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14화 (909/1,132)

< -- 914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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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일은 어떠니? 광산은 잘 되어가고?”

아버지 이야기에 시무룩해진 딸의 모습에 나키아도 얼른 주제를 돌렸다.

“제련소가 곧 완공되어요. 거기 제대로 돌아가면 여기도 자주 못 와요.”

“후훗, 귀엽고 기특한 내 딸 같으니.”

나키아가 딸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지만 이디나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제 일만 잘 돌아가면 뭐 하나요. 아버지가 하는 일마다 죽을 쑤고 계신데.”

“아버지가 못난 게 아니고 황제가 잘난 거지, 이전 황제들은 모두 손에 갖고 노신 분이야.”

“지금껏 수백 년을 갖고 놀아서 뭐 하냐고요, 아직도 이렇게 ‘지하세력’ 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데. 그렇게 우유부단하시니 아직까지도 황제를 못 꺾고 계시죠.”

“너라면 어쨌을 것 같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황제부터 죽였죠. 잔딕 따위에 기대서 미련하게 오늘내일 달력 보며 기우제나 지내고 있느니.”

이디나가 살기어린 눈을 번득이며 음산하게 웃었다. 나키아가 막나가는 딸의 태도에 적당히 브레이크를 걸었다.

“멀리서 보기엔 다 될 것처럼 쉬워보여도 막상 그 자리에 오르면 나름의 고충이 있는 법이란다.”

“아버지는 항상 타협과 장고를 거치다가 제일 나쁜 악수를 두니 탈이죠. 호드르 산에서 난리 피운 것도 쓸모없는 짓이었다고요. 저라면…….”

이디나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꾹 참으며 어머니가 부어 준 데킬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 불만이 많으면서 어떻게 아직까지 입을 꾹 다물고 참아왔는지 신통하구나.”

나키아가 잔뜩 굳어있는 딸의 뺨을 살짝 꼬집고는 빈 잔에 다시 데킬라를 부어주었다.

“어쨌든 황제부터 무조건 죽여야 돼요.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이디나가 황금색 잔을 보며 눈에 살기를 번득였다.

“황제를 본 일이나 있니?”

“셔틀 위에서 먼발치로요.”

이디나는 셔틀에서 위 보았던 황제의 크고 당당한 체구와 인상 깊은 눈빛을 떠올리며 손에 든 데킬라 잔을 빙빙 흔들었다. 좋은 감정인지, 나쁜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대가 적의 수괴인 황제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얼굴과 가슴을 만져보고 싶은 맘이 들 정도로 잠시나마 그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터였다.

“그때 보고 나서 정말로 꼭 죽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다졌죠.”

“넌 태어나기 전이라 모르겠지만, 옛날에 ‘등급 없는 가디언’이 세간에서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 알면 그런 얘기 함부로 못 할 거다.”

“인정해요, 황제는 아버지보다 훨씬 강한 인상이었어요. 하지만 난 황제를 전혀 안 무서워해요. 그게 아버지와 내 차이점이죠.”

이디나가 다리를 꼬고 앉아 남은 데킬라를 훌쩍 들이켰다.

“아버지는 지하세계의 룰과 타성에 너무 젖어버렸어요. 이젠 아예 눈이 퇴화되어서 밝은 세상에는 못 나가는 두더지가 되어버렸죠. 세상을 호령했던 야푸르 할아버지 시대의 기상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 같아요.”

나키아는 눈꼬리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딸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딸이 무섭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딸의 마지막 한 마디가 이런 그의 느낌을 확인해 주었다.

“어쩌면…… 아버지에겐 신이 애당초 안 깃들었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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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을 맞은 콜로니 아이들 모두를 대상으로 간택자를 뽑는 이번 행사는 아이의 미래 운명이 절반은 결정되는 만큼 아이 자신은 물론이고 부모들에게도 떨리고 긴장된 순간이었다.

오늘은 이마 489년, 이후 시대 연호로는 기원 원년 5월에 태어난 아이들이 각자 교구의 중앙 신전에 모여 이 운명적인 의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콜로니가 ‘현신의 발밑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원칙으로 통치되는 만큼, 신의 간택이 ‘우월한 인간’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간택자의 공식적인 특권은 성직자가 될 권리 하나일 뿐, 간택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은 어느 학교든 들어갈 수도, 성직을 제외한 어느 지위에도 오를 수 있었다. 심지어 신학교를 졸업해 신학자가 되는 것도 가능했고 교리청의 종교재판관, 교단 행정청, 크바르나 부대 같은 교단 내 비(非) 성직조직에 들어가는 데도 간택 여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의 간택에 사람들이 그리 집착하는 건 ‘비공식적인 특권’ 때문이었다. 간택을 받았다는 건 우수한 유전자와 훌륭한 지능, 학습능력이라는 밑바탕을 갖췄다는 상징이다 보니 남들보다 좋은 직장을 얻거나 출세하기 훨씬 유리했고, 훌륭한 배우자감으로도 손꼽혔다. 심지어 델루지나 카파키 같은 대 명문가에선 직계의 사위나 며느리로는 오직 간택자만을 들이는 불문율을 고집하고 있기까지 했다.

현실이 그렇다보니 간택자를 뽑는 이 날, 쿠트라스의 대성당에 모인 수많은 가족들은 하나같이 전장에라도 출정하는 듯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들이었다. 심사를 담당하는 성직자들에게 잘 보이려 최고로 비싸고 좋은 옷을 빼입은 정도는 기본이었고, 혈색이 좋아 보이려 화장을 하거나 키가 조금이라도 커 보이려 굽 높은 신발을 신는 경우도 흔했다.

그 와중에 허름한 차림새에 재활용 옷을 손질해 기워 입고 온 초라한 차림새의 코윈 출신 모녀는 도리어 눈에 더 튈 정도였다.

“것 봐, 내가 볼 거 많다고 했지.”

“응.”

태어나 이렇게 많은 사람을 처음 본 꼬마 오르는 쿠트라스 대성당 앞의 큰 광장을 두리번거리며 이번에도 넋이 빠져 있었다. 너른 광장엔 오늘 심사를 받을 아이들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가족들까지 총출동해 수천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제발 아무나 넋 놓고 졸졸 따라가지 말고 엄마 손 놓치지 마. 잃어버리면 찾지도 못하잖아.”

“알았어, 엄마.”

아지드는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행여 아이를 놓칠까 손을 꽉 쥐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확인했다. 지난번 강도를 만나 낫에 베인 손과 팔이 아직 온전치 않았지만 잔뜩 긴장한 오늘은 그마저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마주치는 사람을 하나라도 줄여보려 최대한 시간에 딱 맞춰 왔고, 차림새도 평상복 비슷하게 했지만 지금 보니 그건 도리어 실수였던 것 같았다.

“엄마, 나 무릎 아파.”

“또?”

아지드가 얼른 바닥에 쭈그려 앉아 딸의 무릎과 허벅지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괜찮아, 원래 그런 거야. 엄마손 약손이니까 나아질 거야.”

아지드는 말로는 짐짓 걱정하는 척 아이를 달래주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뛸 듯이 기쁜 맘이었다.

요즘 아이는 밤낮없이 팔다리가 아프다며 끙끙대곤 했다. 처음엔 아이가 꾀병을 부리는 것으로 오해했지만 어느 날 생각 없이 재어 본 아이의 키가 0.5촌(1.5cm) 가까이 훌쩍 커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통증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뼈와 관절, 근육이 서로 균형을 맞춰주지 못하고 아우성을 칠 만큼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빨리 크려고 하는 거니까 조금만 참아.”

“정말이지?”

명색이 의사인 엄마가 제대로 진단을 해 주었지만 아이는 몇 번을 들었으면서도 어딘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1년이나 요지부동 안 자라던 아이는 노상강도 사건이 있은 직후 갑자기 크기 시작해서 고작 한 달 새에 벌써 1촌 반(4.5cm)이 훌쩍 자라 있었다. 요즘 아지드에겐 매일 아침 문설주에 날짜와 아이의 키를 새겨 넣는 게 세상 최고의 낙이었다.

“친구들은 안 아프다던데.”

“친구들은 너처럼 이렇게 갑자기는 안 자라잖아.”

“나만 왜 그래?”

아이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계속 물었다.

“혹시 나 그날 닭튀김 먹어서 그런 거 아닐까?”

“푸훗.”

딸의 엉뚱한 추리에 아지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닭집 아이들은 다들 거인이게?”

엄마가 매일 똑같은 대답을 해 주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닭튀김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 제 딴에도 키가 자라는 게 좋기는 한지, 틈만 나면 싫다는 동생을 억지로 데리고 나가 산닭을 잡는다며 엉성한 그물을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흙투성이가 되어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쩌면 그레이오팔들은 무언가 큰 일을 겪고 나야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카히나도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후 갑자기 자랐다는 것을 떠올린 아지드가 딸의 아픈 무릎을 만져주며 이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걸을 수 있니? 시간이 다 됐는데.”

“응, 걸어 볼게.”

오르가 뒤뚱뒤뚱 다리를 절며 앞장섰다. 하지만 이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신전까지 가려면 한나절이 걸릴 것 같았다.

“이리 와. 엄마가 업어줄게.”

급해진 아지드는 퍽이나 오랜만에 딸을 등에 업어주었다. 허리에 느껴지는 아이의 몸무게가 이젠 제법 묵직했다. 알 수 없는 흐뭇함에 그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는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신전으로 힘을 내어 걸었다.

“엄마, 엄마. 근데 왜 난 렌즈를 껴야 돼?”

또다시 이어진 딸의 물음에 아지드의 말문이 팍 막혔다.

“눈 색깔이 다른 사람하고 다르면 성직자님들이 신기하다고 너 데려가서 이런저런 무서운 실험할 지도 모르잖아.”

아지드는 대충 진실에 걸맞는 대답을 해 주었다.

“내 눈이 그렇게 이상해? 난 잘 보이는데?”

아이는 철없이 눈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잊지 마, 네 이름은 오르마즈가 아니고 ‘아프라시아’야. 아프라시아 카파키. 알았지?”

“응. 근데 내 친구도 아프라시아가 둘이나 있는데.”

딸의 대답에 아지드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초대 대신관을 딴 ‘아프라시아’라는 이름은 워낙에 사방팔방 흔하다보니 모르긴 몰라도 오늘 심사대상 중에도 동명이인이 제법 있을 터였다. 아지드가 아이의 서류상 이름으로 택한 이유도 물론 그 때문이었다.

“빨리 가자, 늦으면 성직자님들한테 혼나.”

아지드는 등에 업힌 아이를 추켜올리며 신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아이들에게 단과자를 파는 잡상인들과 심지어 좋은 신께 간택받을 수 있게 해 준다는 부적을 하는 사이비 무당까지, 사람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오는 장사꾼들이 여지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신전의 성직자들과 헤네티들이 계속 쫓아내고 있지만 오늘 하루만은 부모들도 지갑을 여는 데 전혀 인색하지 않다보니 대목을 맞은 잡상인들도 필사적이었다.

눈과 코를 유혹하는 그 많은 과자들을 넋 놓고 쳐다보던 오르마즈가 갑자기 엄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엄마, 나도 단과자 하나만.”

“이 썩어.”

“딱 하나만, 엄마. 지난번에 맛있는 거 사준다고 약속했잖아.”

딸의 애원에 아지드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멈춰 섰다. 되짚어보니 밖에서 아이들 좋아하는 군것질 거리를 사 준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시계를 확인한 그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자.”

주머니를 뒤적거린 아지드는 5세겔 동전 한 개를 꺼내 딸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집에 돌아갈 걱정이 태산이지만 여기서까지 아이 앞에서 궁상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골라서 사와.”

“알았어. 엄마 것도 사올게.”

얼굴이 환해진 오르는 조금 전까지 다리가 아프다던 아이가 맞나 싶을 만큼 경쾌한 걸음으로 색색의 단과자가 진열된 좌판에 후다닥 달려갔다.

좌판으로 간 오르는 그 앞에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먹을 것이 너무 많아 그런가보다 하며 끈기 있게 기다린 아지드는 딸아이가 결국 빈손으로 털레털레 돌아오자 정색을 하며 물었다.

“왜? 맛있는 거 없어?”

“응, 맛 없어 보여. 그냥 가자.”

당장 울 듯한 표정의 오르마즈는 가져갔던 동전을 다시 엄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가, 엄마. 시간 없댔잖아.”

오르마즈가 자리에서 머뭇거리는 엄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좌판에서 단과자를 산 아이들이 내미는 돈이 수십 세겔이라는 것을 뒤늦게 본 아지드는 잠시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동전을 더 꺼내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가자. 엄마. 나 괜찮아. 정말이야.”

아지드는 딸아이의 손에 이끌려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맘만 같아서는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아이 먹고 싶어 하는 걸 다 사주고 싶지만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젠 좌판 쪽에는 짧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나 괜찮다니까, 엄마.”

아이가 신전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괜히 무거워진 기분 때문인지, 아이에게 지금 무언가를 사 주지 못한 것이 앞으로 영원히 큰 짐으로 남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아지드의 뇌리를 스쳤다.

아케메니안 신전, 남극성당과 함께 콜로니 3대 신전 중의 하나인 쿠트라스 신전 홀에는 오늘 간택심사를 받을 7백여명의 또래 아이들이 사뭇 긴장된 얼굴로 부모의 손을 잡고 모여 있었다. 오르마즈처럼 빈민가에서 온 아이들은 물론이고 겉보기에도 귀티가 흐르는 상류 집안의 아이들까지 모두 뒤섞여 각자의 번호표를 들고 이 묘하게 차가운 분위기 속에 서 있었다.

오늘은 평생에 단 한 번, 출신 신분과 배경을 떠나 순수한 그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받는 날이었다.

간택자를 뽑는 기준에 관해 세간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교단에서 관련된 일을 했던 아지드는 ‘사전 검사’에서 가져간 유전자와 설문지를 익명으로 검사한 결과로 절반쯤 결정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심사는 그곳에서 1차 가려진 아이들을 면접하고 그들 중 일부를 추려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의미였다.

보통 30명에 하나 정도 간택을 받으니 이곳에 모인 7백의 아이들 중 어느 교단이든 간택되어 이마에 보석을 박는 건 고작 20명 남짓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그 중에서도 양대 수장 교단인 다하카르나 트라카의 간택을 받는 건 모든 아이들의 꿈이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행운아는 한둘 정도나 나올 확률이었다.

“이 숫자가 불리면 엄마하고 나가면 돼.”

아지드가 오르마즈의 손에 쥐여진 ‘701’의 번호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단상에는 밖에서 볼 수 없도록 문이 달린 12개의 작은 부스가 죽 놓여있었다.

“하필 거의 꼴찌구나. 심사 내용도 꼴찌면 좋을 텐데.”

“응?”

“아냐, 아냐.”

아지드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간택장에서 차라리 꼴찌를 해야지.’라는 어머니의 이해 못 할 말을 몇 번이나 들은 오르에겐 새로운 내용도 아니었다.

“심사를 담당하실 신관님들께서 드십니다.”

종소리와 함께 견습 모간의 낭랑한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지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 꿇어앉았다. 보통 사람들이 서열 10위 이내의 고위 성직자인 ‘신관’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어린 오르마즈도 사람들이 하는 대로 별 생각 없이 자리에 꿇어앉았다.

“우와, 저 분들이 신관님들이야?”

“쉿.”

아지드는 호기심에 철없이 단상의 신관들을 빤히 올려보고 있는 딸의 고개를 얼른 숙이게 했다. 각각의 교단을 대표해 나온 12명의 신관들이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차례대로 나와 부스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엄마, 왜 그래?”

어린 오르는 맞쥔 엄마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는 것을 눈치 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지드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다시 슬쩍 고개를 든 그는 다하카르 교단을 대표해 나온 당당하고 큰 키의 남자 신관을 곁눈질하며 초조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냐, 아니겠지. 이젠 별 헛것이 다 보이네.”

일단 신관들이 자리를 잡은 후, 아이들이 번호표 순서대로 단상에 올라 각각의 부스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최고신 다하카르부터 제2신 트라카, 제3신 에아를 거쳐 마지막 바유 교단까지 12개의 부스를 모두 거치며 신관들에게 얼굴을 보였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말하는 심사 내용은 허무할 만큼 간단했다. 사전 검사 내용이 실린 두꺼운 파일을 펼쳐든 신관들은 아이의 얼굴과 혈색, 눈빛을 보고는 간단하게 뭐라 적어 넣고 다음 교단으로 가 보라며 무성의하게 손짓하는 것으로 끝이라고 했다. 더러 질문을 받거나 옷을 벗고 몸을 보자는 경우도 있어 부모들을 설레게 했지만 그저 짧은 흥분으로 끝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긴장감 속에 첫 환호성이 나온 건 에아 교단에 간택된 50번째 소년이었고, 뒤이어 각 교단에서 하나 둘씩 선택된 아이들이 가려져 나왔다. 그렇게 선택된 아이들은 바로 명부에 기록되었고, 이마에 영원히 남을 보석을 박기 위해 부모와 함께 신전 별관으로 안내되었다. 반면 탈락한 대다수의 아이들은 허탈함을 달래며 단상에서 내려와야 했다.

결과에 실망한 가족들 중 일부는 자리를 비웠고 사람들도 점점 줄면서 북적거렸던 홀 내부도 ‘누가 되는지 좀 보자’며 호기심에 남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조금씩 썰렁해져갔다.

그렇게 한나절 가까이 걸려 거의 끝 순번에 올 때까지 각 교단에서 적으면 하나, 많으면 셋까지 간택자가 나왔지만 사람들이 가장 소원하는 다하카르의 간택자는 어찌된 일인지 오늘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701번, 아프라시아 카파키.”

내내 가슴을 졸이고 있던 아지드가 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단상에 올랐다. 지금의 그는 8살 때, 바로 자신이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다하카르의 간택을 받았던 그날보다도 더 떨고 있었다. 글도 못 읽던 둔한 이웃 아이의 세포를 내고, 엉터리 설문지를 작성한 그의 꼼수가 통했다면 딸도 다른 아이들처럼 몇 초만에 12개 교단에서 모두 탈락해 이곳을 맘 편하게 나서게 될 터였다.

“엄마, 나 잘 할게.”

오르가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지드는 그런 기특한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첫 번째 부스로 향했다. 그리고는 다른 여느 아이들처럼 ‘가 봐라’라는 무성의한 손짓을 받으리라 기대하면서 조심스레 첫 번째 다하카르 교단의 부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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