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88화 (883/1,132)

< -- 888 회: Part 6. 저승길에 남겨놓은 발자국 -- >

.

.

.

“불릿 한 대는 잡은 것 같습니다.…… 폐하?”

제조창 주변에서 셔틀 사냥을 지휘하고 돌아온 베흔은 경호원들과 함께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카렐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폐하?”

카렐의 등을 짚었던 베흔은 그가 꿈틀거리자 깜짝 놀라 물러났다.

“괜찮으니 계속 물을 거 없다.”

엎드려 있던 카렐이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황제의 가슴에 안겨 먼지와 파편을 피한 코리온도 콜록거리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순서가 뒤바뀐 것 같은 느낌에 베흔이 하마터면 웃을 뻔 했지만 황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온몸에 앉은 뽀얀 먼지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낸 카렐은 잔뜩 노기가 서린 눈으로 무너진 격납고를 노려보았다. 격납고는 말 그대로 불타는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해버렸고, 주변 일대는 곳곳에서 추락한 셔틀의 잔해와 조각조각난 사람 시체로 엉망이었다. 카렐이 있는 곳 바로 옆에도 어디선가 떨어진 셔틀 엔진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크게 벌려놓고 고작 저 정도밖에 못 거둔 거냐.”

카렐이 폐허를 노려보며 송곳니를 무섭게 드러냈다.

“조금이라도 자료를 건지기 위해 빨리 진화하는 중입니다.”

베흔이 민망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지만 카렐은 눈가를 찡그렸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전투와 거의 동시에 투입한 소방대가 서둘러 불을 끄고 있지만 언뜻 봐서는 저 잿더미 속에서 ‘자료’ 비슷한 것도 남아있을 성 싶지 않았다. 시라즈 병사들이 살아남은 적 노동자나 엔지니어들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지만 채 열 명도 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도 화재에 휩쓸려 미처 자살을 하지 못한 운 없는, 아니 운 좋은 자들이었다.

“사에나 쉐너 부장은 어딨느냐.”

“지하실로 피한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그 뒤로 끊겼습니다. 끊기기 직전 음질이 좋지 않아 정확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카렐은 옆에 선 코나의 창백해진 얼굴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놀라거나 눈물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학장은 안전하게 뒤에서 따라오시오.”

카렐은 아직까지 군데군데 불에 타들어가고 있는 격납고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하실을 찾아! 빨리!”

황제의 격한 고함이 쩌렁 울리자 병사들은 아직 진화작업도 채 끝나지 않은 격납고로 일제히 우르르 몰려가 스캐너를 들고 소방대가 끼얹어 놓은 소화액으로 뒤범벅이 된 잔해를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겉으로는 아무 감정 표현이 없던 코나는 소방복이나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뜨거운 잔해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미친 사람처럼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병사 몇이 불타고 있는 철골을 옆으로 힘껏 밀어내며 고함을 질렀다. 그들이 불에 데는 것을 무릅쓰고 드러낸 곳에는 불에 그슬린 큰 철문이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다. 병사들이 문을 당겼지만 안에서 잠겼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러나!”

병사들을 쫓아낸 카렐이 잠긴 문을 직접 발로 힘껏 걷어찼지만 그의 괴력도 이런 육중한 문짝에는 별반 소용이 없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코나가 진화작업을 하던 중장비에 달려가 기사를 쫓아내고 문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중장비의 큰 삽이 찌그러드는 소리에 소방대가 경악을 했지만 앞뒤 보이는 것 없는 코나는 본 척도 않고 다시 문짝을 후려쳐 옆으로 붕 날려버렸다. 두꺼운 철문이 날아가자 내부에 고여 있던 짙은 유독가스가 안에서 확 뿜어져 나왔다.

“따라와!”

카렐은 옆에 있던 베흔의 마스크를 휙 빼앗아 쓰고는 안에 무작정 들어섰다.

“아, 아니 그건 제 꺼…….”

얼떨결에 마스크를 잃은 베흔도 엄한 부하에게서 마스크를 덥석 빼앗아 쓰고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갔다.

헐레벌떡 계단실 제일 아래까지 도착한 카렐은 평상시 닫혀 있어야 할 보안 출입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잠금장치는 열쇠로 제대로 열었는지 [정상-열림]으로 되어 있고, 다시 닫히지 않도록 시체 한 구가 문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카렐은 시체를 툭 걷어차 뒤집어 보았다. 코나가 비친 랜턴에 막 나타난 얼굴은 사에나는 아니었다. 검댕이만 걷어낸다면 여자들 맘을 꽤나 울렸을 크고 잘생긴 미청년이었다.

“음?”

코나가 얼른 그자의 양쪽 눈을 벌려 보았다. 카렐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오드아이냐?”

“……아트위야 현신의 아들 같습니다. 생김새도 닮지 않았습니까.”

눈이 번쩍 뜨인 자이납이 얼른 손수건을 들고 청년의 얼굴에서 검댕이를 닦아내며 투덜투덜거렸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끔찍이 잘생겼는데. 귀한 미남 하나가 또 가다니.”

“잠깐, 저기.”

카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살아있다.”

코나가 이번에도 얼른 황제를 앞서 달려 나갔다. 사에나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그 여자의 가슴을 발로 꾹 밟았다. 거의 가디언에 맞먹을 만큼 큰 키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다부진 몸의 여자였지만 우스꽝스럽게도 웬 커다란 봉지를 가슴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숨을 쉽니다!”

코나가 봉지를 벗기고 얼굴을 드러내자 크고 까만 눈과 오뚝한 이목구비의 미인상이 랜턴 불빛에 모습을 나타냈다. 유독가스에 궁여지책으로 봉지를 쓰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출구까지는 도착 못 한 모양이었다. 이들이 나가려 했던 계단에는 누군가 인화물질을 던진 듯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신분을 밝혀!”

“하페즈…… 빈트 샤마시.”

코나가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거두고 여자의 앞에서 물러났다.

“장신에 큰 골격, 검은 머리, 검은 눈. 맞는 것 같습니다. 살름 빈 샤마시 현신의 딸 같습니다. 존귀한 혈통입니다.”

“자네의 존대가 영 맘에 안 들지만 자네니까 용서하지.”

‘마구스 자녀’라는 말에 카렐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페즈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황제의 그레이오팔에 잔뜩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카렐의 큰 손이 그의 턱을 덥석 붙들었다.

“넌 내가 누군지 알지?”

카렐이 하페즈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눈빛에 압도당한 하페즈가 갑자기 저항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카렐이 그의 귀에 입을 대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드함 마기즈 바즈라카.”

난데없는 바람어에 하페즈가 커진 눈으로 카렐을 힐끔 쳐다보았지만 곧 숨소리를 죽이며 눈을 얼른 아래로 깔았다.

“나도 내가 누군지 안다.”

황제의 음산한 목소리 앞에서 하페즈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벌벌 떨기만 했다. 카렐이 다시 물었다.

“한 번만 묻겠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이냐.”

하페즈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렵게 대답했다.

“트라에타오나 교단의 궁입니다.”

“그건 알아.”

“아트위야 현신의 처소와…… 배신자들을 억류해 두는 곳이 있습니다.”

“배신자?”

“수나 마구스와 옛 하마타 추종자들…….”

“수나? 수나 마구스가 왜 여기에 와 있어!”

“그게……몇 년 전 아트위야 현신께서 보관해 두고 계신 물건을 달라고 찾아와 심한 다툼 끝에 강제로 억류한 걸로 압니다.”

“다 흩어져서 찾아!”

하페즈를 베흔에게 휙 떠넘긴 카렐은 허겁지겁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잠깐, 내부는 왜 안 탄 거냐?”

지하실 안에 들어선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깥의 격납고는 치밀하리만큼 모조리 불을 지른 것에 비해 지하는 소화기로 끌 정도의 작은 화재가 군데군데 나고 유독가스가 약간 찬 것을 빼면 거의 멀쩡해 보였다. 게다가 통로 곳곳에 흩어진 시체들은 질식하거나 타 죽은 것이 아니고 싸움을 벌이다가 죽은 모습들이었다. 몇몇은 불을 지르려던 듯 인화물질 통을 지닌 채였다.

“사에나 경이 이 많은 놈들을 다 죽였을 리는 없다. 자기들끼리 싸운 게 분명해.”

“그럴 리가요. 자살할 만큼 골수 광신도들이 왜 자기들끼리 싸움을 했답니까?”

베흔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궁금하면 깨워서 물어보던지.”

카렐이 시체들을 훌쩍 뛰어넘어 더 안쪽으로 향했다.

“자료들이 많이 남았을 거다. 난 사에나 경을 쫓을 테니 베흔 여단장과 힐러 넌 구석구석을 뒤져서 중요한 자료들을 확보해.”

카렐이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통로 중 한쪽 끝에는 볼트에 맞은 듯 머리가 박살난 경비병 시체가 보안장치가 달린 문틈에 끼워져 있었다. 바닥엔 트라이크의 바퀴가 남긴 긴 스키드마크가 남아 있었고, 문은 이번에도 정상적으로 열렸다며 파란 불이 켜져 있었다.

“저쪽이다.”

카렐이 이번에도 앞장서 달려가 문을 확 밀었다.

“허, 이 정도면 궁전이 맞겠어.”

문 앞에 선 카렐이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안쪽엔 큰 인공연못을 중심으로 화사하고 확 트인 정원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수한 장비를 통해 지상에서 끌어들인 듯한 햇살이 황궁 연회실이 무색할 만큼 큰 지하 정원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화초와 나무 밑에 널린 수십 구의 시체들, 연못에 둥둥 뜬 붉은 핏물이 그런 감상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렸다. 이곳에서도 경비병과 헤네티들이 자기들끼리 칼부림을 벌인 흔적이 역력했다.

“으웁.”

앞에서 달리던 카렐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휘청거렸다.

“폐하?”

코나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았지만 카렐은 괜찮다고 팔을 저으며 다시 앞으로 달렸다. 덩굴로 엮어진 통로 아래에 엔진 과열로 연기를 내고 있는 트라이크와 이마 중간을 석궁에 명중당한 헤네티 시체가 보였다. 머리에 박힌 볼트는 사에나가 잘 쓰는 저격용 볼트였다.

“방금 죽은 것 같은데 좀 이상한걸.”

카렐이 시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볼트에 맞아 죽었다고 보기엔 눈과 입, 코에서 터져나온 어마어마한 피가 심상치 않았다. 이렇게 죽은 자를 이전에 본 일이 있었다.

“맙소사, 수나 마구스?”

카렐은 시체를 훌쩍 뛰어넘어 다시 안쪽으로 달려가 왼쪽 가슴을 움켜쥔 채 큰 소리로 외쳤다.

“사에나 경! 사에나 경! 수나 그대도 여기 있소?”

카렐이 거의 때려 부술 듯한 기세로 문을 확 열고 정원 다음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엔 화려한 침실과 서재, 응접실이 있는 넓은 회랑이었다. 회랑의 카펫 바닥엔 누군가 피를 철철 흘리며 지나온 듯, 선혈의 흔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폐하!”

회랑 맞은편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던 사에나의 반가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과 가슴이 피로 젖어 있는 모습에 코나가 깜짝 놀랐지만 그의 몸에서 흐른 건 아니었다. 그는 카렐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의사를 불러 주십시오! 급합니다!”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에나의 목소리에 카렐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직감했다. 그는 조금 전부터 계속 욱신거리는 왼쪽 가슴을 붙들고 사에나를 따라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제가 내려왔을 때 이미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시종 한 놈을 붙들고 여기까지 왔는데 헤네티 한 놈이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나오고 있어서 쏴 죽였습니다! 놈의 흔적을 따라와 봤더니…….”

회랑 몇 개를 지나온 카렐과 사에나는 제일 안쪽 침실로 훌쩍 뛰어들었다.

“제가 마지막 한 놈을 죽였지만 이미…….”

“이런.”

카렐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곳은 트라에타오나 교단을 상징하는 쇠사슬 문양 붉은 톤 태피스트리로 사방이 둘러쳐진 호사스런 침실이었다. 침실 한쪽에는 왼쪽 가슴을 깊숙이 베인 수나 빈트 트라카 마구스가 가는 숨을 몰아쉬며 12신이 새겨진 천장을 멍하니 올려보고 있었다. 수나의 상처를 눌러주고 있던 니사 라말라 박사가 절망 섞인 얼굴로 카렐을 돌아보았다.

“폐하?”

니사 역시도 한쪽 다리에 볼트가 박히고 어깨를 심하게 베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지만 두 손은 피가 흐르는 수나의 상처를 움켜쥔 채 죽어가는 마구스의 생명을 계속 붙들고 있었다. 몇 년 만의 반가운 만남이라 하기엔 상황이 너무 끔찍했다.

“이게 대체 뭐야!”

창백해진 카렐이 헐레벌떡 달려가 수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금은 워낙 상처가 커 함부로 옮길 수도 없는 상태였다. 갈라진 가슴 안쪽으로 뼈와 내장이 그대로 들여다보였고, 바닥에 번진 피만 보아서는 여태 숨이 붙은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어찌된 거요!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수나를 안고 주변을 둘러보던 카렐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부서진 채 팽개쳐져 있는 투명한 관(棺)을 쳐다보았다. 부서진 관 주변에는 칼과 볼트를 맞은 병사들과 헤네티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런데 유리파편 속에 누워 있는 시체가 어딘지 눈에 익숙했다.

“학장?”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카렐은 하마터면 안고 있던 수나를 놓칠 뻔했지만 다시 보니 코리온과는 조금 달랐다. 길고 검은 머리칼,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와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몸매까지 코리온과 얼핏 혼동할 만큼 닮았지만 이목구비가 더 또렷하고 훨씬 온화한 인상의 미남자였다.

“요아킴 세닉 경?”

카렐이 언젠가 보았던 역사자료 속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한때 교단의 유명한 교리법 학자였다가 전향해 제국 건국 후엔 남부 4제후가 되었고, 코리온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요아킴 세닉 경이었다.

“그대의 특별한 능력이 이 정도였소?”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내분’의 흔적, 피를 흘리고 도망치다가 사에나의 볼트에 맞아 죽은 헤네티, 이곳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경비병과 피를 쏟으며 죽어 있는 또 다른 헤네티까지, 대강의 사건이 머리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혼란스런 틈에 경비병 몇을 그대 편으로 만든 거요?”

고통에 떨던 수나가 입가에 웃음을 품었다.

니사가 수나의 손에 얼굴을 묻으며 대신 대답했다.

“경비병 넷을 데려왔지만 적이 너무 많았어요.…… 포기하고 물러나셨어야 했는데 끝까지…….”

지금껏 수나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 왔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속이 확 타오른 카렐이 가쁘게 숨을 헐떡이는 수나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다.

“젠장! 이 상황에서 고작 시체 따위를 찾고 싶으셨소? 불이 타고 유독가스까지 들어오고 있는데! 명색이 현신이란 자가 도대체 제정신이요!”

“폐하라면……어쩌시겠습니까.”

수나가 부들부들 떨며 카렐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총리가 이렇게 있다면…….”

잠시 발끈했던 카렐이 호통을 딱 멈추었다. 아트위야의 침대 발치에는 요아킴의 관이 세워져 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마도 아트위야는 매일 밤 자신을 쳐다보는 요아킴의 시선을 받으며 다른 남자를 품고, 이곳에서 잠이 들었을 터였다.

“허, 그럼 제대로 살아서 구하기나 하던지!”

카렐이 입으로는 호통을 치며 팔로는 더 힘을 주어 그를 안았다. 지난 사오시안트의 마지막 전투에서 팔을 잘리고도 목숨을 건졌던 그때 같은 기적을 바랐지만 이번엔 어딘지 느낌이 달랐다. 수나의 눈빛도 이상했고 숨도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카렐의 눈짓을 받은 사에나가 요아킴의 시체를 부서진 관에서 꺼내어 수나의 곁에 눕혀 주었다. 카렐은 피로 물든 수나의 손을 시신의 차고 딱딱한 손등에 덥석 얹었다.

“자! 앞으로 이걸 계속 만지려면 버티라고!”

“따뜻하군요.”

수나가 가늘게 열린 눈에 다시금 웃음을 지었다.

“3분만, 아니 1분만 참으라고! 내가 안아주면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젠장! 군의관은 대체 언제…….”

문 쪽에 대고 고함을 지르던 카렐은 익숙한 모습에 말을 딱 멈추었다. 카렐을 따라 이곳까지 내려온 코리온이 문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장?”

카렐이 핏기를 잃은 수나와 코리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말조차 하기 어려워진 수나가 손자에게 억지로 손을 내밀어 보였다. 하지만 코리온은 우두커니 선 채 이 모습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학장. 거기서 뭐 하는 거요.”

황제의 부름에도 코리온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제위전쟁 직후, 그에게 ‘후계자로서 현실을 받아들이라.’며 설득하는 할머니 수나 마구스에게 ‘사교 수괴와는 연을 끊겠다.’며 이미 모질게 선언했던 터였다. 그는 입술에 잔뜩 힘을 주고 서 있을 뿐 ‘사교 수괴’에게는 접근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싫으면 할아버지한테라도 예의를 표해야 할 것 아닌가!”

카렐이 답답한 사내에게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황제의 이렇게 격한 호통을 처음 들은 코리온이 멈칫했지만 결국 마지못해 요아킴의 시신에 다가와 그 옆에 꿇어앉았다. 하지만 죽어가는 수나에게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 손자를 보며 허탈하게 웃던 수나가 갑자기 부르르 떨며 피를 토해냈다.

“파이 코리온.”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수나가 갑자기 힘이 솟는 듯 고개를 억지로 쳐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있는 코리온을 향해 목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유언과 보물은 네 것이고…….”

“맙소사, 아닙니다, 아직 아니에요!”

창백해진 니사가 울음을 터뜨리며 수나의 가슴을 더 힘껏 눌렀다.

“난 이제 네게 새로이 깃들 것이니…….”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던 코리온은 할머니의 운명을 직감한 듯 손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새어 똑똑 흘렀다.

“코리온 빈 트라카……울지 마라…… 이제 네가 하마타의 27번째 지도자다.”

“수나? 제발 1분만…….”

카렐이 움찔하며 수나의 뺨을 짚었다. 그의 고개가 카렐의 품 안으로 힘없이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요아킴과 꼭 맞쥔 그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힘줄이 곤두서 있었다.

“수나?”

카렐이 그의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수나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서려 있었다.

“후우.”

카렐은 숨이 끊어진 수나를 요아킴 옆에 나란히 눕혀 주고는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생전의 요아킴 경이 ‘내겐 한 사람 뿐이다’라며 어떤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직 수나와의 사이에서만 남매를 가졌다는 것을, 그리고 수나가 한 해도 빠짐없이 요아킴의 제례를 몰래 찾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부럽소.”

나란히 누운 둘을 쳐다보며 카렐의 입 안에서 작은 속삭임이 맴돌았다. 평생 정절을 지켰던 이 고결한 남자는 생전에 언감생심 꿈속에서만 그렸을 여인의 곁을 이제야 완전히 지키고 누워 있었다.

“제2신관 니사 라말라, 새로운 현신에 깃드심을 축하드리옵니다.”

카렐은 니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닦아낸 니사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코리온에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트라카의 27번째 현신이신 코리온 빈 트라카께 복종을 맹세하나이다.”

++++++++++++++++++++++++++++++++++++++++++++

888회입니다~~ 8트리플입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주문게시판 : http://www.tasawwuf.pe.kr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