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06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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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군이 반격하러 나온다는 보고에 병력을 이끌고 광장으로 달려온 헤네티 여단장 사카는 문짝에 갖은 철재 더미를 거의 ‘뒤집어쓰다시피’하고 나오는 황실군들을 보며 기가 차 혀를 내둘렀다. 광장에 미리 주둔해 있던 50여명의 헤네티들이 맹사격을 퍼부었지만 여러 개의 철제문을 엮은 방패 같지도 않은 방패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놈들 이 기회에 도망가려는 모양입니다! 그 뒤로 보병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발리스타라도 있으면 쏴서 박살을 내겠지만 마우저만으로는 힘듭니다.”
“기병을 내보내서 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쏟아지는 의견들 사이에서 사카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평소처럼 그의 대답은 몇 마디 되지 않았다.
“빨리 끝날 싸움이 아니군.”
어제 한바탕 당한 황실군들은 시청 정원의 조각품이나 담 뒤에 몸을 숨기고 섣불리 몸을 드러내지 않았고, 바리케이드를 뒤집어쓴 무리도 광장 중간께의 분수대 밑에 숨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헤네티들도 불에 타 무너진 폐허, 옹색하게 남은 건물 틈새에 몸을 숨긴 채 계속 사격만 퍼부었다.
양쪽 모두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수십 분간 지리한 사격전만 계속 이어졌다.
“시간만 끌면 우리가 충분히 이기겠습니다.”
사카의 부장이 성급한 결론을 내렸지만 사카도 이번엔 반박을 하지 않았다. 약간의 가디언이 섞인 정규군 보병대로서는 애당초 선제공격으로 승리를 기대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나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황실군 병사들은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어떤 놈인지 미친 지휘관인 모양입니다.”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마우저에 맞은 황실군 병사들이 즉사하거나 팔다리를 잃고 차례차례 쓰러졌지만 적들은 무모할 만큼 계속 병사들을 내보내며 전투를 계속 이어갔다. 시청 정원은 이미 2, 30구는 되는 시체들이 군데군데 널려 마치 묘지를 연상케 했다.
“저기선 그대 얼굴도 박살나고 있군, 벨.”
사카가 옆에 있는 호드르 시의 뚱보 시장 ‘니딘투 벨’에게 물었다.
“예?”
무심코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벨에게 사카의 부장이 황실군 일행이 뒤집어쓰고 나오고 있는 바리케이드를 가리켰다. 그 중간에 끼워져 있는 시장 초상화가 마우저 사격에 형체고 나발이고 알아보기 힘들 만큼 찢겨 있었다.
‘이 인간이 농담 비슷한 걸 다 하네.’
벨이 뚱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사실 그와 사카는 같은 헤네티지만 거의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었다. 전투 헤네티들은 벨과 쿠마르처럼 유전자 결함으로 전투부적합 판정을 받은 ‘불량품 헤네티’들을 동료로 취급해 주지도 않았고, 반면 그 둘은 ‘머리가 좋은 은총을 받아 위대한 현신의 오른팔이 된’ 특별한 헤네티라고 스스로를 평가절상하고 있었다.
기분이 상한 벨이 괜스레 사카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나저나, 낡아빠진 몸 언제까지 쓸 건가요? 위대한 현신께서도 여단장님이 새 몸으로 옮겨가길 원하십니다.”
사카는 불탄 벽 아래에 깨진 채 뒹굴고 있는 그을린 거울을 흘끔 돌아보았다. 그곳엔 지난 30년간 사용해 온 ‘낡은 몸’이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지난 제위전쟁의 마지막 날, 카렐에게 두 번이나 연이어 죽음을 당하고 받았던 이 몸도 중년에 접어들고 수명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터였다.
“내겐 항상 지금 몸이 마지막이다.”
사카는 별 표정 없이 그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잠시 자신의 얼굴에 빠져 있던 그는 등 뒤에서 무언가 번쩍거리는 것을 느꼈다.
“움?”
사카의 주름진 눈이 갑자기 확 커졌다. 건물 몇 채 너머 등 뒤에서 동시에 시커먼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거의 같은 순간, 도시 남쪽에서도 붉은 대형 발리스타 포탄이 십여 개도 넘게 쏟아지면서 주택가가 있던 곳을 순식간에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깜짝 놀란 그의 헤네티 부하들이 바닥에 엎드렸다가 무안하게 다시 일어섰다.
“속았군.”
사카가 입으로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찡그린 입가 주름이 평소보다 훨씬 깊었다. 당황한 헤네티들이 다급히 물었다.
“지금까지 공격한 게 우릴 묶어두는 미끼였던 겁니까?”
“저놈들 언제 우리 후방에 숨어들었죠? 외곽에 정찰병들이 있는데…….”
자신들의 떠나 온 임시본부 주변에 이미 황실군들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부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정찰병들을 뚫고 특공대가 숨어든 모양입니다.”
부하들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새, 사카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공중에 들었다.
“남풍, 남서풍이다. 불이 우리 쪽으로 온다.”
사카의 한 마디에 소란을 떨던 부하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연료를 뿌려 붙인 불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커져가고 있었고, 발리스타 포탄으로 남쪽에 붙여놓은 불도 점점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황실군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불이 이젠 거꾸로 그들 편이 되어 헤네티들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타죽습니다! 어디론가 움직여야 합니다!”
초조해진 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불을 등지고 적 앞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더 커지기 전에 퇴각하는 수밖에.”
사카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곳 지리에 밝은 벨에게 물었다.
“불을 뚫고 서쪽으로 퇴각할 넓은 길 있나?”
벨이 무거운 몸으로 말에 겨우겨우 기어오르며 힘겹게 대답했다.
“한 블록 아래에 대로가 있습니다. 나머지 길은 좁은 골목이라 불을 뚫고는 못 갑니다.”
“잠시 서쪽으로 퇴각해.”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사카가 말을 돌리며 부하들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함께 있던 60여명이 뒤를 따랐고 광장 주변 폐허 속에 하나 둘씩 흩어져 시청사를 저격하던 나머지 헤네티들도 급히 위치를 버리고 빠져나와 자신들의 말을 숨겨놓은 곳에 모여들었다.
“다 타고 난 후에 돌아오면 된다.”
사카를 선두로 거의 100여명에 가까운 헤네티 기병들이 일단 불을 피해 큰길로 모였다. 멀리로 길 양쪽 건물들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길이 넓어 그 사이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뭐야!”
척후대와 함께 제일 앞서가던 벨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보통의 화재와는 달리 시커먼 연기까지 사방으로 내뿜으면서 말과 병사들의 숨통을 턱턱 틀어막았고, 시야도 최악이었다.
“연료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빨리 통과하는 게 좋겠습니다!”
X특유의 예민한 감각을 이기지 못한 선봉 헤네티들이 매운 눈과 코를 연신 비비며 필사적으로 말에 속도를 붙였다. 다행히 눈앞이 확 트이며 농수로와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살겠네!”
지옥 같은 연기 속을 막 빠져나온 벨이 허겁지겁 농수로 위 다리를 건넜다. 호드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저지대의 밭으로 흘려보내던 이 큰 농수로는 웬만한 개천 크기였지만 오랜 가뭄으로 바닥까지 바싹 말라 있었다. 벨과 3명의 기병들은 농수로에 걸쳐진 작은 다리를 서둘러 건넜고, 사카의 본대도 그 뒤를 따랐다.
그때, 농수로 건너편 건물 창에서 불붙은 막대가 빙빙 돌며 날아와 다리 위에 툭 떨어졌다.
“익!”
막 다리 위에 뛰어들었던 본대의 헤네티들이 기겁을 하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다리 위에 미리 뿌려놓았던 연료 위에 불이 붙으면서 놀란 말들이 날뛰며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불 끌 시간 없어! 일단 계속 가!”
사관 하나가 용기를 내어 불 위로 뛰어들었다.
“아악!”
막 불을 뛰어넘은 말굽 아래 다리 상판이 푹 꺼져들어갔다. 흙을 뿌려 숨겨져 있던 얇은 합판 상판이 불꽃과 함께 우르르 무너지면서 2명의 헤네티들이 말과 함께 마른 농수로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맙소사!”
다리 건너편에 3명의 헤네티들과 함께 고립된 벨이 비명을 질렀다. 길 양옆 건물 2층에 숨어있던 자말의 병사들이 볼트를 퍼부어 그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사이, 이번엔 1층에 웅크리고 있던 5명의 가디언들이 말 위로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기습을 당한 헤네티들은 가디언들의 괴력에 밀려 말과 함께 우르르 나동그라졌다.
일행들이 쓰러지는 모습에 겁을 먹은 벨은 서쪽으로 혼자 도망을 치려 급히 말을 돌렸다.
“이크!”
옥상 어딘가에서 날아온 볼트가 말의 뒷다리에 명중하면서 그의 몸이 옆으로 확 기울었다. 둔중한 몸을 미처 가누지 못한 벨도 쓰러지는 말과 함께 흙바닥에 뒹굴었다.
“아악!”
말에 깔려 한쪽 다리가 부러진 벨이 나머지 다리로라도 일어서려 했지만 크고 뚱뚱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도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돼지야! 어딜 도망가!”
뒤틀린 다리를 질질 끌고 기어 도망치던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고함에 고개를 휙 돌렸다.
“자말 하크로딘?”
밧줄을 들고 달려오고 있는 자말의 모습을 본 벨은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직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현신이시여.”
그는 혀 밑의 캡슐을 의식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평생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용기를 짜내어 이로 힘껏 깨물었다.
“누구 맘대로!”
몸을 날린 자말이 이 배신자 시장의 턱을 덥석 붙들고 이 사이에 밧줄을 꽉 끼웠다. 벨이 그를 밀어내려 버둥거렸지만 자말도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힘을 주어 그가 턱을 못 다물도록 악을 썼다.
“닥치고 자빠져 있어!”
자말이 주먹으로 벨의 퉁퉁한 턱을 사정없이 후려졌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벨은 턱이 옆으로 휙 돌아간 채 그대로 까무러쳤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포로가 된 순간이었다.
“다 잡았냐!”
벨을 묶어서 질질 끌고 온 자말에게 가디언 사관들이 바닥을 가리켰다. 헤네티 둘은 말과 함께 불타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목이 잘린 채 흙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수고했다.”
자말은 벨을 그들 앞에 팽개치고는 불타고 있는 다리 쪽에 칼을 겨누었다. 그 너머에서는 100명 가까운 헤네티들 본대가 불타고 있는 건물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 하고 있었다.
“모두 위치로! 놈들이 농수로를 못 건너오게 지켜! 아까 만든 화염병 어딨어!”
다리가 붕괴되면서 낭패에 처한 건 뒤따라가던 사카와 헤네티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양쪽 건물이 맹렬히 타고 있고, 정면의 다리는 막히면서 이젠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우회로는 없나?”
“다리를 건너는 것 아니면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막 방향을 돌리던 헤네티들은 그새 뒤쪽에서 추격해 오고 있는 황실군들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시로와 20여명의 가디언들이 두 장을 겹친 방패를 쳐들고 그들의 퇴로와 골목들을 쾅 가로막고 섰다.
“쏴!”
가디언들 뒤를 따라온 100명 넘는 보병들이 불 사이에 갇힌 헤네티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교단 제일의 최정예 전사들이지만 사방이 막힌 상태에서 쏟아지는 수백 발의 집중사격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다리 건너에서도 뭐가 날아옵니다!”
누군가의 고함과 동시에, 이번엔 다리 건너편에서 불꽃 하나가 빙빙 돌며 날아와 기병들 중간에 뚝 떨어졌다. 사방으로 확 퍼지는 인화물질과 불꽃에 놀란 말들이 날뛰고 부딪치며 가뜩이나 번잡한 길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리 건너편에서 계속 화염병이 날아들면서 그들이 피할 곳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젠장, 척후대 놈들은 안 싸우고 뭐 하는 거야!”
먼저 보낸 세 명의 척후대가 몰살당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부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쩌죠! 여단장님!”
헤네티들이 속속 쓰러지자 부장이 사카에게 다급히 물었다. 사카는 길을 막아선 황실군과 반대편에서 타고 있는 다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가디언들이 친 방패 뒤로 견고한 밀집대오의 보병들이 긴 창을 내밀고 ‘와 봐라’ 하는 듯 돌격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헤네티들이지만 좁고 양옆이 막힌 길목에서 저런 대오를 쉽사리 돌파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사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말을 버려! 없느니만 못하다!”
사카는 쏟아지는 사격 속에서 말을 방패삼아 안장에 달려있던 무기들을 허겁지겁 챙겼다. 그가 막 창을 챙긴 순간, 황실군의 볼트에 맞은 말의 목이 절반 뚝 잘려나가며 옆으로 맥없이 푹 쓰러졌다. 그의 맘이 점점 초조해져갔다.
“농수로를 도보로 건너서 퇴각해라! 3분대 남아서 뒤를 지키고!”
헤네티들은 내버린 말들을 장애물처럼 길 중간에 내버려둔 채 농수로로 일제히 달렸다. 마른 농수로 양옆은 깊이가 10척(3m)이 훨씬 넘는 수직의 옹벽이지만 평소의 헤네티들이라면 자유자재로 뛰어내리고 오를 수 있는 높이였다. 그들은 볼트에 쓰러진 동료들의 시체를 뒤에 남겨둔 채 불길과 집중 사격 속을 힘들게 빠져나가 둑 아래로 줄줄이 뛰어내렸다.
“도망간다! 가디언들이 뒤쫓아!”
시로와 네피를 선두로, 20여명의 가디언들이 시간을 벌기 위해 남아 있던 예닐곱 명의 헤네티들에게 무자비하게 돌진했다. 두 겹이나 댄 방패도 그들의 마우저 사격에 꽝꽝 소리를 내며 이곳저곳 부서져 날아갔지만 도끼를 휘두를 만큼 근접할 시간을 벌어주기에는 충분했다.
“이 재수 없는 놈들!”
네피가 쓰러진 헤네티의 목을 찍어 내던지며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불타는 건물 사이로 난 이 죽음의 대로엔 사격에 쓰러져 죽은 20명이 넘는 헤네티들과 수많은 말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농수로로 뛰어내린 60여명의 헤네티들도 건너편에서 자신들의 동료들이 아직 싸우고 있으리라는 기대가 크게 틀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조심해! 생각보다 적이 많다!”
둑을 뛰어내린 헤네티들의 머리 위로 건너편 옹벽 위와 건물에 숨은 자말의 황실군들이 총공격을 퍼부었다. 빠른 헤네티들은 쏟아지는 사격 사이를 바람같이 가로질러 농수로 바닥을 달렸지만 가장 큰 벽이 앞에 있었다.
“어딜 기어올라!”
볼트가 쏟아지는 농수로를 돌파해 막 옹벽 위로 뛰어올라 머리를 내밀려던 헤네티들 위로 미리 기다리던 가디언들의 칼날과 병사들의 볼트가 다시 꽂혔다. 대여섯의 헤네티들이 둑 위에 발도 디뎌보지 못한 채 머리가 부서져 농수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같은 시간, 마우저에 머리가 부서지고, 발목이 채여 둑 밑으로 떨어진 황실군 병사들도 속출했다. 양쪽 모두 목숨을 건 혈전이었다.
헤네티들이 둑 위로 미처 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남겨둔 헤네티들을 돌파하고 쫓아온 시로와 네피의 황실군들이 이번엔 반대편 둑 위에서 저승사자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제네르가 수로에 꼼짝없이 갇힌 헤네티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쏴!”
제아무리 날고기는 헤네티들이었지만 움푹한 농수로 바닥에 고립된 채 양쪽 둑 위에서 2백이 가까운 병사들이 양쪽에서 쏟아 붓는 사격 속에서 무사하기는 힘들었다.
“맙소사, 이건 학살이야!”
패닉에 빠진 헤네티 사관 하나가 눈앞에서 머리가 깨져 죽는 부하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처음에만 해도 100명에 가까웠던 헤네티들이 순수 가디언 부대도 아닌 보통의 황실군 2백에 몰살당한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죽어도 올라가서 죽어!”
사카가 반쯤 넋이 빠진 부장의 무릎과 어깨를 차례로 짓밟고 옹벽 위로 뛰어올랐다. 둑 위에 있던 가디언이 거대한 양손검을 힘껏 휘둘렀지만 그는 상대의 가슴 안쪽으로 눈 깜짝할 새 파고들어 갈비뼈 사이에 힘껏 칼을 박아 넣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둔해지기는 했지만 야전군의 초급 가디언 정도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딜 올라와!”
그는 옆에서 석궁을 겨누려는 병사의 머리를 마우저 한 방으로 공중에 흩어놓았다.
“따라와!”
쓰러진 가디언을 짓밟고 둑 위에 선 사카가 밑에 있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그때,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돌리던 그의 왼쪽 어깨를 무언가 강력한 것이 사정없이 때렸다.
“우읍!”
어깨에 볼트가 스친 사카의 몸이 옆으로 휙 돌았다. 그는 다친 어깨를 무릅쓰고 밑에서 올라오는 부장을 힘껏 끌어올렸다.
“올라와!”
상관의 부상에 당황한 부장이 휘청거리는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사카가 그를 확 밀어내며 거칠게 소리쳤다.
“병사들 올라올 자리를 벌어! 날 돌보지 말고!”
사카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이젠 올라올 병사들도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마른 수로에 갇힌 60여명의 헤네티들 중 절반 이상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고, 그 대부분은 둑을 기어오르다가 뒤에서 날아든 제네르 일행의 집중사격에 쓰러진 후였다. 뼈대만 남은 채 불타고 있는 다리 아래, 둑 밑은 싸움도 못 하고 죽고 쓰러진 헤네티 병사들의 무덤이 되어 있었고, 사카를 따라 둑을 올라온 건 열댓 명이 전부였다.
“도망가!!”
둑 위를 빼앗긴 자말의 황실군들이 허겁지겁 여기저기 건물 안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일단 올라온 이상, 정규군으로 헤네티들과 맞서는 건 바보짓이었다.
“저놈들 공격할까요?”
“안 돼, 일단 퇴각해. 어제 빼앗은 보루로 가.”
사카가 수로 건너편의 네피와 시로 일행들을 가리키며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백여 명의 헤네티 기병대 중 남은 건 그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여전히 사방에서 쏟아지는 사격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가디언들을 피해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기서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잡고 있어! 자말!”
다리 건너편에 있던 제네르가 할룩스에 대고 악을 썼다. 적을 쫓으려면 다리를 건너야 했지만 자말이 붙여놓은 불이 이번엔 앞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 있었다.
“빨리 불 꺼! 시가전에서 저런 놈 하나라도 남으면 우리 병사 열 명이 죽는다!”
적이 도망치는 모습에 맘이 급해진 제네르가 직접 간이소화기를 들고 나가 다리 위에 뿌려댔지만 연료를 잔뜩 뿌려 붙인 불은 쉽사리 꺼지지도 않았다. 불꽃 사이사이로, 도망치는 사카의 헤네티들과 그 뒤를 쫓는 자말의 부대원들 모습이 보이다 말다 했다.
보다 못한 네피와 시로, 가디언들이 다리를 포기하고 농수로로 뛰어내려 그들 뒤를 쫓았다.
“헉, 헉.”
불을 끄는 것을 포기한 제네르가 소화기를 내던지고 멍한 얼굴로 적이 달아나는 서쪽을 응시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백여 명에 가까운 헤네티 부대를 거의 전멸시켰다는 데 흥분한 장병들은 서로 끌어안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고, 아직 분이 덜 풀린 병사들은 농수로 아래 쓰러져 있는 적 시체에 엄한 볼트를 쏘아대며 마지막 분노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가 이겼다.”
제네르가 그을음으로 더러워진 얼굴을 대충 닦아내며 대답했다.
“수고들 했다.”
제네르는 분노에 차 시체에 계속 볼트를 쏴 대고 있는 한 병사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사실 승리라고는 해도 이쪽 피해가 더 컸다. 3백의 선발대 중 절반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고, 서쪽 보루에서는 아예 백 명이 넘게 주둔하던 진지 전체가 저들의 손에 아예 전멸을 당한 터였다.
“어쨌든 우리가 이겼다.”
제네르는 사관이 가져온 작은 깃발을 창 끝에 매 땅에 푹 내리꽂았다. 그리고는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사이비들의 손에서 이곳을 구원하신 카렐 대제께 영광을!”
쉰 목소리로 내지르는 제네르의 고함과 뒤이어진 병사들의 함성이 잿빛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시가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리고 승전을 알리기 위해 미리 준비해 온 작은 신호용 로켓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흐릿한 하늘을 수놓는 파란 불꽃이 주변의 부대들에 시가지의 승리를 의기양양하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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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긴데 자르기가 애매해서 한 편에 다 실어버렸습니다. 일부러 짧게 자르는 분들도 있다지만 편수 늘리기는 싫거든요. ^^;;
다음편에 나올 사에나의 쿨~한 전투(?)도 좀 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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