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13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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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그 몸으로 불려오다니. 내가 자넬 걱정해 줘야겠는걸.”
카렐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니사에게 물었다. 얼마 전 수나 마구스와 함께 트라에타오나 교단의 지하시설을 탈출하려다가 입은 크고 작은 부상이 아직 그의 온몸에 널려 있었다. 덕분에 지난 며칠간 ‘한때 직장이었던’ 내의원에 환자로 누워 있어야 했다.
“미천한 제 부상 따위가 문제겠습니까.”
수나의 죽음을 떠올려서인지, 니사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수장을 잃었는데, 요즘 하마타 분위기는 어떤가?”
“어차피 지금까지도 신관들이 그럭저럭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새로운 수장께서 빨리 운명을 받아들여 주기를 고대하고 있긴 하지만요.”
“코리온 리쿠 학장을 당장 바꾸긴 쉽지 않을 게야. 내가 애써 볼 테니 한동안은 자네가 트라카 교단을 이끌어 주게나. 그리고 에아 교단은…….”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자 니사는 바로 그의 의도를 읽어냈다.
“에아 교단 쪽은 새 현신을 맞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내부에서 잠시 논란이 있었지만 이젠 합의가 끝난 모양이에요. 이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으니까요.”
“자리만 마련해 주면 내 사에나 쉐너 경을 에아 교단에 보내줄 테니 자네가 연락을 해 둬. 수나는 갔지만 새 마구스를 받았으니 하마타에 큰 경사 아닌가.”
“감사합니다.”
“아참, 자넬 다시 내 주치의로 삼았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안 한다고 버티면 꽁꽁 묶어놓으라고 보안국에 명령했는데.”
“환자 신분으로 내의원하고 내명부 사람들과 인사는 했어요. 덕분에 재밌는 농담도 많이 듣고 왔고요.”
“농담? 예를 들어?”
“폐하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제일 기뻐하는 게 비빈들일지 모른다고요.”
“허어, 비빈들이 내 장례식날 뒷간에서 웃을 준비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길 빌겠네.”
혀를 차고 있는 황제에게 니사가 장난스레 대답했다.
“이젠 밤중에 다른 비빈 침소에도 잠깐 다녀오시라고 애원할 일이 없어졌잖아요.”
“풋.”
퀭해진 카렐의 얼굴에 짧게 웃음이 감돌았다. 니사가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 덧붙였다.
“한번 불 붙으면 브레이크를 못 잡으시는데 비빈들도 밤마다 폐하 억지로 진정시키기 좀 미안하셨겠어요? 차라리 그냥…….”
“이런. 그댄 여자면서도 여자 맘을 모르는군. 그런다고 정말 다녀왔다가는 내 얼굴에 황궁대로 10차선 날걸.”
“흠흠.”
옆에서 듣기 민망해진 루스탐이 헛기침을 했고 자이납이 ‘저한테도 불 붙는 거 시범 좀 보여주시지’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니사 덕분에 제대로 웃은 카렐은 돈을 뜯기고는 뚱해진 얼굴로 서 있는 루스탐과 자이납에게서 한 무더기의 서류부터 넘겨받았다.
“그런데 왜 자네 혼자 돌아왔나? 코나하고 우베는?”
카렐이 멀뚱하니 서 있던 자이납에게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 안에 보시면 알아요.”
자이납이 보고서를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누군 시라즈 별궁 병실에서 뜨개질하면서 짝지하고 눈꼴 시리게 노닥거리고 있는데 전 이게 뭐냐고요.”
카렐이 이번엔 루스탐에게 물었다.
“그럼 베흔은?”
“아라무트로 갔습니다. 준비하는 내내 툴툴대긴 했지만 가긴 가던걸요.”
“풋. 그럴 줄 알았지.”
카렐이 피식 웃었다. 아라무트의 ‘영감님’을 만나 오르마즈의 시체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는 말에 펄쩍 뛰며 이리저리 뺄 변명만 늘어놓더니 카렐의 발작을 보고 나서는 결국 자진해 떠난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3, 4일 연락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카렐은 남 일처럼 무덤덤하게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그는 호드르 산의 승전 보고와 아들 카이의 공훈에 짧게 웃었고, 페로의 부상이 적힌 보고서에서는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나 페로를 쓰러뜨린 것이 적 마구스 바에자라는 부분에서는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잠깐, 적 마구스 바에자 그자가 살아있었다니? 폭발한 발전소 안에 있었다고 보고하지 않았더냐?”
카렐이 성난 얼굴로 자이납에게 따져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땐 분명 증인들도 여럿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가 도망치는 걸 본 사람은 분명 아무도 없었어요. 쉐너 국장이 엉뚱한 사람을 잘못 봤던 걸까요?”
“어쨌든 발전소 잔해가 이제 우리 손에 들어왔으니 거길 샅샅이 조사해라. 그 안의 시체라는 시체는 다 모아 신원을 확인해. 적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마구스인데 생사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돼.”
황제의 성난 표정에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던 자이납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어, 시체가 아리까리한 게 그 여자 하나뿐만은 아닌데요.”
“무슨 소리냐.”
“사에나 국장이 석궁으로 양 눈을 쏴 죽인 그 뭐냐, 테나스인가 여자 말이에요. 아비인 류한 이그나토의 시체는 발견했는데 그 여자 시체도 감쪽같이 없어졌어요. 저하고 쉐너 국장이 부상자를 챙기느라 잠깐 자릴 비운 사이에 휭 하고 사라졌어요.”
“죽였다며? 그 여자가 무슨 좀비냐?”
어처구니없어하는 황제에게 자이납이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아, 아뇨, 그 말이 아니고요……주변에 발자국이 많이 나 있었어요. 남부제후군 패잔병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판국이라 언놈이 비까번쩍 갑옷하고 장비가 탐나서 가져간 건지도 모르겠어요.”
“미치겠군.”
뭐라 화를 내려던 카렐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일단 성질을 죽이기로 했다.
난처해진 자이납을 대신해 루스탐이 얼른 나섰다.
“그나저나, 총리의 부상이 심해 제국 총회까지 정무에 복귀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일단은 서열에 따라 부총리 이브라힘 경이 정무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카렐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브라힘 경도 물론 잘 하지만 하필 이 중요한 때에…….”
카렐은 이브라힘 경의 서명이 되어 있는 서류들이 눈에 거슬리는지 몇 번이나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도 황제령의 전통 명문 가우라 가 출신으로 전사단 시절부터 카렐 편에 있었고, 재무장관을 거쳐 부총리까지 오른 오랜 충복이고 유능한 경제전문가였다. 하지만 카렐에겐 누군가가 페로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부터가 도무지 맘에 들지를 않았다.
카렐은 그 부분을 넘기고 다음 부분을 확인해 나갔다. 그렇게 하나하나 서류를 확인해가던 카렐의 손은 마지막에 놓인 작은 편지봉투에서 딱 멈추었다.
“이건 무어냐.”
카렐의 물음에 루스탐이 얼른 나섰다.
“아참, 그건 지난번 만나셨던 교단의 광산 지배인 이디나입니다. 인편으로 치안군 부대에 보내 온 쪽지입니다. 열지는 않았습니다.”
카렐은 잘 봉인된 편지봉투를 뜯고 안에 든 쪽지를 꺼내보았다. 노트 한 장을 찢어내 급히 쓴 듯한 쪽지엔 지난번 ‘아버지의 수하’들이 카렐을 폭행한 일에 대한 간곡한 사과와 함께 이번엔 자신이 직접 정한 은밀한 곳에서 꼭 한번만 다시 만나면 좋겠다는 내용이 함께 들어있었다.
“것 봐, 내 이럴 거라고 했지.”
카렐은 예상이 적중했다는 데 만족한 듯 쪽지를 흔들며 짧게 웃었다.
“폐하께 아주 많이…… 반한 것 같습니다.”
루스탐이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편지를 전한 자에게 뭐라고 답변했냐?”
“지난번 폭행으로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고 했답니다.”
“잘했다.”
카렐은 편지지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엔 ‘쿠트라스 99번 컴플렉스 1번 도크’라고 쓰여 있고 날짜는 겨우 이틀 후였다.
“99번? 옛날 군납 조선소인데?”
카렐이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지금은요?”
“세나우스 3세 오넬론 황제가 죽은 프리깃을 건조했던 곳이라서 영구 폐쇄되었지. 저들이 아직도 비밀리에 종종 쓰고 있는 걸로 추정되지만.”
낯빛이 창백해진 루스탐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폐하, 점점 위험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엔 그나마 마스터 케스난이 운영하는 바였지만 이번엔 완전히 저들의 입 안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지난번 어렵게 구한 타리프의 일지 2권도 아직 읽어볼 기회를 못 가졌군. 지금이라도 봐야겠어.”
황제가 딴소리를 하자 애가 탄 루스탐이 다시 걱정을 드러냈다.
“폐하, 제국회의도 이제 열흘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놈들의 진짜 머리를 찾아내 밟아버려야지.”
카렐이 의자를 짚고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고작 광산 지배인 따위가 뭘 알겠습니까.”
“나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었는데.”
카렐이 창가로 다가가 밤 풍경을 내다보았다.
“그런데……그 여자……이상해. 뭔가 달라. 보통 사람과 분명히 다르다. 내 예측이 맞는다면 평범한 지배인이 절대 아냐.”
“예? 무슨 예측이요?”
루스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카렐은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분명히 느낌이 이상하다. 그 여자를 꼭 다시 만나야 해.”
“저어…….”
옆에서 듣고만 있던 니사가 불쑥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방금 이디나라고 하셨습니까?”
“왜, 아는 사람인가?”
카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분명 어딘지 들어본 이름 같아서요. 10년이 넘게 억류되어 있었더니 그 이전에 그냥 스친 기억들은 영…….”
니사가 억지로 기억을 뒤지는 듯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궁금하시면 교단 동료들에게 알아보겠습니다.”
“걱정 말게나. 나와 함께 다니다보면 기억이 되살아날 테니까.”
“예? 제가요?”
“그래, 안 그래도 코나하고 우베가 빠져서 사람이 좀 필요해. 내가 언제 또 거품 물고 자빠질지 모르는데 그땐 자네가 구해줘야 할 것 아닌가.”
카렐이 니사의 얼굴을 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대 입을 막고 있던 윗사람이 떠났고, 새 윗사람은 자리를 거부하고 있으니 이제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 아닌가? 나와 함께 다니면 앞으로 해 줄 말이 많을 게야.”
카렐은 니사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자이납과 루스탐에게 짐을 챙기라고 손짓했다.
“준비들 해. 밀리타하고 사로잡은 하페즈 그년도 만나볼 겸 시라즈 별궁 가서 하루 쉬고 북부로 가야겠다.”
“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서 돌아가셨단다.”
이디나는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나도 아버지한테 화났어요.’라는 말을 억지로 꾹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꼭 너 때문은 아니지만.”
이디나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의 독한 향수 냄새와 저질스러운 장식품들, 천박하고 생기 없는 분위기를 이전부터 혐오했었다.
“간만에 왔는데 이거나 마시렴.”
이디나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붉은 포도주잔을 말없이 받아들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데 자잘한 곳에서 계속 불협화음이 나고 있으니 아버지가 그러시는 것도 뭐 당연하지.”
“그 ‘불협화음’엔 어머니도 한몫 하셨죠.”
이디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곧 반응이 돌아왔다.
“킴메리 그년은 죽어 마땅했어.”
조금 전의 침착한 목소리와는 달리, 이번 목소리는 약간 격했다. 이디나는 비로소 고개를 천천히 들고 마주서 있는 원숙한 여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니 좀 세련되어지시라고요. 이 하렘에서 모멸 안 당하고 살아남으시려면.”
“그런 얘기를 너한테 다 듣다니, 정말 스타일을 바꾸긴 해야 하는가보다.”
안락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여인이 이디나에게 장난스레 대답했다. 통통하게 살집이 좀 오르기는 했어도 제법 균형이 잡힌 몸매에 윤기가 반짝이는 긴 흑발, 서글서글한 이목구비의 제법 미인이었다. 다만 요란스런 화장과 천박스런 장신구 덕분에 어딘지 싼 티가 나 보이는 것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맨날 그러고만 계시니 그 어린 꼬맹이한테 ‘창녀’소리까지 들었지요.”
이디나가 여자에게 다시 짜증을 냈다.
“오호, 그래서 네가 이 어미의 복수를 대신 해 준 거라? 고마워서 눈물 나겠구나. 네 야심으로 오빠하고 여동생을 죽여 놓고 이제와 어미한테 책임을 넘기다니, 역시 위대한 현신의 혈통답네.”
여자가 잔뜩 비꼬았지만 적의가 있어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마구스 자녀들이 적자생존이었던 건 오랜 전통이라고요. 저야 어차피 동생들을 다 죽여도 이상할 건 없어요. 하지만 대놓고 그 둘을 지목하고 방법까지 알려준 건 어머니였잖아요?”
“알았으니까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이 엄마 곁에 앉아 봐. 간만에 딸 얼굴 좀 제대로 보자.”
여자가 옆 소파를 툭툭 두드렸다. 한 손에 잔을 든 이디나는 어머니가 권한 자리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숨막히듯 갑갑한 하렘의 방 안을 새삼 빙 둘러보았다. 화장실에 욕실 하나가 딸린 정사각의 작은 침실 겸 응접실이 위대한 현신의 첩이고 그의 어머니인 ‘나키아’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아버지가 언제 이 깡통방에서 내보내 준대요?”
“글쎄다.”
나키아가 구두 한 짝을 벗어 벽에 휙 던지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빌어먹을, 이 따위 주사위만한 방이라니, 자식까지 낳은 여자한테 해도 너무하시지.”
“솔직히 어머니도 이런 데 처박혀 살면서 온전한 정신 유지하긴 힘들겠네요.”
이디나가 처음으로 맞장구를 치며 어머니와 눈을 맞추었다. 그는 살집이 두둑한 어머니의 손등을 한 번 꼭 잡아주었다.
“명색이 장녀의 어머니한테 2홀이라니.”
이 방의 문밖에는 똑같은 방 수십 개가 원형의 홀을 중앙에 두고 그 안의 주인들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홀을 나가면 다시 [자녀를 둔 여자들]이 사는 1홀과 [자녀가 없는 여자들]이 사는 2홀, 그리고 [자녀들]의 공간인 3홀이 이 ‘대신관 하렘’의 삼각 평면 꼭지점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긴, 10년 넘게 아랫도리 거미줄 치고 사는 년한테 2홀도 과하지 뭐.”
술기운이 오른 나키아가 자괴감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장녀 이디나를 낳았으니 그도 당연히 훨씬 크고 시설도 좋은 1홀에 있어야 했지만 남편의 관심 밖으로 완전히 밀려나버린 상황에서 하렘의 먹이사슬은 가혹했다.
“10년 만에 네 아버지가 드시길래 잠깐이나마 이 어미도 16살 소녀가 됐지 뭐냐. 가슴이 콩닥거리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는데 고작 잔소리나 하고 그냥 나가시니 벽하고 천장이 죄다 노랗게 보이더구나. 이거야, 원 헛물 제대로 켰지.”
나키아가 킬킬거리며 딸의 빈 와인잔에 다시 포도주를 담아주려 했다. 하지만 이디나는 굳은 얼굴로 잔을 치우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거 말고……데킬라 아네호 혹시 없어요?”
“데킬라?”
딸의 말에 나키아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구나. 이 고상하다 못해 지루해 빠진 하렘에 들어오고 나선 말이야.”
“와인은 이제 너무 싱거워서…….”
“그놈이 네게 권했던 술이라지?”
이디나가 눈을 흘겼다. 나키아가 그런 딸에게 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왜,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천박한 인상이어도 나름 미녀인 어머니와 누가 봐도 못생긴 딸의 얼굴은 언뜻 보아서는 과연 피를 받은 것이 맞을까 싶을 만큼 딴판이었지만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만은 혈통을 속일 수가 없었다.
“놀랄 것 없어. 네 아버지가 나한테 대판 화를 내고 가면서 알려준 거니까. 네가 생판 모르는 놈한테 독한 데킬라를 받아서 멋모르고 냉큼냉큼 마셨다면서.”
“맨날 독주나 끼고 사시면서 뜬금없이 남 타령은.”
이디나가 대놓고 콧방귀를 끼었다.
“네가 독주를 마신 것도 모자라서 그 듣도 보도 못한 잡놈하고 아주 뜨겁게 입을 맞추고 살까지 섞자고 들이댔다지? 이런 기특한 것 같으니.”
나키아가 딸의 뺨을 만져주며 싱글벙글 웃었다.
“덕분에 여기 들어오다가 야투 박사를 만났어요.”
순간 어머니 나키아의 웃던 표정이 싹 굳어버렸다.
“내 피를 뽑아가더군요. 내가 아버지 혈통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나 봐요.”
“전부터 그런 얘기는 맨날 들었어. 장녀를 낳은걸 시기하는 하렘 잡년들이었지만.”
나키아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이번엔 또 왜냐? 네가 아버지를 너무 안 닮아서? 아니면 현신의 자식이 일반인 잡놈한테 빠진 게 믿어지지를 않아서?”
“둘 다겠죠, 뭐.”
“그래, 까짓 거, 기분도 그지 같은데 나도 보물창고 좀 풀어야겠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나키아는 밀실 한쪽에 숨겨놓았던 황금색 병을 꺼내와 딸의 잔에 부어 주었다. 어머니의 데킬라를 본 이디나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우리 엄마 솜씨도 좋으셔라. 이건 또 언제 숨겨서 들여오셨대요?”
“너도 그렇겠지만 엄마도 웃을 기분 아냐.”
나키아는 남편 아스탈이 딸을 검사하려 했다는 말에 기분이 단단히 상한 듯 데킬라 몇 모금을 연거푸 들이켰다.
“이디나, 너도 이젠 정신 차리긴 해야겠다. 장녀 자리를 굳히려면 어떻게든 아버지하고 가까워져야지 그깟 잡놈한테 정신 팔려서 남을 게 뭐 있니.”
“제후군 장교니 잡놈은 아니거든요. 우리 신도고 아프라시아라는 멀쩡한 이름도 있다고요. 아버지는 제 머리 올려 줄 것도 아니시면서 왜 훼방만 놓고 다니신대요?”
이디나도 병을 받아 어머니의 잔에 데킬라를 부어주었다. 나키아가 황금빛 잔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며 혼자 킬킬거렸다.
“내가 먹긴 싫고, 남 주긴 아까운 게 어디 한둘이니?”
“쳇, 아빠만 그런 줄 알아요? 솔직히 나도 아버지에게는 안기고 싶지 않다고요.”
“허어. 너도 나 닮아서 이제 갈수록 태산이구나.”
나키아가 딸에게 눈을 슬쩍 흘겼다. 대신관 자녀가 대신관에게 안기거나, 최소한 사랑을 받는 건 성년의 상징이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보니 자녀들의 애정 싸움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별난 딸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는 별반 집착을 보이지 않았었다.
“아버지한테는 미안하지만.”
이디나가 빈 잔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 장교의 품이 아버지보다 훨씬 좋아요. 내일모레 다시 보기로 했다고요.”
“이런. 현신의 혈통이 천박한 보통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다니, 나라도 네 핏줄 의심하고 싶겠다.”
나키아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싫어하는 딸을 억지로 설득하려 하지도, 딸의 ‘별난 취향’을 나무라지도 않았다.
이디나가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엄마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근데, 나 아빠 딸 정말 맞아요? 왜 천한 보통 인간한테 맘이 갈까요?”
“너까지 왜 그러니? 싸구려 댄서였을 땐 별의별 남자 다 안았었지만 여기 오고서는 네 아버지 하나만 보고 살았어. 내 딸한테까지 의심을 받아야겠니?”
나키아가 버럭 신경질을 냈다. 이디나는 흥분한 엄마의 손등을 토닥이며 일단 돌아앉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목 잘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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