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90 회: Part 6. 저승길에 남겨놓은 발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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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신이었어?”
아지드의 머릿속이 낯빛만큼이나 하얗게 변해버렸다. 대신관이 자신을 지키려 숨겨놓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방금 죽인 자들과 한 패일수도 있다는 의심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상대의 관찰력이 그의 판단보다 더 빨랐다.
“잠깐, 다치신 겁니까.”
그는 아지드의 코트자락 사이로 보이는 핏자국에 갑자기 눈을 번득이며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가 공격한다고 생각한 아지드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려 했다.
“뒷문에 우리 사람이 있으니 가 있으십시오. 검은 코트입니다. 빨리요.”
그 노점상, 아니 비밀요원은 품에서 칼과 석궁을 빼들며 다람쥐처럼 날랜 동작으로 계단 위로 후다닥 멀어져갔다. 아지드가 누군가에 쫓긴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머뭇거리던 아지드는 다시 가던 대로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다. 방금 그 비밀요원이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일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생각 없이 여관 뒷문으로 나가려던 아지드가 급히 걸음을 멈췄다. 뒷문 밖에는 정말로 차 한 대와 검은 코트를 입고 어슬렁거리는 두 명이 보였다.
‘미쳤니, 네가 방금 누굴 죽였는데.’
반대편에는 처형을 보러 온 구경꾼으로 북적거리는 앞문이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에 자신의 운명이 갈릴 순간이었다. 계단 초입에서 머뭇거리던 아지드는 결국 방향을 돌려 여관 앞문 쪽으로 향했다. 어깨가 욱신거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이제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낳을 때까지는 살아야 해, 그때까진 꼭 살아야 해.’
앞문을 나선 아지드는 구경꾼들로 발 디딜 틈 없는 광장에 뛰어들었다. 잠시 숨죽인 듯 조용했던 광장은 누군가의 목이 잘리면서 다시 찢어질 듯한 함성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지드에게 남의 처형 따위는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광장 건너편으로 그가 신학도, 의학도로 수십 년을 다녔던 남극성당의 웅장한 정문이 보였지만 지금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으우욱.”
조금 전 친구에게 맞은 배에서 칼로 베는 듯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사람들을 헤치고 달렸다.
“돈이 있어야 해. 돈이.”
가까운 은행에 뛰어 들어간 그는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거칠게 떠밀고 무작정 앞줄에 뛰어들었다. 무어라 성을 내려 했던 사람들은 그의 불룩한 배와 창백해진 낯빛에 서둘러 앞자리를 내주며 ‘뭐 잘못되셨나요?’라고 물어왔다.
“다 현금으로 줘요, 빨리요!”
아지드는 카드를 내밀고 당장 일이 날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성직자로 살며 모은 재산도 집 사는 데 쓰고 얼마 있지도 않았지만 그나마도 수배령이 떨어지고 모든 계좌가 막히면 한 푼도 찾지 못하게 될 터였다. 은행원은 당장 쓰러질 듯 배를 움켜쥔 임산부의 막무가내 요구에 이것저것 복잡한 확인도 생략한 채 본인 확인만 하고 급히 돈부터 모조리 찾아 내주었다.
“저, 저기 병원은 남극성당 안으로 가시면……저희가 구급대를 불러 드릴 테니 여기에서 안정을 취하시고…….”
아지드는 은행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돈만 덥석 챙겨 다시 은행을 나가 인파 속에 뛰어들었다.
“저기다!”
멀리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 하나가 배를 움켜쥐고 인파 속을 헤매는 아지드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아지드는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가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중앙에 무작정 뛰어들었다. 그곳에 왜 사람들이 이리 많은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비켜요! 비켜!”
처형을 가까이 보기 위해 제일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몸으로 밀어붙이는 임산부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사적으로 길을 내주었다. 거의 넋을 놓고 나아가던 그는 갑자기 눈앞에 불쑥 나타난 큰 공간에 화들짝 올랐다.
“이런.”
자신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것을 깨달은 아지드가 가방을 끌어안은 채 멈칫거렸다. 그는 한참 처형이 벌어지고 있는 광장 중앙에 혼자 튀어나와 있었다.
“이 여자 뭐야.”
황소가 끄는 줄에 사형수의 사지를 묶고 있던 헤네티들이 이 정신 나간 임산부를 일제히 노려보았다. 놀라고 당황한 아지드는 구경꾼들 사이로 주춤주춤 뒷걸음치며 얼떨결에 사형수를 쳐다보았다. 순간 창백한 얼굴로 흙바닥에 누워 끔찍한 죽음만을 기다리던 중년의 사형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런.”
죽음의 시선에 덜컥 공포를 느낀 아지드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의 다하카르 문장을 짚었다. ‘임산부가 사형수의 눈을 보면 아이가 명대로 살지 못한다.’는 터무니없는 터부가 굳이 아니어도 죽음을 앞둔 그의 시선은 너무도 무서웠다.
단상에서 재판관의 고함이 들려왔다.
“반역도이며 이단의 괴수인 리 리쿠를 이 자리에서 여섯 갈래로 찢어 죽여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로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남자는 고개를 쳐들고 먼 하늘을 올려보았다. 5척 반(165cm)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자그만 키에 마르고 왜소한 외모였지만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가늘고 날카로운 눈에는 자신의 운명이 이 지경으로 끌려올 때까지도 끝내 뜻을 꺾지 않게 한 의지력, 아니 오기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의 손발이 죽음의 공포에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과 기세만은 여전했다.
그는 법정에서 야푸르 대신관에게 ‘근친혼으로 튀어나온 괴물 변태’라며 침을 뱉었고, ‘너희가 뭘 믿고 신 행세를 하는지 가소롭구나.’라는 폭언으로 격분한 신도들의 쓰레기 세례를 받기도 했었다.
이 외골수는 아버지 리쿠 중령이 비밀 헌병대에서 파견된 가짜 유학자였다는 사실도 끝까지 믿지 않았고, 여섯 조각으로 찢어 죽일 것이라는 선고에 ‘그럼 여섯 배로 응보를 받겠구나.’라며 저주를 퍼붓기까지 했었다.
“구경이 났구나! 그래, 유학자가 어찌 죽는지 실컷 봐 두어라!”
리 리쿠가 구경꾼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아지드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그의 이마에 빛나고 있는 다하카르의 사파이어에 눈가를 찡그리며 침을 퉤 뱉었다.
“네 뱃속에 든 아기도 크고 난 후엔 유학을 공부하게 될 거다!”
“실시해!”
집행관의 고함에 리 리쿠의 손발을 잡아매고 있던 황소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을 너무 오래 끌지 않기 위해 팔다리 옆에 하나씩 서 있던 헤네티들이 도끼를 쳐들었다.
“아냐, 아냐.”
혼비백산한 아지드는 처형장 건너편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검은 코트를 발견하고는 다시 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리 리쿠의 찢어지는 비명과 동시에 구경꾼들 사이에서도 큰 소란이 벌어졌다.
아지드는 비명과 공포로 휩싸인 광장을 정신없이 가로질러 달렸다. 배가 찢어질 듯 아파왔지만 그는 기를 쓰고 견디며 다리에 억지로 힘을 넣었다.
“제발!”
한참을 달려 가까스로 광장을 빠져나간 아지드는 등 뒤에서 들리는 사형수의 끔찍한 비명과 구경꾼들의 천박한 소란에서 귀를 막고 남극성당 정문 쪽으로 달렸다.
“듣기 싫다고! 젠장! 조용히 좀 하라고!”
몇 분이나 달렸는지, 그가 거의 광장을 빠져나가 남극성당 정문에 도착했을 무렵, 집행 완료를 알리는 큰 나팔소리, 군중들의 비명에 아지드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 남자도 길고 긴 끔찍한 고통 끝에 결국 이교도들의 순교자로 이름을 올린 모양이었다.
“뭐 해요!”
정문 앞 도로 중간에 멍하니 서 있던 아지드는 캠퍼스 안에서 막 나오던 통학차가 비키라며 재촉하는 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가 이곳에 학생으로 있던 시절 많이 보았던 번호였고, 어디로 가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지드는 다짜고짜 차에 달려가 문을 두들겼다.
“이봐요, 이건…….”
당황한 운전기사가 뭐라 소리를 지르려다가 그의 이마에 박힌 다하카르의 사파이어와 잔뜩 부른 배에 놀라 얼른 차 문을 열어주었다.
“병원은 안에 있는데요, 이 차는 시가지 터미널로 가는 겁니다.”
“알아요!”
무작정 차에 오른 아지드는 귀 밑의 성직자 표시를 보였다.
“제발,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하니 도와줘요.”
“예? 아, 알겠습니다. 성직자님. 저기, 학생들! 여러분들 선배니 누구 자리 좀 양보해요!”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운전기사는 영문도 모른 채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차에 먼저 타고 있던 신학생, 의학생들이 부른 배로 헐떡이는 선배에게 급히 자리를 내주고 누군가는 입고 있던 코트까지 벗어 바닥에 깔아주었다.
“멀쩡한 거니.”
두툼한 코트 위에 누운 아지드가 배를 만지며 애타게 물었다. 볼트에 맞아 구르고, 친구의 주먹에 맞은 충격이 아기에게도 그대로 전해졌을 터였다. 조금씩 호흡이 돌아오면서 지독한 복통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그를 행복하게 해 주던 아기의 움직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아기가 제일 활발하게 놀던 때처럼 옆으로 돌아누워 다시 배를 만져보았다.
“무사하냐고. 좀 움직여 봐, 제발.”
아지드는 배를 짚은 채 눈을 꽉 감았다. 그의 물음에 화답하듯 작은 움직임이 그의 손끝에 전해져왔다. 참으려 했지만 자꾸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기는 아직 살아있었다.
“내겐 너뿐이란다.”
울음이 터진 아지드가 끔찍한 상황을 버티고 살아남아 준 아기에게 말을 전했다.
“이제 네가 내 전부라고.”
졸지에 도망자가 된 아지드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그와 같은 신세가 된 아기가 탄 통학차는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 남극성당을 빠져나와 인근 도시의 터미널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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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고 욱신욱신 쑤시는 몸을 푹신한 호텔방 침상에 파묻고 있던 카렐은 자신을 찾는 할룩스를 벽난로에 집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제는 코윈의 눈밭에서 밀리타를 구하려 추격전을 벌였고, 새벽엔 하임달에서 아트위야의 궁을 습격하고, 수나의 죽음을 수습하느라 이틀 내내 제대로 쉰 일도 없었다. 묵혀놓았던 피로가 몰려오면서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카렐의 맘을 무겁게 하는 건 시라즈에서 받은 보고였다. 얼음 속에서 어렵게 구해낸 밀리타는 뇌세포의 상당부분이 손상된 채 혼수상태로 중환자 병실에 누워 있다는 보고였다.
“어떤 놈인지 확…….”
마지못해 할룩스를 켠 카렐은 영상으로 나타난 페로의 모습에 표정이 확 풀어졌다. 잔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저 남자가 ‘꼴이 왜 그 모양이냐?’라며 발끈하는 모습부터 상상했지만 웬일인지 페로는 입술에 잔뜩 힘을 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렐은 뭔가 더 나쁜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애들한테 문제가 생겼다는 말만은 말아 줘.”
머뭇거리던 페로가 뒤쪽에 있던 서류로 바꿔들고 입을 열었다.
“……탈라스와 수베르에서 부족 전체가 조기 노화를 보이는 곳이 발견됐어. 페스트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몰살된 주민들하고 같아. 이번엔 4만 가까이나 돼.”
“거기도 무상 원조식량을 먹은 거야?”
“1년 넘게 먹어왔다더군. 네 예상이 맞아. 조사해 보니 그 빌어먹을 원조식량에 수명개조를 깨는 성분하고 검은 재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던 것 같아. 검은 재는 극단적인 성장촉진제라고 하니까 작물을 빨리 키우려고 넣은 것일지도 모르지. 물론 수명개조가 깨진 상태에서 먹은 사람한테는 노화촉진제가 됐겠지.”
“후우.”
카렐이 손으로 눈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재…… 고향 행성을 멸망시킨 게 이젠 우리까지 위협하다니.”
“……타리프의 일지 다음번 권은 구했어? 그걸 구해야 검은 재와 고향 행성에 관해 더 알 수 있을 것 같다며”
“아직.”
카렐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구한 타리프의 일지 첫 번째 권을 정보기관과 역사학자, 코리온에게도 모두 확인을 시켰지만 그곳에 나온 내용으로는 고향 행성이 동식물까지도 거의 절멸해버린 검은 지옥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제후들한테는 무상원조식량은 다 소각하라고 했겠지?”
“그뿐이면 다행이게.”
“그럼?”
“오염된 곡물이 탈라스의 암시장에 떠돌고 있는 게 포착됐어. 놈들이 이젠 염가로 빈민가 시장에 내다팔기 시작했나봐. 재단인가 하는 그 십새끼들을 빨리 잡아야 하는데.”
“미치겠군.”
“다른 지역까지 추정하면 최악의 경우 2백만 명 이상 수명개조가 깨졌을지 모른다고 하더군. 그들을 새로 수명 개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했는데 쉽지 않아 보여.”
“환장하겠군.”
카렐은 침상에 얼굴을 묻은 채 헛웃음을 지었다.
“교단 시대에 전 주민 수명개조를 시키는 데 100년 가까이 걸렸다는데 깨는 건 이렇게 잠깐이라니.”
“그나마 사에나 경이 페스트에서 검은 재를 모조리 날려버리지 않았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빌어먹을.”
“사에나 경이 폭파시킨 건 보관시설이지 생산시설은 아냐. 이번에 점령한 교단 시설에서 나온 자료를 보니 페스트의 호드르 산에서 놈들이 생산 재개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
“벌써?”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5백년 전 교단의 과학기술 중엔 지금 우리도 모르는 게 많아. 오죽하면 명색이 황제가 정보 좀 얻겠다고 교단 광산 지배인 따위한테 웃음을 팔아야 할까.”
“그게 무슨 말이야?”
페로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카렐은 별것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던 페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국총회가 보름 후야. 지금 일시적으로 곡물가가 떨어지고 있지만 델루지 가에서 창고를 열겠다는 약속 못 받으면 다시 폭등할 거라고. 가격을 못 잡으면 빈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오염된 곡물을 사들이는 걸 못 막아.”
“황제는 병으로 죽어가고, 제국민들은 늙어서 죽어가고 꼴 한 번 볼만하군.”
엎드린 카렐의 입 속에서 자조섞인 혼잣말이 맴돌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쳐들고 페로에게 다시 물었다.
“방금 뒤로 돌려 놓은 서류도 전해야지?”
황제의 눈썰미에 페로가 당황한 얼굴로 짧게만 말했다.
“페스트에서 주페를 못 찾았어. 아직 호드르 산 점령지에 붙잡혀 있는 게 아니라면 이미 페스트를 떠난 것 같아.”
카렐은 며칠째 거의 말을 잃고 침울해 있는 코리온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머니 수나의 죽음으로 더 기운을 잃은 그에게 면목이 없이 미칠 것 같았다.
“그 무렵에 페스트를 오간 셔틀하고 수송선 자료도 이그나토 가에서 가지고 있는데 그 아들놈이 가문을 장악하고 있으니 지금은 막다른 길이야. 호드르 산을 되찾고 이그나토 가를 정상화시키는 게 관건이야.”
“내가 공격 승인 해준 게 며칠 전이었던 것 같은데?”
“어제 베아트릭스 황빈이 경기병대 이끌고 제네르 경 도와주러 떠났어. 곧 토벌작전 개시할 거야. 나도 곧 갈 테니 옛날 황금멤버 총집결이야. 가디언 네피하고 시로까지 다 있으니 걱정 마.”
“싸움엔 황금멤버일지 몰라도 교단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 없군.”
카렐이 바로 문제점을 집어냈다. 그는 침대에 머리를 묻으며 쓰게 웃었다.
“학장한테 좀 부탁해 봐야겠군. 지난번 트라우마가 좀 있겠지만…….”
“아니, 몸도 성치 않은 서생이 밥이나 축내지 뭐에 쓰라고…….”
코리온이 온다는 말에 페로의 표정이 확 찌그러들었다.
“그리고?”
카렐이 말을 돌리자 페로가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마하 대군이 몸살로 앓아누웠고.”
페로가 대충 넘어가라며 손을 저었다.
“그 애는 너만 없으면 꾀병 부리잖아. 하루이틀 일인가. 신경 쓰지 마.”
“그렇겠지…… 그런데 이젠 꾀병부릴 나이는 아닌데…….”
카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맘은 무거웠다.
네페티의 딸 마하는 전부터 워낙에 극성맞은 여우짓으로 소문이 자자한데다가 황제가 궁을 비우는 날이 길어지면 여지없이 몸살로 앓아누워 울고불고 시종들을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그렇지만 카렐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남매들 중 항상 1번으로 달려나와 카렐의 품을 독차지하다보니 ‘꾀병이 아니었냐.’는 의심을 매번 받곤 했다.
“넌 그럼 이젠 어디로 갈 거야? 오르마즈 경 시신이 무덤에도 없었다며?”
페로의 물음에 카렐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밤은 좀 쉬고 나서 생각하게. 네가 거기서 험악한 전투 치르는 동안 난 여기서 고상하게 사교 대가리를 박살내야지.”
카렐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자신에게 염려의 말 한 마디라도 해 주지 않나 내심 기대했지만 아니나다를까, 그 무심한 남자는 어깨만 으쓱했을 뿐 별 반응도 없었다.
“그래, 그럼 다음엔 호드르 산 꼭대기에서 승전보 보내지.”
허공 속으로 휙 하니 사라져버린 페로의 영상 잔영을 보며 카렐이 쓴웃음과 함께 다시 침상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네가 어련하겠냐.”
그때, 문이 열리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듯 얇은 흰색 드레스 차림의 북부 길드마스터 케스난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에는 눈을 가린 건장한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케스난이 사뿐사뿐 다가오며 물었다.
“방이 맘에 드시나요?”
“그럭저럭, 이 정도면.”
카렐은 눈동자를 굴려 방을 새삼 둘러보았다.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고(古)가구와 램프, 사방으로 자줏빛 커튼이 둘러쳐진 고급스런 객실이었다.
“아래층 클럽도 최고죠. 제 소유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바하칼리에서 제일 물 좋은 클럽이니까요.”
케스난이 보랏빛 벨벳 커튼을 살짝 들치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는 북부 환락 컴플렉스의 천박하고 원색적인 불빛이 삭막한 황무지 풍경 위에 섬처럼 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따 여기서 만날 사람이 정말 궁금한걸요?”
“글쎄,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더군.”
“설마 저보다 미인은 아니겠죠?”
“미인? 외모를 말하는 겐가?”
카렐이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내 아무리 오랫동안 배우자 살냄새를 못 맡았어도 눈은 멀쩡하다네. 자네도 이런 질문을 한 게 창피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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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다음편과 다다음편의 주제는 [카렐의 눈이 과연 멀쩡할까?]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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