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03화 (898/1,132)

< -- 903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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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가 있는 황실군 사령부는 계속해서 전해지는 다급한 소식들에 벌집 쑤신 듯했다. 시가지의 제네르와 시로가 매복중인 헤네티에 고립되었다는 보고에 이어 산 서쪽으로 근위대가 내려왔다는 보고에 당황한 페로는 산의 지도를 펼쳐놓고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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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페로는 테이블 위의 지도를 옆으로 팽개치며 버럭 화를 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지진으로 골짜기 다리도 무너지고, 나무 한 그루 없이 훤하게 트인 황량한 바위산을 정찰병 눈까지 피해가며 내려오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이 새끼들, 정말 귀신 아냐?”

“대공 각하, 지금은 이 문제에 신경 쓰시기보다는 외부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방어에 주력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킵이 격분한 주인에게 조심조심 말을 건넸지만 돌아온 건 무서운 호통뿐이었다.

“방어? 우린 방어가 아니고 토벌하러 온 거다! 우리 임무도 잊었나?”

“무,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병들은 이미 다 투입되어 있고, 보병 1천은 도시 안에 묶여있고, 주변 보루에 뿌려놓은 보병들 다 빼고 나면 당장 남은 건 보병 1천이 전부야! 교단 놈들이 이그나토 가와 손잡고 맘먹고 쳤다가는 이 숫자론 방어고 뭐고 없다. 그럴 바엔 먼저 저놈 약점을 찾아내 등 뒤에 비수를 찌르는 게 낫지.”

“예에? 이 상태에서 역공을요?”

페로의 위험천만한 생각에 킵이 기겁을 했다.

“비엔의 남부파견군을 더 불러오는 게…….”

“교단하고 남부 놈들 노림수가 그거라는 걸 몰라? 비엔에서 델루지 가를 견제하고 있는 남부파견군을 이쪽으로 보내자는 거지 뭐겠어!”

“교단하고 남부제후들하고 손잡았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 않습니까.”

“꼭 그런 걸 꼭 증거가 있어야 아나. 감으로 잡는 거지. 미련하긴.”

페로가 씩씩거리며 자리를 서성거렸다.

“옆에 황실 파견군이 없으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놈들이야. 차라리 여길 포기하고 퇴각하는 한이 있어도 파견군은 절대 더 못 뺀다.”

바닥에 흩어진 지도들을 씩씩대며 내려다보던 페로는 갑자기 그것들을 주섬주섬 싸서 겨드랑이에 끼었다.

“어디 가십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페로의 명으로 숙소에 갇혀 있던 코리온은 지도와 사진 뭉치를 바리바리 싸들고 불쑥 들이닥친 그 원수 같은 남자를 짜증 섞인 눈길로 쏘아보았다.

“왜 오셨습니까? 전방에서 시체 타는 냄새나 실컷 맡으시지.”

“아까는 제가 과했습니다.”

형식적인 사과만을 툭 던져놓은 페로는 잔뜩 화가 나 있는 코리온의 앞에 지도와 그간 찍은 정찰 사진, 입체 지도를 우르르 쏟아놓았다.

“아무리 황당무계한 안이라도 상관없으니.”

페로는 거의 바닥을 덮을 만큼 큰 호드르 산 지도를 가리켰다.

“1천이 넘는 놈들이 우리 정찰병과 셔틀을 피해서 몰래 내려올 수 있는 길을 좀 찾아주시오, 제발.”

“예에?”

이 남자의 뻔뻔한 부탁에 코리온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여길 타고 내려온 놈들이 우리 서쪽을 공격하고 있단 말입니다! 빨리 좀 찾아내 주시오! 당장!”

페로가 코리온의 옷깃까지 덥석 붙잡고 언성을 높였다. 코리온은 이 남자의 뻔뻔함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내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지금까지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내내 위협적으로 소리만 버럭 질러대던 페로가 코리온의 귀에 입을 바싹 대고는 갑자기 애원조로 목소리를 돌변했다.

“해결해 주기만 하시면…… 내 앞으로 주페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로요.”

코리온이 그제야 슬쩍 눈을 흘겨 페로를 쳐다보았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페로의 애원까지 얻어낸 코리온은 마지못해 하는 척 지도에 눈을 가져갔다. 사실 이 상황에서 성질을 앞세워 지도를 걷어찰 생각은 애당초 없었지만 다급한 이 사내에게 약속까지 덤으로 얻어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적이 처음 나타난 곳이 어딥니까.”

시가지 서쪽에 출몰한 적병은 처음엔 1천 정도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가 더 늘어 점심을 넘길 무렵엔 이미 1천 5백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점점 거리를 가까이해오더니 시가지 서쪽을 지키는 황실군 보루들 앞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넓게 대오를 펼치기 시작했다.

적의 숫자가 늘어나자 ‘도망병 차단’을 목적으로 시가지 둘레에 작은 초소를 수십 개 뿌려놓았던 황실군도 급히 포진을 바꿔야 했다. 작은 보루의 장병들이 허겁지겁 위치를 버리고 더 큰 보루로 합류하면서 3개의 큰 보루로 압축되었다. 황자들이 있는 풍차 언덕에도 주변에서 보병 20여명과 발리스타 팀 2개가 합류하면서 숫자가 150명 가까이로 늘어났다.

풍차언덕은 그 중 제일 북쪽이라 적과는 가깝지만 산중턱에 솟은 가파른 바위언덕인 덕분에 방어에는 나름 유리했다. 다만 단단한 화산암이라 땅을 파 참호를 만들 수 없다보니 굴러다니는 돌덩이나 방앗간의 문, 벽을 모조리 뜯어내고 얼마 안 되는 표토(表土)를 긁어 작은 둔덕을 만드는 정도가 방어를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총리께 전하 일행만이라도 퇴각하겠다고 요청했지만 지금은 이곳을 지키고 있으라 하십니다.”

사령부와 통화를 한 카토가 이 두 황자에게 조심스레 보고했다.

“누구 맘대로 퇴각을 요청해?”

언덕 아래를 살피던 카이가 망원경을 눈에서 떼고 카토를 휙 돌아보았다.

“주변 병력까지 다 합치면 보병 4백에 기병도 2백이라면서? 우리가 방어하는 쪽이니까 이 정도 열세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카이가 마른 얼굴에 억지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역시도 눈빛은 겁에 질린 게 분명해 보였지만 두려움을 제대로 감추지 못하고 있는 동생 엘룬보다는 훨씬 표정이 단호했다.

“죄송합니다. 소장은 그저…….”

“뭐라고 그러셔? 대공이 뭔가 명령을 내렸을 거 아냐?”

“시가지 서쪽에 적 헤네티 기병들이 매복해 있다고 합니다. 함부로 나갔다가는 기병들에게 기습당할 수 있으니 이곳에서 나가지 말고 머물러 계시라는 명입니다.”

“알았다, 사수하라는 뜻으로 알면 되지.”

카이는 망원경을 눈에서 떼고 진지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방금 언덕 아래에서 도망쳐 온 발리스타병들이 조랑말에서 장비를 내려 바삐 설치하는 중이었다.

“나 이건 이번에 처음 봤어. 왜 우리 부대엔 이런 게 없었지?”

카이와 엘룬은 신기한 소형 발리스타를 만지작거리며 잔뜩 호기심을 보였다.

“보병 100명에 2팀 정도 배치되지만 무게 때문에 경보병 기동부대엔 없습니다. 발리스타병 4명에 짐을 나르는 조랑말이 10필이나 필요하니  부담이 크거든요.”

카토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크긴 크네. 폭이 한 10척(3m)은 되나?”

엄마를 닮아 발사무기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엘룬이 발리스타를 당기는 시늉을 해 보였다. 탄성장치의 강력한 토크에 자기장으로 가속되는 이 기계는 사람 키 만한 발리스타, 혹은 살상용 포탄을 날려 상대의 방패와 견고한 대오를 무너뜨리는 용도였다. 그런데 급할 때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바윗덩이. 심지어는 흙뭉치나 모래, 쓰레기까지도 적의 머리 위에 쏟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이번 기회에 좀 배워봐야겠어.”

“밖에 계시지 말고 방앗간 안에 계십시오. 오발이 날아올지도 모르고…….”

“내가 제대로 못 싸운다는 건 알지만 뒤에 숨어있었다가는 나중에 황상 볼 면목도 없을 것 같아. 동생들을 지키겠다고 그분과 약속했어. 사병 갑옷 있으면 줘, 이건 너무 튀어서 안 되겠어.”

카이는 은빛의 화려한 흉갑을 끌러 내던지며 카토에게 억지로 웃어보였다.

“내가 적의 표적이 되는 건 자네도 싫지?”

카이의 넉살에 카토도 이번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더 흘렀지만 1천5백의 근위대는 무슨 생각인지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평원에서 보루를 에워싼 채 보란 듯 대오를 정돈했고, 점심을 먹고, 자기들끼리 무언가 상의를 하며 느긋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었다. 그들의 지나치리만큼 여유로운 모습에 이쪽 장병들이 ‘무슨 생각이지?’ 라며 의아해할 정도였다.

하지만 페로가 이끄는 사령부의 병력은 적들이 ‘좀 나와서 공격해 봐라.’는 듯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에도 야속하리만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근위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해가 중천을 넘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 3시 무렵이었다.

“적이 움직입니다!”

오후 내내 발리스타 쏘는 법을 알려달라며 후방의 발리스타병들을 귀찮게 하던 카이와 엘룬도 카토의 외침에 비로소 1선으로 달려왔다. 적들은 이쪽 세 보루를 동시에 공격하려는 것인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다가오고 있었다.

카토가 이쪽 보루로 다가오는 6백여의 근위대를 가리키며 외쳤다.

“적은 남쪽이나 서쪽이 아니면 못 올라온다! 적들에겐 발리스타 같은 중화기도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카토가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약점은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카이가 정확히 짚어냈다.

“내 에키트 보병들은 근접전에는 무적이지만 사격에는 약해. 사격을 비겁한 짓으로 여긴다고.”

“압니다. 아무래도 포격에 많이 의존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카토의 다음 말을 언덕 아래쪽에서 들려온 적군의 함성소리가 뒤덮어버렸다.

“젠장, 시작입니다.”

카토는 카이와 엘룬에게 돌담 뒤편을 가리키며 외쳤다.

“움직이지 말고 제발 뒤에 계십시오!”

그 둘을 뒤로 밀어놓은 카토는 황급히 병사들이 쳐 놓은 방어선으로 달려나갔다. 1선에는 석궁과 도끼를 든 100명의 에키트 족들이, 2선에는 투창, 장창으로 무장한 바툴 가 기병들이, 제일 후열에는 2대의 발리스타와 20여명의 일반 보병 예비대가 대기했다. 이들 앞으로 거의 6백이 넘어 보이는 적군이 100명 단위의 견고한 방진을 이루고 큰 함성을 올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발리스타!”

카토가 후방의 2대의 발리스타를 맡은 팀에게 언덕 아래 적들을 가리켰다.

“포격 개시!”

병사들이 발리스타를 위로 겨누고 곡사로 포탄을 높이 날려올렸다. 공중으로 솟구친 두 발의 포탄은 무섭게 속도를 받아 지면에 내리꽂히며 사방으로 금속제 파편을 확 쏟아내 병사들을 몇을 그 자리에 쓰러뜨렸다.

“나도 도울게!”

뒤로 밀려나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카이가 포탄 무더기로 달려가 손에 들었다. 그리고 엘룬도 다른 발리스타에 매달렸다.

“엄마 닮았으면 나 이거 굉장히 잘 쏠 거야! 분명해! 그치!”

엘룬이 공포를 감추려 오빠에게 큰소리를 치자 카이도 그런 동생에 질세라 맞받아 외쳤다.

“젠장! 우리 엄마 잘 쏘는 건 욕밖에 없는데 난 어쩌라고!”

카이가 없는 힘을 쥐어짜내 포탄을 짊어지고 달려가 시위에 걸었다.

“날려! 날리라고!”

힘 좋은 엘룬은 악 소리를 지르며 어른 발리스타병과 함께 시위를 감는 기계를 힘껏 돌려 토크를 최대로 올렸다. 아직은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두 남매는 무조건 어른들을 따라 움직였지만 최소한 한 사람 몫은 해 내고 있었다. 황실을 위해 처음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뿌듯함과 의무감이 그들의 아픈 몸이나 어린 나이마저도 까맣게 잊도록 만들고 있었다.

“발사!”

양쪽 발리스타에서 포탄이 쉴 새 없이 날아올라 근위대의 정연한 대오를 조금씩 조금씩 긁어내갔다. 전진하던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면서 언덕 아래쪽에는 포탄 파편에 맞거나, 그보다 운 없이 직격당해 즉사한 병사들의 시체와 피, 조각난 몸통 조각들이 군데군데 흉터처럼 남겨졌다. 포탄이 작렬하고 적들이 쓰러질 때마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올렸지만 그런 시간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적과의 거리를 가늠하던 카토가 발리스타에 다시 지시를 내렸다.

“적이 가까워졌으니 직사(直射)해! 적 진형을 무너뜨려!”

“알겠습니다!”

카이와 장전병이 발리스타용 창을 함께 번쩍 들어 발리스타에 얹었다. 웬만한 투창의 몇 배는 되는 육중한 이 창에는 귀상어처럼 넓적한 날이 앞쪽에 섬뜩하게 붙어있었다. 적과의 거리를 확인한 베테랑 포수가 다가오는 적 대오의 정면을 향해 똑바로 조준하고 레버를 힘껏 내렸다.

“발사!”

가슴이 철렁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튕겨나간 큰 창이 땅을 스치며 날아가 근위대의 밀집대오를 사선으로 덮쳤다. 엄청난 위력의 창과 칼날이 중간에 걸리는 것들을 무자비하게 박살내고 베어내며 날아가 바닥에 꽂혔다. 발리스타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마치 뱀처럼 긴 시체와 피의 흔적이 줄줄이 남겨졌다.

“전진! 전진!”

겁먹은 병사들에게 근위대의 가디언 사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격을 막기 위해 밀집대오를 이루어야 하는 보병들에게는 한 마디로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잘 훈련된 근위대는 쓰러진 동료들을 뒤에 놔두고 계속 끈질기게 전진해왔다.

이쪽에서도 급해진 포수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리며 병사들을 채찍질했다.

“움직여! 게으름 피지 말고!”

급박한 상황에 휩쓸린 카이는 약한 몸도 까맣게 잊은 채 다시 창을 들어 힘껏 기계에 얹었다. 그리고는 포수와 부포수의 손짓과 움직임을 모두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발리스타를 쉴 새 없이 쏟아댔지만 적 보병들은 계속 가까워졌다.

적들이 충분히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린 카토가 이번엔 에키트 보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사격!”

사격에 서툴고, 이렇게 숨어 싸우는 것을 징그럽게 싫어하는 에키트 족들이었지만 이번엔 그들 입맛대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이 쏜 수백 발의 볼트가 근위대 전열 병사들의 방패와 흉갑을 펑펑 소리를 내고 꿰뚫으면서 일단 적의 전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잠깐.”

카이가 적이 공격해오는 반대편인 시가지 쪽을 망원경으로 확인했다. 헤네티들이 저곳에 있다고 했으니 언제든 배후에서 튀어나와 뒤를 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최소한 아직까지는 헤네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

멍하니 서 있던 그의 감각기에 북쪽의 먼 산자락 바위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본능적으로 읽혔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던 그의 앞으로 무언가가 쌕 하니 스치고 지나갔다.

“으읍!”

멍하니 뜬 카이의 눈앞에서 발리스타를 지휘하던 2명의 포수 중 하나의 머리가 그대로 부서져 바닥에 쏟아졌다. 그 광경에 일순간 넋이 나간 카이는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저격이다!”

장태자 곁을 내내 지키던 하심이 얼어붙은 카이를 붙들고 바닥에 확 쓰러뜨리며 외쳤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카이가 발버둥치며 악을 썼다.

“맙소사, 산이야! 산 쪽이었어!”

카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 한 발이 산 어딘가에서 날아와 이번엔 엘룬이 있던 팀의 포수 한쪽 팔을 통째로 공중에 날렸다. 카이가 2스타디아(300m) 훨씬 넘게 떨어진 거친 바위 위를 가리켰다.

“저기 저 바위 위라고! 발리스타를 노리고 있어!”

“내가 쏠게!”

그새 친해진 포반 병사가 쓰러지는 모습에 완전히 눈이 돌아간 엘룬이 쓰러진 병사가 갖고 있던 석궁을 번쩍 쳐들었다.

“어떤 새낀지 대가리만 내밀어 봐!”

“엘룬! 맙소사! 헤네티 저격수라고! 그걸로는 못 맞춰!”

“우리 엄마가 누군데!!!”

“너 미쳤어! 저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보다 못한 카이가 자신을 감싸고 있던 하심을 옆으로 떨쳐내고 동생에게 뛰어가려 했다. 그 순간, 산 쪽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다시 느껴졌다. 동시에 엘룬도 눈을 크게 부릅떴다. 적은 그새 자리를 옮겨 조금 다른 바위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잇!”

저격수가 움직이는 것을 미처 예상 못했던 엘룬은 적이 자리를 조금 옮겨 불쑥 나타나 먼저 쏘자 지레 놀라 일단 방아쇠부터 당겼다.

“으악!”

위력적인 마우저가 엘룬의 귀 옆을 휙 스쳐 카이가 있던 발리스타 부포수의 옆구리를 산산이 찢어놓았다. 양쪽 발리스타의 포수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나머지 발리스타병들이 일순간 패닉에 빠졌다. 마우저가 스치는 느낌에 순간 겁을 집어먹고 엉덩방아를 찧었던 엘룬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시 석궁을 들었다.

“씨이! 이 멍청이! 어디다가 쏜 거야! 젠장!”

쓰러진 포수를 본 엘룬이 울먹이며 다시 일어나 석궁 가늠자를 눈에 가져갔다. 후방 저격수의 등장에 혼비백산한 발리스타병들이 잠시 발사를 멈추면서 적 근위대들이 더 힘을 내어 다가오고 있었다.

“좀 숨어 있으라고!”

카이가 하심을 뿌리치고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동생에게 달려갔다. 그렇지만 제대로 오기가 난 엘룬은 오빠의 호통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빨리 나와! 이놈아!”

이번에도 자리를 조금 옮긴 적 저격수가 작은 흙둔덕 뒤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저기!”

이번엔 악에 받친 엘룬이 조금 빨랐다. 탁 소리를 내고 날카롭게 날아오른 볼트가 웬만한 정예병도 엄두를 못 낼 거리를 순식간에 가르고 날아가 흙둔덕 위를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그리고 마우저의 조준용 모니터를 박살내고 헤네티 저격수의 눈을 뚫었다.

“엘룬!”

동생에게 달려가던 카이가 화들짝 놀라 망원경을 그쪽으로 돌렸다. 시체는 쓰러져 보이지 않지만 둔덕 뒤쪽에 엄청난 피얼룩이 보였다. 그대로 즉사한 것이 분명했다. 난생처음 사람을 죽인 엘룬이 부들부들 떨며 석궁을 바닥에 떨구었다.

“괜찮아?”

카이가 떨고 있는 동생을 조심스레 안아주었다. 엘룬은 괜찮다며 계속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괜찮아, 정말이야.”

엘룬은 오빠를 밀어내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던 양 다시 발리스타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젠 남은 포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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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팬카페의 [팬픽, 패러디] 란에 있는 작가의 자작패러디 [세 남자와 꽃바구니]를 간만에  업뎃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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