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99화 (894/1,132)

< -- 899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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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또 손님이 오시네.”

시로가 남동쪽 벌판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느 날 아침처럼, 등에 사자(使者)를 표시하는 깃발을 단 기병 하나가 건너편 이그나토 가 병영에서 이쪽으로 바삐 달려오는 중이었다. 제네르가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자리크 경은 오늘도 안 나왔네. 저 새끼 오늘도 내가 상대해야 되는 거야?”

“저 꼴 보기만 해도 열불통이 터지는데 퍽이나 나오겠다.”

불에 탄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달려온 기병은 제네르 앞에서 말을 멈춰 세우고는 훌쩍 뛰어내려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가져온 문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남부 제5제후이신 류한 이그나토 경께서…….”

“닥쳐, 이 개새끼야. 누가 제후야!”

격분한 네피가 사자에게 막 발길질을 하려는 것을 시로가 얼른 뜯어말렸다. 그의 기세에 파랗게 질린 사자가 앞부분을 대충 얼버무리고는 뒷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페, 페스트는 우리 이그나토 가의 영지이며, 화, 황실군 발더 분견대의 주둔에 합의하였으나 그 외 병력에는 합의한 바가 없습니다. ……영지에서 분란을 일으킨 폭도들을 진압할 의무와 권리는 불초 제후가에 있사오니 한시바삐 이곳을 제후가의 군대에 넘겨주시고 원 주둔지로 복귀해 주시길 청하옵니다.”

“오늘도 문장 토씨 하나 안 바꿔서 가져온 걸 보니 제후를 자처하는 네 상관도 퍽이나 게으른 놈이구나.”

제네르가 문서를 빼앗아 북북 찢어서는 공중에 날려버렸다. 네피가 도끼를 휙 빼들며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떴다.

“네놈 대가리를 시범으로 쪼개어서 보내주랴?”

네피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놀란 사자가 혼비백산해 말에 뛰어올라 숙영지 쪽으로 멀어져갔다.

“빌어먹을, 저 새끼를 그냥.”

도망치는 사자의 뒷덜미에 도끼를 집어던지려던 네피를 이번에도 시로가 허겁지겁 말렸다. 그때, 사령부 쪽에서 ‘총 출동’을 알리는 긴 나팔소리가 들려오자 비로소 표정이 진지해진 제네르는 사뭇 비장한 얼굴로 네피와 시로, 자말과 함께 말을 움직였다.

“그런데 이번엔 통신기기 제대로 작동하는 거야?”

지난번 통신 두절로 크게 낭패를 겪었던 네피가 할룩스를 몇 번이나 확인하며 요란을 떨었다.

“글쎄, 일단 분대장까지 통신장치엔 급조한 필터링 장치를 달아서 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은데 모르지. 대충 산자락까지는 통하는 것 같던걸. 우리 같은 군바리끼리만 온 것보다는 확실히 다행이야.”

제네르는 필터링 장치를 고안한 코리온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그는 나름대로 코리온에게 고마워하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여전히 굳어있는 그의 표정을 보아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았다.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제네르가 풀 죽어 있는 코리온에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답 없이 말만 몰아갔다.

‘하여간, 꽁하기는.’

코리온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제네르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막 전투 준비를 마치고 도열하고 있는 장병들 앞으로 향했다.

이번 토벌전은 비엔에서 온 황실군 소속 남부 파견군 202연대를 주력으로 지난번 이곳에서 퇴각해 복수의 칼날을 가는 자말의 ‘발더 분견대’가 소수지만 선봉 역할이었다. 그리고 산 정상의 발전소 전투에서 패퇴했던 5백의 이그나토 가 보병들도 황실군과 함께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급소인 상체와 머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을 경량화한 새 황실군 보병 갑옷은 30여년 전의 제위전쟁 당시 근위대 보병에 비하면 훨씬 가벼워진 모습이었다. 왼손에 든 원형 방패, 오른손의 석궁과 등에 멘 가벼운 미늘창은 30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싸움의 양상을 대변하고 있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것이 새로운 변화라기보다는 ‘복고’임을 알고 있었다.

사실 카렐이 황실군의 전투교범을 바꾸면서 참고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교단의 대신관 친위대였던 크바르나 여단이었다. 교단을 상대로 한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이젠 가디언들도 특별히 설계된 경량갑옷을 걸치곤 했다.

대충 전열을 확인한 제네르는 후방에 있는 사령관 막사로 다가갔다. 밤새 사령실에서 ‘밥통’과 씨름하던 페로가 이제야 피곤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참이었다.

“아침식사들은 잘 했나?”

페로가 제네르와 시로에게 빤한 아침인사로나마 아는 척을 했다. 그 역시도 코리온의 존재는 인사건 뭐건 건너뛰고 철저히 무시해 버렸다.

‘저 새끼는 대체 왜 왔담.’

페로는 코리온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리고 주섬주섬 갑옷을 챙겨 입었다.

“재수 없게.”

황제 주변의 남자들을 모조리 증오하는 그였지만, 그 중에도 이 사내는 정말로 미웠다. 이상하게도 이 곱상한 남자와 마주할 때마다 황제와 뜨겁게 잠자리를 함께하는 모습이 상상되면서 혈압이 치솟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곤 했다.

사실 남자로서 강건한 몸도, 다른 조건도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페로이지만, 이상하게 카렐과의 잠자리에서만은 자신이 무언가 제대로 못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물론 카렐은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한다며 깔깔대곤 했지만 이미 수십 년째 그런 생각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코리온을 볼 때마다 이유도 없이 심술을 부리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사실 이 남자가 황제의 침실까지 들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페로에게 정말 두려운 건 ‘자신도 끌릴 만큼 정말 매력적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죽은 샤드니가 이 남자를 차지하려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숨을 멎게 만들 만큼 매혹적인 자태와, 황제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이라는 황당한 모순이 이 남자를 대하는 페로의 가슴 속에 희한하게 얽혀 있었다.

페로가 흉갑을 채우며 제네르와 시로에게 건성 말했다.

“어젯밤에 말한 그대로니 상장군이 알아서 계획대로 진행하게나. 난 다른 문제 신경 쓰기도 바빠.”

“무인 셔틀 정찰 결과는 나왔습니까?”

“인공강우가 시원찮아서 검은 재가 별로 걷어지지를 않았네. 이전부터 알고 있던 걸 빼면 딱히 새로 알아낸 건 없어. 끝도 없이 기다릴 수는 없으니 일단 진입해.”

페로가 그에게 사진을 내보였지만 검은 안개 때문에 지형과 큰 건물을 몇 빼고는 별로 분간되는 것이 없었다.

“보병 2천이 후방에 예비대로 머물고, 시로와 네피가 보병 1천을 데리고 남쪽부터 시가지로 진입할 겁니다. 지리에 익숙한 자말이 1열 선봉대 3백을 이끌고 최대한 빨리 진입해 중앙의 광장과 관공서부터 장악할 예정입니다. 시로가 지휘하는 7백의 본대는 건물을 수색하면서 뒤따라갈 예정입니다. 민간인들이 있을 테니…….”

“하나하나 챙기다가 어느 세월에 저길 다 장악해?”

“예? 우리 임무는…….”

“저항 있으면 저걸로 그냥 때려 부숴버려. 민간인 희생은 감수한다.”

페로는 인화물질이 든 수레를 주렁주렁 매단 20여대의 발리스타를 가리키며 퉁명스레 말했다.

“후우.”

정 많고 맘 약한 시로는 시가지 포격이 내키지 않는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하지만 애당초 페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폭동진압’을 특기로 정계에 등장한 사람이니 어설픈 항의 따위가 먹힐 리가 없었다. 페로가 시로의 굳은 표정을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길도 좁고 적들이 무서운 발사무기를 가졌다고 하니 장수들도 말에 타지 말고 도보로 움직이도록 해. 해산.”

“각자 위치로!”

제네르의 손짓에 무장들이 일제히 각자 부대로 흩어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제네르가 입술에 잔뜩 힘을 주며 검은빛 안개 너머 도시를 응시했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

지난번 썩은 식량을 기화로 한바탕 폭동이 휩쓸었던 호드르 시는 적 척후병들이 중간중간 모습을 보인 것을 빼면 지난 얼마간은 인기척도 없는 유령도시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외곽 판잣집 빈민촌에 불을 놓고 돌아온 정찰대에게서 ‘시가지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풍겨온다’는 섬뜩한 보고까지 들어와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검은 재가 떠다니는 안개와 불에 탄 빈민촌, 산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악취는 그 너머에 있을 음산한 도시에 대한 공포를 더더욱 자극했다.

이번 선봉장을 맡은 자말은 자신이 맡은 부대로 향했다. 3개 제대, 3백의 보병들이 재만 남은 빈민촌 실루엣이 가까스로 보이는 2스타디아(300m) 정도 거리에서 횡대를 이루고 전진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 선 자말이 도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명심해라. 도시는 동심원 모양이다. 중앙에 광장이, 주변으로 시가지가 있다. 시가지 남쪽으로는 일반 주택가가, 제일 외곽엔 천막과 판자촌이 있다. 관공서와 고급주택가는 호드르 산으로 올라가는 북쪽 언덕에 있다.”

“예!”

“우리 임무는 시가지 남쪽부터 이어진 큰 도로 3개를 따라 도시를 종단해 중심에 있는 광장의 시청을 접수하는 거다. 대병력과 장비가 통과할 수 있는 큰 도로는 이 3개가 전부니 반드시 장악해야 한다.”

자말은 주변을 채운 검은 안개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검은 재는 해롭지 않으나 오염된 식량을 먹어 수명개조가 풀린 상태에서 호흡하면 너희를 얼마 못 가 노인네로 만들어버릴 거다. 그러니 늙어죽고 싶지 않으면 지급되는 식량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마라. 둘째, 저항하는 폭도들에게 포로 대우는 없다. 즉각 사살이다. 그럼 전진한다.”

자말이 손을 앞으로 향하자 병사들이 일제히 방패를 들어 자신과 동료의 앞을 막고 그 위에 석궁 총열을 걸었다.

“전진.”

다른 큰 전투에서와 같은 멋들어진 진격 나팔소리 같은 건 없었다. 지휘관과 사관의 손짓을 받은 병사들은 발소리까지 죽이고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적이 지녔다는 신형 무기 ‘마우저’에 대한 무서운 소문이 퍼져서인지, 도시와는 아직 거리가 제법 먼데도 방패를 든 병사들의 왼손에 유독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거 기분 더럽게 나쁜데.”

검은 안개가 점점 짙어지자 몇몇 병사들이 낮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나마도 산 쪽에서 불어온 가벼운 아침 바람에 구역질나는 냄새가 실려오자 바로 조용해졌다.

“악취가 점점 심해집니다.”

제일 앞서 나아가던 가디언 사관이 보조 호흡장치를 끼며 작게 말했다. 참다못한 병사들도 하나둘 얼굴을 찡그리며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몇 발짝 가지 않아 병사들의 발밑에 불탄 빈민가 천막과 널빤지 조각들이 밟히기 시작했다.

“아직은 별것 없다.”

사관들이 놀란 병사들에게 손가락으로 O자를 그려 보이며 계속 전진을 재촉했다. 병사들은 검은 잿물로 질척거리는 땅을 조심조심 디뎌가며 한 걸음씩 계속 도시에 접근해갔다. 병사들의 코에 썩은내가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검은 안개 너머로 호드르 시의 윤곽선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들어가.”

가디언들이 자말의 손짓에 하나 둘 흩어져 시가지에 뛰어들었다. 뒤를 따라가는 병사들은 혹시라도 그들의 고함이나 비명이 들려오지 않나 잔뜩 긴장했지만 안개 속으로 사라진 가디언들에게서 딱히 이상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계속 전진.”

긴장감 속에 빈민가를 돌파한 병사들의 앞에 비로소 제대로 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그나토 가에서 이주민들에게 배정해 준 성냥갑처럼 똑같은 모양의 조립식 목조 주택 수백 채가 좁은 골목을 따라 격자 모양으로 줄지어 늘어선, 무미건조한 주택가였다.

“일단 지나가, 2열이 수색할 거다. 진창길을 지났으니 이제 속도를 내! 빨리.”

자말이 계속 전진하라고 손짓했다. 선봉대는 텅 빈 집들 사이를 가로질러 시가지로 재빨리 달려가기 시작했다.

“허, 이 동네에선 주소 잊어버리면 우리집도 못 찾아 가것네.”

2열을 이끌고 선봉대가 이미 지난 마을에 들어선 시로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주소도 없는데?”

네피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나같이 똑같은 집들이지만 이상하게도 문패나 주소가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주정뱅이들 밤중에 남의 집에서 사고치기 딱 좋았겠네. 이봐, 2인 1조로 집들을 모두 확인해. 똑같이 생겼다고 간 집 또 들어가지 말고.”

시로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긴장한 병사들이 집에 차례로 뛰어들어 수색을 실시했지만 오래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 나왔다.

“비었습니다!”

“여기도 비었습니다!”

“뭐야, 도대체.”

시로와 네피가 당혹스런 얼굴로 서로 마주보았다. 도시 외곽의 이 황량한 주택가 역시 지난밤 불태운 외곽 빈민가처럼 텅 빈 유령도시였다.

“네피, 다시 기억 되짚어 봐. 분명 3만이 득시글거렸어?”

시로가 네피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네피와 생존자들의 말대로라면, 이 도시는 폭동이 일어날 당시만 해도 인근 빈민들까지 모조리 모여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인산인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집도 다 멀쩡한데?”

폭동 당시 이곳의 인파를 눈으로 확인했던 네피도 안 믿긴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버려진 집들은 당장이라도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을 듯 온전했고, 깨진 유리창이나 문짝처럼 약간의 무질서 흔적만 있을 뿐 조직적인 파괴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몇몇 집들은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두고 떠난 흔적까지 보였다.

없어진 건 사람뿐이었다.

“주민들을 다 납치해 간 걸까? 설마 3만이 죄다 폭도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테고. 인간방패로 쓰려고 그럴지도 모르잖아.”

마음 여린 시로가 잔뜩 불안해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껏 수백 년을 근위대에서, 황실군에서 복무해 왔어도 이런 기이한 현장은 처음이었다.

“그럼 이 지독한 썩은 내는 대체 뭐냐고.”

킁킁대던 네피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후각이 예민한 가디언들에게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한 도시는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가 이 정도인데 황상께서 오셨다면 거품 물고 까무러치셨을걸.”

네피의 농담에 시로가 짧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그때, 선봉대인 자말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시가지 쪽입니다! 빨리 오십시오!”

웬만해서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던 그의 목소리 치고는 어딘지 심상치가 않았다. 네피와 시로는 수색을 하는 병사들을 놔둔 채 성냥갑 집들 사이를 황급히 가로질러 시가지로 향했다.

이런 개척도시에서 말이 시가지지 사실 때깔나는 현대식 건물들이 서 있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그저 주택가보다 조금 큰 건물들 몇 채에 이런저런 가게와 사무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읍내 정도에 불과했다. 주거지와는 달리 시가지는 약탈과 파괴의 흔적이 선명했다. 유리창과 문은 거의 깨져 남아있는 것도 없었고 거리는 온통 쓰레기로 가득했다.

어지러운 시가지를 지나 광장에 접어든 시로가 급히 자리에 멈춰섰다.

“이런.”

지금껏 산전수전 다 겪은 네피와 시로였지만 광장에 펼쳐진 황당한 광경 앞에서는 놀라 입과 코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시로가 입을 가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대담한 가디언들을 놀라게 한 건 지름 1스타디아(150m) 가까운 광장을 발 디딜 틈 없이 채우고 있는 어마어마한 썩은 시체더미였다. 시체는 근 며칠간 간간히 뿌려댄 비와 뜨거운 낮 시간 날씨 때문에 원래 상태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부패되어 있었다. 수천, 아니 그 이상의 시체가 바로 20일 전, 수확을 기념하는 축제로 시끌시끌했던 광장에 산처럼 겹겹이 쌓여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다.

“우읍.”

경험 짧은 병사들이 놀라 토악질하는 광경이 곳곳에서 보였고 가디언들도 악취를 참지 못하고 마스크를 찾아 쓰기 시작했다. 시로는 시체에 다가가려는 네피를 얼른 잡아챘다.

“함부로 들어가지 마. 시체에 외상 흔적이 없잖아.”

“그래서 뭐?”

“지난번에도 이상한 바이러스 퍼뜨렸던 놈들이야.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독극물을 퍼뜨렸을지도 모른다고.”

시로는 병사들에게 급히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악취를 참고 시체더미에 들어갔던 병사들도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 시체와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대신 후방에 있던 의무관이 황급히 달려와 죽은 시체를 확인했다.

“사인이 뭐냐?”

시로가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물었다. 이런저런 시약으로 몇 구의 시체들을 확인한 의무관이 당혹스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빨리! 사인을 알아야 전진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독극물이나 병원체가 있냐고!”

“그건 아닙니다. 검출되지 않습니다.”

“그럼!”

“믿으실지 모르겠지만……모두 늙어죽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열흘은 넘었습니다.”

“설마, 노인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고.”

네피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많았던 게 아니고……많아진 거겠지.”

시로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도 안 돼, 고작 보름 조금 넘었다고! 열흘 전이면 폭동 직후인데 그 동안에 다 늙어죽었다고?”

시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한 네피가 절망하며 울부짖었다. 지난번 폭동이 벌어지던 날, 어딘지 겉늙고 힘이 없어 보이던 선량한 이주민 청년들의 모습과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이 도저히 오버랩되지를 않았다.

“누구 산 놈 없어! 좀 나오라고! 아무나 살아있으면 빨리 나와!”

네피가 광장 주변 건물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돌아온 건 메아리뿐이었다. 이 유령도시에서 지금 눈에 보이는 건 악취를 풍기는 시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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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무삭제 출판본이 조아라 유료란인 노블레스에서 2011년 6월 10일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노블레스 독자분들은 그쪽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텍스트 부분은 종이책의 무삭제판이 그대로 들어갔지만  시스템상 삽화나 도표, 조판 구성 같은것은 넣지 못했습니다.

뷰어 왼쪽의 [작품]에 보시면

혈맥 The Iron Vein [무삭제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링크가 있습니다. ^^

* 2011년 9월부터 전자책 서비스도 시작되었습니다. 전자책도 물론 무삭제 출판본 기준이고 표나 삽화, 부록 등이 함께 들어있고, 기간제한없이 영구적으로 소장하고 볼 수 있습니다. 9월 말 현재 4권까지 올라 있고 1달 단위로 2~4권씩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일부 권은 성인용입니다.)

전자책은 유페이퍼(http://www.upaper.net/kiltie), 예스24, 알라딘,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리브로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vein' 혹은 '혈맥' 으로 검색하시면 될 겁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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