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75 회: Part 5. 오염된 자들 -- >
.
.
.
날 발견한 건 마을 주변을 순찰하던 코메트 병사들이었다. 피투성이 몰골로 조랑말 위에 축 늘어진 나를 보고는 처음엔 죽은 것으로 알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랑말이 어떤 길을 거쳐 마을로 돌아왔는지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프리깃이 출발하기 직전 돌아온 것만도 기적이었다.
결국 내 발로 프리깃에 오르지는 못했다. 절반 혼수상태 속에서 들것에 실려 프리깃 해치에 오르며, 난 검은 대지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그 흐린 의식 속에서도, 거대한 검은 폭풍이 몰아치며 마을을 뒤덮던 판지셰르의 지옥 같은 풍경은 놀랄 만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치료를 맡은 단원 말이, 프리깃이 이륙을 하던 순간, 내가 창밖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난 검은 철성을 결국 켜지 못했다. 카히나의 영혼이 끔찍한 폭풍으로 뒤덮인 철성의 땅 밑에서 통곡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상상에 죽고만 싶어졌다. 결국 이곳 전체는 죽음의 땅이 될 터였다.
이 못난 놈, 한심한 놈.
.
.
<공백>
.
.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 말도 안 된다.
방금 찾아온 단원 하나가 야투 연구원이 지금 내 옆 병실에 있다고 말했다. 사고로 왼팔이 잘린 채 실려 왔다고 한다. 대체 뭐지? 그 몸으로 그 먼 곳에서 혼자 돌아왔다니? 그럴 리가 없다.
난 다른 단원에게 야투 연구원의 사고(?)에 관해 자료를 가져오라고 윽박질렀다. 잘못되어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
.
<공백>
.
.
야투 연구원을 데려온 건 코메트 사관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의뢰서에는 무거운 장비를 옮기다가 실수로 팔이 깔려 절단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부단장은 실종으로 처리된 모양이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칼에 찔려 돌아왔고, 실종자가 있다면, 그것도 구조단의 부단장이라면 당연히 출발이 연기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선단은 검은 폭풍이 몰아치고 지옥이 되어버린 판지셰르 마을을 뒤로 하고 아무 일도 없는 양 지극히 정상적으로 출발했다.
의식이 돌아온 후, 코메트 부대장이 프리깃의 의무실에 직접 찾아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인지 물었었다. 그렇지만 난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대체 뭐라 대답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코메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미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개입했는지도 모른다.
.
.
<공백>
.
.
잔딕이 없어졌다.
13개의 잔딕이 들어있던 내 상자 전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빌어먹을!!!
이마 388년, 바유의 달, 28일 13시.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
함께 출발했던 다른 프리깃과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코메트의 일반 장병 2천과 군수품이 실린 초대형 프리깃이다. 비교적 신형인 우리의 중형 프리깃과는 달리 워낙 낡고 오래된 것이라 통신기기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우리 프리깃에 함께 탄 코메트 지휘부도 그리 걱정하는 눈치가 아닌 걸 보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이마 388년, 샤마시의 달, 10일 22시.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
한 달 가까이 걸린 긴 여행이 이제 끝을 맺으려 한다.
워프루트도 없는 오지로 가야 했던 이 길고 긴 항해는 올 때만큼이나 지루했다. 오랜 여행에 질린 사람들은 내일이면 아케메니아 도착해 성대한 환영식을 가질 것이라는, 그리고 착륙장에 가족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말에 모두 들뜬 모습들이다.
한 달의 지겨운 항해가 내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프리깃에 내 발로 오르지는 못했지만, 내 부상도 항해 기간 동안 많이 나았다. 아내와 두 아들 앞에서 내 발로 해치를 걸어 내려갈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지옥에서 홀로 살아남아 새 세계에 첫 발을 디디게 된 파란기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힘든 생활과 굶주림의 때를 벗어낸 그는 출발했을 때에 비교하면 마치 탈피를 하고 나온 나비 같다. 거친 피부가 고와지고 야위었던 뺨에 살이 붙으면서 그는 말 그대로 눈부신 미녀로 변해 있었다. 어머니 못지않게 예쁜 딸 마샤나그를 안은 모습을 보면 마치 성화의 한 장면 같다.
아케메니아에서도 저런 미녀를 본 기억이 있던가? 게다가 영원히 늙지 않는 미모라니, 대체 어떤 남자가 맘을 빼앗기지 않을까!! 1년이 넘게 금욕 생활을 강요당하면서 폭발 직전인 남자들 사이에서 저런 미녀를 지키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난 파란기스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솔직히 말해주지 못했다. 저 여인에게 죽은 생존자들 몫의 행복을 주고 싶던 내 바람이 어쩌면 저 미모 때문에 무너질지도 모르겠다. 도착하자마자 마구스의 하렘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갓난 딸과 영영 헤어지게 되리라는 말을 대체 어떻게 전해야 할까.
솔직히, 파란기스가 우리 교단의 미르 마구스께 가게 되었다는 말에 많이 놀랐다. 아직 젊은 대신관께서 이미 성인인 파란기스를 나이가 많은 미르 마구스께 양보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다른 거래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파란기스만큼이나 나도 맘이 무겁다.
두 아기들은 이전보다 잘 먹으면서 부쩍 살이 올라 더 예뻐졌다. 마샤나그는 그나마 엄마가 있지만, 고아가 된 세네피스는 항상 내 품을 떠나지 않는다. 단원들은 농담 삼아 내게 ‘세네피스 아빠’라고 부르곤 한다. 그 뜻을 아는지, 그 작은 아기가 서툰 발음으로 날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아리다.
파란기스 모녀의 운명처럼, 세네피스를 입양하려는 내 꿈도 무너진 것 같다. 두 아기는 대신관 하렘에서 길러질 거라고 한다. 그러면 남은 평생(두 아기의 수명이 얼마가 되든간에) 현신의 침대만 바라보며 우리 세계와도 결국 단절되어 살아야 하겠지.
대신관께선 20대 초반의 창창한 청년이시니 아마도 40세가 되기 전에 저 두 아기들을 품으실 수…… 씨발, 내가 왜……!!! (욕 부분은 급히 지워져 있다.)
더 이상 못 쓰겠다.
.
.
.
.
.
야투 연구원과는 여전히 불편하다. 아니, 그 젊은이가 날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몇 번 물으려 했지만 그는 그 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은 않지만 아마도 누군가에게서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분명 내게 칼을 휘둘렀었지만 이젠 겁에 질린 저 젊은이가 어딘지 측은해 보인다. 소속 교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단장 편에 섰을 뿐, 내가 아는 야투 연구원은 분명 의협심 넘치고 임무에는 누구보다 충실한 좋은 청년이었다. 날 피해 철성으로 도망갔던 것도, 탑 안의 총에 광적으로 집착하며 칼을 휘둘렀던 것도 부단장의 죽음과 내 손에 들린 석궁에 놀란 나머지 공포감에 튀어나온 돌발행동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부단장을 따라왔던 것 같다.
그때의 일이 얼마나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을지 상상하면 안쓰럽다. 난 그의 변명을 듣고 싶었지만 모두 용서할 테니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는 내 말에도 대답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잔딕을 넣은 상자는 끝내 찾지 못했다. 출발 직전 단원들이 내 짐을 대신 싣는 과정에서 다른 짐에 섞어 들어갔거나, 누군가의 손을 탄 것이 분명했다. 워낙에 혼란스레 진행된 작업이라 이제와 범인을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짐이 섞여 찾지 못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훔쳐간 것이라면 분명 도착 후에 어떤 식으로든 모습을 드러내겠지.
본토에서 긴급 전문이 왔다고 하니 잠시 함교에 다녀와야겠다.
.
.
<공백>
.
.
믿고 싶지 않다. 사고 사실이 믿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내 턱도 없는 의심이 믿고 싶지 않다. 밉든 곱든 그 끔찍한 지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2천의 장병들이 우주 먼지로 변했다니.
단원들도 모두 충격을 받아 말을 잃었다. 그 프리깃엔 의사 출신의 우리 단원들 십여 명도 장기간 여행 중 병사들을 돌보기 위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도 프리깃과 함께 공중 분해되어 버렸다. 단원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며 나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데 슬픔보다 의심이 먼저 드는 건 왜일까.
왜 테번을 비롯한 코메트 지도부는 휘하 장병이 타고 있는 초대형 프리깃 대신 단원들과 헤네티들로 가뜩이나 북적거리고 짐도 많아 애를 먹던 구조단의 중형 프리깃을 탄 것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중요한 표본 일부를 그쪽 프리깃에 나눠 실어달라는 우리의 제안에 왜 코메트의 수송 담당 장교가 그렇게 크게 당황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사제 투르의 시체도 사고 프리깃에 실려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밑바닥 하층민 출신 잡병들이고, 범죄자들까지 섞여있을지언정, 본토에서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버지들이다.
우연일까, 돌아오기 직전, 고향 행성에서 보거나 들은 모든 내용을 기억에서 지우라는 엄격한 훈령이 떨어졌다. 심지어 이젠 [고향 행성]이라는 말도 공식적으로 사용 금지되었다. 우리 프리깃에 탄 고위 간부들에 비해 그들의 입이 관리하기 어렵다는 건 잘 알지만, 설마 비밀을 간수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일을 벌였을까.
그럴 리가 없다. 쓸데없는 의심에 빠지지 말자. 제발.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이 소식에 통곡하고 있을 수많은 본토의 유가족들 앞에서 어떤 표정을 보여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다. 아무래도 공항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아들들 앞에서 환히 웃어 보이지는 못할 것 같다.
신이시여, 고향을 그리며 어두운 스페이스에서 헤매고 있을 그들의 영혼을 제가 가는 그곳으로 함께 인도해 주옵소서, 제발.
이마 388년, 샤마시의 달, 25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
돌아오는 동안 본토에서 새로 받은 자료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해 보았다. 본토의 지리부 탐사대 친구들이 고향행성 인근의 행성들에서 원시적인 유목 생활을 하던 독립 이주민을 찾아냈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 뒤에 출발했다던 2백여 탈출집단 중 하나가 운 좋게 살아남아 약간의 퇴보를 거쳐 생존했던 것 같다.
덕택에 지리부에서 새로운 생존자가 발견된 그곳에 새 지명을 부여하고 아케메니아에 직통하는 워프루트 개척을 시작한 모양이다. 지금까지 전례를 보아 짧아야 수십 년, 길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보지 못하겠지.
그맘때면 내가 갔었던 그곳, 카히나가 묻혀 있는 우리의 진짜 고향은 아마도 생명 하나 남지 않은 황무지가 되어 있겠지. 어쩌면 이번에 새로 발견된 두 지역과 그곳의 생존자들이 더 유명해질지도 모르겠다. 수베르, 탈라스라고 했던가, 그들은 우리의 일부로 편입될 것 같다.
창밖으로 푸른 행성 아케메니아가 보인다. 먼 스페이스에서도 유독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저 모습이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그렇지만 그 지옥을 겪은 내 눈에는 저 아름다움이 너무도 불안해 보인다. 지난 1년 반 사이, 내 마음도, 희망까지도 비뚤어진 것일까.
우리가 다녀온 그 지옥, 오랫동안 고향 행성이라는 희망 섞인 이름으로 불러 왔던 그곳, 아니, 이젠 그마저 빼앗기고 [하임달 9번]이라 불리게 될 버려진 행성도 한때는 저랬을 것임을 알기에.
이마 388년, 샤마시의 달, 27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주문게시판 : http://www.tasawwuf.pe.kr
타리프의 일지는 여기까지로 끝납니다. ^^
이제 다음 파트부터는 카렐과 아들 주페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리고 과거 이야기는 오르마즈의 출생을 전후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12월 6일은 출판본 예약마감일입니다. 예약일이 지나면 가격이 약간 올라가니 참고해 주시고요, 책은 크리스마스 전까지 나올 예정입니다. 이번엔 출판본 진도가 연재본을 살짝 추월했습니다. ㅎㅎㅎ
교정작업 도와주기로 하신 네 분들께는 다음주 중으로 연락드리고 원고 보내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