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11화 (906/1,132)

< -- 911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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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거긴 또 왜 올라갔어!”

어둠이 드리운 타리프 카파키 신관의 묘석 앞에 꽃을 꽂던 아지드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기겁을 했다. 잠깐 한눈을 판 새 그 개구쟁이 꼬마가 이미 타리프의 큰 석상에 기어올라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빨리 내려오지 못해! 오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아지드가 석상을 올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좌대까지 합쳐 거의 3층 높이의 석상이라 자칫 떨어지기라도 했다가는 크게 다칠 판이었지만 이 비쩍 마르고 자그만 꼬마는 엄마의 호통을 못 들은 척, 석상의 어깨에 목마를 타고 앉아 두 팔을 번쩍 들며 환호성을 올렸다.

“이번엔 꼭대기에요~ 저번엔 허리밖에 못 올라왔었는데.”

“너 빨리…….”

“우와, 묘지가 다 보여, 엄마.”

딸의 딴청에 아지드의 열불통이 확 타올랐다. 4척(120cm)도 한참 못 되는 저 땅콩만한 키로 대체 어떻게 저기까지 기어 올라간 건지 도무지 알 수도 없었다.

저 천방지축 8살 꼬마는 마을 밖에 나왔다 하면 도무지 단속이 되지를 않았다. 무언가 신기한 것이라도 봤다가는 무조건 손을 대거나 넋을 놓고 졸졸 쫓아가 길을 잃기가 일쑤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짜고짜 아는 척을 하고 오지랖 넓게 구는 통에 저러다 유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한시도 맘을 놓을 수가 없었다.

“너 안 내려오면 토로 아저씨 부른다?”

엄마의 최후통첩이 다행히 이번엔 약발이 먹혔다. 이 꼬마의 특기인 애교 작전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세상 유일한 철벽이 있다면 길거리 바윗덩이보다도 더 무뚝뚝한 ‘토로 아저씨’였다. 꼬마 오르마즈는 그제야 투덜투덜거리며 타리프의 어깨에서 내려와 몸통과 다리를 끌어안고 죽 미끄러져 내려왔다.

“옷 더러워진 꼴 좀 봐.”

아지드는 석상의 먼지를 온통 쓸어내고 내려온 딸의 시커먼 셔츠 자락을 털어주며 짜증을 냈다.

“히이.”

아이가 이번엔 앞니를 드러내며 눈웃음을 지었다. 얼굴에 살집이 워낙 없다보니 반짝거리는 무지개빛 눈만 주먹만하게 커 보였다.

아지드가 다시 성을 냈다.

“이분 만나려고 일부러 지은 옷인데 이게 대체 뭐야.”

“내가 먼지 닦아줘서 좋아하실 거야.”

딸의 능청스런 대꾸에 아지드가 눈을 흘겼다.

“돌아가면 네가 책임지고 빨아. 알았지?”

아지드가 딸의 콧잔등을 톡톡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 누구보다 힘들게 얻어 키운 아이지만 그는 무작정 오냐오냐하며 아이를 버릇없게 키우는 엄마는 아니었다.

“날도 추운데 빨리 돌아가자.”

아지드는 타리프의 묘석과 석상을 마지막으로 올려보고는 딸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석상을 돌아보았다.

“하긴……생전에 널 목마 태워줄 수 있었다면 정말 기뻐하셨겠지.”

“응?”

“아니다. 가자.”

아지드는 딸의 손을 잡고 묘소를 나섰다.

고향행성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죽을 때의 소원처럼, 탐험가 차림새로 이곳을 수십 년 지켜 온 타리프의 석상은 멀어지는 모녀의 뒷모습을 오늘도 소리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끝내셨나요?”

카파키 가문 묘지 출입문 부근을 서성거리며 망을 보던 토로 로버넬 상등병이 얼른 주변을 확인하고는 직원들이 드나드는 쪽문을 열어주었다.

“빨리 나오세요.”

“추운데 고생했어요, 로버넬 군. 매번 고마워요.”

아지드가 소중한 저녁 시간을 내 준 이 젊은 청년에게 말로나마 감사를 표했다.

모녀가 이렇게 가문 묘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시간은 문이 닫히고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긴 저녁때뿐이었다. 종장 빌루이가 사람들 눈이 있는 낮에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덕분에 아지드가 딸을 데리고 ‘가문의 정체성’을 가르쳐줄 수 있는 때는 묘지에 드나들기 어딘지 이상해 보이는 밤시간 뿐이었다.

“알아보니 주르반 부근으로 가는 차가 8시에 있더군요. 읍내 터미널까지는 태워다드리죠.”

토로가 허름한 군용 화물차 짐칸을 가리켰다. 운전석이 달랑 하나뿐이라 모녀가 앉을 곳은 짐칸 뿐이었다. 아지드는 낮에 시장에서 산 물건 보따리를 옆에 치워놓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어후, 추워.”

짐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아지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름철이긴 해도 코윈의 저녁 날씨는 여전히 혹독했다.

“감기 걸리겠다.”

아지드는 뒤따라 올라탄 딸을 망토 안에 꼭 안아주었다. 아이의 움푹 여윈 뺨과 코는 맹추위에 빨갛게 변해 있었다.

“출발합니다.”

토로가 모는 차는 덜컹거리는 도로를 따라 가까운 읍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오르가 엄마 품에 웅크린 채 말했다.

“조금만 더 이따가 돌아가면 안 돼? 시내엔 구경할 것도 많고 사람도 많은데.”

“동생들이 기다리잖아.”

‘동생들’이라는 말에 오르마즈도 더 이상은 조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아지드도 집에 남아있을 다른 아이들 생각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투르케스크의 아이를 낳고픈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오르마즈만 적당히 키워놓은 후 교단에 자수해 기꺼이 참수대의 도끼를 감수할 참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소원도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투르케스크는 어느 날 절반 술에 취한 채 불쑥 찾아와 강제로 관계를 맺은 후 ‘부부의 도리’에 관해 밤새 잠도 안 재우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괴롭힌 후에야 돌아갔고, 아지드가 자신의 임신 사실, 남편이 몰래 배란유도제를 먹였다는 사실을 안 건 그때부터 몇 달이 지나 배가 불러올 무렵이었다.

아지드에게는 처음으로 생긴 친자식이었지만 그는 며칠을 이불 속에 파묻혀 울기만 했었다. 그 남자는 필요할 때 불쑥 찾아와 욕구만 풀고 돌아가거나 아이를 더 가지라며 윽박지르기만 할 뿐 넉넉한 돈을 가져다주지도, 아버지로서 아이들을 한 번 제대로 돌봐주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제니안에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많이 둘수록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모양이었다. 남에게 인정받는 데 굶주린 투르케스크는 첫딸을 얻은 후 갑자기 달라진 주변의 대우에 고무되어 자식을 더 많이 얻는 데 집착하게 된 것 같았다.

덕분에 그는 아이를 셋 둔 훌륭한 아버지로 인정받아 제니안에서 중간 간부로까지 올랐지만 말단 교사였을 때나, 중간 간부가 된 후나 식솔들에게 주는 돈이 거의 없기는 매한가지라 아지드에겐 달라질 것도 없었다.

따져보면 재벌 가문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란 투르케스크에게 제니안에서 주는 푼돈이 부족한 것도 당연했다. 그에게 제일 우선순위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풍류를 논하며 통 크고 대범한 남자로 인정받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서원을 넓히는 것이었고, 혹시나 남는 돈이 있어도 그 다음 순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너그러운 성인처럼 인정받는 일이 또 남아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자존심만을 위해 사는 동안, 정작 식솔들은 친구는 물론이고 생판 모르는 불우이웃만큼의 대우도 받지 못했다.

결국 가문에서도, 아버지에게서도 버림받은 아이들은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엄마와 강가에 나가 살을 에는 강물에 작고 여린 손발을 담그고 사금조각을 모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달 산사태로 사금장과 광산까지 한동안 폐쇄당하면서 아지드도 하는 수 없이 이렇게 시내와 산골마을을 오가는 보따리 장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 배고파, 엄마.”

“…….”

“아까 닭튀김이라는 거 진짜 맛있겠더라.”

아지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생전 닭튀김을 먹어 본 일도 없는 이 아이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더 꼭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낮의 시장에서 본 형형색색의 음식들은 종일 콩깻묵으로 만든 떡 몇 조각밖에 못 먹은 8살 아이에게도, 음식들을 넋 놓고 쳐다보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끌어야 했던 엄마에게도 고문에 가까웠다.

다행히 맘씨 좋은 시장 아저씨가 ‘나도 이런 예쁜 딸 하나 있으면 좋겠네.’라며 과자 한 움큼을 집어준 덕분에 오후는 넘길 수 있었지만 이젠 돌아가는 길에 배고픈 아이를 달래주는 게 문제였다.

어린 오르마즈는 허기를 참기 어려운지 계속 칭얼거렸다.

“앞집 아줌마가 나보고 굶어서 작은 거래.”

‘미안하다, 얘야.’

아지드는 이런 대답을 하고 싶은 맘을 꾹 눌러 참았다. 사실 8살의 오르마즈는 또래보다 작아도 너무 작았다. 정말 제대로 못 먹여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아이의 몸은 작년부터는 아예 자라지도 않고 있었다. 또래의 아이들과 딸을 비교해 볼 때마다 아지드의 속은 ‘내가 제대로 못 먹여 저런가.’라는 자책감에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살이라도 베어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몸이 작다는 것과 특별한 눈동자 색을 빼면 오르마즈가 유별난 건 없었다. 교단 학자들이 그의 유전자를 특별 격리시킨 명분이었던 ‘타고난 살인마’ 혹은 ‘사이코패스’ 같은 단어와 이 아이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이는 사람들을 너무 좋아했고, 웃음이 헤퍼 탈이었다. 책은 좋아해도 공부는 지독히도 싫어해서 아이를 직접 가르쳐야 하는 엄마의 속을 팍팍 썩였지만 매번 ‘창조적인’ 땡땡이거리를 짜내어 엄마를 귀신같이 속이는 것을 보아 분명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타리프는 그의 친아버지가 X였을 거라고 적어놓았지만 아직은 몸이 너무 작아서인지 특별히 힘이 센 것 같지도 않았다.

“키는 곧 자랄 거야. 엄마는 알아.”

아지드가 다시 딸을 안아주었다. 타리프의 일지에서도 그레이오팔들이 어릴 때 한동안 성장이 정지되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훌쩍 자란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 아이도 그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 언제인지?’였다. 아이의 성장 문제로 고민을 하던 아지드는 카히나 때에 그랬던 것처럼 혹시 엄마가 죽어야 아이가 크는 게 아닐까 하는 소름끼치는 상상을 하며 혼자 몸서리를 치기도 했었다.

그때, 아이의 배에서 꼬르륵 하고 소리가 다시 울렸다. 무안해진 아지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달 이따가 쿠트라스 가면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거기 꼭 가야 돼?”

아지드는 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꼬마가 이번엔 왠지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신의 간택’은 콜로니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삶의 중대한 단계였다.

“괜찮아, 그냥 성직자님들이 얼굴 한 번 보고 보내줄 거야. 너한테는 관심 없을 거야.”

“옆집 오빠가 그러는데 거기서 특별한 아이로 뽑히면 이마에 무슨 보석을 박는대. 그거 되면 무지 좋은 거라고 하던데?”

아지드가 씁쓸하게 웃으며 한때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던 자신의 이마를 더듬었다. 그가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고 ‘다하카르의 간택자’로 뽑혀 성직자가 될 자격을 얻었을 때도 집안에서는 가문을 빛낼 큰 인물이 났다며 큰 잔치까지 벌였던 터였다.

“엄마, 나 그거 되면 엄마도 좋아? 나도 돼 볼까?”

어린 오르가 큰 무지개빛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철없이 물었다.

“네가 되고 싶다고 되는 거 아냐. 그리고 안 되어도 엄마는 좋아.”

아지드는 ‘절대 되어선 안 돼.’라는 말을 최대한 에둘러서 표현했다.

오르마즈가 간택장에서 쓸데없이 관심을 끄는 게 자살행위라는 것을 아는 아지드는 그 중요한 단계를 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아니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치밀하게 준비를 해 오고 있었다. 오르마즈의 출생등록서상의 이름은 콜로니에서 제일 흔해빠진 ‘아프라시아’였고, 생년월일도 엉뚱하게 적어놓은 터였다.

그는 사전조사를 나온 관리에게 지난달 사태로 물에 빠져 죽은 7살 여자아이의 머리카락과 상피세포를 딸의 것과 바꿔치기해 넘겨주었고, 아이가 둔해 읽고 쓸 줄도 모르고 숫자도 읽을 줄 모른다고 적어냈었다. 그가 오늘 시장에서 산 물건들을 팔아 벌게 될 돈도 간택에서 아이 눈에 씌울 칼라렌즈 사는 데 쓸 참이었다.

“그냥 엄마하고 여행 갔다 오는 거야. 걱정할 것 없어. 알았지?”

“응.”

꼬마 오르는 다시 아지드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빠는 안 가지?”

“아빠도 갔으면 좋겠니?”

“싫어.”

딸은 딱 한 마디로 모든 대답을 끝내버렸다. 아지드는 딸의 반응에 좋아해야 할지 아닐지 혼돈스러웠다. 그는 투르케스크의 꼴도 보기 싫었지만 때 묻지 않은 아이들까지도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비뚤어 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최소한 아이들 앞에서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처럼 연기를 했지만 이 눈치 빠른 맏딸은 어찌 알았는지 아버지가 올 때마다 집에서 휙 나가 들어오지 않곤 했다.

“어쩌다 아빠가 본체보다도 한참 못난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아지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기록에 남은 투르케스크의 본체 ‘사제 투르’는 훌륭한 남자였다. 그는 토벌대의 가혹한 고문에도 한동안 저항했던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고, 자신이 고문에 굴복한 때문에 동료들이 몰살당했다는 말에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까지 내버린 사람이었다.

“하지만 넌 카히나처럼……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해질 거야. ……오르?”

아지드는 품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딸을 얼른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낮 동안 피곤했는지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그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토로가 터미널 앞에 차를 세워주었다. 사실 말이 터미널이지 코윈 곳곳으로 가는 화물차, 승합차 기사들이 약간의 푼돈을 받고 태울 사람을 찾으러 모여드는 작은 광장에 불과했다. 아지드와 막 잠에서 깨어 비몽사몽인 오르마즈도 낮에 산 물건들이 담긴 봇짐을 짊어지고 일어섰다.

“잠깐만 여기 계세요.”

그 무뚝뚝한 청년은 모녀를 놔둔 채 터미널 옆의 허름한 시장으로 후다닥 모습을 감추었다.

토로가 다시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는 봇짐을 등에 메고 기다리던 어린 오르에게 기름종이로 둘둘 말린 무언가를 불쑥 내밀고는 아무 말도 없이 차에 올라탔다.

“점호 때문에 전 빨리 들어가 봐야 합니다. 부인. 저 앞의 빨간색 화물차 타시면 됩니다.”

청년 토로는 뭐라 다른 말도 할 새 없이 차에 훌쩍 올라타고는 바로 멀어져갔다.

“엄마, 이것 봐.”

멍하니 서 있던 오르가 엄마에게 봉투를 펼쳐 보였다. 둘둘 말린 기름종이 안에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뜨거운 통닭 튀김이 싸여있었다.

터미널에서 돈을 주고 얻어 탄 화물차는 아지드 모녀를 아랫마을까지만 데려다주고는 돌아가 버렸다.

아지드가 주르반 마을에 처음 왔던, 말 그대로 오지였던 때에 비하면 주변지역은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이젠 아랫마을까지 도로도 뚫렸고, 이곳 주인인 카파키 가의 막대한 부와 번영을 상징하는 황금과 광물이 매일매일 비포장도로를 타고 먼 시내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수익성 좋은 대형 광산도, 도로도 없는 주르반 마을은 여전히 문명권 밖이었다.

깎아지른 바위절벽을 빙빙 돌아 주르반 마을까지 올라가는 이 고산 루트는 산소도 희박한데다가 워낙 좁고 가팔라서 낙석이나 산사태는 일상이었고, 짐과 어린아이를 노리는 흉측한 강도 무리가 있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어오곤 했다.

모녀가 오르는 산길 옆으로도 바닥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이어지고 있었다. 허리에 밧줄을 매고 앞장선 아지드는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좁고 험한 길을 조심조심 올라갔다.

“엉뚱한 데 디디지 말고 잘 따라와. 어두워서 잘못 밟으면 큰일 나.”

집채만한 봇짐을 멘 아지드가 뒤따라오는 딸을 연신 돌아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몸뚱이 두 배는 됨직한 아이의 봇짐이 가뜩이나 작은 키를 꾹꾹 누르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러워 보였다.

“응. 엄마도 조심해.”

어린 오르마즈는 엄마와 이어진 밧줄을 꼭 쥐고 가쁘게 숨을 할딱거리며 뒤를 졸졸 따라왔다.

“후우.”

딸의 가쁜 숨소리에 맘이 불편해진 아지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8살짜리가 엄마를 돕겠다며 힘든 보따리 장사에 매번 함께 나서주는 것이 기특하기는 했지만 도회지에서라면 아직 엄마 품에서 어리광이나 부려야 할 나이에 학교 문턱도 못 가보고 이런 고된 일을 시키는 것이 죄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사실 이곳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이미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다. 어릴 때는 바로 밑의 동생을 돌보고, 그 동생이 더 어린 동생을 돌볼 때면 그때부터는 밖에서 동생들을 위해 돈을 벌어오는 것이 이곳 아이들의 꿀벌 같은 삶이었다. 지금 오르의 짐 속에도 집에서 혼자 갓난 막내를 지키고 있을 동생 일라드에게 줄 큼직한 통닭 다리가 보물처럼 들어있었다.

“힘들면 짐 엄마 줘. 엄마 껀 가벼워.”

“고짓말 마. 엄마 꺼엔 보리하고 콩도 들었잖아. 내 껀 옷밖에 없는데.”

“엄만 힘 세.”

“나도 이젠 세. 나중엔 내가 엄마보다 더 세질 거야. 봐봐.”

어린 오르가 갑자기 후다닥 뛰어 앞서가자 아지드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 아이가 다 컸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일지 혼자 상상해 보는 것도 그에겐 큰 낙이었다.

“그래, 그런 날이 꼭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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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한대로, 이번 편부터 새로운 파트, [어머니와 딸들]이 시작됩니다.

파트 제목과 시작은 훈훈합니다. ^^

덧 : 다음주 금요일 저녁 10시에 팬카페 채팅방에서 온라인 정팅이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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