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79화 (874/1,132)

< -- 879 회: Part 6. 저승길에 남겨놓은 발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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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맹랑한 놈이!”

쿠베의 무지막지한 손에 얻어맞은 주페는 공중을 붕 날아가 맞은편 유리벽에 쾅 부딪치고 맥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고개를 든 주페는 쿠베 뒤에서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는 여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가 한참 올려보아야 할 정도로 훌쩍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가무잡잡하고 매서운 인상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세, 세데스 델루지 경?”

쿠베가 주페의 뒤통수를 발로 재빨리 밟았지만 그는 이미 세데스의 얼굴을 보고 난 후였다. 쿠베에게 도로 붙잡혀버린 주페보다 도리어 신분이 들통나고 당황한 세데스의 얼굴이 더 창백했다.

“이, 이런, 제기랄.”

세데스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페가 그를 알아본 순간, 황제에게 무사히 되돌려 보낸다는 카드 하나가 순식간에 증발한 꼴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쿠베는 주페의 머리채를 쥐고 바닥을 질질 끌어 감방 안에 거칠게 던져놓았다.

“문 안쪽에 이놈이 미리 쐐기를 대 놓았습니다!”

망신을 당한 헤네티가 방금 제대로 안 닫히던 문 안쪽을 확인하고는 그 밑에 미리 괴어 놓았던 뿔 모양 쐐기를 힘껏 빼냈다. 밖에서 문을 밀어 열면 꽉 끼어 안 움직이게 만들어놓은, 간단하지만 교묘한 술책이었다.

“저 쥐새끼 같은 꼬마 놈. 그냥 얼어 뒈지게 할까보다.”

헤네티는 방금 던져놓았던 담요를 도로 빼앗아 밖에 내던져 버렸다. 그는 연신 욕을 내뱉으며 밖으로 나와 문을 도로 잠가버렸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쿠베의 분노한 얼굴이었다.

“이 멍청한 놈! 꼬마 따위한테 당해!”

쿠베의 주먹에 얻어맞은 헤네티가 코에서 피를 쏟으며 방금 전 주페에게 밀려 쓰러졌던 같은 곳에 나뒹굴었다.

쿠베가 걱정이 그득한 얼굴로 세데스에게 물었다.

“저놈이 경의 얼굴을 봤으니 이제…….”

“제기랄.”

세데스가 씩씩거리며 뒤로 휙 돌아섰다. 문을 향해 걷기 전, 그는 감방 안에 쓰러져 있는 소년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쿠베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된 주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침대 앞에 꿇어앉아 훌쩍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붉은 뺨을 타고 그보다 더 붉은 피가 섞인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곧 눈물을 훔쳐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는 유리문에 마주섰다.

“세데스 델루지 경.”

주페가 밖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물론 그가 있는 안쪽에서는 밖이 전혀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를 무시하고 떠나려던 세데스는 소년의 목소리에 멈칫거렸다.

주페가 창에 바싹 다가와 입을 열었다.

“난 아직 어려서 정치 같은 건 모르고 경이 무슨 이유로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쁜 의도는 분명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날 도와준다면 여기서 경을 본 건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태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저 미친 꼬마 놈이.”

세데스가 눈가를 씰룩거렸다. 분명 바깥도 안 보일 텐데 눈물로 젖은 어린 태자의 암갈색 맑은 눈은 그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감정을 애써 죽이고 있는지, 꽉 움켜쥔 소년의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세데스는 망토로 얼굴과 온몸을 휙 가리며 그곳에서 서둘러 돌아섰다. 이미 정체가 탄로 난 마당에 늦어도 한참 늦은 짓이었지만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쿠베가 당황한 듯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감방에서 나가기 직전, 그는 자신의 주먹에 맞아 쓰러져 있는 헤네티를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며 입놀림으로 짧게 한 마디를 전했다.

“수고했다.”

쿠베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세데스를 급히 쫓아가 물었다.

“어쩌죠?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처단하겠습니다.”

“됐어.”

굳은 얼굴의 세데스는 망토자락을 휘날리며 계단참을 휙 돌았다.

“지금 결정하지 않으시면…….”

“나 생각 좀 하게 놔두라고!”

쿠베의 예상대로, 당황하고 놀란 세데스는 호통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고는 음침한 지하 감방 계단실 밖으로 성큼 나섰다.

“이미 내가 넘겨받은 애니까 죽일지 살릴지는 내가 알아서 결정해! 그러니 자꾸 따지지 말라고.”

가뜩이나 심경도 흔들리는 상황에서 당혹스런 사건까지 겹치면서 세데스는 조금 전보다 더 불안정해 보였다. 그에겐 말 그대로 최악의 사건만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노련한 제후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 다 잘 될 거야.”

그는 경황없이 수도원 지하를 빠져나왔지만 대체 어떻게 나왔는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수도원 밖 어두운 숲을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뛰어 셔틀에 올라탔다. 숲의 맑은 공기와 셔틀 객실의 환한 불빛이 너무도 반가웠다.

“후우.”

그 지독한 어둠과 침침한 공간을 빠져나온 덕분인지, 세데스의 복잡해진 머릿속도 점점 상황이 정리가 되었다.

“그래, 다 잘 된다고.”

세데스는 얼굴을 싸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새 뒤를 쫓아온 쿠베가 당혹감에 떨고 있는 그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럼요, 다 잘 될 겁니다.”

“…….”

“제국 총회까지만 버티시면 됩니다. 그 총회만 뒤집어엎으면 떼로 굶어죽게 된 친 황제 성향 제후들이 패닉에 빠질 테고 제국은 다시 내전에 빠집니다. 그땐 저런 태자 따위 어찌 다루든 아무도 터치 못합니다.”

세데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젠 폭주하기 시작한 상황을 그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갈 곳까지 가는 것이 그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바람어인가요?”

페로관을 떠난 카렐은 수베르의 ‘시라즈 여단’에 잠시 들렀다가 북부 코윈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의자 뒤에서 슬며시 몸통을 들이밀고 묻는 자이납에게 눈을 슬쩍 흘겼다. 그는 읽고 있던 ‘타리프의 일지’를 탁 닫고는 이 명랑한 아가씨의 멱살을 탁 붙들고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내가 이거 배워놓으라고 말한 게 언제였지?”

“아, 아구구.”

자이납은 카렐의 의자 등받이에 배가 걸린 채 버둥거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니, 승진시험 볼 때 고대어 기본 8백 글자 외우는 걸로도 얼마나 쌩고생을 했는데요. 가방끈 짧은 저한테 이런 건 너무 무리라고요. 켁켁.”

“허, 네가 아무리 가방끈 짧아도 학교 문턱도 못 간 나만큼이나 하겠냐?”

“아후, 폐, 아니, 아니 사장님이야 워낙 특별난 거고요…….”

카렐은 그를 휙 밀어내고는 다시 노트를 펼쳤다.

“오늘 저녁까지 기본 40문자 외워놓지 않으면 숙소 밖에 종일 불침번 세울 테니 알아서 해라.”

“아휴.”

괜히 참견했다가 혹만 붙이고 겨우 풀려난 자이납이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셔틀 뒤에 있던 우베가 그런 자이납에게 혀를 쑥 내밀며 말했다.

“제 옛날 책 빌려드려요?”

“씨이.”

자이납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카렐이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덧붙였다.

“우베 넌 사교도 어린이용 교재 1권 다 끝내고. 못하는 놈이 불침번이다.”

“엑, 불공평하자나요, 저기는 문자만 외우면 되는데 전…….”

“닥쳐.”

카렐은 눈동자 하나 안 움직이고 노트만 계속 읽어내려갔다.

“고향행성이라…….”

1권 끝까지 다 읽은 카렐은 한숨을 내쉬며 노트를 닫았다. 그가 읽은 내용은 구조단인지, 토벌대인지 알 수 없는 무리가 ‘정상적인’ 생존자 무리와 카히나를 잡기 위해 칼을 갈고 있다는 것까지였다. 그 뒤가 분명 있을 테지만 그의 손에 들어온 건 이 노트 한 권뿐이었다.

“고향행성이 대체 어디일까?”

카렐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놈들이 페스트에 뿌린 검은 재가 고향행성을 황폐화시켰던 것과 같은 거라면 놈들이 획책하고 있는 것과 고향행성이 뭔가 분명 관계가 있을 텐데.”

방금 전에도 괜히 끼어들었다가 손해만 본 자이납이 또 입방정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전부터 소문은 많아요. 전에 해적두목이었던 놈이 그랬는데 아무도 못 살고 일단 들어가면 다 괴물이 되어서 죽는대요. 그래서 거기 다녀온 사람들도 후환을 없애려고 싹 다 죽여 버려서 이젠 안 남아있는 거래요. 그러니 아는 사람도 없죠.”

“넌 거기 다녀오고도 100살 넘게 자알~ 살다가 간 타리프 카파키 이 양반 이름 보고도 그 말이 나오냐?”

카렐이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자이납을 째려보았다. 카렐이 눈을 흘겼지만 자이납은 저자거리에서 주워들은 말을 신나게 떠들어댔다.

“옛날에 북부 술집에서 만난 술친구 노인네 하나가 젊을 때 초기 코메트에 있었던 사람이었거든요. 거의 후방에서 놀고먹는 땡보 부대였다는데 왕고가 젊을 때 고향 행성에 다녀온 사람이었다나봐요. 몸 절반에 화상을 입고 중간에 돌아온 사람이었는데 틈만 나면 후임들 괴롭히고 사고만 치는 완전 진상이었대요.”

“화상? 지금 화상이라고 했나?”

내내 시니컬하던 카렐은 노트에서 언젠가 읽었던 ‘수로에서의 불타는 용’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호기심을 보였다.

“그 사이코 때문에 부대에서 원성이 자자했는데 웬일인지 상부에선 ‘웬만하면 터치하지 말라’고 딱지까지 붙여놔서 속수무책이었나 봐요. 경력도 거기서 돌아온 이후로는 내내 땡보 부대만 돌아서 그 진상한테 뭐 대단한 빽이라도 있는 것 같다고 쑥덕거렸었대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목매 자살해서 다른 사람들이 차마 내색은 못 하고 뒷간 가서 웃었다고 하대요.”

내심 기대를 했던 카렐은 자살했다는 말에 김이 확 빠지고 말았다.

“에이그. 듣고 있는 내가 바보지.”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최소한 일지에 있는 사건이 실제로 있었고, 고향 행성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혹여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것 하나는 분명해진 셈이었다. 그의 속을 읽어낸 우베가 뒤에서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때 젊은 나이였다면 수명개조를 받아 노인의 모습으로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카렐이 턱을 똑똑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수명개조가 기원전 55년에 시작되긴 했지만 초기엔 워낙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극소수 고위층에만 실시되었고 일반 시민에게까지 보급되는 데는 수십 년 걸렸다. 고위급 장교라면 몰라도 말단 병사로 다녀온 하층민이 그 혜택을 받았을 가능성은 낮지. 게다가 코메트 주력군을 싣고 오던 귀환 수송선 한 척은 기록에 따르면 항해 중간에 폭발로 추정되는 사고로 사라졌고.”

“그래도 뒤져보면 생존한 사람이 몇은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수단도 없는 건 아니다.”

카렐은 광산에서 일지와 함께 훔쳐온 작은 병을 떠올리며 이마 388년, 아니 기원전 101년 2월자 일지를 펼쳐보았다. 그 작은 기침약병에 든 흙이 보통 사람들에겐 ‘그냥 흙’으로만 보였지만 카렐의 눈에는 분명 황궁 지하와 대신관 묘에서 보았던 기괴한 파란 빛이 넘실대고 있었다.

“시라즈 별궁에 분석을 맡겼으니 곧 결과가 나오겠지.”

카렐이 일지를 뒤적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병이 일지에 적힌 대로 타리프가 고향 행성에서 몰래 가져온 흙이라면 이번에 교단에서 페스트에 뿌린 검은 재가 정말로 그것과 같은 것인지를 알 수 있을 테고, 운이 좋다면 고향 행성의 토질이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행성이라면 아마 어느 정도 범위를 줄일 수는 있을 거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몇 달을 걸려 가는 멀고 먼 곳이었다던데.”

그때, 조종사 베네루스의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왔다.

“지금 하임달을 지나고 있습니다. 곧 코윈으로 가는 워프루트에 올라탈 겁니다.”

“그나저나, 정말로 오르마즈 경의 묘를 도굴할 참이세요?”

자이납이 내심 걱정이 되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왜? 무서워서?”

카렐이 퉁명스레 물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요.”

자이납이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도굴을 숨어서 몰래몰래 해도 부족한 판국에 동네방네 소문까지 내셨잖아요.”

“동네방네? 과장이 심하구나. 역정보로 교단 측에 흘렸을 뿐이지.”

카렐이 딱 잘라 대답하며 셔틀 구석에 모아놓은 삽과 곡괭이를 가리켰다.

“놈들도 오르마즈 경 시체를 찾고 있을 텐데 우리가 거길 판다고 하면 분명 호기심을 보이겠지. 누군가 우리가 친 덫을 밟을 테니 낯짝 구경이나 하자꾸나.”

가볍게 대답하던 카렐은 황실과 보안국에서 들어온 정보들을 열심히 정리하고 있는 루스탐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무슨 연락이라도 있냐?”

“별 건 없습니다. 알고 계신 현안들은 총리께서 기존 정책 그대로 처리하고 계신 것 같고요, 아참, 노에누스 가에서 들어온 통지가 하나 있습니다만 그리 중요치는 않은 것 같아서 따로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루스탐이 얼른 전문을 들고 카렐에게 다가왔다.

“노에누스 가 군 병원에 누군가 문의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지난번 바하칼리의 57번 광산에서 폭도 진압 도중에 화재로 질식해서 실려 간 키 크고 머리 긴 특수진압반 요원이 무사하냐고요.”

움찔한 카렐은 여전히 셔틀 한쪽에 실려 있는 노에누스 가 치안군 군복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래서?”

“걱정 마십시오. 만일을 대비해서 응급실에 들어갔다가 퇴원해 원대 복귀한 것으로 서류처리를 깔끔하게 해 놓았습니다.”

루스탐이 자신의 일처리를 과시하듯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 보였다.

“특수진압반은 어차피 신원을 기밀에 붙이는 조직이니 그렇게 해 놓으면 더 이상 추적은 못 할 겁니다.”

“잠깐, 날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지목할 정도면 뭔가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 누가 문의했는지는 파악했고?”

그제야 표정이 굳어진 루스탐이 급히 전문 구석구석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문의한 사람은……광산 총 지배인 이디나라고 되어 있군요. 병원 관계자가 이유를 물었는데 ‘업무차’라면서 실명을 물었다고 합니다. 규정상 실명은 알려줄 수 없다고 했더니 꼭 돌려줄 물건이 있다고 자대 위치를 문의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카렐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치안군 본부에 있는 우리 사람에게 병가 나갔다고 둘러대라 해 놨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동료 오발에 머리가 깨졌던 그 말라깽이 여자던가? 신통하게 안 죽고 살았군. 그때는 무슨 과장이라고 들었는데 총 지배인? 초고속 승진이군.”

카렐이 팔짱을 끼고 턱을 똑똑 두드렸다. 자신이 일처리를 잘못한 것인지 잔뜩 기가 죽은 루스탐이 황제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뭐 잘못된 걸까요?”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눈치를 챈 거라면 멍청하게 신분까지 훤히 드러내고 병원에 직접 문의하지는 않았을 거야. 진압반이 치안군 본부에 같이 있는데 새삼 주소를 문의할 이유도 없고.”

루스탐이 기억 속에서 그 여자의 모습을 되짚어냈다.

“그 와중에 수습하는 것 하며 상급자를 바로 알아보는 눈썰미도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서툰 짓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도굴 쇼는 몇 시간이면 충분할 테니…….”

카렐이 팔짱을 낀 채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교단의 광산 고위 간부라…….”

가슴 아래 깔린 채 피를 흘리며 멍하니 뜨고 있던 그 여자의 눈빛이 그의 기억에도 어색하리만큼 선명히 남아있었다. 미인도 아니었고 그리 특별해 보이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기억 속에서 여자의 존재감이 이상하리만큼 강렬했다.

“방금 치안군 본부에 우리 사람이 있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카렐이 한쪽 어금니를 살짝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그 병사도 부대 밖 적당한 곳에서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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