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01화 (896/1,132)

< -- 901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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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됐는데…….”

탑 위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테나스가 막 눈에서 시선을 떼려는 순간, 도시 안쪽에서 붉은 화염과 검은 연기가 확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망원경이 없어도 구경을 하던 병사들의 맨눈으로도 충분히 보일 정도였다. 갑작스런 폭음과 불꽃에 놀란 병사들 사이에서 탄식과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맙소사! 저놈들이 우리 개척민들 다 죽이고 있잖아!”

구경을 하던 병사들 몇이 비명을 질렀다. 시가지 중앙의 불꽃은 사그라지기는 고사하고 점점 커지며 이그나토 가 병사들의 가슴을 뒤집어엎었다. 동시에 병사들 사이에서 격한 적개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잠깐, 저기 저거 발리스타 아냐? 저 새끼들 도시를 아예 날려버리려는 모양이야!”

병사들 몇이 막 전진을 시작한 황실군 발리스타를 가리키며 꽥 소리를 질렀다.

“슬슬 때가 되었나.”

“예?”

지금까지 탑 위에서 과자를 벗 삼아 내내 시간만 때우던 테나스가 과자 부스러기로 더러워진 허벅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따라와.”

탑에서 내려간 테나스는 참모들을 대동하고 말에 올라 병사들이 모여있는 불탄 옥수수밭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지금까지 시끌시끌하던 수천의 장병들도 군단장의 행차에 일제히 입을 다물고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냈다.

“저놈들이 도시를 태우고 있습니다!”

격앙된 하급장교 하나가 도시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놈들 손에 계속 놔뒀다가는 저기 있는 우리 주민들 다 죽습니다!”

몇몇 사관이 그에 맞장구를 치며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도 이구동성 ‘저대로 놔둬야 하나.’며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저곳에 살던 이주민들 중엔 한때 내가 아꼈던 수족 같은 부하들도, 옛 친구도 여럿 있다네. 나라고 맘이 안 아프겠는가.”

테나스는 갑자기 안 어울리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나 역시 가문 후계자로서 가슴이 찢어지리만큼 안타깝네만 그대들이 무서운 황실군과 기꺼이 맞설 만큼 굳건한 용기를 보여준 일이 없지 않은가.”

테나스는 눈물과 한숨에 젖은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들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장병들 후미의 누군가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몇몇 장병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이런 분위기에 당혹해하는 고참병이나 장교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이성을 외치며 함부로 입을 열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리에게 이주민을 구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어차피 잃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어디선가 들려온 외침에 테나스가 눈을 쫑긋거리며 옆의 정보참모를 돌아보았다. 2년을 넘게 굶주려 온 이그나토 가 영지민들 대부분은 황실의 명을 거부하건 말건 속된 말로 잃을 것 없는 처지였다.

“그대들이 원하고, 우리 주민들이 저 안에서 구원을 갈망한다면.”

병사들을 빙 둘러본 테나스가 무언가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의 흉갑을 탕탕 두들겼다.

“당연히 우리가 진주해야지.”

테나스의 손짓에 나팔수가 큰 소리로 집결을 알렸다.

“본부대와 4연대 4천은 여기 남아 숙영지를 지키고 3개 연대 8천은 당장 옥수수밭에 집결해! 우리도 시내에 들어간다!”

그 소리에 지금까지 구경에 열중하던 장병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챙기러 각자의 숙소에 뛰어 들어갔고, 영내에 있던 장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각자 무기를 챙겨 우르르 몰려나왔다. 잘 훈련된 수천의 장병들은 이주민들을 구한다는 일념 속에 눈 깜짝할 새 무장을 갖추고 불탄 옥수수밭에 도열해 섰다.

“저들이 더 진입하기 전에 우리가 숫자로 압도하고 도시를 보호한다!”

테나스는 3개 연대 단위로 나란히 포진한 각 연대 앞에 나섰다. 2천2백 정도의 보병과 5백의 기병으로 구성된 연대 셋이 나란히 포진하고 군단장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 2연대는 시가지 남쪽, 황실군 전면에 포진해 놈들이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게 막는다! 3연대는 동쪽에서 시가지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저놈들이 우리 민간인을 몰살시키기 전에 우리가 시가지를 먼저 접수한다.”

테나스가 각 부대들에 방향을 지시했다. 군단장의 명령에 작전참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입은 안 하고요? 그리고 서쪽은 열어둡니까?”

“일단은 황실군이 더 못 들어가게 지키기나 해.”

테나스가 짜증스레 대꾸했다.

“아, 알겠습니다.”

“사냥당하는 물고기마냥 똘똘 뭉쳐서 굼벵이처럼 전진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속보로 나아가! 저놈들도 지금 어차피 우리를 선제공격 못 한다!”

“예!”

명령을 받은 남부 병사들은 무기와 방패도 모두 등에 짊어지고 종대로 일제히 시가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밀집대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그들의 평소 모습은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병사들의 맘도 급했다.

“달려! 달려 빨리!”

숙영지에서 출발한 2개의 뱀처럼 긴 행렬이 시가지 동쪽, 황실군 정면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시내에 생존자가 없고 시체뿐이다.’는 첫 연락을 받은 페로는 슬퍼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잘 되었다는 듯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잘됐네, 골 아프게 싸울 일 없어졌으니. 한시름 덜었네.”

지휘부에 페로와 함께 있던 코리온이 총리의 무분별한 말투에 대놓고 눈을 흘겼다.

“총리. 지금 생각이 있는…….”

페로는 코리온의 참견을 못 들은 척 참모들과 농담처럼 주고받았다.

“저 새끼들 우릴 흥분하게 해서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수작인가본데 말려들 것 없지. 목조건물이 대부분이라니까 괜히 싸울 것 없이 저놈의 시골 촌동네 다 태워서 지도에서 싹 지워버려. 잘 하면 저기 광장에서 시체냄새 맡으면서 저녁 먹을 수 있겠다.”

“총리!”

코리온이 버럭 화를 냈지만 페로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전방으로 말을 몰아 나아갔다. 코리온이 급히 그를 쫓아와 고삐를 거칠게 낚아챘다.

“저 안에 잡혀간 주페 태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모릅니까!”

“글쎄, 설마 저런 곳에 태자를 뒀겠습니까?”

페로는 못 들은 척 귀를 후비며 고삐를 도로 빼앗았다.

“설마라니, 지금 그런 확률 따위에 태자의 목숨을 걸려고요? 태자는 대공의 핏줄 아닙니까!”

코리온의 격한 항의에 페로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참, 그랬던가? 이상하지요, 그 녀석한테는 영 내 핏줄 같은 정이 안 가지 뭡니까. 아무래도 장태자에 너무 정을 줘서 그런가봅니다.”

페로의 모호한 대답에 코리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 좋은 일은 없기를 바라지만, 행여 그렇다 해도 대의를 위한 것이니 황상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저길 다 뒤지면서 토벌전을 펼치는 게 얼마나 큰 희생을 불러올지 누구보다 잘 아실 테니까요.”

“미쳤습니까! 이미 자식을 둘이나 잃은 분께 또 그런 짓을…….”

“헌병, 학장님을 처소로 모셔라.”

가디언들이 코리온을 자리에서 억지로 끌어내는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페로는 발리스타 부대에 전진하라고 손짓했다.

“시로에게 알려, 시내로 진주한 병력 다 철수시키라고 해. 다 박살내서 태워버린 후에 다시 들어간다.”

페로가 ‘퇴각 후 태워버려’라는 명령을 공식적으로 막 내린 순간, 시가지 중간에서 정말로 붉은 불기둥이 하늘로 무섭게 솟아올랐다. 지레 놀란 페로의 어깨가 순간 들썩했다.

“뭐야, 벌써?”

당황한 페로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시가지 중앙에서 솟는 거대한 불꽃은 그냥 화재 정도가 아니었다. 그가 얼른 할룩스를 켜 보았지만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건 시로와 네피, 자말이 불 속에서 부하들을 찾으며 외치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뿐이었다.

“제기랄, 놈들이 한 발 빨랐잖아.”

적들이 시체를 이용해 매복기습을 한 것을 눈치 챈 페로는 ‘선발대 빨리 퇴각해라.’라는 말만 계속 반복했지만 아무 대답도 없는 것을 보아 제대로 명령을 들을 여유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계속 연락을 보내려던 페로에게 이번엔 기병대를 이끌고 외곽에 있던 베아트릭스 쪽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대공 각하, 이그나토 가가 움직입니다.”

“뭐?”

페로가 남동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지금껏 무시하고 있던 이그나토 가의 보병대가 예고조차 없이 도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무단으로 시가지에 진입하려는 것 같습니다! 차단해야 하겠습니까?”

“씨발, 저 새끼들…….”

페로가 머뭇거렸다. 자칫 양쪽의 무력충돌로 번졌다가는 토벌전이고 뭐고 다 어그러질 판이었다.

“우리와의 전면전을 노리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시가지를 선점하고 우리 작전을 훼방 놓으려는 것 같습니다. 교단 작자들과 미리 짜고 있던 시나리오 아닐까요?”

“한패거리라는 거 다 눈치 까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저들이 시내에 진입하면 이미 시가지에 진입한 1천의 토벌대와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기병대 총동원해서 막아. 어차피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감히 못 덤빈다. 시가지에 들어간 시로의 선발대 1천을 그쪽으로 보내 줄 테니.”

“정찰기병대 2백만 제외하고 전 기병대는 도시 남쪽과 동쪽 차단하고 남부 놈들 못 들어오게 차단해! 루코프 네가 정찰기병대를 맡아!”

베아트릭스가 즉시 기병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그는 바삐 말을 출발시키며 한편으로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데 기병 8백과 보병1천으로 막기엔 저들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만. 저쪽은 8천이나 됩니다.”

“시가지를 선점했으니 상관없다. 우리가 뒤에서 압박할 테니까.”

페로가 ‘선점’이라는 단어에 잔뜩 힘을 주어 말했다.

“그나저나 진짜 걱정되는 건…….”

페로는 기병대가 남부제후군을 막으려 온통 반대편으로 몰려가면서 휑하니 노출된 시가지 서쪽을 잠시 응시했다. 그곳엔 기병 2백과 드문드문 떨어진 보루―그 중 하나에는 카이와 엘룬이 가 있는―의 보병 5백 정도가 전부였다.

“서쪽은 괜찮겠지?”

“이그나토 가와는 반대쪽이니 별 문제 없어 보입니다. 시가지에 숨은 놈들이 저쪽으로 도망치는 정도일 텐데 그 정도는 충분히 차단할 수 있습니다.”

“하긴.”

페로는 황자들도 있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는 ‘꼬마들을 괜히 내보냈나.’ 싶었지만 남부제후군과는 정반대편, 그것도 적이 우글거리는 시가지에선 제일 먼 곳이라 별반 신경쓰지는 않기로 했다.

“빌어먹을 검은 재 때문에 시야도 안 좋고 스캐너가 말을 잘 듣지 않으니 정신들 똑바로 차리고 있으라고 하게나.”

시가지 주변을 경계하던 베아트릭스의 황실군 기병 8백이 길을 막아서자 위세등등하게 전진하던 테나스의 제후군도 일단 속도를 늦추고 그들과 마주서서 포진하기 시작했다.

“베아트릭스 플라칼 대장군입니다. 길을 열어줄 맘이 없나봅니다.”

테나스와 함께 온 참모가 망원경으로 전방의 깃발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황실군 기병들이 지난밤 불태워 없앤 빈민가 천막촌 자리에 일사불란하게 포진한 채 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고작 저 정도 기병으로?”

“주택가를 등지고 있습니다. 주택가에 보병들이 숨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투창 사격에 능한 경기병들이 절반입니다.”

테나스는 못 들은 척 말을 몰아 황실군 기병대에 천천히 다가갔다. 시체 탄내와 재가 뒤섞인 탁한 바람이 시가지 쪽에서 불어와 그의 긴 머리칼을 뒤로 펄럭거리며 날렸다. 베아트릭스가 거의 눈에 들어올 정도의 거리까지 들어간 테나스는 잠시 움찔했다. 전혀 황빈 같지 않은 그 무뚝뚝한 인상의 여자 무장 손에는 묵직한 투창 ‘자리드’가 들려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테나스의 근위병들이 방패를 들고 얼른 군단장의 앞을 막아섰다.

“저 무기로 1스타디아 넘는 거리에서도 무장 머리만 골라 한 방에 부술 수 있다고 합니다. 황제도 맞춘 적 있답니다.”

반대편의 베아트릭스도 부장의 호위를 받으며 성큼성큼 이쪽으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그의 기수가 든 거대한 검은빛 황실 깃발은 이그나토 가 제후군의 것보다 족히 두 배는 컸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투창을 안장 옆의 통에 일단 넣었지만 언제든 다시 빼들 태세였다.

“황실 대장군이며 황상의 명예로운 빈인 베아트릭스 바툴이다. 황실군의 작전구역에서 당장 물러나거라.”

“저년 많이 컸네.”

테나스가 옆에 있는 부장에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그 소리를 들은 몇몇 무장들이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여긴 황제령이 아니고 저희 가문 영지입니다. 황실에서는 저희와 사전 협의되지 않은 부당한 군사행동을 당장 중단해 주십시오.”

테나스도 질세라 확성기를 들고 딱 잘라 대답했다. 베아트릭스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다시 반복했다.

“너희 제후 마자리크와 이미 협의한 것이니 당장 꺼지지 못할까!”

“그분께선 우리 제후가 아니십니다.”

“네년의 아비가…….”

양쪽 무장 사이에 빤한 논쟁이 잠시 오갔다. 시가지 쪽을 선점한 황실군도, 진입하려다가 길이 막힌 이그나토 가 제후군 사병들도 다 아는 이야기였다. 숫자가 턱도 없이 적은 황실군이 선제공격할 처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테나스도 딱히 당장 공격할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소질도 없는 논쟁을 일단 접고 본대로 돌아온 베아트릭스는 옆에서 눈치 없이 하품을 하고 있는 부장을 휙 째려보았다. 깜짝 놀란 부장이 민망한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놈들 공격할 맘이 있기나 했던 걸까요?”

“움?”

그제야 무언가 정신이 퍼뜩 든 베아트릭스가 등 뒤를 휙 돌아보았다. 시가지 중앙의 광장은 여전히 불타고 있고, 안에 들어간 선발대 1천은 와서 합류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쪽에 보병이 없다는 걸 저들이 눈치 채기 전에 빨리 와 줘야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거 혹시…….”

그때, 베아트릭스의 할룩스로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엄마!”

바로 시가지 서쪽 풍차언덕에 내보내놓은 딸 엘룬의 흥분한 목소리였다.

“엘룬?”

“엄마……아니, 장군님, 산에서……적군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어요!!!”

베아트릭스의 온몸이 순간 확 굳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적이 온다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보다 딸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제가 눈이 좋아서 빨리 봤어요! 굉장히 많은데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인다고 하니 어떡해요!”

“그럴 리가 없는데……거기는 분명 길이 끊겼다고…….”

베아트릭스는 등 뒤의 호드르 산을 다시 올려보았다. 지난 정찰과 이곳에 주둔했던 장병들 보고대로라면, 산 서쪽은 지난 대지진으로 옛 지형이 완전히 붕괴되어 이젠 깎아지른 절벽에 거미줄 같은 깊은 균열이 난 바위땅만 남아 있어 대군은 내려올 수 없는 최악의 지형이었다. 게다가 곳곳에 숨겨놓은 정찰병들의 눈을 피해 내려오는 것도 마술을 부리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몇 명이나?”

“모르겠어요, 그냥 많아요. 땅을 다 덮었어요, 백 명, 아니 그보다 훨씬 많아요!”

엘룬의 부정확하고 장황한 대답에 베아트릭스는 떨리는 기색을 감추고 호통부터 쳤다.

“전장에서 황자가 왜 그리 경망스러우냐! 급박한 상황에선 직속상관에게 제대로 보고를 하고 모르는 건 카토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지 철없이 엄마부터 찾아 징징대다니! 아랫사람들에게 창피하지도 않나!”

겁에 질린 엘룬이 엄마에게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어요. 놀라서 그랬어요.”

베아트릭스는 겁먹은 딸에게 자칫 안쓰러운 시선을 줄 뻔했지만 아이를 무조건 달래주는 건 그가 배우고 자란 바툴 가와 플라칼 가의 방식이 아니었다.

옆에 있는 카토와 뭔가 대화를 주고받은 엘룬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보병 1천 명 정도요. 대오를 맞춰 내려오는 걸 보니까 폭도들이 아니고 배신한 근위대 같아요.”

“씨이, 대체 어떻게 내려온 거야!”

베아트릭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가지에서 제일 먼 곳에 두어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이 도리어 정반대의 꼴이 된 셈이었다. 이제 저 작은 풍차언덕은 적에게 가장 가까운 곳의 최일선이 되어버렸다.

창백해진 엄마의 얼굴을 보던 엘룬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전 걱정 마세요, 이제는 안 무서워요, 정말이에요.”

“힘든 하루가 될 것 같구나.”

엘룬이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베아트릭스는 이전엔 거의 해 준 기억조차 없는 말 한 마디를 아주 작게 속삭였다.

“널 사랑한단다, 얘야.”

딸을 차마 계속 볼 수 없었던 베아트릭스는 할룩스를 그대로 딱 끊어버렸다. 그가 자란 플라칼 가에서라면 더 모질게 대했겠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루코프.”

베아트릭스는 정찰대장 루코프를 다시 불러냈다.

“적들이 산꼭대기에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책임지고 찾아내라. 못 찾으면 내 얼굴을 다시 볼 생각 하지도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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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무삭제 출판본이 조아라 유료란인 노블레스에서 2011년 6월 10일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노블레스 독자분들은 그쪽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텍스트 부분은 종이책의 무삭제판이 그대로 들어갔지만  시스템상 삽화나 도표, 조판 구성 같은것은 넣지 못했습니다.

뷰어 왼쪽의 [작품]에 보시면

혈맥 The Iron Vein [무삭제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링크가 있습니다. ^^

* 2011년 9월부터 전자책 서비스도 시작되었습니다. 전자책도 물론 무삭제 출판본 기준이고 표나 삽화, 부록 등이 함께 들어있고, 기간제한없이 영구적으로 소장하고 볼 수 있습니다. 9월 말 현재 4권까지 올라 있고 1달 단위로 2~4권씩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일부 권은 성인용입니다.)

전자책은 유페이퍼(http://www.upaper.net/kiltie), 예스24, 알라딘,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리브로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vein' 혹은 '혈맥' 으로 검색하시면 될 겁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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