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73화 (868/1,132)

< -- 873 회: Part 5. 오염된 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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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이곳에서 모두 철수할 예정이다. 우리 단원들도, 코메트도 모두 이곳을 떠난다. 미운정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짐을 싸며 다시 돌아본 이 저주받은 땅은 전과는 어딘지 달라보였다.

우리에게도, 코메트의 병사들에게도 이곳의 기억은 평생 기억될 끔찍한 상처로 남은 것 같다. 사제들과의 싸움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병사들 중 상당수는 아직까지도 심한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며 정신과 단원의 숙소를 쉴 새 없이 들락거리고 있다.

가해자도 다를 건 없다. 아니, 어찌 보면 그들이 가장 심각하다. 동굴에서 생존자 수백을 산 채로 태워 죽였던 수색대 장병들은 절반 이상이 수면장애와 발작, 식이장애를 호소하고 있고, 이미 2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몇몇은 지휘부가 자신들에게 환각제를 먹여 그런 짓을 저지르게 했다고 호소했지만 테번은 공식적으로는 부인했다.

그런 희생을 감수하며 우리가 건진 건..........잘 모르겠다. 우리가 데려갈 두 아기와 파란기스, 투르의 시체가 앞으로 정말 세상을 바꿀지, 위대한 자하크 현신께서 지금의 젊고 아름다운 20대 몸을 영원히 늙지 않게 바꾸실 수 있을는지.

하지만 이곳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할 일이 있다.

먼 곳으로 마지막 지질조사를 나선 팀을 부득불 따라나섰다. 그리고는 중간에 ‘몸이 좋지 않아 돌아가겠다.’며 혼자 두 마리의 조랑말을 끌고 일행을 빠져나왔다. 조랑말에 실린 큰 짐을 들키지 않을까 잔뜩 신경을 썼지만 마지막 탐사 준비에 바쁜 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검은 재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판지셰르 분지는 여전히 혼탁하다. 인공강우 이후로 사정이 잠시 나아졌지만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은 우리가 떠나는 것을 기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평소보다 시야갸 훨씬 나은 편이다. 지금 시각이 오후 4시니 돌아올 때는 깜깜한 밤중이 될 것 같다.

카히나가 살아서 지금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과 함께 뒤의 조랑말에 실린 짐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 불쌍한 것 같으니. -

오늘 파란기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사제들의 조상은 외부와는 격리된 이 판지셰르 분지에서 거대 농업회사(그들은 감독관이라 불렀다.)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변형되고, 교배되고, 연구된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들은 우수한 형질만을 남기고 무자비하게 살해하거나 죽도록 방치했고, 사제들은 그 가혹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였다.

이곳을 뒤덮은 검은 재는 감독관인 농업회사가 생장 촉진을 위해 만든 실험적인 물질이었다고 한다. 문명의 몰락과 무정부상태로 기근이 연이어지고, 굶주린 자들이 넘쳐난다는 이유로 그들은 안전성도 확인되지 않은 이 물질을 무차별적으로 팔아 그 와중에도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결국은 토양이, 작물이, 동물이, 마지막엔 사람까지도 모두 오염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들은 분지 안의 피실험 동식물(인간을 포함해)의 한 세대를 짧게 해 실험 결과를 빨리 얻기 위해 검은 재를 악용했던 것 같다. 사제들은 농업 회사의 탐욕과 시궁창 같은 현실을 딛고 피어난 연꽃 같은 존재였을까.

결국 외부 세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통제도 무너진 틈을 타 사제들은 결국 [감독관]들을 물리치고 반란을 일으켜 철성을 차지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자유를 찾고 바깥세상에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행성의 대부분이 살인적인 열풍 혹은 살을 에는 찬바람과 산소 부족, 수많은 오염물질로 아무도 살 수 없게 된 후였다.

거기에 인근의 ‘검은 재’ 공장이 통제를 상실하고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그나마 사람이 살 수 있었던 이 부근마저 검은 지옥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가혹한 통제를 물리치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이제 혹독한 환경과의 끔찍한 전쟁을 재개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통제하고, 외부와 격리하기 위해 만들었던 이 ‘검은 철성’이 결과적으로는 보호막이 되었다. 생존자들은 [관리자]의 흔적이며 자신들이 그들을 물리친 힘이기도 했던 [쇠와 총]을 모두 부수고 녹이어 그들의 방벽인 검은 철성을 보강하고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들이 개량한 철성은 안쪽 분지를 향해 끊임없이 고압의 정화된 공기를 내보내어 외부의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바깥쪽에는 하강기류를 만들어 검은 재가 하루빨리 대기 중에서 사라지도록 작동했다고 한다. 분지를 에워싼 높은 산맥은 외부의 가혹한 환경, 침입자로부터 그들을 지키는 자연방벽이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산맥을 넘어온 우리들이 분지까지 들이닥치면서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고, 사제들은 철성의 정화 시스템을 껐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분지 안쪽의 환경이 점점 열악해지면 우리의 수색작업도 어려워질 테고, 결국은 포기하고 떠나리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전술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집요함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지금 내 앞의 거치적거리는 암흑도 그 때문이겠지.

어쨌든, 난 길을 재촉해야 한다. 점점 어두워지는 길을 뚫고 홀홀단신 철성이 있는 산으로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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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난 지난번 5백여 명이 타죽었던 깊게 팬 통로에 도착했다. 짧은 해가 이미 져버려서 주변은 온통 짙은 암흑이다.

이 정체불명의 깊은 통로가 산에서 내려오는 수로일 것이라는 우리의 멍청한 예측은 착각이었다. 이건 철성에서 내보내는 맑은 공기를 분지 전체에 퍼뜨리는 순환 시스템의 하나였다고 한다.

난 그 수많은 병사들을 몰살시킨 ‘불타는 용’의 정체를 물었지만, 그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아는 건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악용할 것을 염려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것이 이 철성만의, 아니 카히나가 감추고 싶어 했던 비밀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난 수로를 타고 계속 올라가며 혹시라도 누가 따라오지 않는지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 봤자 뒤따라오는 조랑말의 큰 눈 두 개를 빼면 시커먼 암흑뿐이다. 이래서는 정말로 추격자가 있다 해도 바로 등 뒤에 접근하지 않는 한 기척도 못 느낄지 모르겠다.

끔찍한 일을 너무 많이 겪어서일까. 이미 지나온 길이 이유도 없이 불안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너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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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 옆을 따라 계속 올라간 나는 5백명이 타 죽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일단 말을 내렸다. 내 기억 그대로, 그곳엔 현장 수습 작업 당시에 설치해 놓았던 줄사다리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곳도 꼭 확인하고 싶었다.

준비해 온 배낭을 등에 짊어진 나는 입에 랜턴을 꽉 물고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험악한 환경 속에서 8달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던 사다리는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보다 더 빨리 늙어 있었다. 군데군데 삭고 망가진 사다리는 내가 짚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뜩이나 예민해진 내 불안감을 자극했다. 시커먼 재 때문에 바닥이 안 보이는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겁나는 것이 없었던 20대 시절, ㅤㅋㅞㄹ크의 정글에서 봉사의(醫)로 활동했을 때 이후로 이런 위험한 일을 해 본 일이 한 번도 없다보니 추운 날씨임에도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왜 하필 치렁치렁한 성직자용 로브를 입고 왔을까, 내려오는 내내 후회를 했다.

다행히 통로 밑바닥에 도착할 때까지 사다리는 무사히 버티어 주었다.

- 어디였지? -

좁은 통로 밑바닥을 한참 맴돌며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고요함이 너무 무서워서 스스로에게라도 계속 말을 하고 싶었다. 시체에 덮는 푸른 거적이 랜턴 불빛에 드러난 순간, 난 익숙한 광경임에도 지레 놀라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예상대로, 시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손가락이나 작은 뼈들은 이미 없어졌고, 팔과 목은 몸통에서 떨어져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에 이들의 시체도 함께 거두어갔어야 했지만 전사자 시체도 보관 못 해 아수라장이 된 판국에 불에 심하게 타 샘플로서의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던 ‘평범한’ 세 배신자들의 시체까지 챙길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었다.

비록 동족을 배신한 자들이지만 변변한 무덤도 갖지 못한 채 검게 타고 바싹 말라비틀어진 채 내팽개쳐져 있는 것을 보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 지금이라도 내가 풀어줘야지. -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지만, 그때는 죄책감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핑계거리였다. 난 가져간 외과수술 도구로 시신의 두개골을 열고 안에 집게를 넣었다. 예상대로, 안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쇳조각이 잡혔다.

- 1번. -

희생물의 머릿속에서 화마(火魔)를 피한 1번 잔딕 막대는 상태가 무척 좋았다. 겉에 묻은 살점의 흔적을 닦아내고 보니 반짝거리며 윤이 날 정도였다. 나머지 두 구의 시체 안에도 3번과 5번 막대가 온전하게 들어있었다. 이제 16개의 막대 모두를 확보한 셈이다.

- 이래서 한 숫자씩 건너뛰었구려. -

난 손바닥에 있는 1, 3, 5번 막대를 보며 다시 카히나를 떠올렸다. 그는, 아니 그의 어머니는 집단의 소중한 식량을 훔쳤던 이 중죄인들에게서 언젠가는 막대를 다시 제거해 줄 생각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연이은 3개의 번호를 사용했다면 셋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했을 테니.

막대를 챙기고 막 일어서려던 나는 무언가 눈앞이 번쩍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던 나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곳을 한참이나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기립성 저혈압이거나 섬광증이었던 것 같다. 벌써 그렇게 늙었나 생각하니 허탈해진다.

난 위험천만한 줄사다리를 다시 붙들고 통로 바깥으로 올라왔다. 혹시나 하고 불안해  했었지만 다행히 유순한 두 마리 조랑말은 그 자리에서 침착하게 날 기다려주고 있었다.

- 가자, 가자꾸나. 반은 왔으니. -

난 조랑말을 타고 다시 산을 오르는 중이다. 이 글을 계속 쓰면 두려움이 좀 덜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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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철성 주변은 오늘 아침 이곳을 지키던 경비 소대가 마지막으로 퇴각하면서 이제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이 버리고 간 잡다한 쓰레기와 전투식량 봉지들이 그들이 다녀갔다는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철성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대문은 여전히 곰보 투성이의 몰골로 서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몰랐지만, 이 흔적은 사제들이 주축이 된 실험물들과 마지막 감독관들과의 처절한 싸움의 흔적이었다. 난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100명 넘는 용맹한 저항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 사이를 지났다.

주인을 잃은 검은 철성은 호흡을 멎은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다. 이곳에 카히나의 영혼이 이곳을 차마 못 떠나고 여전히 맴돌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난 조랑말에 싣고 온 자루를 철성 앞 정원터에 내려놓았다. 혹시나 하는 맘에 랜턴으로 정원 안쪽을 비춰보던 나는 지난번 왔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낮은 원형 울타리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무릎 높이 정도의 철망 안쪽에 이미 말라 죽은 모종 몇 포기가 보였다. 춥고 척박한 내 고향 코윈에서 흔하게 봤던 것이었다.

- 돌매화? -

이곳에 살던 사제 일가 누군가가 죽기 전 심었던 것 같다. 열매도 없고, 먹지도 못 하는 화초를 굳이 왜 심었을까? 어쩌면 카히나는 여기서 푸른 꽃밭을 보는 날을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첫 시도는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죽어버렸지만.

난 죽은 돌매화 앞에 삽과 곡괭이로 구덩이를 팠다. 땅은 단단했고, 익숙지 않은 노동에 손이 쓰라렸지만 난 온몸이 땀에 젖어가며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길고 깊게 땅을 팠다.

- 이곳에 돌아오게 되면 내 손수 꽃밭을 꾸며 주리다. -

땅을 다 판 나는 자루를 열고 그 안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카히나를 향해 속삭였다. 냉동이 막 풀린 시체는 창백했고, 고문의 흔적으로 어디 한 군데 온전한 곳이 없었지만 내겐 여전히 이전처럼 아름다웠다. 난 생전의 카히나가 저 돌매화 모종을 이곳에 정성껏 심는 모습을 혼자 상상해 보았다.

- 내 살아있을 때 이곳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

처음 느껴 본 그의 입술은 전혀 차갑거나 거칠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그를 보내주어야 했다. 난 그를 구덩이 안에 뉘여주고 내가 입고 있던 털망토로 그 위를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한 삽 한 삽 떠넣었다.

볼록해진 봉분 위에 파란기스가 써 준 이곳 말로 된 팻말을 박았다.

마지막 카히나의 사제가 여기에 누워 있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햇볕이 들고 푸르러질 날을 그는 영원히 기다리며 지켜볼 것이다.

그의 무덤 앞에 앉아 글을 쓰는 동안, 무슨 이유인지 두려움이 사라지고 맘이 평온해졌다.

이제 철성에 들어갈 참이다. 떠나기 전, 반드시 검은 철성을 켜 놓아야 한다.

파란기스의 말대로라면, 철성이 꺼진 상태로 1년이 넘어가면 판지셰르의 낙원도 다른 곳들처럼 열폭풍과 혹한이 번갈아 몰아치는 지옥으로 변할 것이라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여기도 한두 달 이내에 아무 생명도 남지 않는 완전한 황무지로 변할 터였다.

탐사 초기, 우리는 비록 짐승에 가까운 돌연변이가 되었을지언정, 아직 살아 있는 생존자를 분명 여럿 봤었다. 아니, 카히나를 따르던 동굴의 생존자 중 어쩌면 단 한 명이라도 살았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파란기스는 카히나가 내게 이걸 남겨준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막 일어서려다가 어둠 속에서 또 하얀 무언가를 보았다. 빌어먹을 섬광증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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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광증은 특정한 상황에서 눈앞이 번쩍하며 갑자기 있지도 않은 빛이 보이는 증상을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 노안이 온 분들께 흔한 증세입니다. ^^

타리프의 일지 마지막 부분이고......끊기 뭣한 부분이라 좀 깁니다.

아직 두 편쯤 남은 일지의 끝이 이번 파트의 엔딩이고요, 살짝 쇼킹할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살짝 네타를 흘리자면.....지금 나오는 이곳이 이후 현재 시점의 무대가 됩니다. (이미 눈치들 채셨을까요?? ^^;;)

일지가 끝나면 다음 파트 [저승길에 남겨놓은 발자국]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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