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93화 (888/1,132)

< -- 893 회: Part 6. 저승길에 남겨놓은 발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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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와요!”

카렐은 이디나를 끌어당기려는 척 그의 가방을 덥석 붙들었다.

“이크!”

이디나가 경황이 없는 새, 카렐이 손가락을 가방끈 고리에 슬쩍 넣고 힘껏 잡아당겼다.

“앗.”

이디나의 비명과 동시에 카렐의 힘을 버티지 못한 고리가 딱 끊어져 버렸다. 줄이 끊어진 가방이 공중으로 휙 날아가 놀라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 툭 떨어졌다.

“엇.”

눈치 빠른 우베가 놀라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를 재빨리 헤치고 달려가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이디나의 가방을 재빨리 낚아챘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웬 우람한 덩치 하나가 우베와 거의 동시에 백을 덥석 움켜잡았다.

“내놔, 이 꼬맹이야.”

“엑.”

조그만 우베는 그 덩치가 쳐든 바윗돌만한 주먹에 기겁을 했지만 그 와중에도 가방을 놓치는 않았다. 날아오는 주먹에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던 우베는 무언가 귀를 찢는 쨍 소리에 움찔하며 슬쩍 실눈을 떴다.

“이 개새끼가 어딜.”

자이납이 찌그러진 쟁반을 휙 내던지며 얼른 뒤쪽을 눈짓했다. 우베는 가방을 끌어안고 인파 사이로 후다닥 사라져 버렸다.

“못 데려간다니까!”

같은 시간, 카렐은 이디나를 끌고 가려는 내관과 막 멱살잡이를 시작한 참이었다. 옆에서 싸움을 지켜보는 이디나는 놀라거나 겁먹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양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의 속내를 읽어낸 카렐은 이번엔 ‘처음으로’ 능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뒈지고 싶냐!”

카렐은 내관의 옷자락을 움켜쥐고는 업어치기로 들어올렸다. 내관의 육중한 몸이 공중에 큰 원을 그리고는 짧은 비명과 함께 말 그대로 ‘멋지게’ 바닥에 내리꽂혔다.

“별것 아닌 게 어딜 감히…….”

여유만만하게 이디나에게 돌아서려던 승자 카렐의 앞에 무언가 흰 것이 번쩍했다.

“웃.”

테라스석에서 그를 쫓아 내려온 헤네티의 큰 주먹이 막 고개를 돌리던 카렐의 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빡 하는 타격음이 울리며 카렐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고, 이디나의 짧은 비명이 울렸다. 멋진 승리는 잠깐의 한번뿐이었다.

“이런…….”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카렐은 그대로 눈과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축 늘어졌다. 이 ‘꺽다리 장교’를 소동 끝에 가까스로 제압한 헤네티가 주먹을 꽉 쥐며 투덜거렸다.

“제기랄, 이놈 턱이 무슨 쇳덩이 같네.”

제대로 성질이 난 헤네티는 바닥에 까무러진 카렐을 신경질적으로 몇 번이나 걷어찼다. 한바탕 분을 푼 그는 까무러진 내관을 들쳐 업고는 이디나의 팔을 덥석 붙들고 클럽 밖으로 향했다. 이디나는 턱을 얻어맞고 쓰러져 있는 카렐을 몇 번이나 애타게 돌아보고는 마지못해 그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

소동이 가라앉고, 잠시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클럽 안은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냐는 듯 시끌벅적한 놀이터로 다시 되돌아갔다. 늘상 있는 패싸움과 크고 작은 다툼에 이골이 난 종업원들은 물론이고 손님들도 조금 전의 일 따위는 눈 깜짝할 새 잊어버렸다. 심지어 테라스석 계단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꺽다리 군인’에 신경 쓰는 사람조차 없었다.

“저 여기요.”

자이납이 슬그머니 다가와 카렐의 가슴을 툭툭 쳤다.

“다 갔어요. 일어나세요.”

그제야 실눈을 뜬 카렐이 재빨리 주변을 훑어보았다.

“죄다?”

“예.”

카렐이 그제야 몸을 벌떡 일으켜서는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가방은?”

“여기요.”

자이납 뒤에 있던 우베가 우쭐하며 줄이 끊어진 가방을 내보였다. 그리도 갖고 싶어 했던 [타리프의 일지] 다음권이 이제 그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카렐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이납과 손뼉을 마주치고는 가방을 받아들었다.

“저어, 이런 질문 여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자이납이 잔뜩 호기심어린 얼굴로 물었다.

“뭘?”

카렐이 텅 비어버린 테라스석으로 되돌아가며 싱글벙글 물었다.

“그 여자가 정말로 그렇게 맘에 드셨어요?”

“맘에 드냐고? 허, 농담 하냐.”

자리에 털썩 앉은 카렐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그냥……아니다.”

카렐이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근데 가방을 그냥 빼앗아도 되는데 왜 이런 소동을 벌이셨어요?”

카렐이 키득거리며 테이블 위의 잔을 집어 들었다.

“고작 20대에 누구와도 변변히 사랑을 못 나누어 본 여자야. 사회에서야 똑똑하고 야심만만할지 몰라도 최소한 감성적으로는 덜 성숙했을 게 뻔하지.”

“서, 설마 숫처녀래요?”

자이납이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 다시 물었다.

“누군가 자기를 지키려고 맞아가며 죽자사자 싸웠는데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냐? 응?”

카렐은 뻐근해진 턱을 잠시 만지작거리고는 테이블 위의 음료를 아무 생각 없이 입에 확 들이부었다.

“보나마나 ‘어머나, 미안해요~’ 라면서 다시 날 찾아올 게…… 우읍, 이런.”

맛을 느끼기도 전에 ‘음료’를 꿀꺽 삼켜버린 카렐이 잔을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잔 바닥에는 독한 데킬라가 절반이나 섞인 포도주스 찌꺼기만 조금 남아있었다.

“젠장, 빌어먹을.”

그대로 눈이 뒤집어진 카렐은 긴 안락의자 위에 ‘정말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타리프의 일지]가 든 가방을 꽉 껴안은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엷은 웃음이 남아 있었다. 정신을 잃어가는 그의 귓가에 ‘이참에 나도 내명부에나 들어갈까?’라며 자이납이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기운에서 막 깬 카렐은 멍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보았다. 그의 위에서는 꿀물을 든 루스탐과 코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나 사고 안 쳤나?”

카렐이 아직 멍한 의식 속에서 제일 먼저 꺼낸 질문이었다.

“사고요? 아뇨. 술에 취해 의식을 잃으신 걸 자이납이 업고 올라왔습니다.”

카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몇 시간 전 케스난과 잠시 함께 있었던 바로 그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혹시……자이납한테 아무 짓 안 했고?”

“흠흠.”

루스탐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가리고는 얼른 꿀물을 내놓았다.

“무슨 일 있었으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지요.”

카렐이 슬쩍 눈을 흘겼다. 루스탐은 아무 일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표정이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카렐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는 그가 내민 꿀물을 벌컥 들이켰다.

“제기랄, 머리가 깨질 것 같네.”

카렐은 이미 훤해진 바깥을 내다보았다. 술기운 덕분에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시체처럼 뻗어 잔 모양이었다.

“그동안 무슨 보고 안 들어왔고?”

“남부 페스트의 제네르 하크로딘 상장군이 호드르 산에 토벌전을 정식으로 개시한다고 출정서를 올렸습니다.”

“알아서 잘 하겠지.”

카렐은 평소 잘 하던 말투 그대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총리에 학장까지 함께 있으니.”

“그런데…….”

루스탐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장태자도 총리와 함께 전장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카이가?”

카렐이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후전 반대를 무릅쓰고 새벽녘에 몰래 총리를 찾아가 먼저 데려가 달라고 했답니다. 황후전에서 노발대발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쩌죠?”

“훗.”

카렐은 남은 꿀물을 훌쩍 들이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페로 역시도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한 카이에게 경험과 권위를 주기 위해 일부러 데려간 것이 분명했다.

“잘 하겠지.”

카렐이 한 말은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루스탐도 고개를 숙이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카렐은 뒤쪽에 말없이 서 있는 코나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자넨 시라즈에 잘 다녀왔나? 오르마즈 경 무덤에서 찾은 시체는 잘 검사했고?”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흐릿하던 카렐의 눈에서 빛이 번쩍 났다. 코나가 단단히 봉인이 된 문서 파일을 카렐에게 올렸다.

“아무도 열어보지 말라고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걸 전해주던 모렌 박사가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한 걸 보니 뭔가 이상한 내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카렐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적거리며 파일을 열어보았다. 복잡한 표와 실험결과 데이터가 빽빽하게 차 있는 문서였다.

“후우.”

표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읽어 본 카렐이 이마를 짚으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코나가 그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제 예상이 맞습니까?”

“그래, 야푸르 대신관의 시신이 맞는 것 같다.”

카렐이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코나가 잔뜩 얼굴이 굳어있는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이미 예상했던 것 아닙니까.”

“내가 모렌 박사에게 검사를 시킨 건 그게 아니니까.”

코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렐은 어깨 한쪽을 끌러 내리고 맨살을 내보였다. 그곳에는 비늘까지 선명하게 그려진 용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죽은 이라즈는 내 외조부가 누군지 알고 이걸 새겨준 걸까?”

“흐흡.”

순간 창백해진 코나가 카렐의 앞에 얼른 무릎을 꿇고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침대에서 일어난 카렐은 다 본 혈통 분석 자료를 벽난로 속에 휙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문서에 클립으로 끼워져 있던 필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안에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변색되고 꼬깃꼬깃해진 쪽지 한 장이 보존 처리되어 담겨있었다. 죽은 야푸르 시체의 손아귀에 꼭 쥐여져 있던 것이었다.

“자이납하고 우베 깨워라. 펜지켄트의 대신관 묘로 가야겠다.”

“예? 왜 그곳에…….”

고개를 번쩍 들었던 코나가 얼른 다시 머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무례하게 말꼬리를 붙였습니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얼마나 오래 그 호칭을 부르고 싶었지? 헤네티 코나?”

카렐은 고개를 숙인 코나를 힐끔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그 호칭을 자네에게서 처음 들어보네.”

“황공하옵니다.”

코나가 재차 바닥에 이마를 가져갔다. 사에나를 빼면 누구 앞에서도 꼿꼿하기만 하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오르마즈 경의 시체는 도둑맞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양반이 누군가 자기 시체를 훔쳐내도록 미리 손을 써 놨던 거지.”

카렐은 쪽지 내용을 몇 번이나 거듭 읽었다. 쪽지에 있는 짧은 바람어 문장은 고르지 못한 필체 때문에 읽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 이 시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네가 직접 모셔다 놓아다오. 그곳에서 내가 간 발자국을 찾을 수 있을 테니.

서른 한 번째 위대한 현신

아르잔 오르마즈 빈트 다하카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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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이 된 아지드는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를 들고 어두침침한 코윈 공단 컴플렉스의 뒷골목을 헤매는 중이었다. 불룩한 배만으로도 버거운 몸에 어깨와 온몸의 상처들, 거기에 큰 가방까지도 짓누르고 있어 한 걸음 한 걸음이 괴로워 주저앉고 싶을 지경이었다.

교단의 압박은 지금도 그의 뒤를 조여오고 있었다. 그가 남극성당을 도망친 직후, 아케메니아의 터미널이나 도로 곳곳에선 ‘불법낙태를 단속한다.’는 핑계로 임산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문이 벌어졌다. 덕분에 그는 두꺼운 옷으로 임신을 감춘 채 버려진 배, 폐가를 전전하며 50여일을 숨어 지내야 했다.

다행히 임산부에 대한 집중 검문은 여론이 악화되어 시들해졌지만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오는 며칠 전, ‘성직자나 의사가 입회하지 않은 무단출산을 신고하면 거액의 포상금을 한 달간 한시적으로 지급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포고령이 콜로니 전체에 내려지면서 만삭의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외모는 이제 누가 봐도 걸인이었다. 목욕 같은 건 두 달 동안 엄두도 못 냈고 떡이 진 머리와 몸에 걸친 외투는 두 달동안 한 번도 물에 닿아 본 일이 없었다. 교단에서 운영하는 부랑자 보호소에 가는 건 자살행위였고, 강이나 호수의 찬물에 만삭의 몸을 담그느니 차라리 창피함과 불결함을 감수하는 게 나았다. 몸 냄새도 날 테지만 그는 스스로 못 맡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이곳에서도 슬쩍슬쩍 곁눈질을 했지만 아케메니아의 신전 부근에서처럼 임산부라고 도와주거나 길을 비켜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리어 물건이 가득해 보이는 그의 몸뚱이만한 큰 가방에 눈독을 들이는 음흉한 눈길이 더 많아보였다.

“썩은내 나는 옷밖에 없으니 꺼져.”

아지드는 가방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불량해 보이는 청년에게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잔뜩 발톱을 세운 암컷 맹수 같은 그의 사나운 모습에 청년이 멈칫거렸다. 6척(180cm)이 넘는 크고 건장한 체구에 인상까지 험상궂은 아지드는 임산부 부랑자라 해도 함부로 덤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후우.”

청년을 쫓아낸 아지드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타르서스의 풍광 좋고 부유한 해안 휴양도시 수에니 출신인 그에게 가난한 노동자들로 꽉 차 숨이 막힐 것 같은 코윈의 경공업 공단 컴플렉스와 빈민 거주촌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햇빛은 하루 중 서너 시간도 들지 않았고 컴플렉스 유리뚜껑 안으로 공급되는 냄새나고 탁한 공기는 마시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딱 맞춰놓은 것 같았다.

힘겹게 한 블록을 걸어온 아지드는 한 골목에서 돌아섰다. 가로등도 없는 좁은 골목 끄트머리엔 누군가 쓴 ‘서원(書院)’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서원들은 콜로니 곳곳에서 자칭 유학자들이 포교를 하는 제일 말단조직 격이었다. 콜로니 지배층은 현신의 신성함과 권위를 인정하는 한 기본적으로 다른 종교를 핍박하지는 않았고, 이런 서원들도 수백 곳이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지드는 새삼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도망치며 은행에서 급하게 찾은 얼마 안 되는 돈은 지난 두 달 동안 먹을 것 사는 데 쓴 돈, 수송선으로 코윈에 밀항하면서 브로커에게 준 수수료, 암시장 약과 의료기구, 임신 출산도구 사는 데 거의 써버리고 이젠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우욱.”

아지드는 화끈거리는 어깨를 꽉 잡았다. 병원에 갈 수가 없어 스스로 꿰맨 상처는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다하카르 간택자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이마의 사파이어를 떼어내는 것도, 문장을 떼어낸 이마의 흉터와 귀 밑의 성직자문을 황산으로 지져 화상으로 위장하는 것도 모두 스스로 해야 했다. 그것도 뱃속의 태아를 위해 마취도, 항생제도 쓰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인내력만으로 그 끔찍한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다 왔어, 오르, 조금만 참으렴.”

그는 골목 안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가족과 친척, 친구와도 연락을 끊어야 했고 도움을 줄, 아니 그럴 가능성이라도 보이는 사람은 자신과 똑같이 교단에 쫓기는 이 남자, 투르케스크 카파키였다. 다행히 몇 달 전 마지막으로 만나 밤을 함께했을 때 받아 놓은 연락처가 아직 그에게 있었다.

그 남자가 아기의 존재에 그리 기뻐할 것 같지는 않지만, 아지드가 내심 기대고 있는 건 투르케스크의 출신 가문인 명문 대재벌 카파키 가였다. 그는 이 도망생활을 계속할 생각도, 그럴 자신도 없었다. 아기가 젖을 떼고 엄마 없이도 누군가의 품에서 자랄 수 있게 되면 그는 아케메니아로 돌아가 대신관에게 자수할 참이었다.

“내가 없어져도……카파키 가에서 널 돌봐줄 거야. ……그래, 꼭 그렇게 해 놓고 갈 테니까 넌…….”

아지드는 울컥 하는 느낌에 괜히 눈물을 쏟을 뻔했다.

아지드가 확인한 비밀문서에 따르면, 카파키 가의 선대 종장인 타리프 신관이 장남 빌루이에게 투르케스크를 양자로 들이게 하면서 ‘저 애와 후손이 언젠가 가문의 큰 보물이 될 테니 네 친자식보다 더 아껴줘야 한다.’고 말했던 터였다.

사실 교단이 지금껏 투르케스크를 못 잡고, 아니 안 잡고 있는 것도 아버지의 유지, 혹은 가문의 체면 때문에 이 말썽꾼 양아들을 보호할 수밖에 없는 종장 빌루이 때문이었다. 빌루이는 겉으로는 그를 쫓아냈지만 뒤로는 무시무시한 종교재판관이나 헤네티들에게 잡혀가지 않게 손을 쓰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빌루이는 양아들 투르케스크가 제니안을 버리기만 하면 가문에 다시 받아들여주고 대형 금광을 주겠다고까지 했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아지드도 빌루이에게 몰래 연락을 하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알았으니 신분부터 밝히시오.’라고 사무적으로 묻는 종가 보좌관의 목소리에 기가 죽어 매번 연락을 끊곤 했다. 카파키 정도의 가문이면 ‘가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며 협박을 하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아기가 정말 그레이오팔로 태어난다면 카파키 가에서도 부녀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어쨌든, 이 아기에게 최소한의 보호막이 될 명문가와의 연줄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나야 조금이라도 맘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투르케스크와 직접 부딪치는 게 마지막 남은 선택이었다.

그는 어둡고 삐거덕거리는 음침한 계단을 힘겹게 올라 나무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안에서는 묵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확 풍겨왔다.

“누구요.”

텅 빈 방 안에서 혼자 책들을 정리하고 있던 남자가 문가를 휙 돌아보았다. 호리호리하고 큰 키에 이목구비 수려한 미남형이지만 얼굴에 묻어나는 완고함과 약간 찡그린 듯한 인상 때문에 그다지 호감은 가지 않는 겉늙은 이미지였다. 그렇지만 아지드의 눈에는 그런 것들보다도 오팔처럼 반짝거리는 무지개빛 눈동자가 먼저 들어왔다.

“아니, 이게 뭐요?”

만삭의 임산부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아지드를 보자마자 투르케스크가 보인 첫 반응은 충격으로 멍해진 얼굴이었다. 아지드가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투르케스크는 창백해진 얼굴로 벽에 걸린 달력부터 얼른 보았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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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트도 이제 마지막 한 편만 남았네요.

다음다음편부터는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가 이어집니다.

대단원 부분을 제외하면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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