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67 회: Part 5. 오염된 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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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위야가 철수를 결정하고 돌아선 순간, 무언가 육중한 힘이 수술실 문을 꽝 하고 치는 소리가 실내를 흔들었다. 문은 아직까지는 붙어 있지만 소리만으로도 교단 의사들을 겁먹게 하기는 충분했다. 사방으로 금이 간 강화 유리창은 당장이라도 뚫릴 것처럼 보였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일이 꼬이면서 그들의 계획 전체가 망가지고 있었다.
“빨리 처리하고 따라와, 시간 없다.”
창백해진 아트위야가 하심 부근의 두 의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엘룬에게 주사를 놓으려 했던 의사가 갑자기 방향을 휙 돌려 하심을 향해 메스를 휘둘렀다.
“으앗!”
칼을 피해 뒤로 물러나던 하심은 바닥의 무언가에 발이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공포에 질린 하심은 주사를 놓으려는 의사의 다리를 다짜고짜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으힉!”
다리를 붙들린 상대 의사가 벌렁 넘어지면서 약품과 도구가 있는 카트까지 함께 넘어져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용물을 와장창 쏟아내 놓았다. 동시에 또 한 번의 굉음이 울리면서 부서질 듯 금이 간 강화유리창이 크게 출렁거렸다. 누군가 몸으로 들이받은 모양이었다.
“곧 부서지겠어!”
하심보다 더 겁을 먹은 두 의사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심과 짧은 몸싸움을 벌이는 새, 함께 있던 동료들은 그 둘에게 뒤를 맡겨놓은 채 장태자와 마하 대군을 업고 수술실 뒷문으로 빠져나가버린 후였다. 유리창에서 세 번째 굉음이 나며 유리가루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안되겠다. 빨리 챙겨!”
창이 뚫릴 것 같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은 하심과 엘룬을 포기하고 일단 뒤돌아섰다. 그들은 주변에 흩어진 자료들을 가방에 넣고는 먼저 나간 아트위야를 쫓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심도 메스 하나를 주워들고는 도망치려는 그들을 무작정 쫓아가 뒷문 앞에 약장을 확 엎어놓았다.
“어딜 빠져나가려고!”
하심이 가방을 든 의사의 옷자락을 다짜고짜 붙잡고 늘어지며 메스를 휘둘렀다. 그가 휘두른 메스에 팔을 베인 의사가 비명을 지르며 가방을 놓치고 말았다. 기를 쓰며 그자의 가방을 빼앗아들었던 하심은 등에서 무언가 묵직한 압박감과 함께 살을 찢는 통증을 느꼈다.
“아, 아윽.”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린 그는 피 묻은 수술 가위가 눈앞을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주춤주춤 벽으로 뒷걸음쳤다. 무언가 고함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머릿속이 멍해져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급하게 내뱉는 말 중간의 ‘현신께선 먼저 가셨는데’라는 말이 그의 뇌리를 송곳처럼 찔렀을 뿐이었다.
‘사교도들이다.’
의사들이 빼앗긴 가방을 도로 가져가려 했지만 등을 찔린 하심도 벽 구석에 기댄 채 가방으로 얼굴과 목을 가리고 메스를 쥔 손을 마구 휘두르며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들이 정말 교단 수하들이라면 자료가 든 가방을 놓아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깨와 겨드랑이가 가위에 몇 번이나 찔리고 팔과 손이 찢겼지만 하심은 가방을 온 힘을 다해 껴안은 채 온몸을 버둥거려가며 끝까지 놔 주지 않았다.
‘죽었구나.’
하심이 끝장이라고 느낀 순간, 다시 유리창에 무언가가 부딪치고 유리가루가 우수수 쏟아지는 소리가 나면서 그 짧은 공포도 끝을 맺었다. 시간에 더 쫓기고 더 크게 당황한 건 저들이었다.
“맙소사! 도망가!”
하심은 뒷문으로 멀어지는 그 둘의 발소리와, 자신의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그는 부서진 약병들, 수술 도구들로 난장판이 된 수술실 구석에 가방을 안은 채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몸으로 끝내 유리창을 부순 베아트릭스는 창틀을 훌쩍 넘어 수많은 유리가루와 함께 수술실 안쪽에 뒹굴었다. 어깨에 피멍이 들었고 얼굴도 긁혀 피가 번졌지만 그의 머릿속엔 딸 하나뿐이었다.
“엘룬! 엘룬!”
비틀비틀 일어난 베아트릭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쓰러진 수술대와 선반, 사방에 부서진 약병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수술실 안 광경에 경악을 했다.
“엘룬! 어딨니!”
그는 가스마스크가 반쯤 벗겨진 채 수술대 위에서 신음하고 있는 딸 엘룬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달려가 숨결을 확인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엘룬이 눈을 가늘게 뜨기는 했지만 쉽게 의식을 찾지는 못했다.
“카이는!”
뒤따라 들어온 페로의 거친 목소리가 수술실을 쩌렁 울렸다. 페로와 킵은 장태자와 마하 대군, 그리고 의료진들까지 모조리 사라져버린 수술실 풍경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뒷문 앞은 몸싸움이 있었는지 깨진 약병으로 난장판이었고 구석엔 수술복 차림의 하심이 가슴에 가방을 꽉 껴안고 피로 질벅한 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
“저기요, 저기에요.”
하심이 가늘게 숨을 내쉬며 손끝으로 뒷문을 가리켰다.
“다, 다 한 패였어요. …… 저 혼자는 ……죄송해요.”
피투성이가 된 하심이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 모두 한패였다고? 말도 안 돼.”
하심을 안은 페로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난밤, 그의 품에 있었던 ‘아트 박사’에 대한 그의 순진한 믿음이 무참히 무너진 순간이었다.
“내 의사들은?”
“그 둘도 한패 ……라고요. 사교도들……그 여자, 눈 색 이상한 그 여자……현신이라고,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어요.”
“현신?”
반쯤 넋이 나간 페로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밤 이불 속에서 그를 다정하게 만져주고 희롱하던 바로 그 여자였다.
“그건 사교도들이 마구스를 부를 때…….”
이번 의료진이 사교도라는 건 페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에서 이름 있는 의사들 백에 아흔 아홉은 어차피 사교도였고, 사교도라고 해서 모두 황실의 전복을 노리는 옛 교단 추종자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실이든 아니든 현신이라 불리는 존재라면, 경우가 분명 달랐다.
“여기 계십시오! 반대편에 우리 편이 있으니 독 안에 든 쥐입니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킵은 몇 명의 가디언 부하들을 데리고 수술실 뒷문으로 사라져갔다. 충격은 받은 페로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고개만 젓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빌어먹을 새끼!”
페로는 맨주먹에서 피가 날 때까지 마구 벽을 후려쳤다. 손에서 피가 줄줄 흘렀지만 이 손으로 납치범들을 들이고, 심지어 그 우두머리를 안기까지 했다는 것을 떠올리니 아예 잘라 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충격을 받은 아메스가 자신도 적을 쫓겠다고 악을 쓰는 것을 가디언들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리는 중이었다.
“이 못난 놈, 한심한 놈.”
페로가 울부짖으며 벽에 이마를 몇 번이고 들이박았다. 도망친 놈들은 이미 독안에 든 쥐라 해도 그가 이번에 저지른 어마어마한 실수, 아니 망신에 가까운 패착을 카렐에게 어떻게 말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각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엘룬을 의료진에게 넘겨주고 달려온 베아트릭스가 가까스로 뜯어말렸지만 그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는 허리에 찬 단검을 꽉 쥐며 턱을 파르르 떨었다.
“그 씨발년, 내 손에 잡혀 봐라, 눈깔을 확 파내 버릴 테다.”
“각하! 각하!”
가디언 페다이가 중간이 크게 부서진 유리창을 훌쩍 뛰어넘어 페로에게 달려왔다.
“뭐냐!”
분이 덜 풀린 페로가 수술실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아까 킵 대장이 맡긴 유전자 분석입니다.”
순간 눈물로 흐리멍덩하던 페로의 눈이 확 뜨였다. 그는 페다이의 손에서 자료를 확 낚아채며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어떤 놈이라는 거야.”
“우리가 가진 파일에 있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신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를 할 때 가짜 검체로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페다이가 말꼬리를 흐렸지만 이미 답은 뻔했다. 그자들의 신원을 검사했던 것이 수술에 들어갔던 그 두 의사들이었다.
“눈치 보지 말고 어떤 놈인지나 말해!”
“킵 대장 예상대로 우리 직원이었던 사람입니다. 250년부터 20년가량 황실 수련장에 있었고, 그 후엔 북부의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20년쯤 전 스카웃되어 여기서 몇 년 전까지 일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의 신원도 조작된 게 분명합니다.”
“맙소사.”
페로가 침통한 얼굴로 이마를 싸쥐었다. 철저하기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여겼던 자신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속았다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다못해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페다이가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조심스레 말했다.
“옛날에 황상의 팔찌 설치 수술을 위해 왔던 5명의 황실 스텝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황실 수련장에서 일했었습니다.”
“뭐?”
페로와 베아트릭스들의 목소리가 동시에 커졌다. 방향이 갑자기 카렐에게로 돌아가면서 이들의 머릿속에 해괴망측하고 말도 안 되어 보이는 별의별 이상한 시나리오가 다 스쳤다.
머리를 짚고 잠시 생각을 한 페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맙소사, 카렐의 팔찌였어.”
“예?”
“교단 놈들이 정말로 카렐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도…… 이번 것도 어쩌면…….”
그때, 킵이 수술실 뒷문에서 헐레벌떡 모습을 나타냈다.
“그놈들은!……뭐냐? 왜 빈손이야!”
“그게……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반대편을 지키던 우리 가디언들도 도망치는 무리를 못 만났다고 합니다.”
순간 사색이 다 된 페로가 수술실 뒷문에 직접 뛰어들었다. 뒷문 바로 바깥은 각종 의료용구와 전시를 대비한 약품들이 보관된 크고 어두운 창고였고, 반대편 출입문은 이미 다른 가디언이 서 있었다. 페로는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다 잡은 줄로 알았던 건 그의 착각이었다.
“죄다 불 켜! 빨리!”
창고에 불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사방의 가디언들이 주변을 확인했지만 창고 안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잠깐, 웬 핏자국이지?”
바닥의 아주 작은 핏방울을 자칫 밟을 뻔했던 킵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드문드문 떨어진 핏방울을 따라가던 그는 한 캐비넷 앞에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어떻게 된 거지?”
소리를 듣고 달려온 페로가 머뭇거리는 킵을 확 밀어내고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봤으면 빨리 가지 뭐 꾸물거려!”
자신의 책임으로 황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 그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핏자국의 방향을 막아선 캐비넷을 다짜고짜 힘껏 걷어찼다.
“엇.”
지레 놀란 페로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별 것 아닌 약품 캐비넷이 벽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뭐야, 무슨 캐비넷이 이래?”
놀란 킵이 서너 명의 힘센 가디언들과 함께 달려들어 캐비넷을 완력으로 무작정 떼어내자 사람 한 명 지나갈만한 크기의 벽이 뒷면에 붙은 채 부서진 경첩과 함께 뚝 떨어져 나왔다. 놀랍게도, 벽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이런 세상에.”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킵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불도 안 켜진 음침한 계단실이 그 밖에 있었다.
“맙소사, 비상용 계단입니다! 지난번 공사 때 누군가 몰래 비밀 문을 내 놓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씨발, 두더지같은 십새끼들이 내 집구석에 대체 무슨 개수작을 해 놓은 거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페로가 다짜고짜 계단에 훌쩍 뛰어내렸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 건물 전체에 다 비상을 내려! 빨리!”
격앙된 페로가 뒤늦게야 위험을 직감했지만 곧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계단실 꼭대기와 이어진 옥상 주기장에서 셔틀 엔진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카이!”
눈이 뒤집어진 페로가 악을 쓰며 위로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옥상으로 나서면서 찬바람을 느낀 카이는 슬며시 눈꺼풀을 열었다. 희미하나마 의식을 차린 건 이미 수술실에서였지만 약기운으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던 그로서는 숨죽이고 마취된 척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타고난 저항력 덕분인지 약기운이 빨리 풀리면서 이제 손발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이걸 어쩌지.’
긴장한 카이는 옆에서 마하를 업고 달리는 의사 쪽을 돌아보았다. 동생을 쳐다보던 카이는 마찬가지로 자기처럼 몰래 실눈을 뜨고 있던 마하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엇.’
두 꼬마들은 서로의 시선에 지레 놀라 얼른 눈을 감았다. 눈빛과 빠른 움직임을 보아 마하도 이제 거의 깨어났지만 아닌 척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카이는 수술실에서 슬쩍 집어온 오른손의 메스 날을 재차 확인했다. 날에 깊게 벤 손바닥은 이미 피투성이었지만 이곳으로 오는 길을 뒷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바닥에 남겨놓은 핏방울을 누군가 봐 주었기만 바랄 뿐이었다.
“왜 벌써 오셨습니까?”
낯선 목소리에 카이가 다시 실눈을 떴다. 셔틀에서 기다리던 이 남자는 지금까지 본 의사들과는 달리 단단한 골격과 말하는 태도에서 군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상황이 급하다.”
뭐라 대답하려던 아트위야의 목소리가 딱 끊겼다. 별채 전체에 귀를 찢는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놀란 쿠마르가 일행들을 급히 셔틀 쪽으로 밀었다. 페로 일행이 여전히 수술실 주변에서 ‘다 잡은 쥐’를 찾고 있으리라는 그의 예상이 여지없이 틀린 모양이었다. 주기장 중앙에 있는 에너지장벽 포스트에 예열을 알리는 붉은 빛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빨리 출발해! 저게 켜지면 늦는다!”
쿠마르의 재촉에 셔틀이 일단 엔진을 켜고 무작정 이륙을 시도했지만 경보를 듣고 옥상으로 몰려나온 경비 가디언들이 그새 이쪽을 발견했는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봐! 뭐야! 신분을 밝혀!”
그들의 고함도 아랑곳없이 셔틀은 엔진출력을 키우며 조금씩 이륙을 시도했다.
“계속 움직이면 격추시키겠다!”
가디언들 몇이 주기장에 설치된 자기무기에 달려가면서 상황이 더 나빠졌다. 이대로 출발했다가는 셔틀에 탄 모두가 몰살당할 판이었다.
“안되겠다. 그 꼬마 좀 내놔 봐.”
방금 전의 그 ‘군인’이 셔틀 뒤쪽으로 열린 큰 해치를 활짝 열고는 의사에게 붙들려 흐느적거리고 있던 카이를 한 팔로 가슴에 보란 듯 안아들었다. 카이는 이자가 자신과 같은 X 헤네티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더 다가오지 마라!”
그의 날카로운 외침이 막 달려오던 페로 가디언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장태자 눈알을 하나씩 파 놓을 테다! 당장!”
‘이익.’
여전히 마취에서 안 깬 척 늘어져 있던 카이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자의 단검 끝이 바로 목에 닿아 있었다.
“맙소사, 장태자 전하시다!”
당황한 가디언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때, 계단실을 헐레벌떡 쫓아 올라온 페로와 킵, 베아트릭스 일행이 뒤늦게야 옥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예열이 끝난 에너지장벽이 비로소 하늘에 붉은 장벽을 드리우면서 양쪽 모두 이제 벼랑 끝에 선 셈이었다. 헤네티가 칼끝을 조이며 페로 일행에게 고함을 질렀다.
“물러나! 당장 에너지장벽 꺼!”
협박에 당황한 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쩌지요?”
페로가 대답을 미뤄둔 채 눈을 더 찡그렸다. 그때, 헤네티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카이가 자신을 애타게 쳐다보는 페로에게 피투성이 오른손에 쥐고 있던 손가락만한 칼날을 슬며시 내보였다. 페로의 놀란 눈이 가늘게 열린 장태자의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둘 사이에 소리 없는 대화가 짧게 흘렀다.
잠시 후, 페로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마하 대군도 무사한지 보여줘라.”
페로의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진 베아트릭스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사실 황자들 중에서 가장 페로의 관심 밖에 있는 게 네페티의 딸 마하였다. 코앞에서 장태자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가 난데없이 마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어딘지 이상했다.
“대군까지 무사한 걸 내가 확인하면 길을 터 주마.”
“안 돼.”
안쪽에 있던 아트위야가 상대의 수를 바로 읽어내고는 단호하게 끊어냈다.
“문가에 인질 둘을 다 내보이는 건 위험하다. 하나는 안쪽에 놔둬.”
“알겠습니다.”
지시를 확인한 헤네티가 재차 카이의 목에 칼을 댔다.
첫 계획이 실패하자 페로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내가 직접 다가가서 보지. 가디언들은 여기 있어.”
킵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손짓한 페로는 셔틀 안의 상황이 정말로 궁금한 척 눈을 크게 뜨고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리고 낌새를 읽은 베아트릭스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예상대로, 셔틀 안에는 아트위야와 의사들이 축 늘어진 마하를 데리고 모여 있었다.
“그만 다가와. 10초 내로 장벽 꺼라. 빨리.”
헤네티가 카이의 목에 댄 칼날을 바싹 조여들었다.
“……장벽 꺼라.”
페로는 그제야 뒤의 가디언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됐다! 빨리 출발해!”
에너지장벽이 엷어지는 것을 확인한 헤네티가 조종석 쪽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질렀다. 셔틀이 서둘러 움직이면서 중심을 잃은 헤네티가 바닥에서 발을 떼며 휘청거렸다.
헤네티의 관심이 흐트러진 것을 본 페로가 아직 열려있는 해치 문을 향해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가긴 누구 맘대로!”
베아트릭스 역시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뒤를 쫓았다.
“엇!”
한눈을 팔았던 헤네티가 페로의 고함에 다시 바깥으로 고개를 휙 돌렸을 때, 그의 앞에는 조금 전까지도 그의 품 안에서 휘청거리던 병약한 소년이 손에 메스 날을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무엄한 놈!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카이의 칼날이 공중에 예리한 반원을 그리면서 헤네티가 비명도 못 지른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단번에 베어나간 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확 솟구쳐 카이의 앳된 얼굴을 덮었다.
“이대로 보내줄 것 같냐!!!”
막 출발하는 셔틀을 결사적으로 쫓아 달려간 페로가 열린 해치를 향해 힘껏 몸을 날렸다. 그리고 함께 달려온 베아트릭스와 함께 막 이륙하고 있는 해치 문짝에 매달렸다.
“올라가십시오!”
함께 매달린 베아트릭스가 페로를 먼저 힘껏 올려주었다. 셔틀 안에 훌쩍 뛰어든 페로의 눈에는 이 안에서 딱 한 사람만 보였다.
“감히 날 속여! 이 가짜 마구스 년아!”
페로가 악 소리를 지르며 셔틀 안으로 무작정 달려들었다. 표적은 분명했다.
“현신님을 지켜!”
의사 하나가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거친 남자의 무지막지한 팔뚝에 얼굴을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나동그라졌다. 어어 하며 물러나려던 아트위야는 황소같이 돌진해 온 사내의 어깨에 무자비하게 들이받히며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아웁!”
아트위야의 가늘고 호리호리한 몸은 이 덩치 큰 근육질 남자의 가슴 아래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의 짧은 비명이 셔틀 안을 울렸다.
“이, 이건……”
페로에게 깔린 아트위야는 어느새 턱 밑에 닿아 있는 검 끝을 보며 파르르 떨었다. 이 남자가 내뿜는 거친 숨소리에 그의 앞머리칼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살았다고 생각한 순간,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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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맥을 끊지 않으려 했는데 용량의 압박으로 또....^^;;;
이번 파트는 어디서 잘라 봐도 절단마공이 되네요, 하하하 (삐질)
이번 회가 너무 길어서 다음 회는 사정상 좀 짧아져도 양해해 주시길...^^;;;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www.tasawwuf.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