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08화 (903/1,132)

< -- 908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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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 다르잖아!”

코나는 손이 묶인 채 울부짖는 류한 경의 턱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가리 찢기 전에 닥치고 있어.”

코나에게 얻어맞은 류한은 불에 그슬린 측벽 구석에 사정없이 처박히며 비명을 질렀지만 옥수수밭 중간의 이 버려진 농가에 그를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눈앞엔 목에 칼이 꽂히고 머리가 부서진 경호원 2명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뭘 봐? 내 분명 딸년 연락 받아서 이리로 오게 하라고 했지?”

코나가 작은 전투망치로 그의 정수리를 똑똑 두드리며 으르렁거렸다. 표정이라고는 저세상에 두고 온 것 같은 그 무뚝뚝한 인상에 류한은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제발, 어떻게 딸을 내 입으로 함정에 빠지게 하겠소, 제발 날 이대로 잡아가고 딸애는 보내주시오.”

“함정?”

코나가 망치를 번쩍 쳐드는 모습에 류한이 비명을 지르며 납작 엎드렸다. 이그나토 가 기병으로 위장한 십여 명의 보안국 요원들을 농가에 매복시켜놓고 그를 미끼로 테나스까지 이곳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류한이 딸에게서 온 연락을 못 받겠다고 우기면서 결국 이렇게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테나스 그년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다.”

하는 수 없어진 코나는 사에나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저기 봐요, 남부 놈들 도망쳐 오는데요? 우와, 개미떼 같다.”

무너진 지붕 틈새로 머리를 빠끔히 내밀고 주변을 감시하던 자이납이 시가지 쪽 지평선을 가리켰다. 황실군과 대치하던 이그나토 가 병사들이 불탄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자신들의 원래 숙영지가 있는 남쪽으로 떼를 지어 몰려가고 있고, 그보다 조금 멀리에는 그 뒤를 쫓는 베아트릭스의 황실 기병대도 희미하게 보였다.

“그래도 8천은 안 되어 보이는데요? 그 반도 안 되려나? 다들 어디 갔지?”

“내일이면 쭈그렁 할망구가 된다는데 너라면 여기 계속 있고 싶겠냐?”

“하긴, 그러면 학장님이 눈길도 안 주실 텐데.”

“못 살아.”

자이납의 말도 안 되는 혼잣말에 우베가 짜증스레 눈을 흘겼다. 그가 뭐라 하건, 자이납은 계속 혼자 떠들었다.

“저놈들 전투 벌여서 잡아 죽이려면 시간 오부지게 걸렸을 텐데. 아우, 저놈의 징글징글한 남부보병들. 근데, 칼 한 번 안 쓰고 끝나니 이거 뭔가 허전하긴 하네.”

“말이 씨 되니 쓸데없는 소리 좀 마요.”

우베가 버럭 성을 돋웠다.

둘이 평소처럼 그렇게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창고 중간에 놓인 류한의 할룩스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우베가 얼른 다가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코나를 돌아보았다.

“어, 테나스 그 여자가 또…….”

뭐라 말하려던 우베의 턱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몸을 날려 우베의 얼굴을 머리로 힘껏 들이받은 류한이 턱으로 할룩스의 수신 버튼을 얼른 눌렀다.

“여기 옥수수밭 중간의 농가…….”

“이씨!”

류한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코나의 망치가 기계를 박살을 내버렸다.

“망할 새끼!”

코나가 겁에 질린 류한의 머리를 사정없이 걷어차고는 뒷덜미를 움켜쥐고 허겁지겁 창고 밖으로 나갔다.

“도망가! 위치가 발각된 것 같다!”

“예?”

매복해 있던 보안국 요원들도 농가 구석에 매 놓았던 말을 허겁지겁 끌어냈다. 이그나토 가 패잔병 무리가 눈으로도 빤히 보이는 거리에 있으니 당장 도망쳐야 했다.

“저기, 서쪽에 누가 와요!”

자이납의 비명에 코나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도망치는 적 패잔병 무리에 섞여 있던 이그나토 가 근위기병 수십이 방향을 휙 돌려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 있는 무장은 화려한 갑주 모양새로 보아 테나스가 분명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다. 코나는 기절한 류한을 안장 앞에 걸쳐놓고 말에 황급히 뛰어올랐다.

“따라와!”

코나를 선두로 우베와 자이납, 남부기병으로 위장한 보안국 요원 십여 명이 황실군이 오고 있는 북쪽으로 허겁지겁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저놈들이다!”

아버지를 납치해 도망가는 코나 일행을 발견한 테나스가 무거운 마갑까지 바닥에 떨구고는 말에 속도를 붙여 필사적으로 뒤를 쫓아왔다. 반면 사람 둘을 실어 짐이 무거워진 코나의 말은 조금씩 뒤로 처져갔다. 우베가 기병대에 황급히 구원을 청했지만 아직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차라리 그 새끼 죽여서 내버리세요!”

급해진 자이납이 코나에게 악을 썼지만 코나는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국장님께 생포하라 명을 받았으니 죽기 직전까진 지킨다.”

“아휴! 답답하긴!”

그 사이에도 테나스는 계속 간격을 좁혀왔다. 보다 못한 자이납이 보안국 요원들과 함께 창을 빼들고 휙 돌아서며 코나에게 계속 가라고 손짓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저년 잡으면 돼요?”

자이납이 창을 곧추세우고는 돌격해오는 테나스를 향해 마주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련한 테나스도 시간을 끌려는 빤한 수작에 휘말릴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뒤따라오던 기병들에게 자이납을 맡기고는 근위기병 한 명만 거느리고 옆으로 살짝 우회해 계속 코나를 노리고 쫓았다.

“어!”

테나스를 놓친 자이납이 말을 돌리려 했지만 그의 근위병들이 무더기로 달려들어 채 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황실의 개 같은 놈!”

계속 말을 달리던 코나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바싹 조여 온 테나스의 창끝이 등 뒤에서 섬뜩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별 수 없군.”

코나는 하는 수 없이 단검을 뽑아들었다. 뒤늦게라도 류한의 숨통을 끊어 내버리려던 그는 뒤따라오던 테나스의 근위기병이 던진 창에 말이 휘청거리면서 순간 중심을 잃었다.

“아악!”

비틀거리는 말을 추스르려던 코나는 무언가가 등 뒤를 찢어발기는 것 같은 끔찍한 충격에 손에 쥔 칼과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테나스가 던진 창에 옆구리 뒤를 맞은 코나는 류한의 숨통을 미처 끊지 못한 채 검은 재가 시커멓게 쌓인 밭 위에 붕 날아가 동댕이쳐졌다.

“대장!”

함께 달리던 우베가 급히 말을 돌려 석궁으로 테나스의 얼굴에 한 발을 당겼다. 그렇지만 군단장을 겨눈 석궁을 본 근위기병이 방패를 들고 재빨리 그 앞에 끼어들었다.

“우아악!”

방패 모서리를 스쳐 날아온 볼트에 옆 머리를 얻어맞은 근위병이 말 옆으로 휙 밀려나 바닥에 머리부터 사정없이 꽂혔다. 그렇지만 제일 무서운 적은 아직 남아있었다. 우베가 테나스도 마저 쏘려 했지만 그 재빠른 무장은 쓰러지는 부하를 피해 번개처럼 말을 돌렸다. 테나스가 재빨리 움직인 탓에 우베가 쏜 볼트는 뒷덜미를 쌕 소리를 내고 빗나가 버렸다.

“쪼끄만 놈이 어딜!”

흥분한 테나스가 재빨리 방향을 돌려 이번엔 그에게 돌진해왔다.

“으엑!”

기회를 놓친 우베는 말에 있던 방패로 앞을 가렸지만 노련한 테나스의 창끝을 그의 서툰 싸움 실력으로 버티기는 무리였다. 육중한 기병창이 그의 자그만 몸뚱이를 말 등에서 사정없이 밀어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우욱!”

어깨와 가슴에 큰 충격을 받은 우베는 비명을 지르며 잿빛 흙더미 위에 나뒹굴었다.

“아버지!”

적들을 모두 쓰러뜨린 테나스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 류한 쪽으로 급히 말을 둘렸다. 코나와 함께 말에서 떨어져 흙투성이가 된 류한이 딸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쳐들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테나스는 칼을 빼들고는 아버지의 몸을 묶어놓은 포승을 단칼에 잘라냈다.

“저 말에 타요! 빨리요!”

테나스가 아버지에게 근위기병이 탔던 빈 말을 가리켰다. 아직 정신이 얼떨떨한 류한은 아무 생각 없이 딸이 시키는 대로 빈 말로 향했다. 그때, 그의 발치에 근위기병이 떨어뜨린 칼이 차였다.

“잠깐.”

류한이 칼을 번쩍 집어 들고는 등에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코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조금 전 그를 납치하고 이곳까지 끌고 와 모욕을 준 자였다.

“이 황실 개년부터 난도질하고 나서.”

류한은 희미하게 숨이 붙어 신음하는 코나를 발로 힘껏 걷어찼다.

“네년 못생긴 그 쌍판대기부터 재수가 없었어, 씨발.”

류한이 칼을 번쩍 쳐들었다. 피를 많이 흘린 코나의 의식이 희미했지만 버둥거릴 만큼의 힘은 남아 있었다.

“욱!”

류한이 목을 노리고 서툴게 내리친 칼이 코나의 어깨를 깊숙이 베어내고 땅바닥에 푹 꽂혔다.

“이거 재밌는데!”

솟구치는 피를 보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친 류한은 땅에 박힌 칼을 다시 힘껏 빼내 이번엔 코나의 입을 겨냥하고 내리찍었다.

“빌어먹을 낯짝 걸레를 만들어주마!”

나름 회심의 일격을 노리고 칼을 힘껏 내리찍으려던 류한의 오른팔이 갑자기 뒤로 휙 넘어갔다. 멍해진 그가 다시 팔을 추슬렀을 때, 그곳에선 칼을 쥐었던 손목이 무언가에 관통되어 절반 잘려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아, 아아악!”

피가 솟구치는 손목을 움켜쥐고 몸부림치며 쓰러지는 아버지의 모습에 테나스가 얼른 칼을 쥐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등 뒤?”

그가 뒤로 휙 돌아섰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말 그대로 번개처럼 달려오고 있는 백마와 그 위에 앉은 검은 제복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씨이!”

공포를 억지로 쫓아낸 테나스가 방패를 쥐고 말 뒤의 예비용 창을 쳐들었다.

“직급 떼고 싸워보자!”

그가 악을 쓰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명예롭게 싸우자는데 설마 비겁하게 쏠 거냐!”

사실 중갑옷에 투구, 창과 방패까지 제대로 갖춘 상태에서 갑옷 쪼가리 비슷한 것도 없는 상대에게 일기투를 청하는 것부터가 비겁하다 못해 치졸한 짓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네 가문 이름에 먹칠하고 싶지 않으면!”

그는 명문가 출신 사에나를 의도적으로 도발하며 말에 최대한 속도를 붙였다.

“그러신가.”

사에나가 석궁을 내리고 오른손에 장검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중무장을 하고 깔아뭉갤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테나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상대가 자신의 도발에 걸려들었다고 판단한 테나스는 방패로 가슴을 가리고 표적의 가슴을 겨누었다.

사에나는 오른손에 칼을 든 채 상대가 코앞까지 올 때까지 자리에서 꿈쩍도 않았다.

굳어 있는 사에나를 향해 힘차게 창을 내밀려던 테나스의 고개가 강력한 반동에 뒤로 휙 꺾였다.

“악!”

사에나 옆을 휙 스쳐간 테나스의 말은 평소에 훈련받은 대로 주인을 실은 채 몇 발짝 더 달린 후 상대를 향해 또각또각 돌아섰다. 그렇지만 그 위에 앉은 주인은 조금 전의 그 상태가 아니었다.

“하악.”

테나스의 박살난 스코프 렌즈 조각 사이로 붉은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에나가 쏜 볼트가 갑주에서 유일하게 노출된 눈구멍과 스코프를 관통해 왼쪽 눈에 꽂혀 있었다. 치명상을 입은 테나스가 힘겨운 숨을 몰아쉬며 말 위에서 파르르 떨었다.

“명예는 개뿔.”

사에나는 왼손에 든 석궁을 다시 장전했다.

전두엽이 부서지고 판단력을 잃은 테나스는 몸에 밴 본능대로 창을 들고 말의 박차를 가하며 맹렬히 돌격했지만 그건 그저 그의 상상 속 이미지였다. 제3자가 본 그는 마치 좀비처럼 오른쪽 눈을 크게 뜨고는 흐느적거리며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너 맘에 드네.”

짧은 한 마디와 동시에 사에나가 두 번째 볼트를 날렸다. 이번에도 제대로 명중당한 테나스의 몸이 뒤로 확 밀려나 말 뒤로 굴러 떨어졌다. 오른쪽 눈을 꿰뚫은 볼트에 숨골까지 완전히 부서져 이제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사에나는 쓰러진 적을 확인사살하지도, 짧은 동정이나 연민 따위도 전혀 주지 않은 채 무심히 휙 돌아섰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사에나는 테나스의 시체를 내버려둔 채 코나가 쓰러져 있던 쪽으로 말을 몰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코나가 그를 향해 억지로 고개를 들었지만 곧 힘없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사에나는 분노와 걱정으로 파랗게 질린 얼굴을 무표정함으로 포장하고 급히 말을 달려 그에게 다가갔다.

“이 꼴이 대체 뭐야!”

사에나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쓰러진 코나의 앞에 꿇어앉았다. 등과 어깨에 중상을 입은 코나가 힘겹게 손을 들어 사에나의 뺨을 만져주는 것으로 반가움을 대신했다.

“옷 더러워져.”

뺨이 벤 코나의 어눌한 발음에 사에나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네가 다시 만들면 되지.”

사에나가 평소 목숨처럼 아끼던 코트를 급히 벗어 코나의 몸에 감싸주었다. 그리고는 피로 젖은 그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춰주었다. 코나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팔 낫고 나서.”

코나가 그를 차갑게 밀어냈다.

“저 빌어먹을 새끼 놓치면 안 만들어 줘.”

코나가 눈동자를 슬쩍 움직였다. 손목을 크게 다쳐 쓰러졌던 류한이 비틀거리며 빈 말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저놈이.”

사에나가 후다닥 달려가서는 도망치는 류한의 뒷덜미를 덥석 붙들고는 바닥에 사정없이 동댕이쳤다. 불타 쓰러진 옥수수와 검은 재로 범벅이 된 땅 위에 쓰러진 류한이 버둥거리며 사에나에게 저항하려 했지만 이 잔인한 보안국장의 손아귀가 턱을 붙든 채 놔주지 않았다.

“널 왜 살려두라고 했었는지 아나?”

“제발…….”

“네 어미 손에 죽게 하려고 했는데, 이제 맘이 바뀌었어.”

사에나의 손이 그의 턱을 꽉 눌러 억지로 입을 벌려놓았다. 류한이 뭉개진 발음으로 계속 버둥거렸다.

“전 그저 수족일 뿐이라고요!”

“그걸 누가 모르나? 우린 마구스 이름들도 다 알아.”

“그거 말고 황실 내각에 말입니다!”

류한의 목을 비틀려던 사에나의 손이 멈칫거렸다. 그는 캑캑거리는 류한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차갑게 속삭였다.

“누군지 말할 생각이 없다면 하나마나한 소리라는 건 알겠지?”

“전 정말로…….”

사에나는 공포에 질린 이 남자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수십 년간 닳고 닳은 경험에서, 그는 이 남자가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떠들고 있다는 것을 읽어냈다.  지금의 이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놓고 거래를 할 마지막 패를 남겨둘 만큼의 판단력도 이미 잃은 상태였다.

“정말이에요! 이름은 몰라도 누가 있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고요! 바에자 그분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고요!”

“바에자?”

사에나가 혀를 찼다.

“예! 그 단발머리 한 여자 현신 말입니다! 제가 나흘 전에 들었다고요! 그분이 여기 사령관입니다!”

“그 여잔 내 손에 옛날에 죽었거든?”

사에나가 혀를 끌끌 찼다. 사에나는 검은 재로 범벅이 된 흙을 한 움큼 집어 그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숨이 막힌 류한이 버둥거렸지만 사에나는 그의 가슴팍을 무릎으로 꽉 누른 채 이를 드러냈다.

“더 말할 거 없으면 넌 쓸모가 다했어.”

류한은 정말로 더 이상 아는 내용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사에나가 다시 흙 한 움큼을 사정없이 넣고는 턱을 꽉 물렸다. 입과 목구멍에 흙이 가득 들어차 숨을 쉴 수가 없어진 류한이 거친 신음소리를 내며 팔을 휘저었다.

“네 패거리가 뿌려놓은 재나 실컷 쳐 먹고 그냥 지금 뒈져.”

사에나가 몸부림치는 류한의 코에 다시 검은 흙을 확 밀어넣고 입을 손으로 꽉 막았다. 목구멍과 코에 들어찬 검은 흙을 뱉어내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던 류한의 저항도 결국 조금씩 약해져갔다. 그리고 손목이 잘린 채 휘두르던 그의 팔도 맥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사에나는 그제야 제후 행세를 하려 했던 이 남자의 가슴 위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사에나가 숨을 씩씩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였다. 교단을 등에 업고 어머니 제후를 몰아내 가문을 장악하려 했던 부녀(父女)는 이제 검은 재로 범벅이 된 땅 위에 흉측한 몰골로 쓰러져 야속하게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코나?”

중상을 입은 코나의 상태가 그새 더 나빠진 모습에 당황한 사에나는 그와 우베를 황급히 말에 싣고 자리를 떠났다. 류한과 테나스 부녀의 시체도 가져가야 했지만 당장은 산 사람을 살리는 게 중요했다.

사에나에게서 이그나토 가까지 사실상 무너뜨렸다는 연락을 받은 페로는 이제 승전이 거의 손 안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제후와 군단장을 모두 잃은 이그나토 가 1군단의 군단장 대리는 ‘진짜 제후’인 마자리크에게 충성하겠다며 군단기(旗)를 보내 왔고, 그들을 쫓아낸 베아트릭스의 기병대는 전열을 정비해 이젠 서쪽을 위협하는 근위대 잔여병력을 무찌르러 갈 참이었다.

나름 자신감을 얻은 그는 카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려 여러 수단을 동원해 보았지만 어제부터 그랬던 것처럼 카렐은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통한 끝에 그가 어렵게 전해들은 건 ‘황상께선 심한 발작 이후 이틀째 혼수상태에 빠져 계신다.’는 루스탐의 답변뿐이었다. 내심 카렐에게 멋지게 승전을 알리고 뽐내고 싶었던 페로로서는 숨이 탁 막히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맘이 되어버린 페로에게 이번엔 또 청천벽력 같은 소식까지 전해졌다.

“정상의 지열발전소가 텅텅 비었습니다.”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가디언 킵이 할룩스 너머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보고를 올렸다. 이 충성스런 가디언도 적 보급대와 정상의 적 사령부를 치라며 마자리크 부대와 함께 보냈던 터였다.

“무슨 소리냐?”

발끈한 페로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왜 그걸 이제야 알려!”

“용서하십시오, 산 윗부분은 검은 재 농도가 짙어서 통신이 되지 않아 산자락까지 달려서 내려오느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킵이 당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놈들의 족적을 분석한 결과 2루트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간 것 같습니다. 그놈들도 그 길을 이미 알고 있던 게 분명합니다.”

“젠장! 혹시 모르니 양쪽 길 다 확인하면서 올라가라고 했잖아!”

“말씀하신 대로 제2루트엔 10명 정도의 정찰대를 보내고 본대는 1루트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새벽의 전투에서 보급대 놈들이 워낙 극렬하게 저항해 본대의 전진이 늦어진 사이에 놈들이 도주를 결정한 것 같습니다. 정찰대는 통신도 끊긴 상태에서 우리보다 앞서갔다가 퇴각하던 그들과 만나 전멸한 것으로 보입니다.”

킵이 나름 침착하게 설명했지만 페로는 다 잡은 완승의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족적을 분석해 보니 도망친 자들은 약 2백 안쪽의 보병인 것 같습니다. 사령부에 있던 놈들이니 어쩌면 헤네티일지도 모릅니다.”

“빌어먹을! 막판에 이게 뭐야!”

페로가 무기를 챙겨들고 헐레벌떡 일어섰다.

“사령부에 남은 병력이 얼마냐!”

“전투요원은 경비중대 3백과 각하께서 데려오신 가디언 50명이 전부입니다.”

“됐어, 비전투원들 무기 들려서 세워놓고 경비부대하고 가디언들 다 불러내.”

그는 투구와 무기를 허겁지겁 챙겨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긴, 사령관끼리 싸우는 것도 제격이지.”

페로는 애써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붉은 애마에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제위전쟁 직후, 카렐이 직접 만들어 선물해 준 전투용 투구의 눈구멍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지금 맞서야 할 상대, 적 사령관이 누군지, 어떻게 싸우는 자인지도 아직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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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정상 예정일보다 하루 일찍 올립니다.

이번 파트도 이제 마지막 한두 편만 남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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