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69 회: Part 5. 오염된 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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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어렵게 눈을 뜬 카이는 야속할 만큼 맑고 파란 사막 하늘과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베아트릭스의 검은 얼굴을 제일 먼저 보았다. 정신이 어질어질해진 카이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얼른 살폈다. 반쯤 부서진 의자와 조각조각 찢긴 완충용 풍선 조각들이 마른 사막의 바위들 위에 흩어져 있었다. 뜨거운 사막의 한낮 햇빛이 그의 얼굴 위에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마하는요? 국구께선 어딨고요?”
“국구께선 무사하실 겁니다.”
베아트릭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셔틀이 떨어진 바위산자락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방에 셔틀의 파편들이 널려서 마치 쓰레기장 같았다. 군데군데 풍선과 함께 떨어진 좌석들이 보였지만 워낙 골짜기 곳곳에 흩어져 있어 누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언덕 너머에서 낯선 셔틀이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엇.”
셔틀 모양을 본 베아트릭스가 카이를 품에 얼른 끌어안으며 한 손에 칼자루를 잡았다.
“저건 뭐지?”
장군인 그의 눈에도 무척이나 낯선 송곳 같은 모양의 이상한 비행체가 막 문을 닫으며 이륙하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페로 관에서 쫓아온 이쪽 지원셔틀은 아니었다.
“교단 놈들 한패거리 같습니다!”
베아트릭스는 카이를 데리고 허둥지둥 가까운 바위 밑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잠시 주변을 훑는 듯 싶었던 그 정체불명의 비행체는 페로 관에서 출발한 셔틀들이 나타나자 남쪽 하늘로 눈 깜짝할 새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맙소사, 뭐가 저리 빨라.”
베아트릭스가 당혹스런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제대로 재 보지는 못했지만 언뜻 보기에도 경주용 셔틀을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조금 전 이륙할 때 의사들 일행이 입었던 푸른색 수술복이 안쪽에서 언뜻 보였지만 정확히 누가 살아서 도망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하, 마하를 찾아야 해요.”
창백해진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약해진 몸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곧 기운을 잃고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베아트릭스가 그를 대신해 주변에 큰 소리로 외쳤다.
“대공 각하! 대공 각하!”
기병대 전장에서 다져진 그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좁은 바위골짜기 안을 윙윙거리고 맴돌았다. 잠시 후, 언덕 조금 아래에서 잔뜩 쉰 남자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빈? 장태자는?”
조금 떨어진 바위 아래에서 손을 흔드는 페로의 모습에 베아트릭스가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좁은 골짜기에 떨어진 덕분에 사방팔방으로 너무 멀리 흩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 계십니다!”
페로는 카이의 상태가 궁금한 듯 서둘러 달려 올라오려 했지만 그 역시 충격을 받아 다리가 풀렸는지 몇 번을 넘어지고 휘청거려가며 불안하게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의 가디언들이 탄 셔틀은 페로가 장태자에게 거의 달려왔을 무렵에야 머리 위에 멈춰 서서 가디언들을 내려 보내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셔틀에서 레펠을 타고 죽 내려온 킵은 작은 골짜기를 온통 뒤덮고 있는 수많은 셔틀 잔해에 기겁을 했다.
“괜찮으니까 빨리 주변을 뒤져! 마하 대군이 어딘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고 못 도망간 의사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참 이걸 찾아라.”
페로가 큰 소리로 윽박지르며 주먹 안을 내보였다. 그 안에는 손가락만한 금색 막대가 든 투명한 튜브가 들어있었다. 그가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바닥이 손톱에 눌려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그놈들 소지품으로 보이는 것들은 종잇조각 하나라도 무조건 찾아서 가져와라. 제일 중요한 건 이거다. 가디언들을 모조리 풀어 여길 다 덮든 금속 탐지기라도 가져오든 무조건 찾아내야 한다. 놈들이 못 챙겨갔을지도 몰라. 알았냐!”
“알겠습니다!”
씩씩거리는 주인의 태도에 가디언들이 골짜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다른 가디언들을 태운 셔틀들도 속속 도착해 골짜기 곳곳에 병력을 풀어놓았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페로가 머리칼을 확 움켜쥐며 분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하나밖에 못 건졌어, 하나밖에!”
“잠깐 보여주실 수 있겠죠?”
페로의 손에서 막대가 든 튜브를 건네받은 베아트릭스는 별 생각 없이 그곳에 새겨진 글씨를 유심히 살폈다.
“흐웁.”
화들짝 놀란 그가 얼른 페로의 눈치를 보았다.
“왜 그러나.”
신경이 곤두선 페로가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 그게…….”
망설이던 베아트릭스는 차마 안 떨어지는 입술을 어렵게 열었다.
“황상께 박힌 걸 빼내려면……12번과 14번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불길함을 느낀 페로의 눈빛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이건 제가 아까 봤던 14번 막대가 아닙니다.”
순간 충격을 받은 페로는 역정을 낼 생각도 못한 채 자리에 털석 주저앉고 말았다.
“뭐, 뭐라고?”
이곳에 새겨진 낯선 숫자를 전혀 읽지 못하는 페로는 자신이 받아든 이 막대가 당연히 카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열쇠 중 하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아니었다.
“잘은 기억 안 나지만……이건 15번을 의미하는 숫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제가 봤던 건 아닙니다.”
“에이씨!”
일순간 폭발한 페로가 바닥의 돌과 흙을 마구 집어 내던지며 괴성을 질렀다. 베아트릭스도 손에 쥔 이것이 제발 14번이기를 누구보다 기원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베아트릭스는 격해지는 감정을 감추려 눈을 손으로 감쌌지만 자꾸 나오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언덕 위쪽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각하! 각하! 대군 마마입니다! 저 위쪽에 떨어져 계셨습니다!”
베아트릭스가 눈가의 눈물을 얼른 닦아냈다. 흙투성이가 된 소녀를 업은 한 가디언이 큰 바위들 사이를 깡총깡총 뛰어넘어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팔은 피에 젖었고 옷도 엉망이 되었지만 가디언의 등에 업힌 건 분명 마하 대군이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베아트릭스는 짧은 한 마디를 건네는 정도로 관심을 끊었다. 죽은 줄 알았던 대군이 살아 돌아왔으니 분명 기뻐해야 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도저히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페로도, 베아트릭스도 살아 돌아온 마하의 모습에서 힘없이 고개를 돌리며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카이가 가디언의 등에서 내려서는 동생에게 팔을 뻗어 반갑게 맞아주었을 뿐이었다.
“잘 됐다, 무사했구나, 어떻게 된 거야?”
“조종석에 빈 보조석이 하나 있었거든. 그래서 오빠 있는 데로 나갈려다가 말았어.”
마하는 자신의 선택이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고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른들의 침통한 표정을 못 본 척 오빠에게 우쭐하니 떠들기 시작했다.
“아참, 이거 봐라. 나 잡고 있던 놈한테서 10골드 대신 챙겨왔어.”
마하가 손에 들고 온 먼지투성이 검은 가방을 불쑥 내보였다.
“10골드라니?”
“그런 게 있어. 셔틀 떨어지면서 그놈 제정신 못 차리길래 내가 얼른 슬쩍 했어.”
마하가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앞니를 드러냈다.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맞추면 가방은 오빠 줄게.”
동생의 진지한 표정에 카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가방 안쪽을 응시했다. 베아트릭스와 페로를 한 번씩 쳐다보았던 카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으면……100골드라도 줄께.”
마하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 꼬마의 철없는 장난에 진지한 베아트릭스가 버럭 화를 낼 뻔했지만 곧 하려던 말을 접어야 했다.
“이런, 세상에.”
울적해 있던 베아트릭스의 얼굴에 일순간 혈색이 살아났다. 마하의 작은 손 안에서는 페로가 가져온 것과 똑같은 모양의 금빛 막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14번이잖아!”
울컥해진 베아트릭스가 막대를 확 집으려 했지만 마하가 얼른 손을 빼내어 품에 감추었다. 하지만 분명 조찬 시간에 베아트릭스의 손에 잠시 들어왔던, 바로 그 ‘14번 막대’였다.
“싫어요, 제가 폐하께 드릴 거예요.”
마하가 작은 막대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며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이게 폐하 살릴 수 있는 거라면서요, 꼭 제가 드릴 거예요.”
“이게 어디…….”
발끈한 페로가 뭐라 언성을 높이려는 것을 베아트릭스가 얼른 막고는 이 소녀를 품에 꼭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쨌든 잘했다, 네 덕분에 폐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겠다.”
베아트릭스는 이 예쁜 소녀의 뺨을 만져주며 웃었다.
황제에 대한 마하의 유별난 애교는 내명부에서 거의 악명 수준이었다. 이 꼬마는 황제가 엄마 네페티의 침소에 들 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찾아가 자기에게도 뽀뽀해 주지 않으면 안 비켜준다고 떼를 쓰곤 했고, 가끔은 황제의 처소에 새벽부터 쪼르르 달려가서는 목욕이나 몸단장도 자기가 해 주겠다며 전담 시녀들을 쫓아내기도 했었다. 덕분에 처소 담당 시녀들에겐 ‘황태후 다음으로 무서운 불청객’으로 찍혀있을 정도였다.
“폐하께서도 정말 기뻐하실 거다. 그런데, 이거 말고 다른 건?”
베아트릭스의 물음에 마하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뿐인데요?”
“아니, 이거 말고 12번도 있어야…….”
베아트릭스가 막 물으려는 순간, 페로가 갖고 있던 할룩스가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페로는 짜증스레 꺼버리려 했지만 그곳에 나타난 발신자 명의가 심상치 않았다.
“하심 경이?”
막 통신이 연결된 하심은 페로의 잔뜩 긴장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온몸에 자상을 입은 채 병상에 누워있던 그는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며 재촉하는 의료진들을 거칠게 쫓아내고는 할룩스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놈들이 뭘 하려는 건지 알아냈습니다.”
고통스런 표정의 하심은 조금 전 의사들에게서 빼앗은 가방을 내보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가방에서 꺼내놓은 바람어 서류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뭐 새로운 것이라도 있는 건지 내심 기대에 부풀었던 페로가 허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이미 우리도 알아냈네. 황상의 손목에 박은 ‘잔딕’과 같은 걸 박으려던 것 아닌가.”
“아뇨, 아뇨,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하심이 고개를 저으며 더 목소리를 높였다.
“황상의 손목에 박힌 걸 빼려면…….”
“그것도 안다니까! 앞뒤 번호의 막대 2개가 필요하지 않나! 황상께는 13번이 박혀 있고…….”
신경이 곤두선 페로가 언성을 높였지만 하심은 요지부동이었다.
“막대 2개요? 아뇨, 하나가 빠졌습니다.”
“또 하나라니?”
페로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앞 번호와 뒤 번호를 양쪽에 손잡이처럼 끼우고 뒤쪽에 [사제의 키]를 꽂아 내부 회로를 파괴한 후에 뽑아야만 숙주가 죽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키? 열쇠 같은 거?”
“아뇨, 큰 오팔이 붙은 쇳조각이라고 합니다.”
하심은 누군가 악필로 흘겨 써 놓은 쪽지를 내보였다. 손으로 대충 그린 그 스케치에는 열쇠라는 단어와는 쉽사리 연결되지 않는 타원형의 보석 같은 것이 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폐하께 필요한 건 총 세 개입니다. 막대 두 개와, 사제의 키.”
하심이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런 빌어먹을.”
페로는 마하가 여전히 품에 꼭 껴안고 있는 막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우리가 가진 막대는 지금 저 하나뿐이야.”
“14번은 구하셨나요?”
“저게 14번이라는 건 어떻게 아나?”
페로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하심을 돌아보았다.
“12번은 아직 못 구했다.”
“당연하죠.12번 막대는 거기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뭐?”
페로와 베아트릭스가 굳은 표정으로 하심의 입술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건…….”
격앙되어 있던 하심의 눈가에 갑자기 눈물방울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12번은 돌아가신 오르마즈 경 머리 속에 들어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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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 완수해야 할 미션이 이제 주어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