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50화 (845/1,132)

< -- 850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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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이라는 말에 당황한 선임 장교가 계속 물었다.

“무슨 근거로 배신을 말씀하시는지 정도는……”

사에나에게 따지려던 그 장교는 어딘지 의심이 잔뜩 어린 상대의 무서운 시선에 그 뒷부분 할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상관이 정말 배신자였다면 아랫사람들도 줄줄이 의심을 받을 테고,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는 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장교의 입을 틀어막아놓은 사에나가 자기 하던 말을 이었다.

“저 수송선에 인공강우 유도장치가 있나?”

“아마 인공 번개 유도 장비가 달려있을 겁니다.”

“됐다, 그거면.”

“하지만 기상조작은 윗선의 허락이 있어야…… 위계상…….”

선임 장교는 ‘네가 뭔데 우리한테 명령이냐.’라는 말을 차마 겉으로는 하지 못 하고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비를 적당히 뿌리는 즉시.”

사에나가 이번에도 상대가 말하려는 내용 따위는 듣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수송선으로 향했다.

“너희 제후를 구하는 작전을 개시한다.”

이 한 마디에 장교들의 분위기가 싹 변했다. 이그나토 가 장교단에 ‘제후를 구하는 것’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 없었다.

“출동! 출동이다!”

정신이 퍼뜩 든 장교단이 일제히 각자 맡은 부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작전 개시를 별의별 타령으로 미루려 했던 대대장에 대한 의심이 순식간에 확신으로 굳어진 순간이었다.

사에나를 따라온 헌병 장교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는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증거도 없이 즉결심판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그걸 저네들이 알면 어쩝니까?”

사에나가 피 묻은 칼을 휴지로 쓱쓱 닦으며 코웃음을 쳤다.

“마자리크 경이 이 덕에 산다면 어차피 입 다물 테고, 이미 죽었어도 제후에게서 연락받은 거라고 떠넘기면 되지 않냐.”

“예에?”

놀란 장교는 상관의 잔혹한 계산에 치를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영원히 배신자로 낙인찍힐―진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무장의 시체가 종군 노예들 손에 쓰레기처럼 치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막 출발하려는 수송선에 뛰어오른 사에나에게 방금 전의 선임 무장이 빠른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10분 이내로 작업 개시 가능하다고 합니다.”

“잘했다.”

사에나는 칼질 한번으로 약탈해버린 지휘관석에 태연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떨결에 자리를 잃은 남부 보병대 선임 장교가 슬쩍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전혀 일어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국장님께서도 빨리 무장을 갖추십시오.”

사에나를 따라온 휘하 헌병들이 그에게 긴 전투용 장검과 갑옷을 올렸지만 그는 칼만 받아들고 갑옷은 확 밀어내 버렸다.

“내 가죽과 피가 갑옷이다.”

그는 길고 검은 코트자락을 양 옆으로 넘기고는 날씬하고 긴 다리를 휙 꼬고 앉았다. 그리고는 호드르 산 정상이 있는 곳―지금은 검은 재의 장막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의 가는 손목에는 물의 신 에아의 현신을 뜻하는 백금 팔찌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당장 비를 뿌려라. 저 위가 어떤 꼴인지 한 번 보자꾸나.”

“어머니……아니 상장군께선 직접 지휘가 어려우십니다. 뒤에서 지켜보실 테니 일선 지휘에서 큰 역할을 해 주셨으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창백해진 얼굴의 자말이 아스탈을 쫓다가 포기하고 막 돌아온 마자리크에게 ‘특수 망원경’을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마자리크는 병사들의 등에 업힌 채 터빈 건물 안으로 옮겨지고 있는 제네르를 보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는 큰 포대에 돌돌 말아놓은 마야의 시체가 따르고 있었다.

“미안하다. 자말 하크로딘 비장.”

마자리크는 벗어 놓았던 더러운 투구를 다시 눌러쓰며 무안한 듯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약혼녀를 잃은 자말, 온 가족을 모조리 잃은 제네르 앞에서 그도 뭐라 말할 염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섣불리 판단했던 것 같다.”

마자리크의 솔직한 사과에 자말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세네피스의 말에 따르자면, 적어도 수천은 되는 사람들이 이미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제 어쩌죠.”

말에 뛰어오른 자말이 마야의 시체에서 애써 시선을 떼며 뒤따라 투구를 눌러썼다. 그의 손에는 친아버지 히르직스가 쓰던 긴 장창이 쥐여 있었다. 마자리크는 온통 부상병동이 되어버린 건물 안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네피는 쓰러졌고, 상장군도 저렇게 되었고, 학장은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그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포에 질린 표정의 발더 분견대 장병들과 경호대 100여명이 이곳에서 제일 큰 터빈 건물을 등지고 서서 압도적인 숫자의 폭도들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폭도들이 있을만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 그들을 볼 수 있는 건 세네피스와 제네르의 망원경을 넘겨받은 마자리크 뿐이었다.

자말은 들이붓듯 쏟아지는 검은 비를 올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학장님 말씀대로 비가 굉장히 많이 옵니다. 이번에 올라간 수증기 때문인가 봅니다.”

자말은 눈도 보호할 겸 스코프를 눈에 끼고 다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미 저녁 시각이라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덮어놓은 것처럼 까맣기만 하던 하늘에 희미한 빛무리가 보이는 것이 조금 전보다는 재가 옅어진 게 분명했다.

“이 비가 도움이 될까요.”

“글쎄,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마자리크가 말고삐를 움켜쥐며 사뭇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지금까진 황태후께서만 또렷이 볼 수 있었지만 이게 걷어지면 누구나 잘 볼 수 있으니.”

비에 흠뻑 젖은 마자리크는 눈에 낀 스코프를 시험삼아 켜 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반응을 보인 건 그의 할룩스였다.

“엇.”

지레 놀란 마자리크는 얼른 할룩스를 켰지만 곧 꺼지고 말았다. 그때, 조금 전 비가 시작될 때보다는 훨씬 또렷해진 수송선 혹은 프리깃의 엔진음이 공중을 울렸다.

“수송선이다!”

소리를 들은 장병들이 바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육중하고 시커먼 그림자가 남쪽 하늘에 희미하게 보일 뿐 아군인지 적군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적이야! 또 적일지도 몰라!”

“닥쳐라.”

겁에 질린 한두 명의 분견대 장병들이 헛소리를 하는 것을 노련한 고참병과 사관들이 사정없이 후려쳐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비를 타고 재가 점점 옅어지면서 이곳을 향해 몰려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폭도들의 모습도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눈에 잘 보인다는 게 꼭 좋지도 않군.”

창을 쥐고 튀어나가려던 마자리크는 옆에 있는 세네피스가 할룩스를 드는 모습에 움찔하며 멈췄다. 아직 통신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소리만은 똑똑히 들렸다.

“보안국장 쉐너 장군입니다. 들리십니까?”

순간, 세네피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통신이 끊겼던 건 고작 몇 시간이었지만 마치 장님의 눈이 갑자기 열린 것 같았다. 말문이 막힌 그는 할룩스를 든 채 아랫사람들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장병들은 공포감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잡음이 심하지만 어느 정도 들린다.”

순간 반대편에서 와아 하는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입니다. 근거리 통신은 되는군요. 지금 비를 내려 재를 제거하는 중이니 점점 나아질 겁니다. 800명 정도의 이그나토 가 제후군을 데리고 가는 중입니다. 지진관측소로 가면 됩니까?”

마자리크는 세네피스의 할룩스를 받아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 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지열발전소로 와! 중앙에 있는 큰 터빈 건물 앞을 우리가 사수하고 있을 테니까 너희는 그 조금 북쪽 작은 평지에 내려서 합류해 빨리!”

눈앞으로 가까워지는 수많은 폭도들을 발견한 마자리크의 대답이 점점 횡설수설해졌다. 할 말을 끝낸 그는 할룩스를 세네피스의 품에 휙 돌려주고는 자말과 함께 창을 쥐고 앞으로 돌격해 나아갔다.

“수신 완료.”

사에나의 대답이 돌아왔을 때, 마자리크와 자말은 이미 말을 타고 보병대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지원군이 온다!”

마자리크가 칼을 번쩍 들고 100여명밖에 남지 않는 부하들에게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당장 무너질 듯 휘청거리던 장병들이 기대도 않았던 낭보에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거의 동시에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수백, 수천의 민간인들이 농기구,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발전소 철조망을 무너뜨리며 넘어오기 시작했다.

“사격 개시!”

마자리크가 소리를 지르며 칼을 앞으로 향하자 지금껏 적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던 석궁들이 일제히 위력적인 볼트를 날렸다. 숫자에 잠시 압도당했던 마자리크도 당초 걱정보다 훨씬 부실한 폭도들의 모습에 내심 안도하며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훈련도 못 받은 민간인 폭도들이고 우리 손엔 신무기가 있다! 앞의 몇 명만 죽이면 놈들은 전의를 잃고 도망칠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쏴!”

마자리크는 잠시 겁을 먹었던 장병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말대로, 개량된 볼트는 제대로 된 갑옷조차 입지 못한 채로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던 개척민들의 몸을 순식간에 뚫고 그 뒤를 따라오던 후미의 자들까지 피떡을 만들었다.

“잘했다! 여기서 다들 죽어!”

폭도들 뒤편에서 웬 여자의 외침이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언뜻 말도 안 되게 들리는 이 소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도들은 계속 몰려들었고, 이쪽 장병들은 ‘곧 지원군이 온다.’는 희망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쉴 새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 준비도 없이 싸움에 뛰어든 폭도들 수십, 수백이 무차별 사격에 우르르 무너지면서 이미 반쯤 쓰러진 철조망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무수한 시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기괴한 전시물이 되고 말았다.

“저놈들 왜 안 도망가지! 그냥 민간인들이잖아!”

마자리크가 눈앞의 광경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폭도들은 온몸이 찢긴 채 철조망에 걸려 있는 동료들의 시체를 밟아 넘으며 계속 몰려들었다. 압도적인 사격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몰려드는 모습에 도리어 이쪽이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했다.

“1열 밀집! 밀집!”

적이 수의 우세를 타고 계속 가까워오자 전열을 이루고 있던 경호대들이 일제히 방패로 벽을 쌓았다. 그리고 그 뒤에 선 발더 분견대는 계속 사격을 퍼부었다.

“제기랄! 이 미치광이들 다 어디서 쏟아져 나온 거야! 이게 정말 우리 주민들이야?”

마자리크도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석궁을 들고 병사들과 함께 사격을 퍼부었지만 여전히 끝도 없었다. 적의 예상 못한 반응에 숫자에 당황한 마자리크가 눈을 씻고 다시 앞을 노려보았다. 폭도들은 꾀죄죄한 차림새에 겉늙고 여위어 보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의욕은 고사하고 공포감에 제정신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 몰려들었다.

“돌격! 돌격하다가 죽어!”

사방을 새카맣게 뒤덮은 폭도들의 전열 뒤에서 다시 웬 여자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그제야 그 목소리를 의식한 마자리크는 마치 죽으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퍼뜩 받았다.

‘뭔가 이상한데.’

그때, 몽둥이를 들고 쇄도한 폭도 한 명이 처음으로 1열의 방패에 힘껏 몸을 들이받았다. 물론 그자는 제대로 밀어붙여 보지도 못한 채 병사의 칼에 꿰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뒤이어 두 명, 세 명, 이쪽의 방어선에 몸을 날리는 자들의 숫자가 계속 불어났고, 이젠 폭도들의 무수한 시체가 1열의 방패들 앞에 산을 쌓기 시작했다.

“설마?”

달려오는 적을 향해 석궁을 쏘려던 마자리크는 30여년 전, 제위 전쟁이 끝나던 날의 전투를 떠올리며 순간 움찔했다.

“혹시 이놈들도 어디선가 되살아나는 건가?”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코앞에 달려드는 폭도를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쏜 볼트에 폭도의 두개골이 박살이 나며 뒤로 붕 날아가 떨어졌다. 물론 그 뒤로 또 다른 폭도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지원군이다!”

그때, 자말이 북쪽의 공터를 가리키며 외쳤다. 사에나와 8백의 남부보병들이 탄 수송선이 마자리크가 조금 전 말한 그곳에 막 착륙하고 있었다. 마자리크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배신자로 몰아붙였던 이 젊은 무장에게 수송선 쪽을 가리켰다.

“몇 되지는 않지만 자네가 기병들을 이끌게. 지원군이 올 진입로를 뚫게나.”

“알겠습니다.

자말이 든든한 붉은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목소리에 어색하게 힘을 주었다.

“이제야 진짜 게임이다!”

자말이 4명의 제네르 휘하 근위기병, 5명밖에 남지 않은 분견대 기병들을 이끌고 폭도들을 향해 돌격했다. 히르직스의 말과 창으로 무장한 자말, 수는 적지만 상장군을 지키던 최정예 중장기병들은 훈련은 고사하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 벌떼 같은 폭도 무리의 중간을 칼날처럼 갈라내고 말굽으로 짓밟으며 수많은 시체들을 바닥에 카펫처럼 깔아놓았다.

비록 이쪽의 숫자는 턱없이 적지만, 최소한 지금까지의 전세는 우세하다 못해 거의 학살극에 가까운 모양새로 연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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