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02화 (897/1,132)

< -- 902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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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가 넘어간 지금까지도 검은 재가 덮은 하늘은 여전히 혼탁했다. 그리고 시가지에 진입한 시로의 황실군 상황도 그에 못지않게 나빴다. 광장의 갑작스런 화재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시로와 네피, 자말의 부대는 실종자들이 속출하면서 물러날 수도, 안 물러날 수도 없는 곤혹스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광장을 집어삼킨 불길은 다행히 그리 오래 가지 않았지만 주변의 싸구려 목조건물, 조립식 건물들에 옮겨 붙은 불길은 여전히 무서운 생명력을 과시하며 황실군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좁은 골목을 사이로 낡은 저층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상황에서 불과 연기까지 더해졌으니 길을 잃는 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불운이었다.

페로의 명령대로라면 화재 속에서 실종된 장병들을 포기하고라도 외곽에서 이그나토 가를 막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기병대를 도와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3백의 선발대 병사들 중 부상자가 40명이 넘었고, 여전히 귀환하지 못하고 연락조차 되지 않는 실종 병사들은 50명이 넘었다.

일단 퇴각했다가는 인정머리 없는 페로가 이곳에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을 것이 빤한 판국에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못 찾았어? 못 찾았냐고!”

시로는 연기와 열기, 재로 가득한 골목에서 콜록거리며 나오는 장교의 멱살을 덥석 붙잡았다. 장교는 병사들이 업고 온 2명의 부상자들과 3명의 그럭저럭 성한 병사들을 가리켰다.

“저 다섯이 전부입니다! 동쪽 골목엔 아무도 없습니다!”

“빌어먹을! 나머지 놈들은 그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시로가 답답한 가슴을 쥐어뜯으며 짜증을 냈다. 그의 할룩스에는 ‘빨리 남동쪽으로 퇴각해 이그나토 가를 막고 있는 베아트릭스 경의 기병대를 도와라.’는 페로의 재촉이 쉴 새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네피가 이번엔 서쪽을 돌아보았다.

“서쪽은? 아까 자말이 가는 것 같더니?”

“아직 안 돌아왔어. 여기 지리에 제일 밝으니 분명 잘 찾아낼 거야.”

시로가 검댕이로 더러워진 얼굴을 옷소매로 대충 닦아내고 불타고 있는 건물의 창을 올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노파가 살려달라며 손을 흔들던 곳이었지만 이젠 소름끼치는 불길만 안쪽에서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건물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저곳 옥상에 숨어 마우저와 볼트를 쏘아대던 자들도 도망친 듯했다.

“페로 대공께서 한시바삐 퇴각하라고 재촉하십니다! 왜 할룩스를 안 받냐고 노기가 대단하십니다!”

장교 하나가 시로에게 급히 달려와 알렸지만 시로는 못 들은 척 괜히 여기저기 부산만 떨었다.

“젠장! 자말 그놈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왔다갔다하며 소리를 지르던 시로는 시가지 남쪽에서 달려오는 십여 명의 병사들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사령부에서 페로가 보낸 헌병인 줄 알고 지레 놀라 자리를 피하려 했던 그는 어딘지 익숙한 걸음걸이에 우뚝 멈춰섰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병사들 선두에 있던 장신의 ‘사관’이 짜증스레 입을 열었다.

“맙소사,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시로가 얼른 주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총리가 날 잡아먹으려고 하더군. 남편하고 아들놈 내 손으로 멱살 잡아서 끌고 오라고.”

“몰라요, 전 시청 점령하러 왔지 퇴각하라는 명령 같은 거 받은 일 없어요.”

시로가 괜히 귀를 후비며 딴소리를 했다.

“내가 멱살 잡아가도?”

“난 시청을 접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에요. 그 뒤는 몰라요. 멱살 잡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시로가 참사 후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그는 불편한 팔로 투구를 벗으려는 ‘사관’의 손을 급히 막았다.

“투구는 벗지 말아요. 악취 때문에 기절해요.”

“후방 주택가에 있던 7백을 베아트릭스 황빈한테 기병대에 보냈어. 그 정도면 총리 명령을 아주 생깐 건 아니니 일단 변명거리는 되겠지. 그런데 실종자가 몇이길래?”

“49명 정도 됩니다. 자말이 수색하러 떠났으니 줄어들 겁니다.”

“허, 그럼 나라도 못 떠나겠네.”

제네르는 여전히 불타고 있는 건물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광장의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넓은 공간은 이젠 시체 대신 거대한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 너머로 선발대의 원래 점령 목적이었던 시청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래, 시청 점령하러 왔지.”

“시로 대장님! 급한 연락이랍니다!”

조금 전 페로의 연락을 전했던 장교가 멀찍이서 다시 외쳤지만 시로는 이번에도 못 들은 척 자리를 피하려 했다.

“대장님! 자말 하크로딘 중랑의 연락입니다! 서쪽에서 교단 무리로 추정되는…….”

“자말?”

시로는 일부러 안 받고 잇던 할룩스를 그제야 얼른 켰다. 그런데 자말이 있는 곳이 어딘지 심상치 않았다.

“왜 이제야 받으십니까?”

어두운 실내에 웅크리고 숨어 있던 자말은 창밖을 급히 확인하고는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시가지 서쪽에 적이 있습니다. 지난번 산 정상에서 우릴 공격했던 검은 차림새의 헤네티 기병들입니다. 그 중 몇 놈들이 질식사한 우리 병사들 갑옷을 훔쳐 입는 걸 봤습니다.”

자말은 창밖을 다시 힐끔 확인하고는 모기만한 소리로 전했다.

“100놈이 넘는 것 같습니다. 그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로?”

창백해진 시로가 얼른 손짓으로 전투 준비를 명했다. 지금까지 옹기종기 모여 있던 장병들이 일제히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알았다. 넌 무사하고?”

자말은 목소리를 더 작게 죽였다.

“낙오병 20명 정도 구해서 총원 28명 데리고 숨어있습니다. 밖에 적이 많아 못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가 적 근거지인 것 같습니다. 서쪽 5번가입니다.”

“알았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잘 숨어 있어. ……엇.”

민감한 시로가 먼저 고개를 서쪽으로 휙 돌렸다. 복잡하게 얽힌 골목골목 너머에서 몇 명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불타는 건물들이 내뿜은 짙은 연기 때문에 잘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실루엣만 보아서는 연기 속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대여섯 명의 황실군 병사들로 보였다.

“이봐!”

기뻐하며 다가가려는 사관을 시로가 얼른 막아섰다. 그리고는 병사들에게 손짓으로 사격 준비를 명했다.

“발두르!”

시로가 암구호를 외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젠 시로로서도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발사!”

병사들 몇이 혹시나 하는 맘에 차마 못 쏘고 머뭇거렸다. 그렇지만 수십 발의 석궁이 골목으로 날아가 ‘황실군’들에게 명중하면서 짧은 비명과 어디선가 불꽃이 확 솟는 모습이 검은 안개 너머에서도 확실히 분간되었다.

“적이잖아!”

그제야 적군임을 확신한 나머지 병사들까지 일제히 석궁을 쏘아대기 시작했고, 정체가 들통 난 것을 눈치 챈 적들의 엄청난 말굽소리가 서쪽 골목을 울리기 시작했다. 쓰러진 적군 뒤로 길을 꽉 채우고 몰려오는 엄청난 숫자의 기병들이 보였다.

“그때 그놈들 맞아!”

제네르는 지난번 산 정상의 칼데라에서 아스탈과 함께 황실 일행을 쫓았던 기병들을 바로 분간해냈다.

시로가 팔을 번쩍 쳐들었다.

“서쪽에서 헤네티 기병이다! 분대별로 골목을 맡고 사격 준비해!”

처음으로 ‘진짜 전투’를 하게 된 선발대 병사들이 일제히 골목 모퉁이에 몸을 붙이고 잘 보이지도 않는 골목 너머를 향해 개량된 석궁을 겨누었다.

“접근 못 하게 일단 발사해!”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골목을 향해 마구 석궁을 발사했다. 적들이 쓰러졌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계속 장전을 하고 정신없이 쏘아댔다.

“잠깐, 사격중지! 조용히 해!”

시로가 급히 손을 저었다. 적이 전멸했을 리가 만무한데도 이상하게 말굽 소리가 순식간에 뚝 끊겨버렸다. 불안한 고요함이 좁은 골목들 사이를 맴돌았다.

“다른 길로 돌아서 오려는 건가?”

예민한 가디언들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적들은 쉽사리 포착되지 않았다. 시로의 뒤에 있던 제네르는 이 자리에 마리안이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짧게나마 했다.

불안한 몇 초, 혹은 몇십 초가 지난 후, 민감한 가디언 한 명이 대뜸 건물 옥상을 가리켰다.

“위쪽입니다! 엄청 빠릅니다!”

“옥상?”

시로가 등에 멘 큰 도끼를 재빨리 쳐들며 위를 올려보았다.

“이런!”

옥상을 타고 건물들 사이를 겅중겅중 뛰어넘어 온 검은 옷의 헤네티들 수십이 옥상 위에서 우수수 쏟아져 내려왔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머리 위에서 공격을 당한 병사들 서넛이 피를 뿜으며 ‘첫 전사자’로 이름을 남겼다.

“가디언들은 사병들한테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가디언들이 앞에서 막고 병사들이 뒤에서 쏴서 죽이라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시로가 도망치는 사병을 막 공격하려던 헤네티의 뒷목을 도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크!”

시로는 목이 달아난 헤네티의 시체에서 혹시라도 불이 날까 급히 물러났지만 다행히 바로 숨이 끊겼는지 끔찍한 불을 다시 볼 일은 없었다. 그 사이 혼비백산한 병사들이 급히 2선으로 물러났고, 가디언들이 헤네티들을 몸으로 막아섰다.

“제기랄, 몇 놈이야! 대체!”

검은 옷의 헤네티들 끝도 없이 줄줄이 옥상에서 뛰어내려 압박해 들어오면서 20명 조금 넘는 이쪽의 가디언들도 점점 버티기 버거워져갔다. 2선으로 물러난 병사들이 사격을 하려 했지만 이쪽 가디언과 헤네티들이 뒤엉킨 상태에서 함부로 볼트를 쏠 수도 없었다.

“맙소사, 기병들이 또 와!”

시로가 다시 골목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멈췄던 기병들의 돌격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선봉대가 옥상을 타고 선제공격해 황실군을 잡아놓은 새 본대인 기병대가 다시 골목들을 우회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최소한 100기는 넘는 것 같아!”

“어디서!”

아직 한 팔이 성치 않은 네피가 결사적으로 달려드는 적의 가슴을 힘껏 차내며 물었다.

“서쪽하고 남쪽!”

“남쪽까지? 빌어먹을! 퇴로는 어쩌라고!”

시로는 시가지 외곽으로 향하는 남쪽을 휙 돌아보았다. 선발대가 이들에게 붙들려 있는 새 발 빠른 기병들이 주변을 빙 돌아 퇴로까지 먼저 막은 게 분명했다.

“창! 창으로 측면에서 공격해!”

장교 한 명이 임기응변을 냈지만 제네르가 얼른 그를 막아섰다.

“뭐야, 사관 따위가…….”

발끈했던 그 장교는 뒤늦게야 상대의 신분을 알아채고는 얼른 입을 다물고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저 많은 헤네티 기병을 보병 2백이 상대한다고? 창으로?”

제네르는 아직까지 군데군데 불타고 있는 광장을 휙 돌아보았다. 광장을 채운 불탄 수많은 유골과 잿더미 건너편으로 얼마 전까지 시청 겸 페스트 행정청으로 쓰였던 석조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낡고 허름한 목조나 조립식 건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광장 북쪽을 차지한 저곳은 원래 작전대로라면 토벌군 사령부로 쓰려 했을 만큼 견고한 건물이었다.

“모두 시청으로 퇴각……아니, 시청을 점령한다! 가디언들이 뒤를 지켜!”

제네르가 병사들에게 반대로 적진에 더 깊이 들어갈 것을 명했다.

“광장으로요?”

“뛰어가! 멈추지 말고 무조건 달려!”

제네르가 악을 쓰며 장교의 등을 확 떠밀었다. 2백여의 병사들은 조금 전만 해도 불을 피해 허겁지겁 도망쳤던 광장으로 도로 되돌아가야했다. 헤네티들도 황실군이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움직이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놈들 못 가게 해! 막아!”

헤네티들을 막아선 시로가 함께 있던 네피를 제네르 쪽으로 힘껏 밀었다.

“내가 여기서 시간을 끌 테니까 네가 상장군님 지켜! 저분한테 일 생기면 죽을 줄 알아!”

시로와 가디언들이 뒤를 막아주는 사이, 병사들은 불길에 휩싸인 건물들 사이를 재빨리 지나 광장에 뛰쳐들었다. 지름 1스타디아(150m)나 되는 이 큰 광장에는 아직도 타고 있는 시체들과 군데군데 남은 잔불들이 지뢰처럼 흩어져 있지만 다급한 지금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멈추면 뭐가 날아올지 모르니 빨리 달리라고! 모두 흩어져서 달려!”

네피를 선두로 2백여의 장교와 사관, 병사들은 유골과 잿더미를 짓밟으며 광장 반대편 시청사를 향해 숨이 넘어갈 듯 뛰었다.

“됐다!”

제네르와 병사들이 어느 정도 달아난 것을 확인한 시로는 덤벼드는 헤네티의 가슴을 도끼로 힘껏 갈라내고는 뒤로 휙 돌아섰다.

“따라가!”

병사들과의 거리를 번 그는 20여명의 가디언들과 함께 앞서 퇴각한 제네르와 병사들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꽤 가까워진 헤네티 기병들의 말굽소리가 뒤를 빠르게 조여오고 있었다. 이번엔 앞서 퇴각을 시작한 일반 장병들의 차례였다.

“정지! 가디언들을 엄호해!”

퇴각하던 2백의 병사들이 일제히 뒤로 휙 돌아서서 동료 가디언들의 뒤를 쫓는 검은 기병 헤네티들에게 석궁을 겨누었다.

“발사!”

가디언들이 재빨리 허리를 숙이자 그들의 머리 위를 휙 스쳐간 2백 발의 위력적인 볼트가 그 뒤를 허겁지겁 쫓던 헤네티들의 가슴을 향했다. 그들도 몸을 피하려 했지만 앞선 가디언들이 시야를 가렸던 덕분에 반응이 빠르지는 못했다.

“우웁!”

운이 없었던 헤네티 하나는 바로 불길에 휩싸였고, 중상을 입은 자들 몇이 피를 뿜으며 바닥에 꼬꾸라졌다. 그 사이 가디언들이 다리에 속도를 붙여 그들과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적을 일제 사격해 묶어놓은 병사들도 다시 방향을 재빨리 돌려 시청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새끼들 못 도망가게 해!”

동료를 잃은 헤네티들도 그에 질세라 허리춤에 감춰놓았던 팔뚝만한 막대를 빼들었다. 도망치던 시로가 뒤를 힐끔 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우저다!”

발 빠른 가디언들이 재빨리 갈지자로 움직이며 하방으로 흩어져 조준을 피했지만 2백의 보통 병사들은 그렇게까지 날래지는 못했다. 곳곳에서 따닥 하는 짧은 소리가 울리더니 수십 발의 마우저가 동시에 날아와 병사들의 몸통, 팔다리, 그리고 운 없는 병사의 머리를 단번에 조각내 놓았다.

“맙소사, 이게 뭐야.”

이 끔찍한 무기에 관해 사전 교육은 받았지만 눈앞에서 동료가 죽는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형체도 없이 머리가 날아간 동료를 눈앞에서 본 신참 병사들과 갓 부임한 어린 초급장교들이 충격을 받아 자리에 굳어버린 모습까지 보였다.

“움직여! 씨발, 대갈빡 깨지려고 환장했냐!”

네피가 멍하니 서 있던 한 비장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졌다. 그나마 침착한 사관들과 고참병들이 급히 되돌아가 팔다리가 잘리고 머리가 깨진, 혹은 다리가 굳어 못 움직이는 동료를 급히 추슬러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엄호사격! 엄호사격! 산 놈 챙겨! 제기랄!”

죽은 병사의 석궁을 주워든 네피가 뒤로 휙 돌아서서는 뒤따라오는 헤네티의 말 머리를 단박에 박살을 냈다. 병사들은 다른 동료들이 적을 저지하고 있는 사이 부상으로 울부짖는 동료를 들쳐메고 계속 달렸다. 숨이 목구멍 뒤로 넘어갈 듯 차올랐지만 멈추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엇!”

제네르와 네피를 뒤쫓아 달리던 시로가 이번엔 서쪽을 돌아보았다. 검은 기병들 몇이 이번엔 광장 서쪽의 골목에서 몰려나오고 있었다.

“왼쪽 조심하세요!”

시로가 허리춤에서 도끼를 뽑아 골목에서 몰려나오는 검은 기병의 선두에 온 힘을 다해 던졌다. 기병들도 급히 방향을 돌렸지만 특등급 가디언이 던진 위력적인 도끼를 쉽사리 피할 수는 없었다.

“어엇!”

막 방향을 돌리던 기병 군마의 목덜미를 강력한 도끼날이 후려쳤다. 목의 절반이 잘려나간 군마는 울음소리도 못 내고 옆으로 밀려나 질척한 바닥에 거칠게 동댕이쳐졌다. 앞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동료와 말을 이처 피하지 못한 뒤의 다른 기병들 서넛까지 중심을 잃고 냄새나는 광장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빨리 가!!!”

양쪽 모두 치명적인 공격을 주고받으며 선혈이 낭자한 결전을 벌이는 사이, 네피는 부서진 펜스를 넘고, 이젠 폐허가 된 정원을 가로질러 제일 먼저 시청사에 도착했다. 정원 덕분에 청사에서 내려다보는 주변 경관은 확 트여 있었다.

“허, 제네르가 제대로 봤군.”

네피는 뒤따라온 고참병과 사관들에게 문을 가리켰다.

“너희는 문 양쪽 지키고 있어!”

호흡을 가다듬은 네피는 굳게 잠겨 있는 철문을 온몸으로 힘껏 들이받아 단번에 박살을 냈다. 안에 내동그라진 그는 도끼를 얼른 빼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1층 로비는 텅 비어있었다.

“들어와! 빨리! 빨리!”

네피의 손짓에 부상병을 부축한 병사들이 속속 도착해 안에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디선가 날아드는 마우저 사격에 또다시 몇 명이 피를 뿜으며 시청 정원에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그런 불운을 피해 무사히 도착한 제네르도 숨이 턱에 차 건물 안에 픽 주저앉았다.

“옥상하고 2층에 소대 하나씩 올려 보내고 나머지는 1층을 지켜! 빨리 움직여!”

병사들이 재빨리 창가로 달려가 유리창을 깨고 뒤따라오는 동료들을 위해 석궁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쏜 개조 볼트에 목이 절반 떨어져나간 헤네티와 뒷다리가 동강난 말들이 끔찍한 폐허가 된 광장에서 불덩이로 변해버렸다. 이쪽의 피해도 컸지만 헤네티들의 피해도 그에 못지않았다.

“시로! 시로는 왔어?”

제네르가 문 밖으로 머리를 조금 내민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마우저가 그의 투구를 스치고 비켜나가 로비 안쪽 벽에 걸린 쟁반 크기의 시장(市長) 초상화와 폭동을 선동하는 격문이 쓰인 수십 개의 피켓들을 박살을 내 놓았다. 뚱보 벨 시장―지난 폭동을 주도했던―의 자그만 초상화 위에는 제후 마자리크와 죽은 장남 윌더의 큼직한 사진도 있지만 그쪽은 멀쩡했다.

“이런! 괜찮아요?”

투구 한쪽이 부서진 채 바닥에 뒹굴었던 제네르는 마지막에 들어온 시로의 목소리에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어, 어?”

제네르는 반쯤 넋이 빠진 채 열린 문가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열린 문 밖으로 불쑥 몸을 내밀어 가운뎃손가락을 불끈 세워 보였다.

“어떤 새낀지 재주도 겁나게 좋네!”

제네르가 그답지 않게 큰 소리로 욕을 내지르며 시장 벨의 사진과 부서진 피켓 조각들을 시청 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뭐 해요!”

놀란 시로가 얼른 그를 안으로 끌어당겼지만 그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돌발행동이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살아서 이곳까지 온 병사들이 와아 하고 일제히 맞장구를 치고 함성을 올렸다.

“어쨌든……우린 목표를 달성했잖아?”

기진맥진해진 제네르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킬킬대고 웃기 시작했다. 옥상으로 올라간 병사들이 찢어 내버린 붉은색 폭도들의 깃발과 현수막이 불이 붙은 채 하늘거리며 광장에 내버려지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그렇군요. 목적을 달성했으니……총리도 뭐라 못하겠군요.”

시로도 헛웃음을 지었다. 당초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선발대는 처음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이봐, 옥상에 황실 깃발 올리라고 해. 시가지는 우리가 접수했다. 시청에 접근하는 놈들은 모조리 쏴 죽여.”

죽은 병사와 헤네티들이 시체가 어지럽게 뒤엉킨 광장 위로 나름대로 거점을 확보했다며 자축하는 황실군들의 함성과, 매복공격에 실패하고 분통해하는 헤네티들의 욕설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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