻어맞고는 뒤로 휙 밀려나고 말았다. 상대를 힘으로 일단 제압한 마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을 날카롭게 뻗었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도였다기보다는 그저 기계적으로 나온 공격이었다.

“앗.”

예리한 칼날이 제네르의 어깨를 깊숙이 베어냈지만 그는 부상에도 아랑곳없이 힘껏 몸을 날려 마야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으악!”

말 위에서 뒤엉킨 채 잠시 몸싸움을 벌이던 둘은 중심을 잃고 함께 낙마해 바닥에 뒹굴었다.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 순간, 제네르는 동생이 허리춤에 꽂고 있던 ‘적의 신무기’를 힘껏 낚아채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뭐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황한 마야가 무기를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쓰러진 제네르가 발목을 덥석 움켜쥔 덕분에 앞으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동생을 넘어뜨린 제네르는 그의 몸을 짓밟고 헐레벌떡 몇 발짝을 뛰어가 보자기로 잘 싸 놓은 적의 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크!”

몸을 너무 낮춰서인지, 제네르의 발이 엉키며 앞으로 벌렁 쓰러졌지만 어쨌든 보자기로 싼 적의 무기는 그의 품 안에 있었다.

“이런!”

한 발 늦게 일어난 마야는 아차 싶었다. 그에겐 제네르와 싸우는 것보다 저 무기를 되찾는 것이 더 시급했다. 대신관이 최측근의 믿을만한 자들에게만 지급한 저 중요한 무기의 비밀이 큰 싸움은 시작도 하기 전에 노출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아스탈을 바로 따라가지 않고 이곳까지 되돌아온 것도 저것 때문이었다.

“못 가져가!”

마야가 달려드는 것을 본 제네르는 바닥에서 몸을 휙 돌리며 등에 멘 석궁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움직임을 눈치 챈 마야도 말에 달려 있던 석궁을 뽑아 재빨리 겨누었다.

“내놓지 못해!”

서로를 겨눈 두 사람 사이에 갑작스레 침묵이 흘렀다. 길어야 열 발짝 남짓 될 거리였지만 조금 전까지도 동생을 죽이겠다고 이를 드러냈던 제네르도, 피를 흘리고 격앙된 마야도 바로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내 사격이 형편없어도……지금 너 정도는 맞춰.”

제네르가 억지로 고개를 쳐들며 큰소리를 쳤지만 다친 어깨로 힘겹게 든 석궁이 이미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못 쏴?”

비로소 모든 상황을 읽어낸 마야가 앞니를 살짝 드러내며 기이하게 웃었다. 제네르가 왜 처음에만 그리 공격적이었는지, 자말에게 왜 제자리를 지키라고 했는지.

“어차피 날 죽일 생각이 없었잖아?”

“아니, 널 죽일 거야.”

왼팔에 보자기를 끌어안은 제네르는 석궁을 든 오른팔을 바들바들 떨며 동생을 계속 노려보았다.

“허, 못 죽여. 그저 그놈의 명분하고 충성 때문에 입으로만 떠들 뿐이지. 아니, 어쩌면 내가 죽을까봐 안달이 난 자말이 이 싸움을 말리지 못하게 하려는 건지도 모르지?”

“…….”

“말해 봐, 애당초 내 손에 죽고 싶었던 거 아냐? 자말이 죽은 친부처럼 자기 여자를 저승으로 몰아넣을까봐 혼자 짐을 지겠다, 이거 아냐?”

“뭐? 뭐라고 했어?”

제네르의 미간에 바싹 주름이 잡혔다. 수십 년간 철저히 감춰 왔던 자말의 친아버지를 동생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피가 흘러 어깨에서 힘이 빠지면서 그의 손에 들린 석궁이 점점 밑으로 처지고 있었다.

“아주 훌륭한 시나리오였어. 언니는 죽어 충신이 되고, 난 살아 도망가고, 자말은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도 없이 적의 무기를 빼앗은 공로자로 남을 테니.”

마야는 자신을 겨눈 제네르의 석궁 끝이 조금씩 처지는 것을 끈기 있게 노려보며 방아쇠를 쥔 자신의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하지만 난 그걸 가져가야겠는걸.”

“날 죽이고 가져가라니까!”

그때, 팔에서 힘이 완전히 풀린 제네르가 툭 소리와 함께 석궁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던 마야가 방아쇠를 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꼼짝 마.”

바로 옆에서 들려온 방아쇠 거는 소리에 마야가 멈칫거렸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본 그곳엔 자말이 까만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석궁으로 그를 겨누고 있었다.

“어머니를 해치면……나도 더 이상은 널 못 지켜.”

“날 쏘기라도 하게?”

마야가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자말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마야의 공격적인 반응에 맘이 약해진 자말이 보자기를 끌어안고 신음하고 있는 제네르를 힐끔 돌아보았다. 마야가 씩씩대며 언성을 높였다.

“정신 차려, 자말. 네 친아버지를 죽인 게 언니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그래놓고 널 자식이랍시고 키운 거야. 훔쳐 온 애완동물처럼 널…….”

“시끄러, 이미 알아.”

자말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거침없는 대답에 마야는 물론이고 제네르까지도 낯빛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자들이 내게도 접근하려 했었으니까! 네게도 그자들이 말해 줬겠지?”

제네르를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자말이 다시금 눈을 크게 뜨며 마야를 노려보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잡소리 집어 쳐! 쏘고 싶지 않으니 제발 이대로 그냥 가 줘! 빨리.”

“넌 어차피 못 쏴.”

마야가 다시 제네르를 노려보며 석궁을 휙 겨누었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자말의 애타는 절규와 함께 한 발의 볼트가 마야의 다리를 향해 바람을 갈랐다. 개량된 석궁에서 날아간 위력적인 볼트는 다리근육과 대퇴동맥까지 무자비하게 찢어내고 관통해 날아갔다.

“우윽.”

단 일격으로 다리에 치명상을 입은 마야는 옆으로 확 밀려나 바닥에 꼬꾸라졌다. 그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말? 네가 쐈어? 네가?”

“미안해, 미안해, 마야.”

생각보다 훨씬 치명적인 결과에 파랗게 질려버린 자말이 석궁을 떨어뜨리며 그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오지 마!”

눈이 벌겋게 충혈된 마야는 쓰러진 자신에게 달려오려는 자말에게 대뜸 석궁을 겨누었다. 그는 다쳐 쓰러진 맹수처럼 언니인 제네르와 약혼자 자말에게 번갈아 석궁을 돌리며 무섭게 이를 드러냈다. 계속 흐르는 붉은 피에 애가 바싹 탄 자말이 이성을 잃은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제발, 빨리 그 피 안 막으면…….”

“여기서 죽느냐 형장에서 죽느냐가 다를 뿐이야.”

피범벅이 된 허벅지를 다시금 쳐다보던 마야는 의식이 흐려지는지 고개를 몇 번 저었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상처를 쳐다보던 그는 발을 동동 구르는 자말에게 갑자기 공허한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자말, ……넌 정말 좋은 남자인데.”

순간, 마야가 자신의 목을 향해 석궁 끝을 휙 돌렸다.

“내가 짐을 줄 순 없잖아.”

“마야!”

자말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미처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약혼녀의 목 절반이 찢겨나가고 맥없이 고개가 떨어지는 것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아야 했다.

다리가 풀린 자말은 숨이 끊긴 약혼녀의 시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실낱같은 생명의 기운이라도 찾으려 피투성이가 된 약혼자의 얼굴과 몸 곳곳을 필사적으로 더듬었지만 결국은 식어가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아니었는데.”

제네르가 어처구니없는 광경 앞에서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살아남은 그의 마지막 혈육마저 또다시 시체가 되어 검은 대지 위에 누워 있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는데.”

제네르가 더러워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금의 그에겐 더 이상 쏟을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어, 어머니…….”

마야의 시체에 기대 흐느끼던 자말이 천천히 시선을 제네르에게로 돌렸다. 제네르는 말없이 팔을 뻗어 그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그도, 자말도, 마야가 왜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알고 있었다. 배신을 저지르고 칼을 휘둘렀지만, 제네르는 마지막까지 자말을 지켜주려 한 동생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다만 누구보다 똑똑하고 제국에 충성스럽던 마야가 어쩌다가 사교 무리에 휘말렸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왜, 왜 내게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제네르는 야속한 하늘을 올려보며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그때, 그의 콧잔등을 무언가가 짧게 때렸다. 뒤이어 또 다른 무언가가 그의 뺨을 타고 주르르 흘렀지만 눈물은 분명 아니었다. 비로소 눈을 뜬 제네르는 한쪽 손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마치 먹물 같은 검은 물방울이 그의 손등에 묻은 동생의 피를 씻어내고 바닥으로 똑 떨어져 내렸다.

제네르는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더 치켜들었다. 터빈 건물 건너편에서 ‘사방에 적이 몰려옵니다.’라는 병사들의 다급한 외침이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당장은 중요치 않았다. 온통 시커멓기만 하던 하늘 너머에서 희미한 엔진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번쩍 하고 빛을 뿜으며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인공강우…….”

바깥의 누군가가 이곳에 비를 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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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이라 그런지, 주 후반에 자꾸 일이 생기네요.

주 후반에 어딜 가게 될 것 같아 이번에도 좀 많이 한 번에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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