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56 회: Part 5. 오염된 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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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프 카파키의 일지 - 9
새벽 무렵, 갑작스레 잠이 깬 나는 시커먼 먹물이 처마를 타고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참으로 낯선 광경이다.
1년 전, 아케메니아에서 출발하던 날의 부슬비가 내가 보았던 마지막 비였다.
도착한 이래 이곳엔 단 한 번도 비가 온 일이 없었다. 이 행성의 대기권에는 해수가 증발한 거대한 구름층이 존재하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팀의 기상학자도 이곳 대기가 지금은 지나치게 안정적이라 적어도 몇백 년은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 말했었다.
그래서 이번 비는 정말로 낯설고 어색하다.
내 처소에 모여든 구조단원들은 신기한 비를 구경하며 갖은 유치한 감상을 떠드느라 아우성이다. 지금의 저들에게서 탐사 초기 돌연변이들의 목에 서슴없이 독극물을 꽂던 냉혹한 과학자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 가혹한 임무에 기꺼이 지원한 호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순수한 모습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비에서 아무런 감상을 느끼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이 내가 너무 늙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과학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이유 없이 이 비가 불길했다. 한 연구원이 [비가 그치면 이 재도 왕창 없어질 겁니다.]라고 떠들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그 한 마디에 연구원들은 여기가 곧 천국이라도 될 것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한 마디에 나는 가슴 속 불길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잠에서 깨기 직전, 꿈 속에서 타오르던 지옥불과 귀를 찢는 악마의 외침이 이른 새벽에 임무를 안고 이륙하던 프리깃의 요란한 엔진음이었다는 것을.
이건 인공강우다.
이마 388년, 다하카르의 달, 21일 04시 10분.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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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비의 유치한 감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5시 무렵, 코메트 본부 쪽에서 올리는 날카로운 [비상출동]의 나팔 소리,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의 상공에는 이곳에 온 이래 가장 화창한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본토에서라면 이 정도로는 결코 ‘맑다’라고 말할 수 없다. 회색 재를 일시 걷어냈다 해도 대기 높은 곳에서는 두꺼운 수증기와 가스층이 이미 햇빛 대부분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판지셰르 낙원]이 위치한 이 극지를 제외하면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이미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이다.
어쨌든, 이 정도의 햇살, 하늘도 1년 넘게 해를 보지 못한 지금의 우리에겐 퍽이나 낯설다.
코메트 지휘관 테번은 마을에 남을 기간요원만 빼고 나머지 1천7백을 모조리 외곽에 집결시켰다. 이전 같으면 모든 계획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사기를 북돋은 후에 길을 떠났겠지만 저 현실적인 젊은이는 ‘다 집결했나?’라는 물음에 대답을 듣자마자 참모진과 함께 바로 앞장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선지가 어디인지, 어느 길로 가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테번은 이번에도 우리에게 함께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비를 챙겨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우리를 굳이 막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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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은 퍽이나 단순하다. 몇 달 전, 5백여 명이 타 죽었던 바로 그 ‘수로(?)’를 다시 거슬러 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번엔 위험천만한 수로 밑바닥 대신 그 옆을 따라 나아갈 참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수로는 여전히 우리들의 흥밋거리다. 이 거대한 옹벽 구조물의 깊이는 위에서 보면 10층 가까이를 파내려가 보기에도 아찔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산에 깊은 칼집을 낸 것처럼 보이리라.
이 이상한 구조물의 용도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저 꼭대기에 있다는 ‘검은 철성’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수로의 밑바닥에도 정찰을 하며 올라가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좁고 까마득한 공간에 갇힌 병사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들의 불안감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바로 저 좁은 공간을 지난번에도 무서운 불꽃이 휩쓸었겠지.
이번 토벌대에도 화염방사기병들이 동행했지만 이번엔 뚜껑을 씌운 수레에 장비를 실어 후미에서 올라오는 중이다.
- 아십니까? -
내게 먼저 말을 건 건 뜻밖에 테번이었다. 그 청년은 화염방사기를 실은 수레를 가리키며 묻지도 않은 것을 자진해 가르쳐 주었다.
- 지난번 일은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누군가 의도적으로 화염방사기 연료 밸브를 노리고 고온의 발사체를 쏜 게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식량을 갖고 도망가던 패거리들이 같은 수법으로 우리 화염방사기병들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걸 보고 알았죠. -
이미 알고 있다. 이 멍청아.
- 놈들이 상당히 똑똑할지 모른다는 뜻이죠. -
너보다도 훨씬.
- 이젠 불꽃이 아래로 쏟아져서 병사들을 무더기로 덮친 이유만 찾으면 됩니다. -
그것도 모르면서 이 길을 따라 가고 있다니 간도 크구나.
말을 하는 사이 지난번 참사가 있었던 지점을 잔뜩 긴장하며 지났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5백명이 몰살당한 그 수로의 안쪽과 주변에는 먼 옛날 이곳을 뒤덮었다가 죽어버린 덩굴이 새벽에 내린 비로 흠뻑 젖어 질척거리고 있다.
지금은 지독하게 추운 것이 도리어 문제다. 새벽의 비 때문에 기온이 몇 도는 더 낮아진 것 같다. 그새 바닥엔 온통 빙판이 져 있고, 조금 전에는 정신 나간 병사 한 명이 겁 없이 수로 모퉁이에서 객기를 부리다가 안쪽으로 추락해 즉사했다. 미친놈.
젠장, 대체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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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참사가 있던 곳에서 위로 얼마 더 가지 않아 수로는 끝을 맺었다. 그렇지만 그건 놀라움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막다른 곳에는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터널 입구, 아니 입구‘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 키에 맞먹는 직경의 원형 터널 12개가 수직으로 줄줄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쏟아내기(혹은 빨아들이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 이게 뭐죠? -
밑에 있던 정찰대 장교가 무선으로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못 했다.
지난번 상사가 죽기 전 남긴 편지의 내용이 맞다면 이 어마어마한 구조물은 ‘카히나의 사제들’이 이 죽음의 행성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무언가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규모를 보아 고향행성이 완전히 몰락하기 이전, 엄청난 자금과 노동력을 쏟아 부어 수행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분명했다. 대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구조물을 만든 것일까?
우리는 수많은 궁금증을 저곳을 남겨둔 채 자리를 떠야 했다. 테번은 터널에서 뭔가 나타날지도 모르니 병사들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지시를 내리고 나머지 병력들을 이끌고 계속 전진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코메트를 따라갔다. 앞에서 대체 무엇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올라가는 내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에 접근하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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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검은 형체]가 보인다는 정찰병의 보고에 일행은 일단 자리에 멈추었다. 우리는 정찰대를 기다리던 병사들이 어딘가에 모여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았다. 혹시나 해서 다가가 본 그곳엔 큰 이정표가 쓰러져 있었다. 지금은 절반쯤 땅에 묻혀 있지만 서 있을 때의 원래 높이는 어른 키의 2, 3배는 되어보였다.
우리는 손으로 이정표를 파내어 보았다. 중간중간 삭아서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고, 이상한 그림도 있다. 연구원이 이정표의 의미를 물었지만 나도 이들의 글은 읽을 줄 모른다. 어쩌면 ‘검은 철성’의 본래 이름인지도 모르지. 만일을 대비해 일단 사진을 남기기로 했다.
Welco** to th* Institut* *f Biodivers*ty
We M*ke You S*ecial
Warning!
-Bi**azard Area-
-Do No* Fo*get Anti-Ga*-mask-
-Be**re of the Inflam*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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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를 지나친 우리들은 사람들이 왜 이곳을 ‘검은 철성’이라고 불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고산지대의 뿌연 안개 너머로 거대한 공장(?)이 희미하게 보였다. 마치 해부해 놓은 시체의 근육과 핏줄처럼, 저곳도 이젠 호흡이 끊긴 기계와 파이프의 섬뜩한 조합 같다. 정확한 용도는 잘 모르겠다.
저 거대한 철제 야수는 죽은지 이미 꽤 오래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굴뚝이 몇 개 있지만 거의 무너졌고, 적외선 열 반응에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거듭 보아도 이 행성을 구원할 아름다운 마법의 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저런 곳에 카히나가 살고 있다니!)
비록 차가운 쇳덩이일지언정, 저곳은 우리가 이 버림받은 행성에서 찾아낸 가장 크고 고도화된 인공의 구조물이다. 지금껏 원시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원주민들만을 상상했던 우리에게 이렇게 거대한 플랜트는 충격과도 같은 풍경이다.
혹시 저들이 한때는 우리보다 더 높은 수준의 기술이나 문명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계속 공장에 다가갔다.
그곳에는 삭아서 거의 쓰러진 철조망과 부서진 철제 출입문이 있었다. 철문에는 벌집 같은 흠집이 나 있고 군데군데 불에 그슬려 있다. 단순히 시간 때문에 이리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 이곳을 약탈하려 했거나 멸망 당시의 흔적인지도 모르지.
철과 대리석으로 된 문과 문설주에 이렇게까지 수많은 흠집과 구멍을 내 놓은 건 대체 무얼까?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다 해도 석궁이나 칼로는 분명 불가능하다. 아마도 어떤 폭발? 아니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를 당황하게 한 건 부서진 문이 아니었다. 불안하게 기울어진 문설주에는 서투나마 우리의 공용어로 쓰인 큰 천 조각이 걸려 있었다.
- 부탁합니다.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당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
그들이 정말 이런 쪼가리로 테번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한 걸까? 혹은 토벌군에게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을 주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일까.
- 빨리 치워버려. -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창대로 천조각을 끌어내려 바닥에 팽개쳤다. 테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병사들에게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라 손짓을 했다. 경무장 보병들이 이 ‘철성’ 주변을 빙 둘러 포위망을 펼치기 시작했고, 5백의 중보병대가 조심조심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난 병사들이 내버린 천조각을 수습해 그들을 따라갔다.
철조망 안쪽은 공장에 딸린 정원이었던 것 같다. 주 진입로는 보도블록으로 포장이 되어 있고, 양쪽으로는 물 빠지는 우수관로의 흔적도 남아있다. 길 옆에는 이젠 바싹 마른 탄소 덩어리가 되어버린 죽은 나무들, 삭아버린 벤치와 테이블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비록 지금은 잡초 한 포기 남지 않은 살벌한 폐허지만,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햇살 아래 웃으며 산책을 하던 아름답고 푸르른 공간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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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길 보십시오. -
선봉 정찰대의 외침에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세 도망자들의 말이 맞았다.
무지개빛 눈의 사제들은 우리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이곳에 남아있다. 그들은 공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계단 위에 나란히 선 채 우리의 접근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오팔빛 눈의 사제들은 5명 남짓 되어 보이고, 그들의 주변을 20명이 넘는 건장한 젊은이들이 굳은 얼굴로 에워싸고 있다. 가장 바깥쪽을 둘러싼 건 7척이 가까운 큰 키에 기골이 장대한 남자 거한들이다. (이번엔 어린 소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처음 본 크고 건장한 남자들의 모습에 코메트들이 갑자기 위축되었다. 저들의 굵은 팔다리만 보아서는 웬만한 병사들은 한 팔로 집어 내던지고도 남을 정도다.
- 맙소사, 저게 누구죠? -
단원 한 명이 물었다. 그들의 제일 중앙에는 얼굴에 크게 베인 흉터가 있는 갈색 머리의 젊은 여자가 무지개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6척이 넘는 큰 키에 당당하게 치켜든 턱, 거친 피부, 약간 헝클어진 머리칼과 어깨에 걸친 두툼한 동물의 털가죽이 그를 더 강인해 보이게 한다. 이젠 완전히 다 큰 어른의 모습이다.
주변을 에워싼 황소 같은 거한들 사이에서 그는 마치 여왕처럼 빛이 나 보인다.
- 카히나. -
나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입 속에서 반복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대체 몇 살일까? 저들이 어떻게 나이를 먹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쩌면 턱도 없이 어릴지도, 아니, 나보다도 세상을 더 오래 살았을지 모른다. 대화라도 한 번 해 보았다면 나이를 짐작이라도 했으련만, 목소리조차 들은 일이 없다. 똑똑한지, 차분한지, 격정적인지, 유순한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저 눈빛과 느낌 뿐이다.
한 번이라도 만져……빌어먹을! 허튼 망상에 사로잡힌 이 늙은 남자를 부디 용서하소서!
(이 위는 펜으로 마구 그어져 있다.)
카히나의 양 옆에는 주변의 거한들과는 사뭇 다른 젊은 남자 두 명이 서 있다.
왼쪽의 한 명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갸름하고 앳된 얼굴, 큰 암갈색 눈동자, 긴 머리칼에 피부도 희고 이목구비가 아주 또렷하다. 제대로 꾸미기만 했다면 같은 남자의 가슴도 뒤흔들 만큼 놀랍도록 아름다운, 말 그대로 아름답다고 할 외모다.
오른쪽의 한 명은 반대편의 소년 같은 남자에 비하면 선은 훨씬 굵지만 서글서글하고 호감을 주는 인상의 역시 빼어난 미남자다.
이 두 남자들은 카히나의 양쪽 귀에 대고 번갈아가며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다. 부하들일까? 개인 비서? 아니면.......
제발 측근 그 이상은 아니었으면!!! (이 위도 펜으로 지워져 있다.)
- 당.신.들 고.향.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
카히나의 진짜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거칠고 힘이 있는 음성이다.
그는 미리 외운 듯한 서툰 우리말을 한 음절, 한 음절 구사했다.
- 우.리 땅.입.니.다. 이.곳.에.서 피.를. 원.치. 않.습.니.다. -
분명 부탁이지만, 그의 번득이는 눈에서 간곡함이나 애원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가 이미 싸움을 각오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건 테번도 마찬가지였다.
- 저놈들이 다냐? -
- 그런 것 같습니다. -
정찰대장의 대답에 테번은 만족스러워하는 눈치다. 카히나를 향한 저 청년의 음흉한 시선을 본 순간, 난 하마터면 주먹을 휘두를 뻔했다.
-저 년이 우두머리냐? 사로잡으면 좋겠구나. -
카히나의 옆에 있던 소년 같은 인상의 청년이 테번의 말을 재빨리 번역해 그에게 전하는 것 같다. 남자의 말에 카히나의 표정이 굳었지만 공포는 보이지 않는다.
- 위대한 현신께선 산 몸뚱이는 가져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
- 누가 가져간댔나. 저 오염된 놈들을. -
이번엔 반대편의 남자가 이들의 대화를 전했다. 카히나는 우리를 내려다보며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옆에 세워놓았던 육중하고 긴 기계를 들고 두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어린아이 키 정도 길이? 아래엔 이상한 상자가 붙어 있고 한쪽 끝에는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파이프가 길게 튀어나와 있다.
기계는 여자의 몸으로 다룰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거워 보인다.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카히나가 저 기계를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앞이 뾰족한 금빛 쇠막대 수십(수백?)개가 나란히 연결되어 마치 혁대같이 생긴 반짝이는 긴 띠를 어깨에 걸었다.
어딘지 절망에 찬 듯 보이는 그의 눈빛이 내 가슴을 찢어놓는 것 같다. 그는 이미 우리의 의도를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자포자기한 것도 같다.
-공격 준비 -
테번의 손짓을 받은 20여명의 코메트들이 달려나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카히나를 향해 일제히 석궁을 쳐들고 위협의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건장한 청년들도 우루루 몰려들어 카히나와 사제들의 앞을 두꺼운 철판으로 막아섰다.
- 저 두 남자놈들은 우리말을 알아듣는 것 같으니 네 주인한테 똑똑히 전해라. 조용히 무릎을 꿇으면 고통은 없이 죽여주겠다고. -
테번이 카히나 양옆의 남자들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엔 그 둘 다 꼼짝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들이 번역을 해 주던 게 아니었던가? 도리어 그들은 마치 연습한 것처럼 카히나에게서 한 발 떨어져서 섰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 소년 같은 청년은 울고 있는 것 같다.
- Our era is coming. -
카히나도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시를 내리며 손에 들고 있던 이상한 막대 모양 기계의 레버를 확 당겼다 놓았다. 쇠가 부딪치는 철크덕 소리와 함께, 그는 기계를 번쩍 들어 한쪽 끝을 어깨에 기대고 반대편 끝을 우리를 향해 돌렸다.
- Be proud of ourselves. -
카히나의 자포자기 섞인 눈빛이, 그의 손에 들린 기계 끝 작은 구멍이 어딘지 소름이 끼치고 두렵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수백의 코메트들 앞에서 어떻게 저리 태연할 수 있는지. 분명 지금 상황을 알고 있을 텐데.
- Let's meet again in another world, my guys, the great survivors. -
맙소사, 카히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잖아!!!
오늘 일지는 이 이상 쓰지 못할 것 같다.
이마 388년, 다하카르의 달, 21일 12시 50분.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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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한대로 이번 편부터 [파트 5. 오염된 자들]이 연재됩니다.
이번 파트에서 타리프의 일지가 끝을 맺고 카렐과 베흔이 손에 제대로 피를 묻힙니다.
이번엔 한 번에 왕창 올려놓고 며칠간 3부 출판본 작업에 매진하려 합니다.
다음 주말쯤 다음편을 올리겠습니다.
이번엔 출판본 진도가 연재본을 추월해서 나올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