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82 회: Part 6. 저승길에 남겨놓은 발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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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가문 종원들의 묘를 지난 후, 역대 종장이나 최고제후의 크고 화려한 묘가 모습을 나타냈다. 워낙 역사도 깊고 오랜 기간 위세를 날리던 가문이었던 만큼, 이들의 묘 앞에는 생전에 그들의 모습을 되살려놓은 석상과 업적을 남긴 비석들이 맹추위가 덮은 눈벌판 위에서도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타리프 카파키?”
자리에 우뚝 멈춘 자이납이 그 중 가장 큰 묘를 올려보았다. 타리프와 부인 시린 가우라 신관의 합장묘는 이곳 중앙의 가장 좋은 위치에 서서 후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상 한 번 희한하네.”
자이납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거 이 사람 석상이 맞아요?”
카파키 가 역대 종장들의 입상(立像)은 대개 근엄한 표정과 자세에 마치 고위 신관 같은 요란스런 로브 차림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책이나 경전보다는 돈다발에 더 익숙한 사업가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TSG의 창립자에 종교학자였고 진짜 고위 신관이었던 그의 석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 가방을 멘 교단 말단 성직자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모자를 붙들고 바람을 뚫으며 나아가는 역동적인 모습이 성직자나 학자라기보다는 마치 탐험가처럼 보였다.
“어라, 누군지 읽은 거예요? 이제 바람어 읽네요?”
루스탐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자이납이 마주선 큰 비석에는 주인의 이름이 바람어로만 새겨져 있었다. 공용어로 된 팻말은 눈이 얼어붙어 읽을 수도 없었다.
“그래야 오늘 새벽에 우베가 불침번 서지, 히히. 오늘밤엔 훼방꾼도 없을 테니까 너 얼마나 잘 컸는지 좀 보여주면 안 될까?”
보안경 안쪽 자이납의 까만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으휴.”
루스탐이 기겁을 하며 그의 능글거리는 시선에서 얼른 벗어났다.
“그나저나, 이 양반도 다른 사람처럼 좀 고상하게 책도 들고 폼 잡은 걸로 만들지 왜 죽어서도 저 쌩고생을 하고 있대요?”
자이납이 교단 헤네티 장교였던 코나에게 물었다. 앞서가던 코나가 뒤를 힐끗 돌아보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궁금하면 관 뚜껑 열고 물어봐. 무덤 자리는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는 게 관례였으니까.”
“에이, 재미 없기는.”
자이납이 투덜대며 계속 가던 길로 움직였다. 타리프의 옆엔 아들인 초대 최고제후 빌루이와 부인 스카나의 묘가 그 옆에 있었고, 그 다음 최고제후였던 투르케스크의 묘가 최고제후 묘의 제일 끝에 위치해 있었다. 호기심덩어리 자이납이 이번에도 가벼운 입을 참지 못했다.
“투르케스크 이 양반 총각이었어?”
“무슨 소리에요?”
자이납의 말도 안 되는 물음에 루스탐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봐봐, 다들 부부 합장묘인데 이 양반만 달랑 혼자서 묻혀 있잖아.”
자이납이 투르케스크의 묘를 가리켰다. 비교적 최근에 증축된 듯 보이는 석상과 비문도 황제의 할아버지이고 최고제후답게 나름 화려했지만 선조들의 묘에 비해 무언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황궁 앞에서 산 채로 껍질이 벗겨져 죽는 끔찍한 처형을 당했던 그는 묘지에서도 어딘지 썰렁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황실 사정을 잘 아는 상선 루스탐이 주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이 양반 두 번 결혼했던 거 아시잖아요.”
“당연히 알지. 그러니까 그 마누라들이 다 어딨냐고?”
“돌아가실 때 정실부인이었던 루다베 부인은 친정인 노에누스 가에 묻혀 있겠죠.”
루스탐은 루다베 부인 스스로가 생전에 남편과의 합장을 원치 않았었다는 말까지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조강지처는? 그 양반이 자식들도 다 낳았잖아.”
루스탐이 턱으로 목적지 쪽을 슬쩍 가리켰다.
“저기 가 보시면 알아요.”
최고제후들의 묘지도 모두 지나 가문 묘지 제일 안쪽에는 한쪽 벽면이 트인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자 중앙에는 검은 묘석이 있고, 그 옆에는 휑한 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엔 작은 말 동상이 붙은 약간 다른 모양의 묘 하나가 더 있었다. 정자 안쪽 벽에는 검은 돌 위에 고인의 생전 전공이 세밀한 부조로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진짜 영웅의 묘로군. 시체가 있든 없든.”
노예 코나가 웬만해서는 하지 않을 듯 싶어 보이는 말을 중얼거리며 모자를 잠시 벗어 가슴에 가져갔다.
“정말 죽어도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루스탐이 마지막 추모객이 꽂아놓고 간 듯 아직도 타고 있는 향을 뽑아 이리저리 흔들며 말했다. 최고제후들의 묘처럼 요란한 석상이나 거대한 석상도 없지만 그의 향로와 묘석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탔는지 원래 새겨져 있던 글자와 현무 문장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닳아 있었다.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아이가 그의 묘를 만지면 나중에 크게 된다는 미신이 북부에 널리 퍼져 있다 보니 아기를 낳은 부모라면 한 번쯤 꼭 찾아와 손자국을 남기는 곳이기도 했다.
“묻혀 있든 아니든 사람들 믿음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지요.”
루스탐이 어깨에 메고 온 장비를 내려놓으며 정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참, 저기요.”
그는 뒤따라온 자이납에게 정자 맞은편의 키 큰 전나무를 가리켰다. 이 묘지에서 가장 오래된 듯 보이는 높은 나무 아래엔 가문 사람들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의 묘 하나가 제법 화려하게 자리를 잡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석엔 카파키 가의 문장도, 그렇다고 레즐린 가의 문장도 아닌 낯선 문장이 달려 있었다.
“아지드 레즐린 부인은 오르마즈 경께서 생전에 저기 묻으셨다죠. 당신이 묻힐 묘자리 맞은편 잘 보이는 곳에. 봐요, 신경 많이 쓴 티가 확 나죠. 완전 명당이잖아요.”
“그럼 조오~기 혼자 누운 아버지는 어쩌고?”
“그거야 내 아나요.”
루스탐이 쓴웃음을 지으며 정자 안쪽으로 돌아섰다. 오르마즈의 묘 옆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휑한 구덩이 하나가 되메우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원래는 하임달에서 함께 전사한 남편 마에두가 묻혔던 곳이지만 ‘동생을 역적과 함께 둘 수는 없다’며 당시 트라티누스 가 종장이 매정하게 파내어 가버린 가슴 아픈 흔적이었다.
카렐 황제가 오른 후, 새 종장 제르베 경이 삼촌을 생전의 뜻에 따라 이곳에 다시 묻어주고 싶다며 카파키 가에 몇 번이나 애원을 했지만 지난 일로 단단히 심사가 틀어진 종장 세네피스 황태후가 이제와 그런 속 보이는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세네피스는 마에두를 다시 묻는 것도, 그렇다고 되메우는 것도 모두 금지한 채 ‘이게 뭘 뜻하는지 보고 느끼게 해라.’라며 빈 구덩이를 이렇게 백 년 넘게 그대로 놓아두고 있었다.
“내키지 않지만.”
코나가 다시 모자를 쓰고 오르마즈의 이름이 붙은 묘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 시작하자.”
“그분께선 정말 보고 계실까요?”
자이납이 정자 밖을 빙 둘러보았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에도 황제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이곳으로 조심조심 다가오고 있는 낯선 인기척이 어딘가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오르마즈 묘 맞은편의 늙은 전나무의 아찔한 꼭대기는 갓 내린 흰 눈이 엉겨붙어 마치 하얀 모자라도 쓴 것처럼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음?”
꼭대기께의 두툼한 눈더이 사이에서 무지개빛 보석 두 개가 반짝 하고 빛을 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눈꽃 사이에서 날카로운 오팔빛 눈동자가 재빨리 좌우로 움직였지만 그 외의 부분은 미동조차 없었다.
주변을 훑은 두 개의 눈동자는 천천히 아래로 움직여서는 최고제후들 묘 사이로 재빨리 다가오고 있는 몇 개의 흰 형상들을 똑바로 향했다.
“동쪽, 최고제후 묘 부근, 5명이다. 헤네티 같다.”
두 개의 눈동자 아래, 얇은 입술에 붙은 눈송이 몇 개가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흩어졌다. 나머지 부분은 여전히 나무와 한 몸이 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작업 계속 진행합니다.”
어느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코나의 짧고 명료한 대답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와 나무 꼭대기가 조금 흔들렸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거의 10층 높이에 달하는 이 얼어붙은 침엽수 꼭대기에 누군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상대가 정밀한 스캐너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극한으로 찬 공기 속에서 위장포로도 체온을 감추기 어렵다면 온몸에 두툼하게 두른 눈덩이가 가장 훌륭한 방어막이었다.
카렐은 눈을 가늘게 뜨고 괴한들의 움직임을 계속 추적했다. 최소한으로 낮춰놓은 체온은 딱 피가 얼어붙지 않을 만큼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자칫 격하게 움직였다가는 몸에서 열이 더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조금 더 먼 곳을 둘러보았다. 묘지 바깥쪽의 도로변에 잘 숨겨져 있는 차 두 대가 들어왔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거의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추위 때문에 내부에 히터를 틀어 놓았는지, 안에서 나오는 열기가 그의 예리한 적외선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는 이번엔 차에서 기다리고 있는 우베를 불러냈다.
“우베, 네 2시 방향 3스타디아 정도에 차 두 대가 숨어 있다. 3명 정도가 외부에 나와 감시중인 것 같으니 다가가지는 마라.”
“옙.”
카렐은 다시 발밑을 응시했다. 코나 일행이 휴대용 굴착기로 막 묘석을 들어내고 땅을 파는 중이었다. 그때, 코나에게서 뜻밖의 보고가 들려왔다.
“누군가 여길 이미 손댔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묘석 밑면에 흠집이 많습니다. 누군가 도구를 넣어 묘석을 억지로 들어냈던 것 같습니다. 혹시 묘를 새로 손질한 일이 있습니까?”
“아니,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손댄 일 없다. ……어쨌든 계속 진행해라.”
“알겠습니다.”
카렐은 부하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다섯 명의 괴한들을 응시하며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저들이 코나와 자이납, 루스탐 일행을 공격한다면 전멸이 빤한 이상, 이곳에서 지켜주어야 했다.
코나 일행은 괴한들의 접근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작업을 계속 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저 사실을 알았다면 오금이 저려 삽질하는 손이 마비되었을 테지만, 코나는 이 순간에도 정말로 그들의 존재를 모른 척 기계처럼 묵묵히 땅을 파고 있었다. 카렐은 코나 정도면 목 뒤로 칼날이 덮치는 순간까지도 표정 없이 계속 땅만 팔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 괴한들이 오르마즈의 묘가 있는 정자를 에워싸는 모습에 카렐은 칼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다행히 그들은 묘석 뒤에 정체를 숨기고 작업을 훔쳐보기만 할뿐 더 이상은 접근하지 않았다.
카렐은 다시 담 밖의 차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 저 차에 계속 관심이 쏠렸다. 마치 차 안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도굴작업 중입니다.”
묘지 안에 잠입한 슈라가 보내는 영상이 차 안에 있는 아트위야의 화면에 그대로 들어왔다.
“키가 제일 작은 한 명이 리더로 보이고, 나머지 둘 중 6척 정도 되는 놈은 움직임이 가디언 같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체격은 대단히 좋지만 가디언 치고는 키가 너무 큽니다. 그냥 덩치 좋은 시민 같습니다.”
“황실 보안국 놈들이겠지?”
“제복을 입고 파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옆에 있는 쿠마르의 엉뚱한 참견에 아트위야가 슬쩍 눈을 흘겼다.
“카파키 가에 밀고할 준비는 해 놨겠지?”
“당연하지요. 저게 황실 놈들이라는 것까지 함께 증명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저 세 마리 곰탱이들이 황실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고? 황실이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닐걸? 일단은 계속 감시하기나 해.”
아트위야가 단박에 쿠마르의 제안을 잘라버렸다.
“우리가 손 더럽히지 않고도 내용물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니냐.”
그는 헤네티들의 감시를 받으며 앉아 있는 밀리타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죽음의 위협까지 당해서인지 긴장한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오르마즈의 시체를 알면서도 감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자네 표정 보니 내가 실수한 것 같아. 아까 그 술 한 병 통째로 선물해 주지.”
아트위야가 겉으로는 넉살을 떨었지만 속으로는 ‘괜히 의심했군.’하는 후회와 미안함이 들고 있었다.
그때, 묵묵히 앉아있던 밀리타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나?”
아트위야의 물음에도 밀리타는 대답 없이 멍하니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묘지 중간에 불쑥 솟아 있는 큰 전나무를 향했다. 흰 눈을 잔뜩 뒤집어쓴 나무는 강한 밤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아트위야가 버럭 짜증을 내자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밀리타는 입을 반쯤 벌리고 뭐라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뭐라 더 말하려던 그의 입술을 뒤이은 슈라의 보고가 멈추게 했다.
“관이 나옵니다.”
아트위야가 밀리타에게서 관심을 끊고 얼른 화면을 주시했다. 덩치 큰 둘이 구덩이 안에서 관을 함께 들어 위로 밀어 올리자 위에 있던 ‘리더’가 받아 올리는 모습이었다. 대리석 조각이 붙은 무거운 관을 단 둘이 들어 올리는 걸 보아 슈라의 말대로 힘이 센 가디언이 분명했다.
“허어, 개국공신의 묘가 저 지경이 되는 꼴을 사람들이 보면 단체로 놀라 통곡이라도 하시겠어.”
“그보다는 저 관을 열고 저놈들 기절초풍하는 꼴이 더 궁금한데요.”
쿠마르가 호기심이 당기는지 화면에 바싹 얼굴을 들이댔다. 구덩이 위로 기어오른 둘은 방한복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는 관 뚜껑의 잠금장치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저놈들 기절초풍하는 순간에 경보라도 울리게 하면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
쿠마르가 싱글벙글하며 차가워진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관의 잠금장치가 하나 둘씩 떨어지고 그 셋이 힘을 합쳐 뚜껑을 열었다. 쿠마르는 물론이고 이번엔 아트위야까지도 잔뜩 기대가 찬 얼굴로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현장의 슈라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엇.”
먼저 반응을 보인 건 현장의 슈라였다. 셋 중 리더인 키 작은 사람이 두 손을 치켜들고 손뼉을 짝짝 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키 큰 둘도 마치 자축하는 듯 서로의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나게 맞대고는 와락 껴안았다. 누가 봐도 무언가 큰 성공을 거두고 기뻐하는 모습들이었다.
“뭐죠?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방금 전까지도 실컷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던 쿠마르가 놀란 얼굴로 아트위야를 휙 돌아보았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제일 놀라고 당황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진 밀리타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근데 이거 대체 어떤 놈일까?”
자이납이 자신을 꽉 껴안은 루스탐의 귀에 작은 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알 게 뭐에요.”
적당히 시간을 끈 루스탐이 이 능글한 아가씨를 품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날도 추운데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될까?”
“그분께서 보고 계실 텐데요.”
자이납이 루스탐의 널찍하고 불룩한 가슴을 마지못해 놓아주며 아쉬운 눈짓을 보냈다.
“쳇, 그러니까 오늘밤엔 내 방에…….”
“닥치고 빨리 겸자나 내놔.”
관 속의 시체에서 염을 벗겨내던 코나가 이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루스탐이 얼른 가방에서 작은 겸자를 꺼내어 코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코나가 막 드러내놓은 시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누군지 꽤 잘생겼네요. 누굴까요?”
관을 열자마자 일단 미리 연습한 쇼를 요란스레 벌이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오르마즈를 대신해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의 정체도 역시 궁금했다.
“글쎄. 얼굴 말고 다른 부분도 볼까.”
처음엔 얼굴만 드러냈던 코나도 나름 호기심이 당기는지 관의 빈 자리를 채워놓은 그득한 솜을 옆으로 조심조심 치워내고 몸을 감아 놓은 삼베포도 벗겨냈다. 잘생겼다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든 자이납이 관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정말이네. 후와, 진짜 잘생겼다. 이게 누구야.”
수명개조 당대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중후한 인상을 주는 미남자가 가슴에 손을 모으고 누워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에 웬 쪽지가 하나 쥐여 있지만 시체의 사후경직 때문에 꺼낼 수가 없었다.
“이런.”
몸에서 막 삼베를 벗겨내던 코나가 움찔하며 루스탐을 쳐다보았다.
“왜요?”
“교단 성직자 로브다. 말기 스타일이고……더더군다나 이건…….”
“이게 왜요?”
“맙소사, 왜 여기에…….”
시신의 어깨를 살짝 드러냈던 코나는 기절할 듯 놀라며 얼른 자세를 고치고 공손히 꿇어앉아 머리에 쓴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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