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66화 (861/1,132)

< -- 866 회: Part 5. 오염된 자들 -- >

.

.

.

“잠깐만요.”

엘룬에게 넣을 주사약을 지켜보던 하심이 갑자기 의사의 앞에 확 끼어들었다.

“장태자와 대군께 쓴 게 아닌데. 이건 무슨 제제죠? 이유가 뭐죠?”

이 끈질긴 불청객의 질문공세에 그 의사는 당황한 듯 아트위야 쪽의 눈치를 얼른 보았다.

“옹주가 가스마취에 감수성이 낮아서 정맥마취를 추가하는 중이요.”

아트위야는 혹시라도 꼬투리 잡힐까 짧게 대답하고는 주사를 하라고 재차 손짓했다.

“잠깐만요, 약 이름도 안 알려줬잖아요. 이건 옅은 황색인데 제가 아는 수술용 마취약 중엔 이런 색 없어요. 황자께서 마취제에 특이반응이 있다면 내의원에서도 당연히 알고 있어야죠.”

하심이 펜끝을 수첩에 댄 채 아주 강경하게 물었다. 자꾸 자신을 무시하고 따돌리려 하는 이들에게 처음부터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다.

시간에 쫓긴 아트위야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우리가 임의로 조제한 거요. 지금은 곤란하니 수술 후에 제법을 건네주겠소. 자꾸 맥을 끊어놓다가 우리가 실수라도 하면 어쩔 거요? 중간에 자꾸 막지 마시오.”

“막는 게 아니고 알려줄 건 알려줘야죠. 황자님들에 관한 걸 내의원에서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심은 무언가 감추려는 이들의 태도에서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무슨 이유인지, 조금 전 급하게 들어온 남자에게서 무언가 소식을 듣고 난 후, 의사들의 표정에는 긴장하고 쫓기는 기색이 역력했고 리더인 여자의 얼굴에도 잔뜩 불안감이 드리워 있었다.

‘그나저나, 저 인간들은 또 뭐야.’

하심은 아무 역할도 안 하고 있는 페로 관 의사들을 쏘아보았다. 저들의 독단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니고 수술 내용을 잘 아는 페로 관 의사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옆에서 팔짱만 끼고 선 채 눈치만 보고 있는 한심한 형국이었다.

하심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마취제 여분은 가져오셨을 테니 그거라도 주세요. 샘플로 가져갈 테니까. 감수성 테스트 자료도 좀 보여주시고요.”

“이 양반 참.”

아트위야가 버럭 짜증을 냈다. 그때, 페로와 비빈들이 있는 수술실 바깥과 연결된 인터폰이 갑자기 윙윙대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그 소리에 가뜩이나 긴장해 있던 아트위야와 의사들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랐다.

‘이놈들 왜 이래?’

이들의 이상한 반응이 하심의 의심을 더 증폭시켰다.

카이의 수술준비를 지켜보며 더 떨고 있던 건 도리어 유리창 밖의 페로였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먼 옛날, 바로 저 자리에서 손목에 팔찌를 해 박았던 카렐의 기억이 지금의 광경과 자꾸 오버랩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카렐의 가늘고 마른 손목에서 철철 흐르던 피는 2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에겐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안쪽에서 먼저 묻지 않았어도, 이미 그는 딸 아메스에게 아들의 수술을 꼭 보여줘야 하는지 내심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카렐의 수술을 보고 상처를 받았던 자신과 비슷한 트라우마를 아메스에게까지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커튼이 닫히기 직전, 수술실 안의 아트위야와 눈이 마주친 페로는 이번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 수술실과 연결된 카렐의 옛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인지, 이번만은 도저히 저 여자를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죄책감에 미칠 것 같았다.

커튼이 쳐진 후, 페로는 딸 아메스를 꼭 안아주었다.

“걱정 마라, 카렐도 저기서 비슷한 수술을 받았었으니.”

생각 없이 말했던 페로의 머릿속에 먼 옛날 수술 광경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던 악몽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그때 보셨어요?”

아메스가 물었지만 페로는 대답도 잊은 채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디언 팔찌는 자라난 수련장에서 달아주는 것이었지만, 카렐만은 ‘황실수련장에서 합성했으니 황실 의사들이 해야 한다.’며 난데없이 찾아온 황실 의료진들이 했던 터였다.

‘왜 그렇게 많이 왔었을까.’

페로가 새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꼬마 하나에게 팔찌를 박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대여섯은 되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2, 30분 남짓이면 끝나는 가디언 팔찌 설치가 카렐에겐 한 시간 가까이 걸려 사람들이 ‘애 잡겠네.’라고 투덜거리며 자리를 비웠던 기억도 났다. 게다가 어린 페로에겐 그 한 시간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길게 느껴졌었다.

“잠깐, 전신마취를 했었던가?”

페로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가디언 팔찌 설치는 부분마취만으로 충분했고 황실 수련장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먼 옛날 일이어도 되새김질해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것 같았다.

‘카렐은 잘 있을까.’

그는 무심결에 자신의 손을 어루만졌다.

‘이번엔 꼭 치료법을 찾아야 할 텐데.’

사실 그는 카렐이 발작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저 그 직후의 시체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 온몸에 남은 쇠사슬 자국과 숱한 자해의 흔적이 그가 본 것의 전부였다. 페로는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카렐의 대답은 비슷했다.

- 교단 놈들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것 같아. -

카렐의 이런 대답에 페로는 말도 안 되는 피해망상이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카렐의 병은 황제가 되기 전부터 발병했고, 이전의 그는 ‘등급 없는 가디언’으로 악명을 떨치긴 했어도 교단에서 ‘무슨 짓’까지 할 특별한 이유도 없었으니 페로의 짐작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에 오르마즈도 비슷한 병이 있었다는 말까지 들은 후로, 그는 카렐의 발작이 그레이오팔만의 유전병일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교단 출신의 뛰어난 의사들’을 고용하면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황제를 설득하려 들곤 했다.

게다가 이번에 황자들에게서까지 문제가 생기면서 페로의 목소리가 더 힘을 얻는 것 같았다. 덕분에 황제와 심각한 마찰까지 빚곤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둘 다 서로의 성격과 고집을 알다보니 병에 관한 이야기는 아예 안 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번 일에서 그가 교단 의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서부 연구소를 별로 의심하지 않고 고용한 것도 그 완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들은 7년 전 출혈열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숙부 헤데론 경과 가문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살려내었고, 그리고 이번엔 장태자 카이의 증세까지 놀랄 만큼 호전시키면서 그의 확실한 믿음을 따냈던 터였다. 이번에 태자들의 일만 해결된다면, 다음엔 정말로 황제의 병까지도 의뢰해 볼 참이었다.

“각하, 각하.”

수술실 창 앞에서 서성거리며 긴장을 달래던 그는 옆에 불쑥 다가온 가디언 킵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응?”

주변을 확인한 킵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는 주인 페로의 귀에 속삭였다.

“방금 하심 경 조금 전에 급하게 들어왔던 남자 의사 말입니다.”

“그놈이 왜?”

페로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보안을 총괄하고 있는 이 똘똘한 가디언이 실없이 이런 얘기를 꺼낼 리가 없었다.

“혹시 이전에 여기서 일했다거나 이 별채에 온 일이 있는 자입니까?”

“아닐걸. 여긴 우리 내부인만 오는 곳 아닌가.”

페로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킵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레 귓속말을 전했다.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제법 됩니다. 그 거리를 혼자서 길 한 번 안 잃고 숨넘어갈 것처럼 달려오는 걸 봤습니다. 제 경험상 초행인 사람이 그렇게…….”

“뭐?”

페로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리 준비를 해 놓았던 이번 의료진의 신상자료 파일을 확 펼쳤다.

킵이 긴장한 그에게 말을 이었다.

“고용한 직원도 그 정도로 길에 익숙해지려면 한 달은 넘게 걸립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서 3번이나 영외에 다녀오는 게 영 꺼림칙해서 사람을 시켜 미행을 좀 했습니다. 그런데…….”

킵이 페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도 주인과 밤을 함께했던―게다가 맘에 들어가는 기색이 역력한― 여자의 팀원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는 것이 영 껄끄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페로는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시선을 신상자료에 고정한 채 사무적으로 계속 물었다.

“드나드는 이유는 파악했고?”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차를 몰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온 게 전부입니다. 혹시 우리 모르게 외부에서 물건을 들여왔을 수도 있고, 감청을 피해서 외부와 통신하기 위해 나갔다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영내에서 외부와의 통신은 모두 감청되고 있지 않습니까.”

페로는 고개를 저으며 파일을 덮었다.

“경력도 분명하고 상피세포로 본인 여부도 확인했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고 되어 있어. 여기 나온 걸로는 우리와 무관한 북부와 서부의 민간 연구소 경력뿐이야.”

킵이 머리를 조아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그저 정황이 미심쩍어서……제 오해라면 좋겠습니다만……. 방금 그자가 넘어졌을 때 문틀에 긁혀 피부 일부가 탈각된 것 같았습니다. 아랫놈들한테 최대한 빨리 유전자 검색을 명해 놓았습니다.”

“후우, 수고했다.”

일단 표정을 푼 페로는 눈치 보일 것을 각오하고 이 사실을 전한 충성스런 가디언의 어깨를 힘 있게 탁탁 쳐 주었다.

“어쩌죠? 일단 결과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냐, 아트 박사가 사람을 잘못 고용했을 가능성도 있지. 그래, 지금이라도 확실히 해야지.”

잠시 망설였던 페로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의 걱정은 어젯밤을 함께한 그 ‘아트 박사’가 혹시 믿을 수 없는 놈을 수하로 두는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닐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커튼이 쳐져 있는 강화 유리창에 다가가서는 손톱으로 유리창을 탁탁 두들겼다.

“이봐, 이봐.”

그는 안쪽과 연결된 인터폰에 입을 대고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한쪽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던 아메스와 비빈들이 비로소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의 이상한 행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인터폰 건너편에서 사무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수술 잠시 중단해라.”

“예? 이미 마취가 끝나고 절개까지 시작했습니다. 지금 중단하면…….”

“닥치고 수술 중단해. 예킨터스 박사 직전에 들어갔던 놈 잠깐 나오라고 하고.”

반대편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안에서 웬 여자가 마치 싸우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았다.

“잠깐, 거기 무슨 소리지? 안에서 싸우고 있는 거냐?”

페로가 귀를 기울였지만 하심의 목소리인지, 아트위야의 목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페로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뭐야, 대답 안 하고 뭐해, 이 새끼야.”

그때 딸칵 하며 반대편에서 인터폰 끊는 소리가 났다. 놀라고 당황한 페로는 주먹으로 유리창을 쾅쾅 치며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에이, 씨발! 대답 못 해, 이 개새끼야!”

페로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수술실 안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문 부숴!”

당황한 페로가 킵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지 놀라고 당황한 비빈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죠? 뭐에요?”

명령을 받은 킵이 온 힘을 다해 수술실 문을 걷어찼다. 그런데 별 것 아닌 문이 어찌된 일인지 가디언의 힘에도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을 직감한 베아트릭스도 그와 함께 문을 밀어 보았지만 별 차이가 없었다.

“이씨!”

뒤로 물러났던 킵이 온 힘을 다해 달려가 문을 어깨로 힘껏 들이받았다. 그 힘에 문 중간이 약간 찌그러들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젠장! 안에 뭔가 댄 모양입니다!”

페로가 이마를 짚었다. 바로 며칠 전, 직원의 실수로 알콜이 튀어 이 수술실에 작은 불이 난 일이 있었다. 그때 교체했던 새 문짝이었다.

“문! 다른 문 없어?”

“반대편에 의약품 창고와 연결된 뒷문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디언들을 보내겠습니다!”

“비켜요!”

다급해진 베아트릭스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어느새 그가 자신의 짐에서 꺼낸 도끼를 한 손에 꽉 움켜쥐고 있었다.

“뭐 하려고!”

페로가 급히 옆으로 물러서자 베아트릭스는 악 소리를 지르며 온 힘을 다해 강화유리 창으로 도끼를 날렸다.

“이크!”

굉음에 놀란 솔이 귀를 막았다. 도끼가 박힌 강화유리는 사방으로 거미줄 같은 흠집을 내며 쩍 하니 갈라져 버렸다. 가디언인 킵보다도 먼저 눈에 불을 켠 베아트릭스가 창에 무작정 돌진해 온 힘껏 몸을 날렸다.

인터폰으로 페로와 연락이 된 것을 본 하심은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원리주의자 유학자의 양심으로 눈앞의 이 한심한 상황들을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여기요! 페로 관 의사 둘 좀 바꿔주십시오! 무책임하게 빈둥거리고만 있을 거면서 왜 들어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심이 엘룬의 주사를 막아선 채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그의 외침이 바깥에 제대로 전달될지 어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바깥에 있는 누군가가 안의 상황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아트위야가 그 의사에게 인터폰을 끄라고 손짓했다.

“뭐야, 대답 안 하고 뭐해, 이 새끼야.”

페로의 성난 고함을 마지막으로, 그 의사는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인터폰을 탁 꺼버렸다.

“뭐야, 저놈!”

그 순간, 하심은 페로 관 의사로 알았던 자들이 엉뚱하게 아트위야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저들에게 매수되었거나, 혹은 원래부터 내통을 하기 위해 페로 관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안되겠다. 연구소에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고 주변 상황도 너무 안 좋다. 너무 늦기 전에 그냥 나가는 게 낫겠다. 너희 둘은 옹주하고 그 의사 빨리 처리해라. 쿠마르, 준비는 되어 있다고 했지?”

아트위야가 거추장스런 마스크와 수술 가운을 확 벗어던지며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황자들은 데려갑니까?”

“둘째는 잡아놨다고 하니 남매 상봉시켜 줘야지.”

아트위야는 장태자와 마하 대군을 업으라며 눈짓을 하고는 창고가 있는 뒷문 쪽으로 휙 돌아섰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www.tasawwuf.pe.kr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