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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891화 (886/1,132)

< -- 891 회: Part 6. 저승길에 남겨놓은 발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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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못생겼나요?”

케스난이 그제야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 사이, 케스난이 데려온 건장한 사내가 눈을 가린 채로 카렐의 옷을 벗겼다.

“세상에나.”

옆에서 카렐의 몸을 지켜본 케스난이 혀를 끌끌 찼다. 검은 용이 휘감은 카렐의 단단한 몸은 검은 멍과 상처로 온통 만신창이였다.

“차라리 병원부터 가시지.”

케스난이 오른손의 황금색 갈고리로 옷을 냉큼 받아들며 물었다.

“최고 솜씨의 안마를 보여주겠다며.”

카렐은 남자 안마사가 등에 부어주는 따뜻한 기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케스난은 의자를 끌어 침상 앞에 바싹 대고 그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는 카렐의 낮은 숨결까지 느껴질 만큼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혹시 침대에서 제가 한쪽 손하고 갈고리로 해 드리는 ‘특별한 안마’를 생각하고 오신 건가요?”

“이 몸으로? 미쳤나. 내 몸 가누기도 힘들어.”

카렐이 어처구니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몸은 그렇지만 눈동자는 다른 말씀을 하시는데요?”

케스난이 카렐의 눈을 가까이서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카렐이 가슴을 톡톡 두드리며 냉큼 대답했다.

“여기 사는 짐승 새끼가 제멋대로 발정이 나거든.”

“제대로 말씀하셔야죠, 제멋대로가 아니고 하루 온종일이라고.”

“푸훗.”

남자 안마사가 등 근육을 꾹꾹 풀어주는 느낌에 카렐이 몸을 쭉 펴며 혼자 피식 웃었다. 하지만 언젠가 밀리타가 궁에 있을 때 그에게 해 주었던 안마만큼 온몸을 제대로 풀어주었던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카렐이 쓸데없는 잡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내고 물었다.

“그나저나, 일은 잘 되어가나? 그쪽 파티에 초대받았다지?”

“계획대로요.”

케스난이 카렐에게 얼굴을 바싹 대고 다시 묘하게 웃었다. 케스난은 카렐의 뺨과 귓가, 목덜미를 갈고리로 쓰다듬으며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몇 번이나 훑었다.

“지난번에 크테시폰 궁으로 보이는 곳에 갔었지만 워낙 몸 수색이 심해서 정확한 위치는 파악 못했고요, 대신 마구스로 보이는 자들하고 핵심 인물을 외모는 확인할 수 있었죠.”

케스난은 품에 가져온 서류를 그에게 슬쩍 넘겨주었다. 그는 카렐을 주물러주고 있는 덩치 좋은 안마사를 힐끔 올려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살름 빈 샤마시라는 덩치 놈이 제 치마폭 안에서 아주 귀엽게 놀거든요. 조만간 아주 큰 일거리를 딸 것 같아요. 무언가 비밀스런 화물을 옮기는 것 같은데 아직 내용은 모르겠어요. 덕분에 감시하는 눈도 두 배는 많아졌고요. 제 옆에도 염탐꾼이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잡아낼 방법이 있어야 말이죠.”

“익.”

어깨에서 따끔함을 느낀 카렐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손톱으로 살갗을 긁어놓은 안마사가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실수로…….”

“제기랄, 꺼져!”

케스난이 버럭 화를 내며 안마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정말 죄송합니다.”

눈을 가린 안마사는 가구들을 조심조심 짚으며 문으로 움직였다.

거의 문가까지 다가간 그 안마사를 케스난이 다시 불렀다.

“이봐.”

“예?”

남자가 뒤를 돌아본 순간, 케스난이 당긴 석궁의 볼트가 안마사의 두 눈 사이에 딱 소리를 내며 박혔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도 없이 기습을 당한 안마사는 짧은 비명 한 마디만 남기고는 고운 카펫이 깔린 바닥에 축 늘어졌다.

“저놈?”

문가를 흘끔 돌아보았던 카렐이 다시 침상에 얼굴을 묻었다.

“살름 그놈이 질투가 좀 심하거든요. 오늘 저놈 머리 들고 가서 한바탕 쏟아내 봐야겠어요.”

케스난이 석궁을 백 속에 감추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뭐라고 변명하면서 싹싹 빌지 벌써 궁금해지네요.”

밖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듯 루스탐이 문을 똑똑 두드리고 나타났다. 그는 죽은 안마사의 눈을 가리고 있던 수건 안쪽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내보였다.

“이래서 발신 신호 검색에서는 안 걸렸군요. 단순 녹음기입니다.”

“손톱에 내 피가 묻었을 거다. 살짝 빠져나가서 누굴 만난 건지 검색해 보려 했겠지.”

카렐이 침상에 얼굴을 묻은 채 덧붙였다.

“뒤탈 없이 소각하겠습니다.”

“아참, 머리는 남기고.”

루스탐이 시체를 자루에 담아 짊어지고 얼른 밖으로 사라졌다. 카렐과 케스난은 아무 일도 없던 사람들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살름 빈 샤마시라고 했나? 그대에 눈독들인 사내놈이?”

카렐이 케스난을 힐끗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케스난이 웃으며 그의 뺨에 코끝을 부볐다.

“지금 질투하시는 거죠? 세상에, 이런 영광이 있나.”

“그 딸네미가 내 손에 있거든. 하페즈라던가.”

“그놈은 딸이 죽은 걸로 알고 있던걸요? 오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이더군요. 위로해 준다는 핑계로 저녁때 찾아가겠다고 했죠.”

“맘이 약해졌으니 다루기 쉽겠군. ……너무 가까워지지는 말고.”

“그러실 줄 알았죠. 질투하시는 거 맞죠?”

케스난이 빙긋이 웃으며 그의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제가 그 인간하고 잤을까요? 아닐까요?”

“제위전쟁 못 끝낸 초짜 황제도 맘에 안 찬다고 침대에 안 들였던 여자가 고작 5교단 마구스 따위한테 몸을 허락했다면 실망이지.”

카렐이 케스난의 콧잔등을 만지작거렸다. 케스난이 묘한 웃음과 함께 그의 큰 손을 가슴 옷깃 속에 살짝 당겨 넣으며 속삭였다.

“지금은 완전한 황제시니 저쪽 큰 침대로 옮기실래요? 방금 못 받으신 마사지 제가 마저 끝내드릴 테니.”

“허, 웬일이야.”

“저를 안았던 침대에 설마하니 다른 놈을 들이시지는 않을 테니까요.”

카렐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막 달아오르려던 둘의 분위기는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확 깨져버렸다.

“젠장, 우베 그놈이 분명해. 부전자전이라니까.”

맥이 탁 풀려버린 카렐이 다시 침상에 얼굴을 기댔다. 잔뜩 골이 난 케스난이 문에 대고 버럭 성질을 냈다.

“누가 멋대로…….”

잠시 흥분했던 케스난의 목소리가 확 사그러들었다. 카렐은 이 대담한 여자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거기 놓고 나가거라.”

케스난이 카렐의 앞을 살짝 막아서며 급히 말했다.

“예?”

웬 소년의 목소리에 카렐이 눈앞의 케스난을 슬쩍 밀어냈다. 은쟁반에 찻주전자와 손 닦을 물, 수건을 들고 들어온 웬 소년이 케스난의 냉담한 태도에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백해진 케스난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놓고 나가라고. 당장.”

“잠깐, 이리 와 봐라.”

카렐이 소년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여기로 오라고 했다.”

우물쭈물하고 있던 소년은 황제의 재촉에 마지못해 나아가 침상 한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납작 절을 올리고는 침상 위의 카렐에게 쟁반을 높이 올려 보였다. 절하는 동작이나 움직임 모두 제대로 배운 황실 예법대로였다.

“죄송합니다. 밑의 바에서 싸움이 나서 담당 사환이 못 왔습니다. 제가 대신…….”

“이 클럽 지배인이 설마 황궁 시종장 출신은 아닐 테고.”

카렐의 말에 케스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기선 평범한 일개 손님에게까지 무릎걸음에 황실 인사법으로 접대하나?”

카렐이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폈다. 키로는 열 살 남짓 되어 보였지만 날카로운 눈매의 옅은 회색 눈동자에 갈색 머리칼, 야무지고 조숙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카렐의 시선에 놀란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너 내가 누군지 아는구나?”

카렐의 한 마디에 소년의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카렐이 갑자기 무기 벨트에 손을 뻗었다.

“아앗.”

케스난이 소스라치게 놀라 그의 팔뚝을 다짜고짜 와락 끌어안았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가 말해줬어요.”

“음?”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척 하며 벨트에 달린 주머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냈다.

“뭘 그러지 말라고?”

그제야 자신이 카렐에게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케스난이 얼른 손을 떼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카렐은 소년의 쟁반에 은화를 놓아 주고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네 이름이 뭐냐?”

“발렌틴입니다, 폐하.”

“황제가 물으면 성까지 대답하는 거란다.”

소년이 이번엔 케스난의 눈치부터 보았다. 케스난이 단념한 듯 결국 입을 열었다.

“제 양자입니다. 발렌틴 오나시스입니다.”

“왜 내게 양자를 얻었다는 말은 안 했지?”

“……친모가 직접 기를 사정이 못 되어 제게 부탁했습니다.”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차 한 모금을 다시 삼켰다.

“누가 맡겼다고? ……후훗. 자네가 이상한 병에 걸렸다면서 한동안 날 피해 다녔던 게 아마 11년쯤 전이었지?”

케스난의 입가에 힘줄이 확 곤두섰다.

“폐하를 배신한 일은 없습니다. 절대로.”

“그런가. 그럼 됐고.”

궁지에 몰린 케스난을 힐끔 쳐다보았던 카렐이 다 마신 잔을 쟁반에 돌려주었다.

“차가 맛있구나, 발렌틴.”

카렐이 소년의 고운 갈색 머리칼과 오뚝한 코, 얇은 입술, 회색빛이 감도는 눈가까지 손끝으로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눈가를 만져주던 카렐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누구 아들인지 참 잘생겼구나. 언제 어머니와 함께 황실에 놀러오려무나.”

“나가보렴.”

케스난의 손짓에 발렌틴은 왔을 때처럼 무릎걸음으로 적당히 물러나 뒷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소년을 내보낸 케스난은 다시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무어라 말하려던 그는 결국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눈빛이 아주 야무져. 케스난. 어미로서도 훌륭한지 이제 알았네.”

“…….”

“그나저나, 나갈 시간이 거의 다 되었어. ‘짧은 마사지’를 저 꼬마가 다 망쳐놨으니 화낼 수도 없고.”

“다음엔 정말 뜨겁게 해 드리게요.”

케스난이 억지로나마 표정을 풀고는 카렐의 목을 안고 뺨에 얼굴을 부볐다. 카렐은 항상 긴장감을 자아내고 자극적이기만 하던 그의 손길과 느낌이 갑자기 어딘가 편안해진 것처럼 느꼈다.

“준비는 해 왔겠지?”

“그럼요.”

케스난은 가방에서 작은 가면을 꺼내놓았다. 이마와 눈가, 광대뼈까지 덮도록 만들어진 얇은 인공 피부 가면엔 가벼운 흉터와 화상 흔적까지 세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둥근 콧날과 뺨 부분이 유독 도톰했다.

“입가까지 가리면 말할 때 어색해지니 이 정도가 적당해요. 갑갑해도 좀 참으시고요.”

케스난이 카렐의 움푹해진 뺨에 가면을 꼼꼼히 붙여주었다.

“어차피 황제 얼굴을 잘 알지도 못할 게야. 봤어도 먼발치에서나 봤을 테지.”

“밤 시간엔 조명도 최대한 어둡게 해 놓을 테니 맨얼굴이어도 잘 모를걸요. 시끄러워서 목소리도 잘 못 알아들을 테고요.”

가면을 붙인 카렐은 거울을 돌아보았다. 통통해진 뺨과 부드러운 콧날 덕분인지 평소보다 훨씬 온화해진 인상이었다.

“혹시 이게 그대가 원하던 얼굴?”

“그 여자가 홀딱 반할까봐 걱정되네요.”

“오호, 오늘 질투가 유독 심한데?”

케스난은 푸른색 컬러렌즈를 카렐의 그레이오팔 위에 불쑥 대 주었다.

“그 여자는 이 보석 같은 눈동자를 못 보니 상관없어요.”

“헛.”

객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루스탐은 안에서 나온 카렐의 낯선 모습에 움찔하며 무기에 손을 가져갔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고 머쓱하게 웃었다. 치안군 장교 정복에 어깨에는 큰 겨울 코트를 걸치고 얼굴엔 반창고를 붙인 피곤해 보이는 모습은 여지없이 군 병원에서 갓 나온 모습이었다.

“마스터 케스난은 먼저 내려갔습니다.”

“알아.”

카렐은 방을 나오자마자 복도 창밖을 먼저 내다보았다. 고상한 검은 드레스에 모피 숄로 외모를 싹 바꾼 케스난이 소년 발렌틴의 손을 꼭 잡고 웬 고급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아마도 샤마시 교단의 살름 마구스를 만나러 가는 길일 터였다.

차에 타기 직전, 소년 발렌틴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카렐이 보고 있는 창을 올려보았다. 하지만 곧 케스난을 따라 차 안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여기.”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본 카렐은 손바닥 안에 감추고 있던 가는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을 루스탐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 머리카락 주인의 부모가 누군지 알아봐라.”

머리카락을 받아들고 잠시 머뭇거리던 루스탐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침에 붙잡은 샤마시 교단 딸의 배다른 남동생인지 우선 알아보라 하겠습니다.”

카렐이 지나치게 눈치 빠른 루스탐에게 슬쩍 눈을 흘겼다. 화들짝 놀란 루스탐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스럽습니다.”

“11년 전이면 모렌 박사가 황실 유전연구소를 맡고 있을 때다. 연관되어 있을지 모르니 박사에겐 비밀로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니다.”

카렐은 입술을 깨물며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붉은 카펫이 깔린 회전계단을 타고 아래층에 있는 클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유리창 하나 없는 이 ‘북부 스타일’ 고급 클럽은 몇 개 안 되는 조명 아래에서 농도 짙은 음악이 선남선녀들의 색기 넘치는 시선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중앙의 큰 스테이지를 마치 극장처럼 부채꼴로 에워싼 좌석과 여러 개의 미니 스테이지들은 발 디디기 힘들 만큼 꽉 차 있고 손님들의 차림새는 하나같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종업원 차림새로 주변을 감시하고 있어라’라는 명령을 받은 자이납과 우베는 원래 임무는 모조리 까먹었는지, 스테이지 위에서 반나체로 야릇한 춤을 추고 있는 미남미녀 댄서들을 헤벌레 구경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맙소사, 저 30년 넘게 부려먹으시면서 이런 데를 이제야 데려오시다니 너무했어요.”

“이놈아, 넌 내가 그 여자 수하들한테 칼 맞아 죽어도 저기만 보고 있을 거냐.”

카렐이 자이납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툭 쏘아붙였다. 기겁을 한 자이납이 눈물을 찔끔거리며 대꾸했다.

“뭐, 저희가 여기서 칼 맞아 죽어도 그 여자 보고 계실 거잖아요.”

뭐라 계속 수다를 떨려던 자이납은 중앙 스테이지에 막 나온 반나체의 미소년에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괴성을 질렀다.

“우와아, 난 이래서 북부가 좋아!”

“허,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

카렐이 넋이 팔린 자이납을 놔둔 채 혼자서 구석으로 향했다. 그는 사람들 시선이 거의 닿지 않는 2층의 VIP용 발코니석으로 올라 [예약석] 팻말을 휙 치워냈다. 서너 명 충분히 앉을 크고 긴 안락의자 중간에는 누군가 일부러 가져다놓은 듯한 큰 팔걸이 쿠션과 접이식 테이블 하나가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클럽의 의자들 대부분이 ‘동행과 자연스레 스킨쉽, 혹은 그 이상까지도 나눌 수 있게’ 키보다도 긴 의자로 되어 있지만 이런 방해물이 자리를 잡은 건 이것 딱 하나뿐이었다.

“푸훗. 케스난.”

카렐은 엷은 웃음과 함께 푹신한 의자 한쪽에 몸을 싣고 케스난이 미리 준비해 놓은 ‘무알콜 음료’를 삼켰다. 벽을 등진 높은 자리라 주변도 훤히 보였고, 남에게 등을 보이기 싫어하는 카렐의 전사기질에도 딱 맞는 편한 자리였다.

막 자리에 앉은 그가 무심결에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종업원이 미처 자리 안내도 하기 전에 여자의 시선이 무언가를 찾는 듯 2층의 발코니석 쪽으로 제일 먼저 움직였다.

“이디나라…….”

카렐이 자리에 앉은 채 발코니석으로 다가오는 이디나의 모습을 뚫어지게 살폈다.

황실에 등록된 그 여자의 자료는 사소한 전과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나이나 배경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높은 자리’에 있다는 건 분명 어딘지 미심쩍었다. 20대의 머리 피도 안 마른 나이에 학벌도 공립학교 졸업이 전부인 자가 그런 대규모 광산을 운영한다는 건 누가 봐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가족사항도 ‘나키아’라는 전직 싸구려 클럽 댄서의 딸로 올라 있을 뿐 성(姓)도 없고 아버지에 대한 기록도 없지만 사교도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니 그것만으로 의심하긴 어려웠다.

“저 얼굴에 외모로 누굴 침대에서 잡은 것도 아닐 테고.”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머리도 잘 다듬었고 제법 값나가 보이는 코트와 비싼 장신구도 걸쳤지만 별로 돈값을 못 한다는 느낌이었다. 매부리코에 병자 같이 움푹한 뺨, 길고 툭 튀어나온 뾰족한 턱 때문에 인상이 그리 좋지 못한 탓 같았다. 그런데 계속 쳐다보니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큼 그렇게 못생긴 얼굴은 또 아닌 것 같았다.

생김새야 어쨌든, 카렐은 그를 ‘최대한의 호감으로’ 맞아주기 위해 매무새를 정돈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디나는 종업원을 따라 클럽 2층 발코니석으로 향했다. 겉으로는 태연하려 애쓰고 있지만 사실 태어나 이런 곳에 와 본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 아스탈은 자식들에게 그렇게까지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체통 없이 이런 ‘천박한’ 곳에 드나드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저놈도 오늘이 끝이려나.”

이디나는 입술 끝에 힘을 주었다. 지금까지 그가 나름대로 맘에 들어했던 사람들은 둘 중 하나였다. 딱지를 놨다가 ‘내 딸 자존심을 건드렸다’며 분노한 아버지 아스탈에게 죽음을 당했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였다가 ‘내 딸에 손대지 마라’는 아버지의 변덕으로 봉변을 당했거나였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 선택된 사람들 치고 지금껏 무사한 사람은 없었다.

“후우.”

그는 낯설고 어색한 느낌을 억지로 떨쳐내고는 어깨에 두른 숄을 꼭 조이며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조심조심 걸었다.

‘정신 차려, 이디나. 어딘가 아버지 수하가 있을지도 몰라.’

이디나는 자신에게 다짐을 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누가 누구인지 쉽사리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디나는 다시 발코니 위를 올려보았다. 발코니석 난간 너머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지난번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왠지 가슴이 욱신거리고 살짝 아픈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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