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74화 (869/1,132)

< -- 874 회: Part 5. 오염된 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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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 멎은 철성 안은 암흑과 고요함뿐이었다. 내 걸음이 내는 요란스런 발소리에 잔뜩 긴장하며 랜턴 하나에 의지해 그 안을 조심조심 걸어 들어갔다. 이곳에서 하룻밤 지냈던 그날처럼 뒤쪽의 풍력발전기를 연결해 조명이라도 켤 것을 그랬다며 뒤늦게 후회를 했다.

어쨌든, 내 짐작이 맞았다. 카히나가 내게 남겨준 ‘사제의 키’는 검은 철성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금색 탑을 여는 열쇠였다. 용접기로도, 갖은 절단기기로도 꿈쩍도 않던 그 두꺼운 금고문은 사제의 키에 박혀 있는 오팔의 광채를 인식하며 비로소 내게 길을 열어주었다.

내부의 잠금장치가 자동으로 풀리고 어른 한 명 가까스로 기어들어갈 크기의 작고 두꺼운 문이 자동으로 밀려나왔다. 잔뜩 긴장한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열린 문 안쪽으로 랜턴을 비추려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문이 완전히 열린 순간 안에서 갑자기 뿜어나온 빛에 깜짝 놀라 눈을 가려야 했다. 이 저주받은 행성에 온 이후로 처음 본 눈부실 만큼 환하고 강한 빛이었다.

- 세상에 -

빛에 놀라 잠시 동안 안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탑 안쪽은 원형 평면의 작은 방이었다. 용기를 내어 안으로 막 들어서던 나는 문가 바닥에 있던 무언가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그곳엔 지난번 카히나가 코메트 병사들에게 난사했던 [총]이 떨어져 있었다. 그곳엔 카히나의 혈흔이 아직 남아있었고, 그가 미처 다 쏘지 못했던 금색 실탄이 남아있었다.

내부 벽면은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한쪽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들이 까마득히 높은 천장까지 꽉 채워져 있고, 반대편에는 온갖 복잡한 계기판과 스위치로 가득한 기계장치가 되어 있다. 그리고 제일 안쪽, 투명한 커버 안쪽에는 정체 모를 가는 튜브 수천, 수만 개가 틈새 하나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커버에 무심코 손을 대 열어보았던 나는 안에서 스며 나오는 강한 냉기에 화들짝 놀라 다시 닫았다. 튜브에 달린 라벨은 읽을 수 없지만 그곳에 붙은 동식물의 작은 사진들에서 내용물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탑은 이곳에서 오래 전 없어진 생명들을 보관하는 방주였다.

처음엔 대체 어디서 동력이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파악한 동력은 뒤쪽에 있는 풍력발전기 몇 대가 전부였고 그것으로는 조명 몇 개 켜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파란기스는 분명 사제들이 이 철성을 돌렸었다고 말했었다. 거대한 철성을 움직이고 냉동장치를 작동시키는 데 쓰이는 어마어마한 동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난 계기판에서 어렵지 않게 힌트를 얻었다. 그곳엔 이곳의 땅밑 깊숙한 곳과 연결된 파이프가 모식도로 그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시설은 지각의 열을 이용해 움직이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복잡한 계기판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철성을 어떻게 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뒤에 꽂힌 책들 중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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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읽을 줄도 모르는 문자로 된 이 낯선 책들을 한참이나 뒤적거렸다.

밖에서 조랑말 울음소리가 난다. 날씨도 추워졌을 텐데 너무 오래 그놈들끼리 놔뒀던 것일까?

아무래도 말들을 건물 안에 들여놔야겠다.

< 긴 공백. 날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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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식을 찾은 건 프리깃이 귀향 항해를 위해 요란하게 엔진 소리를 내고 있던 새벽녘이었다.

난 검은 철성이 아니고 판지셰르 마을의 내 숙소 병상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누워있었다. 그 와중에도 마을은 퇴각 준비로 아수라장이었고, 내 병상 옆에서도 단원들이 짐을 옮기느라 어수선했다.

기억이 끊긴 그 시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되살리는 데는 한 시간 가까이가 걸렸다. 금빛 탑 안에서 책을 읽다 말고 조랑말 울음소리에 나간 것을 겨우 기억해냈고, 다행히 그 뒤의 사건들이 사슬처럼 엮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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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밖으로 나오니 굉장히 추웠던 기억이 났다. 난 외투와 중요한 물건들이 든 가방을 탑 안에 두고 문을 열어놓은 채 나온 것을 후회했지만 어차피 말들을 데리고 바로 돌아올 참이라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밖에 매여 있던 조랑말들은 어딘지 불안해 보였다. 난 그저 춥고 어두운 곳에 오래 방치해 두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두 마리를 철성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조랑말을 당기려던 순간 어디선가 분명 발소리가 났다. 자정이 가까워져 주변은 깜깜했고, 통신도 되지 않고,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도 없다.

솔직히 그 순간 다리가 얼어붙을 만큼 무서웠다.

난 짐에 함께 실어놓았던 자그만 호신용 석궁을 살그머니 꺼냈다. 사실 제대로 쓸 줄도 모르지만, 일단은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뭐 하십니까. -

때로는 사람이 제일 무섭기도 하다.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이곳에서 갑자기 만났다는 것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니, 최악의 상황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난번 내 숙소 앞에서 소동을 벌였던 바로 그 부단장이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다.

- 자네가 여기 무슨 일인가. -

난 치렁치렁한 로브 소맷자락 속에 석궁을 감춘 채 물었다.

- 그러시는 단장님께선요? -

짙은 어둠 속에서 하늘거리며 나타난 형상은 하나가 아니었다. 부단장의 뒤에는 젊고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따르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내가 한때나마 좋아할 뻔했던 젊은이였다.

- 야투 군 자네도? -

이들이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나타난 것인지는 몰라도, 난 바싹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둘 다 다하카르 교단 소속의 성직자들이었고, 야투 연구원은 워낙에 젊은데다가 몸도 좋고 기운도 세기로 유명했다. 조금 전, 공기통로에서 잠시 보았던 불빛이 섬광증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 여긴 왜 왔냐고 물었네. -

- 임무 도중에 얻은 물건과 지식을 사적으로 독점하는 건 금지되지 않았던가요. -

부단장은 밑도 끝도 없이 내게 쏘아붙였다. 난 그들이 ‘사제의 키’를 이미 알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의 털이 쭈삣 곤두서는 것 같았다. 아기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올 때, 저 청년에게 카히나와 오팔에 관해 쓸데없이 많은 말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저 청년이 그만큼 눈치가 빠르다면 내 잘못이 분명했다. 아니면 파란기스와의 대화를 밖에 있던 코메트 장교가 엿들었을까.

- 그런 것 없으니 돌아가게. -

- 탑을 여셨죠? -

부단장이 노골적으로 물었다. 난 억지로 태연하려 했지만 부단장은 내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빤히 보고 있었다.

- 트라카 교단이 독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까? -

부단장은 날 옆으로 밀어내며 철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 부단장의 옷자락을 거칠게 붙들었다. 저 안에 있는 역사는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 가져야 할 것들이었다.

- 들어가지 말라니까! -

내 저지에 부단장은 기다렸다는 듯 돌아서면서 무언가를 확 디밀었다. 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잠시 깨닫지 못했다.

나도 놀랐지만, 날 찌른 부단장도 나만큼이나 놀란 것 같았다. 그가 내 옆구리를 노리고 서툴게 내지른 칼은 내 왼팔을 베고 골반 옆 근육에 박혀 있었다. 그자는 칼이 빗나간 데 당황했는지 잠시 멈칫거렸다. 그 순간, 죽을 수 없다는 본능이 내 머리보다 먼저 팔을 움직였다. 난 오른손에 감추고 있던 호신용 석궁을 부단장의 옆구리에 대고 당겼다. 조금 앞서갔던 야투 군이 부단장의 비명에 놀라 뒤를 휙 돌아보았다.

- 모간님! -

내 석궁에 쓰러지는 부단장을 본 아프라스 야투 단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저 청년도 날 죽이러 이자와 공모를 하고 온 것일까? 아니, 어쩌면 부단장의 독단적인 공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그런 더러운 일은 젊고 힘도 센 아랫사람에게 시키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던가?

어쩌면 청년은 내가 선공을 했다고 오해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는 저 청년에게 설명을 해야 할는지, 일단 공격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이놈이 날 먼저. ―

내가 설명을 했지만 그는 바로 허리춤의 칼을 빼들고 내게 덤비려 했다. 난 다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 청년도 내 손에 들린 작은 석궁을 보았다.

그는 내가 옆구리 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휘청거리는 것을 힐끔 보고는 갑자기 철성 쪽으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모하게 덤비느니 내가 피를 흘려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속셈 같았다.

- 서! 너도 한패였던 거냐! -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잘 모르겠다. 어둠 속에서 저 청년을 놓치기 전에 반드시 저지해야 했다. 나는 다친 몸으로 그 뒤를 쫓아가며 다급한 맘에 마구 석궁을 쏘았다. 그렇지만 피를 흘리고 걸어가며 쏜 볼트는 발 빠른 젊은이를 계속 빗나갔다. 그는 내게서 멀어지며 시야에서도 점점 흐려졌다. 남은 볼트도 이제 한 발뿐이었다.

- 어딜 가냐고! -

아무리 젊고 발이 빨라 봤자, 도망갈 곳은 뻔했다. 난 철성의 문에 석궁을 미리 겨누고 기다렸다. 예상대로, 철성 문에 들어가려는 청년의 푸른 로브가 짧게 눈에 들어오자마자 마지막 한 발을 당겼다. 동시에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 괘씸한 놈 같으니. -

난 욕을 중얼거리며 그쪽으로 걸었다. 계단을 오르며 옆구리가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난 위험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문가 바닥에는 핏자국만 약간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난 눈앞이 아찔했다. 석궁은 이제 비었으니 그 젊은이가 얼마 다치지 않았다면 눈치 채기 전에 지금 도망치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그때, 철성 안쪽에서 걸음소리가 울려왔다.  걸음소리가 불규칙한 걸 보니 절고 있는 것 같았다. 조심조심 내딛는 것 같았지만 텅 빈 공간 안에서 소리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맙소사, 난 탑을 활짝 열어놓고 왔다는 것을, 문가에 카히나가 쓰던 [총]이 내버려져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고는 도저히 도망갈 수가 없었다.

난 탑을 향해 필사적으로 걸었다. 그는 칼을 지녔고, 나보다 젊고 튼튼하니 싸워서 이기긴 어렵지만 그저 나보다 더 많이 다쳤을 수도 있다는 요행 하나에 내 목숨을 걸기로 했다.

그도 쫓아오는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점점 급하게 걸음을 내딛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탑의 열린 문에서 나오는 환한 빛을 배경으로, 도망치고 있는 청년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청년에게 카히나의 무기를 빼앗긴다면, 저 탑의 내부를 공개해 버린다면 사제의 키를 내게 넘겨준 그를 저승에서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부주의하게 문을 열고 나온 내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 쫓아오지 말라고요! -

뒤를 돌아보고는 파랗게 질린 청년이 다리를 절며 탑으로 계속 다가갔다. 그는 볼트에 엉덩이를 맞아 한쪽 다리를 제대로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와의 거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탑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문가에 세워진 카히나의 총도 시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정신이라면 야투 군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들어가지 마! -

난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악을 쓰며 외쳤다. 아니나 다를까, 청년은 문 안으로 얼른 손을 뻗어서는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던 총을 덥석 붙잡았다. 그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총이 생각 외로 무겁다는 것을, 그리고 문의 지름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총이 문에 탁 걸린 순간, 내가 청년의 뒷덜미를 덮쳤다. 난 그와 몸싸움을 하며 함께 바닥을 굴렀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총은 다시 탑 안에 떨어졌다. 난 그의 손에서 칼을 떨쳐내려 했지만 젊은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그의 발길질에 채여 앞으로 밀려났다.

야투 연구원은 나를 밀어내고 다시 손을 넣었다. 카히나의 총으로 날 쏘아 죽이려는 것 같았다.

- 안 돼, 거기 있는 건! -

저 젊은이를 힘으로는 당할 수 없었다. 다른 수단이라도 써야만 했다. 난 가망 없는 몸싸움 대신 문짝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들어가 있는 구멍 위로 철제 문짝을 힘껏 닫아버렸다. 팔꿈치 아래가 문짝에 낀 야투 연구원이 비명을 질렀다.

- 손 빼라고! -

그는 내 경고에도 결국 왼손에 쥔 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오른손에 쥔 칼을 휘두르며 비키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문을 열어주면 그때는 내가 죽을 터였다. 난 어깨로 문을 밀며 버텼고, 결국 그의 칼이 내 겨드랑이를 찔렀다.

변명 같지만, 그때는 이후 어떻게 될지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난 한 손으로는 칼을 쥔 그의 손을 붙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사제의 키’를 꺼내 문 위의 홈에 꽂았다. 처음 열릴 때처럼, 문이 모터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 손 빼라고 했잖아! -

내가 칼을 든 그의 손을 비틀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문이 팔뚝을 조여들면서 뒤늦게 공포에 빠진 야투 연구원이 그제야 총을 놓고 얼른 팔을 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닫히는 문틈에 팔이 굳게 끼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두꺼운 자동문은 그의 팔을 무자비하게 짓이기며 야속할 만큼 천천히 닫혔다.

살려달라 울부짖는 야투 연구원의 찢어지는 비명과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철성 안을 한참이나 끔찍하게 맴돌았다. 그의 공격이 멈추면서, 피를 많이 흘린 나도 기운을 잃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난 비명소리가 잦아들자 그제야 용기를 내어 야투 군 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해 놓은 짓이라고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그의 왼팔은 이미 절단되어 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하지만 닫힌 문틈에 낀 옷자락 때문에 그의 몸은 여전히 문에 매달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의식을 잃은 듯 보였지만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고, 오른손엔 여전히 칼을 쥐고 있었다.

- 야투 군. -

두 번이나 불렀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쇼크로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청년을 살피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난 야투 군을 그대로 놓아둔 채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혼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맘은 무거웠다. 그렇지만 그때는 내 몸 가누기도 힘들 만큼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니, 할 수 있었다 해도 내게 칼을 휘둘렀던 청년을 구해서 데려가기는 너무 무서웠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죽일 만큼 모질지도 못했다.)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올 생각을 했던 것일까? 모르겠다. 그런 고결한 생각까지는 할 정신도 없었다. 성직자라는 작자가 혼자 살기 위해 상황을 합리화했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분명 그때의 나는 철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부단장의 칼에 찔린 옆구리에서, 야투 연구원의 칼에 찔린 겨드랑이에서 계속 피가 흘러 바닥을 기는 것도 힘들었다. 난 두 무릎과 한 팔로 바닥을 질질 끌며 밖으로 향했다. 탑 안에 남겨두고 온 가방, 그 안에 들어있던 3개의 잔딕과 수술 도구 따위는 그 때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야 된다는 절박함 뿐이었다.

조랑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찬바람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문이 가까워지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머릿속이 멍해지고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다. 나가는 것도, 돌아가는 것도 모조리 포기하고 그냥 이 자리에 눕고만 싶었다. ‘힘들다.’라는 말이 몇 번이나 튀어나왔다.

고향 코윈의 하얀 얼음밭 풍경이, 그새 몰라보게 자랐을 두 아들놈의 얼굴이, 아내 시린의 모습이, 그리고 내게 이 키를 준 카히나의 마지막 모습이 바닥에 보여 차마 누울 수가 없었다.

철성 문을 나선 나는 그 앞의 계단을 반쯤 구르듯 내려가 바닥에 뒹굴었다. 바닥에서 신음하는 날 맞아준 건 조금 전 내 손에 죽어 쓰러져 있던 부단장의 부릅뜬 두 눈이었다. 덕택에 난 공포감에 소스라치게 놀라 조랑말 쪽으로 기어갈 수 있었다.

- 제발. 제발 좀 데려가 다오. -

조랑말의 다리와 안장끈을 붙들고 기를 쓰며 일어섰다. 보통 말이었다면 오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다. 버둥거리며 안장에 오른 나는 키 작은 조랑말이라는 것을 신에게 몇 번이나 감사했다.

- 빨리 가자고. -

말의 목을 안고 무작정 출발시켰다. 착한 조랑말은 내 출발신호에 맞춰 움직였다. 방향감각도, 시간감각도 없었다. 또각거리며 걷는 조랑말의 답답한 걸음소리에 짜증이 났지만 더 재촉할 기운도 없었다. 몸을 웅크리고 갈기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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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프의 일지는 이제 딱 한 편 남았군요......다음 파트부터는 기다리시던(?) 카렐이 다시 등장합니다.

출판본 원고작업 때문에 요즘 좀 바쁩니다. 주문도 함께 받아야 하고요. 한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네요. ^^

이전에 야X동 사이트에 다른 분들이 출판공지글을 대신 올려주셔서 그거 보고 오신 분들이 꽤 계셨는데 제가 그곳 회원이 아니다보니 이번 출판공지글도 올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아이디 있으신 분 계시면 도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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