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76 회: Part 6. 저승길에 남겨놓은 발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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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지저분하기는.”
딸 세데스가 자신을 찾는다는 연락에 집무실까지 서둘러 올라온 델루지 가 종부 오르테 라자루스 부인은 여느 때처럼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서류들과 대충 벗어 걸어놓은 옷가지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를 부르고, 집무실을 이 꼴로 만들어놓은 당사자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제후께선 어디 가신 거냐? 어미를 불러놓고?”
오르테는 당혹스런 얼굴로 따라 들어온 비서관에게 눈을 흘겼다.
“갑자기 손님이 오셔서 접견실에 가 계십니다. 곧 오실 겁니다.”
“집무실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급한 손님 때문에?”
오르테의 칼끝이 엉뚱한 비서관에게로 향했다. 세데스가 자리에 있었다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뒤집어썼겠지만 지금은 주인공이 없으니 비서관이 그 매를 대신 맞을 판이었다. 세데스의 신임을 받는 이 최측근 비서관은 대답도 못 하고 머리를 긁적거리기만 했다.
“제후께서 바빠서 이런 것들을 못 챙기시면 아랫것들이 알아서 정리를 해야지! 손님이라도 갑자기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죄송합니다. 제후께서 책상에 손을 대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셔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네 눈엔 더러운 게 책상 위만 보이더냐.”
오르테가 어질러진 방을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행정가 가문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정리정돈이 몸에 밴 꼼꼼한 어머니와는 달리 천성적으로 무골 기질을 갖고 태어난 딸은 굳이 좋게 말하면 수더분했고, 나쁘게 말하면 덤벙대는 것이 흠이었다. 그렇다보니 이렇게 어질러진 방과 책상은 어릴 때부터 이 깐깐한 법률가 출신 어머니의 단골 지적거리였고, 제후가 된 지금도 여전했다.
“내가 이러니 재혼을 못 하지, 쯧쯧.”
오르테가 의자 위에 대충 던져놓은 딸의 옷가지들을 씩씩대며 챙겨들었다. 그가 수많은 청혼자들과 주변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억척스레 시가에 남아있는 것도 가문을 온전히 맡기기는 어딘지 부족해 보이는 딸 때문이었다. 세데스가 야심도 강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똑똑한 인재라며 사방에서 주목받는 게 사실이지만 오르테는 그런 평가의 저변에 ‘지금은 아니다.’라는 가혹한 평가가 깔려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세데스는 남극성당을 졸업하고 제후 역할을 한지 아직 10년밖에 되지 않았고, 똑똑함과는 별개로 젊은 나이에 당연히 수반되는 과도한 의욕과 미숙함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보니 연륜으로 똘똘 뭉친 가문 원로들도 그에 대한 불신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옷은 몰라도 중요한 서류들은 있을 곳에 놔야 할 것 아냐. 누가 보기 전에.”
오르테 부인이 버럭 화를 내며 책상 위 서류들까지 손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당황한 비서관이 얼른 문을 닫고 달려와 책상 앞을 냉큼 차지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됐다니까. 손 대지 말라고 했다며.”
오르테가 짜증스레 비서관을 밀어냈다. 하지만 건장한 체구의 이 비서관은 이상하리만큼 완강하게 저항하며 오르테의 손에 들린 서류까지 휙 빼앗아갔다.
“이러시면 제후께 제가 혼납니다. 제발 이번만은 봐 주십시오.”
비서관이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류들을 허겁지겁 챙겼다. 비서관의 애원에 맘이 약해진 오르테는 그의 무례함을 못 본 척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그때, 파일 무더기가 무너지면서 밑에 있던 파일 제목 하나가 그의 눈에 확 들어왔다.
- 이샤 프로젝트 -
“이게 뭐냐?”
그 파일이 책상 제일 중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오르테가 무심코 손을 가져갔다. 지금껏 딸과 그가 사실상 가문을 공동으로 운영해 왔다보니 제후 책상에 이름을 달고 올라올 정도의 프로젝트라면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나가기 직전까지 딸이 직접 보고 있던 파일이라면 그도 알아야 했다.
“아, 별 것 아닙니다. 농업부의 개량비료 생산계획입니다.”
비서관이 그 위를 얼른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렇지만 그의 이 빠른 반응이 도리어 오르테의 의심을 자아냈다.
“내가 모르는 프로젝트가 대체 뭐냐고.”
별 것도 아닌 것을 감추려는 비서관의 태도에 화가 난 오르테가 보란 듯 파일을 확 펼쳤다. 그런데 막 펼쳐든 첫 장에 나타난 건 비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부 페스트의 지도였다.
“잠깐, 네놈 지금 비료 어쩌고 그랬었냐.”
오르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비록 군인은 아니지만 농지 구획지도와 군사 전략지도도 구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오르테가 비서관의 손에 아직 들려있는 다른 서류들까지 거칠게 빼앗았다.
“네놈이 지금 누굴 속이려고 해!”
비서관이 잠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이 괘씸한 비서관, 아니 딸이 자신을 따돌리고 무언가 추진하고 있다는 데 오르테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도 모르는 군사행동이라니, 그것도 페스트면 황제 영향권이나 마찬가지인데!…… 가만, 페스트? 둘째아들놈이 기근을 틈타 지 어미 마자리크 뒤집어엎고 반란을 일으킨 곳 아니더냐?”
비서관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을 못 하자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임을 직감한 오르테도 이번엔 강경했다. 검은 재로 페스트가 폭도들의 손에 넘어간 그때, 마자리크 경의 둘째아들 류한 경이 기근으로 뱃속은 물론이고 충성심까지 바닥난 주민들을 선동해 본토인 일리안까지 차지해버린 터였다.
호드르 산의 지열발전소에서 힘들게 탈출했지만 그새 아들과 주민들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마자리크 경은 아직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군 병력을 이끌고 페스트에서 남편 네피와 함께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중이었다.
“이년이 설마……그 개 같은 아들 새끼하고 손잡은 건 아니겠지?”
오르테는 씩씩거리며 보란 듯 파일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황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자신과 야심을 품은 딸 사이에 이런저런 충돌이 벌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오르테는 명분에 벗어난 짓을 남부 전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딸을 설득했지만 딸 세데스는 ‘알아서 해결하게 두고 보자.’며 계속 뭉개고만 있었다.
처음에 분노로 시작했던 오르테의 표정은 몇 초 지나지 않아 공포와 당혹스러움으로 변해갔다.
“빌어먹을, 이년이 지금 무슨 짓을…….”
오르테가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방금 전의 건장한 비서관이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르테는 본능적으로 살기와 공포를 느끼며 뒤로 한 발 물러서려 했다.
“뭐냐, 물러나지 못할까.”
소리를 지르려는 오르테의 입술을 비서관의 손이 순식간에 틀어막았다. 오르테의 짧고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지만 입을 막은 손 때문에 닫혀있는 문 밖까지 들릴 만큼 크지는 못했다. 버둥대던 오르테가 소나무 분재를 힘껏 쳐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비로소 큰 소음이 방 안을 울렸다.
동그랗게 커진 오르테의 까만 눈동자 위로 번쩍거리는 무언가가 반사되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집무실 문 밖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분재 떨어지는 소리에 들어왔을 때, 오르테는 베인 목에서 피를 쏟으며 제후 책상 옆에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오르테 부인?”
경호원들까지도 충격을 받아 머뭇거렸다. 오르테 옆에는 방금 전까지 그들과 희희낙락 수다를 떨며 차를 나누어 마셨던 세데스의 수행비서관이 피 묻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이런.”
경호원 한 명이 뒤늦게야 석궁을 빼들고 비서관을 겨누었다.
“우, 움직이지 마라!”
멍해진 비서관은 바닥에 쓰러진 오르테 부인, 자신을 겨눈 경호원들과 손에 있는 피투성이 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번엔 자신의 목에 칼을 가져갔다. 아무 설명도, 변명도 없었다.
“못 하게 해!!!”
경호원들이 찢어지는 고함을 지르며 뒤늦게 제후 자리로 뛰어갔지만 그를 막기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비서관은 자신의 귀 밑부터 목젖까지를 단 한 번 머뭇거림도 없이 깊숙이 베어버렸다. 방금 전 오르테를 죽일 때처럼 능숙하게 훈련된 동작이었다. 숨이 끊긴 비서관은 자신이 사방에 흩어놓은 파일 더미들 위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경호원들이 책상에 도착한 건 그때였다.
“이걸 어째.”
오르테의 맥박을 확인한 경호원이 뒤따라온 동료들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찢어지는 사이렌 소리가 그제야 본가를 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사이렌 소리를 들은 세데스가 헐레벌떡 집무실에 돌아왔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어머니?”
카펫 위를 흠뻑 적신 붉은 피에 놀란 세데스는 집무실 문 앞에 잠시 굳어 있었다.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그를 30년 넘게 정적들에게서 지켜냈고, 자칫 몰락할 뻔했던 가문을 남편을 대신해 꿋꿋하게 이끌었던 똑똑하고 강인한 종부 오르테 부인이 그곳에 쓰러져 있었다.
“엄마.”
세데스가 비틀비틀 다가가 어머니 앞에 꿇어앉았다. 잔뜩 겁을 먹은 경호원들과 다른 비서관들이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했지만 세데스의 귀에는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비서관의 소행이었습니다. 이유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엄마.”
세데스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어머니를 품에 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비록 가문 대소사에서 사사건건 충돌했어도, 매번 정치적으로 부딪히고 갖은 잔소리와 참견, 과한 열정과 기대로 그를 힘들게 하긴 했어도 아버지 없이 가문의 텃세를 이겨내야 했던 모녀의 특별한 유대감에 흠집을 낼 만큼은 아니었다.
“엄마, 나 엄마 없이 어떻게 살라고!”
세데스는 축 늘어진 어머니 오르테 부인을 가슴에 꽉 끌어안고 목청이 찢어져라 울부짖었다. 어른이 된 이후 매일같이 상상했던 독립된 제후의 삶이 비로소 그의 앞에 펼쳐지게 되었지만 그가 원했던 건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하루 업무를 마치고 막 퇴근한 페로 자이센 총리는 사랑채 대청마루에 서서 서문 밖을 내다보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퇴근 후 해가 질 무렵, 이렇게 마루에 서서 서문 밖 떡갈나무 언덕의 저녁놀을 보는 것이 마치 일과처럼 굳어져 있었다. 크고 푸른 떡갈나무는 그의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굵은 가지를 드리우고 언덕 정상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으음?”
페로가 무심결에 어깨를 움찔했다. 그는 즉시 허리춤에서 할룩스를 빼들고 가디언부대에 알렸다.
“떡갈나무 언덕에 올라가지 마라.”
언덕 아래에서 꼭대기로 달려가던 대여섯 명의 가디언들이 주인의 명령에 화들짝 놀라며 급히 방향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굵은 떡갈나무 줄기 옆으로 저녁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누군가의 망토자락이 보였다.
“아무도 따라 나오지 마라.”
방에 들어가 서류를 이것저것 챙긴 페로는 망토를 대충 어깨에 걸치고 빠른 걸음으로 허겁지겁 사랑채를 나섰다. 그리고는 난데없는 총리의 출현에 당황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쪽문과 대문을 지나며 숨이 넘어갈 듯 턱끝에 걸렸지만 당장은 문제가 아니었다.
“총리 각하, 저곳에 의심스런 자가…….”
서문 앞을 지키던 가디언 수문장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페로는 들은 척 만 척 서문을 힘껏 밀어젖히고 언덕으로 향했다.
“따라오지 마!”
그는 놀에 붉게 물든 풀밭이 강물처럼 넘실대는 비탈진 언덕을 한참이나 미친 듯 뛰어올랐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짙은 풀내음과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와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씻어내 주었다. 키 큰 떡갈나무와 그 뒤에 숨은 채 펄럭이는 망토가 점점 그의 눈에 가까워졌다.
그는 떡갈나무를 붙들고 그 뒤로 휙 돌아섰다.
“내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랬어.”
몇 분을 심장이 터지게 달려온 페로는 가볍게 핀잔을 주는 이 옛 친구의 팔을 와락 붙들고 매달리며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네가 다시 가 버릴까봐.”
“나 어디 도망 안 가.”
카렐은 숨 넘어갈 듯 지쳐 비틀거리는 페로의 양 팔을 얼른 붙잡고 부축해 주었다. 페로는 그의 팔을 떨쳐내고 카렐의 망토 후드부터 확 벗겨냈다. 근 며칠간 꿈속에서만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날짜가 아주 많이 지난 것도 아니었지만 이번엔 꼭 카렐을 기쁘게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
그동안 연습했던 이런저런 낯 뜨거운 말들과 행동이 그제야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또 입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넌 왜 아직도 이렇게 말랐냐.”
고작해야 이런 말을 뱉어놓은 페로는 정말 자기 입을 확 꿰매버리고 싶어졌다. 가슴속에 꼭꼭 쌓아놓았던 멋지고 낭만적인 입맞춤과 다정한 속삭임은 그 한 마디와 동시에 공중으로 먼지처럼 휙 하니 날아가 버렸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카렐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래, 이래야 너답지.”
그의 얼굴을 만지는 카렐의 큰 손이 따뜻했다. 무심코 그의 손을 더듬던 페로는 그곳에서 만져지는 단단한 가디언 팔찌에 움찔했다.
“괜찮은 거야?”
“그럭저럭.”
카렐이 여윈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일리안에서는 마자리크 경 둘째아들놈이 주민들을 선동하면서 내가 죽어간다고 했다지?”
“그 개새끼 잡히면 내가…….”
“오호, 그건 양보해. 그 새끼 처리하는 건 이미 예약해 놓은 임자가 있으니까.”
카렐이 페로의 콧잔등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그런데 이제 어떡하지? 헛소문이 너무 크게 퍼져서 이젠 수습하기 어려워지고 있어.”
페로는 양심에 찔려 차마 ‘헛소문’을 구체적으로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한때 그가 주장했던 ‘황제의 유전병’ 이야기가 이제 세간에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었다. 두 황자들의 급사는 시작일 뿐이고 곧 장태자와 황제도 죽을 것이라는 소문은 이제 저자거리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가뜩이나 기근으로 흉흉해진 민심은 모처럼 세운 황실다운 황실이 고작 30년밖에 버티지 못하고 또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페로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제국 총회가 이제 14일 남았어. 곡물가격은 기대감에 일시적으로 떨어지고 있지만 총회에서도 남부의 비축곡물을 내놓게 하는 데 실패하면 감당할 수 없게 돼. 동맹제후들이 심은 오염된 옥수수하고 감자를 다 태워 없애면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고.”
“그 대가로 황실 비축곡물을 전달하라고 했지?”
“황실 비축곡물까지 줄면서 우리가 쓸 카드도 함께 줄었다고. 이젠 남부에서 뜯어내는 것밖엔 다른 수단이 없어.”
카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을 돌아보았다. 페로가 그런 그의 손등을 슬그머니 잡으며 물었다.
“그땐 올 거지?”
“걱정 마. 지난번 출혈열 약을 들고 나타났을 때처럼 당당한 황제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될 테니까.”
“나쁜 소문은…….”
“내가 아직 안 죽었는데 무슨 상관이야.”
카렐이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페로의 손을 끌어 자신의 가슴에 대 보였다. 여전히 힘차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박동이 그의 손끝을 타고 전해져왔다.
“고마워, 페로. 네 덕분에 내가 살 길을 찾았잖아.”
카렐이 고마움을 전했지만 페로는 얼굴을 붉힌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카렐도 그가 자신의 앞에서 차마 고개를 못 드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모른 척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페로는 품에 가져온 서류를 카렐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 의사 놈 가방에서 건진 문서가 이거야. 낯선 문자라 난 못 읽는데 하심 경이 그러더군. 교단 본부에서 오르마즈 경의 시신과 12번 잔딕, 사제의 키를 찾으라고 내린 문서 같다고.”
“그 말은 그놈들도 오르마즈 경의 시신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군. 희소식이야.”
카렐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페로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14번을 우리에게 뺏겼으니 놈들이 더 필사적으로 시체를 쫓으리라는 뜻도 되지. 그놈들이 아니면 시체를 훔쳐간 건 대체 누구일까?”
“북부로 가서 오르마즈 경의 묘를 파헤칠 참이야.”
카렐의 뜻밖의 말에 페로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거기에 뭐 있기나 하겠어?”
“글쎄, 내 목숨이 걸린 경주에 출발신호가 떨어졌는데 꼭 공정하게 할 이유가 있겠어? 발이라도 걸고 뒷덜미도 잡아야지.”
카렐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놀이 점점 지면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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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후 첫 연재입니다. 연말기념으로 좀 길게 올립니다.
소설 표지도 3부 것으로 바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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