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53화 (848/1,132)

< -- 853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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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빈 건물 옥상에서 서성대며 전황을 지켜보던 세네피스와 마리안은 남부보병대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너지는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비록 무장은 아니었지만 저 상태로 버티기 어렵다는 것 정도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퇴각’을 외치는 마자리크와 무장들의 찢어지는 고함, 겁먹은 병사들의 외침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결국……여길 내줘야 하는 건가.”

패전을 직감한 그는 황실 행궁과 종마장이 있는 아름다운 호드르 산의 실루엣을 돌아보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밤 나름대로의 저항, 작은 싸움과 승리, 이런저런 사건도 많았지만, 어쨌든 역사는 결과만을 기록하니 오늘은 ‘황실이 폭도 세력에 패하고 요충지인 호드르 산을 내준’ 최악의 날로 기록될 터였다. 게다가 황제의 둘째아들 주페까지도 적의 손에 넘어가버린 후였다.

“가만히 있어라, 옹주.”

그의 옆에서는 아직 키가 작은 마리안이 난간을 붙들고 억지로 발돋움을 해 가며 전쟁터를 내다보려 기를 쓰고 있었다.

“보지 않는 게 낫겠다.”

세네피스는 마리안을 난간에서 떼어서는 손을 꼭 쥐고 급히 수송선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버려진 발전소의 옥상은 이런저런 공구, 거의 쓰레기에 가까운 잡동사니들이 사방에 뒹굴고 있어 발도 디디기 어려웠다. 수송선은 그 중간께에 어렵게 자리를 잡고 뜬 채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람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빨리 돌아가자, 목숨 걸고 싸운 군인들이 돌아올 때 방해가 되면 안 된다.”

“잠깐만요.”

급히 걸음을 옮기던 마리안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서서는 옥상 한쪽의 난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기서 무슨 소리 나요.”

“소리라니?”

놀란 세네피스가 옹주를 얼른 등 뒤로 돌리고 난간을 노려보았다. 검은 재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시야는 아직 제한적이지만 그의 그레이오팔에 보이는 세상은 도리어 평소보다 더 선명했다.

“아무도 없단다, 옹주.”

“아뇨, 저 난간 너머에서 소리가 난다고요.”

세네피스는 지금 이 꼬마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다. 난간 너머는 5층 정도 높이의 허공 뿐이었다. 세네피스는 주변에 확인하러 보낼 군인이 없는지 얼른 둘러보았지만 전장에 한 명의 군인이 아쉽다보니 지금 옥상 위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기 중인 수송선 안에 실린 사람들도 모두 제 발로는 설 수도 없는 중상자들 뿐이었다.

세네피스는 불안해하는 마리안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손짓을 하고는 난간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자세히 본 그는 난간에 웬 갈고리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뭐지?”

별 생각 없이 그 위로 고개를 내밀었던 세네피스는 무언가 흰 것이 휙 올라오는 모습에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악!”

웬 우악스런 손에 목을 채인 세네피스는 하마터면 그대로 난간을 넘어 밑으로 추락할 뻔했다.

“안돼요!”

그때, 무언가가 그의 허리를 덥석 붙들었다. 세네피스를 몰래 뒤쫓아온 마리안의 작은 손이 그의 허리띠를 죽어라 붙들고 있었고, 밑에서 올라온 정체불명의 손이 여전히 그의 목을 붙들고 있었다.

“이놈!”

세네피스는 품에서 단검―몇 시간 전, 제네르에게서 받았던―을 뽑아 머리를 붙든 손목을 사정없이 베어버렸다.

“으읍!”

굵은 목소리의 남자 비명과 함께 손이 그제야 확 풀리며 그를 놓아주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난간 밑을 제대로 내려다본 세네피스는 방금 전 자신이 보았던 갈고리에 걸린 긴 케이블과 그곳에 매달린 2명의 괴한들을 보았다. 세네피스에게 손목 절반을 베인 괴한은 고통 때문인지 밑으로 약간 미끄러진 채 버둥대며 다시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세네피스는 난간에 걸린 갈고리를 힘으로 빼내려 했지만 이미 두 사람분 체중이 실려 있다보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새 손목을 베인 자가 다시 올라오려 손을 내밀고 있었다. 다급해진 세네피스는 갈고리 대신 그곳에 연결된 가는 케이블을 단검으로 온 체중을 다 실어 내리찍었다. 하지만 이 단단한 강화 케이블은 실처럼 가늘기는 해도 칼질 한 번으로는 끊어지지 않았다. 그때, 다시 밑에서 올라온 손이 그의 옷자락을 확 움켜쥐었다.

“젠장!”

세네피스는 옷깃을 잡힌 채 휘청거리면서도 날이 우그러진 칼날로 케이블을 재차 내리찍었다. 뚝 끊긴 케이블이 퉁 소리를 내며 끊긴 순간, 끊긴 줄에 매달려 있던 2명의 괴한들이 허공으로 붕 내동댕이쳐졌다. 세네피스도 하마터면 함께 끌려갈 뻔했지만 마리안이 그때까지 허리를 붙든 채 버티고 있었다. 양쪽 사이에서 휘청대던 세네피스는 이가 나간 칼로 자신의 옷자락을 확 찢어냈다.

“으아앗!”

세네피스를 붙들고 잡아당기던 자의 공포어린 검은 눈동자가 세네피스의 그레이오팔과 딱 마주쳤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멀어진 직후, 무언가 바닥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소름끼치는 단말마의 비명이 함께 들려왔다.

“저기, 저기요!”

마리안이 다시 조금 떨어진 다른 난간을 가리켰다. 그곳엔 문제의 갈고리가 2개나 걸려 있었다.

“이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세네피스는 녹이 잔뜩 슨 큰 작업도끼를 주워들고 그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이 옥상을 적들이 차지한다면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다가 퇴각하는 장병들이 도망칠 수송선을 탈 곳조차 잃을 터였다.

“이것들이 다 뭐냐고!”

세네피스는 죽을 힘을 다해 도끼를 휘둘러 갈고리를 힘껏 후려쳤다. 단검과는 위력부터 다른 일격에 갈고리에서 노란 불꽃이 팍 치솟아 올랐다.

“빨리 좀!”

그는 다시 도끼를 쳐들고 갈고리를 두 번째 내리찍었다. 다행히 이번엔 갈고리의 연결 부분이 박살이 나며 팽팽하게 당겨 있던 줄이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이번에도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지만 그런 소리에 겁을 먹고 지체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아직 줄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으악! 저기 봐요!”

마리안이 그곳을 가리키며 바닥에 있는 주먹만한 큰 너트를 덥석 쥐었다. 웬만한 꼬마라면 들기도 어려운 무게였지만 지금의 마리안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곳에서는 마지막 줄을 타고 올라온 중무장한 괴한이 막 난간을 넘어 올라오려 팔을 뻗고 있는 중이었다.

“어떡해요!”

비명을 지르면서도, 마리안의 팔은 이미 너트를 힘껏 집어던지고 있었다. 어둠 속을 가르며 날아간 녹슬고 육중한 철물이 막 난간 위로 고개를 든 괴한의 한쪽 눈을 사정없이 때렸다.

“우악!”

급소를 얻어맞은 괴한의 몸이 뒤로 확 기울었다. 이마와 한쪽 눈이 터지며 중심을 잃었던 그자가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엔 큰 도끼를 든 세네피스가 더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감히 어딜 올라오냐!”

녹슨 도끼가 그자의 정수리를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싸움이라고는 거의 할 줄 모르는 상대에게 어처구니없이 치명상을 입은 괴한은 머리에 도끼가 박힌 채 그대로 로프와 난간을 놓치며 바닥으로 뚝 떨어져버렸다.

“못 올라가! 못 올라가! 위에서 지키고 있어!”

함께 시도하던 동료들이 모조리 추락사하거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자 이 줄에 매달려 있던 다른 괴한이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허겁지겁 도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끼를 잃고 당황했던 세네피스는 그들이 포기하는 모습에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주변을 다시 둘러본 그는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언제 다시 모였는지, 또다시 수천의 폭도들이 마치 좀비처럼 발전소 주변에서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맙소사.”

세네피스는 마리안을 급히 품에 안았다. 이 작은 지열발전소 주변은 이미 완전히 포위당해 있었다.

“저기, 저기 또 무슨 소리가 나요!”

마리안이 옥상 모서리를 다시 가리켰다. 하지만 이번엔 세네피스에게 무기도, 심지어 녹슨 도끼조차 없었다.

터빈실에 들어온 목적을 일단 이룬 사에나는 줄줄이 놓인 ‘검은 재’ 상자들 사이를 가로질러 막 건물을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지나가는 적병들이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런.”

당황한 사에나가 멈칫거렸다. 마자리크의 남부보병대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무너져버린 모양이었다. 측면의 다른 문도 보았지만 그곳도 역시 적의 모습이 보였다. 퇴로가 꼼짝없이 막혀버린 사에나가 한 손에 석궁을 빼들고 주변을 재차 확인했다. 거의 5층 높이의 실내운동장 같은 거대한 공간이지만 천장까지 꽉 채운 복잡한 배관과 이런저런 기계들, 검은 재가 가득한 상자들로 꽉 차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때, 더 나쁜 상황이 뒤이어 벌어졌다.

“이 안에 보안국 놈이다!”

문 앞을 지나던 적군 가디언이 검은 옷을 입고 안에서 서성이는 사에나를 발견하고는 크게 소리를 질러 동료들에게 알렸다. 다급해진 사에나가 다른 쪽 문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곳에서도 몇 명의 적병들이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젠장!”

“보안국?”

그때, 회색빛 방수 망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가린 사람 하나가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로 외치며 안에 확 뛰어들어왔다.

“보안국 놈이라고 했나?”

이번에 온 여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이 어딘지 익숙했다. 사에나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여자가 갑자기 킬킬대며 몸에 두르고 있던 망토와 머리에 쓴 진줏빛 투구를 벗었다.

“이게 얼마만이신가.”

“바에자 빈트 에시마?”

사에나는 손목에 낀 에아 마구스의 팔찌를 슬쩍 비틀며 한쪽 송곳니를 살짝 드러냈다. 그도 공포를 못 느끼는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여자 앞에서만은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웬일이신가.”

그는 검은 코트의 아랫자락을 휙 뒤로 넘기며 가늘고 긴 다리를 벌리고 똑바로 마주섰다. 바에자가 그를 노려보며 웃음을 지었다.

“30년만이구나.”

“그보다는 조금 길어. 산수도 못 하냐.”

사에나는 가는 눈을 똑바로 뜨고 상대를 구석구석 살폈다. 상대에게는 칼 말고도 낯선 형태의 팔뚝 길이 정도 긴 막대 모양 무기가 들려 있었다. 황제가 말했던 적의 ‘신무기’가 분명했다. 바에자가 사에나를 노려보며 여유를 부리는 척 했다.

“오호, 내 ‘마우저’가 맘에 드나 봐?”

“마우저? 그 멋없는 막대기를 그리 부르냐?”

손에 쥔 신무기 ‘마우저’를 들어 보이려던 바에자는 사에나 역시 손에 든 석궁을 움찔거리는 모습에 재빨리 움직임을 멈추었다. 두 사람 모두 지난번 대결의 경험에서 상대가 무서운 명사수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쪽이 무기를 드는 순간 상대도 적의 심장을 겨눌 것이 분명했다.

이 상황에서는 누구의 무기가 더 강하고 좋은지, 얼마나 좋은 조준 기능을 가졌는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네 부하들은 3교단 현신에게 예의도 안 보이는 잡스러운 호로새끼들이냐.”

사에나는 그 와중에도 눈동자를 바삐 굴려 혹시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지를 살폈다. 그때, 정신없이 얽인 배관과 프레임들 너머로 구석진 모서리의 벽에 고정된 오래된 철제 사다리가 보였다.

“현신? 너 같은 잡종이 무슨 얼어죽을 현신?”

“생물 공부 다시 해야겠군. 세상에 잡종 아닌 몸뚱이도 다 있나?”

사에나도 석궁을 만지작거리며 질세라 대꾸했다.

그는 천천히 옆으로 돌며 방금 본 철제 사다리로 가는 길을 확인했다. 머리 위에 그물처럼 얽힌 열수 파이프와 이런저런 설비 기계들이 보였고, 모서리의 사다리는 그 끝에서 천장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사다리 위는 아마도 옥상―지금 수송선이 대기하고 있는―과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글쎄, 때로는 아닐 수도 있지.”

상대가 탈출로를 찾고 있음을 직감한 바에자는 함께 들어온 병사들에게 사에나의 주변을 에워싸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는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야 한다.’며 재빨리 수화를 보냈다.

“전처럼 날 사로잡고 싶겠지? 이 팔찌와 함께?”

사에나가 키득거리며 속내를 정확히 읽어내자 바에자가 움찔했다. 상대는 30여년 전, 황도에서 헤네티들에게 습격을 당했을 때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맘에 들어서.”

바에자가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사에나는 그의 옆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질세라 사악한 미소를 품었다.

“오호, 어쩌나, 너까지?”

“마구스 행세하는 놈 치곤 너무 못생기긴 했지만 나름대로…….”

그 사이, 보이지 않게 조금씩 움직인 교단 병사들이 사에나의 주변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그 한쪽에는 적의 도주로를 유도하기 위해 ‘빠져나갈 수 있을 법해 보이는’ 틈 하나를 일부러 내놓은 상태였다. 적이 지레 놀라 등을 보이고 달아나도록 유인하는 술책이었다.

“이놈들이!”

사에나는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휙 돌아서 도망치려는 척 움직임을 보였다.

“잡았다!”

사에나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한 병사들이 함정 쪽으로 일제히 방향을 튼 순간, 그는 전혀 엉뚱하게 정면의 바에자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어, 어.”

짧으나마 타이밍을 놓친 바에자가 마우저를 들었지만 이미 상대의 석궁 끝이 그의 눈 사이를 겨누고 있었다.

“앗!”

이번의 바에자는 미처 방아쇠를 당겨 볼 틈도 없었다. 무언가 눈앞이 번쩍 하며 엄청난 충격이 목젖 부근을 때렸다. 사에나가 쏜 볼트가 그의 마우저 조준경을 박살내고 약간 꺾어지며 쇄골 부근 갑옷을 단번에 때려 부쉈다.

“우읍!”

거의 죽을 뻔한 바에자가 뒤로 휘청거렸다. 그리고 새처럼 날렵한 사에나가 막 뒤로 넘어지는 그의 무릎과 어깨를 순서대로 타탁 밟으며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갑옷을 입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바람 같은 동작이었다. 그리고 사에나의 징 박힌 장화 끝이 바에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젠 내가 더 잘생겼지!”

턱이 휙 돌아간 바에자가 순간 의식을 잃으며 뒤로 휙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밟고 뛰어오른 사에나가 머리 위 조명기구가 걸린 틀에 훌쩍 매달리며 스프링처럼 그 위로 튕겨 올랐다. 목과 머리에 충격을 받아 혼절한 바에자는 중심을 잃은 기둥처럼 뒤로 기울더니 서 있던 자세 그대로 털썩 쓰러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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