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15화 (910/1,132)

< -- 915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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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번, 아프라시아 카파키.”

내내 가슴을 졸이고 있던 아지드가 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단상에 올랐다. 지금의 그는 8살 때, 바로 자신이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다하카르의 간택을 받았던 그날보다도 더 떨고 있었다. 글도 못 읽던 둔한 이웃 아이의 세포를 내고, 엉터리 설문지를 작성한 그의 꼼수가 통했다면 딸도 다른 아이들처럼 몇 초만에 12개 교단에서 모두 탈락해 이곳을 맘 편하게 나서게 될 터였다.

“엄마, 나 잘 할게.”

오르가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아지드는 그런 기특한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첫 번째 부스로 향했다. 그리고는 다른 여느 아이들처럼 ‘가 봐라’라는 무성의한 손짓을 받으리라 기대하면서 조심스레 첫 번째 다하카르 교단의 부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흐흡.”

신관 앞에서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려던 아지드가 순간 멈칫했다. 어딘지 익숙한 베르가못 향이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감추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오랜만이다, 아지드 비스 모간.”

굵고 중후한 목소리였다. 여자라면 누구나 설렐 만큼 매혹적인 음성이지만 지금의 아지드에겐 저승사자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8년 전 그때처럼, 그는 이번에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 그는 달아날 곳도 없었다.

공포에 질린 아지드는 실눈을 뜨고 부스 안쪽을 확인했다. 8년 전, 남극성당 앞 광장의 처형장에서 그가 어렵사리 따돌렸던 그 중년의 ‘여자 노점상 주인’이 어느새 나가는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대신관의 자녀 둘을 죽인 살인자를 코앞에서 놓친 이 암행(暗行) 요원이 8년 동안 이를 갈며 뒤를 쫓은 것이 분명했다.

“너희 모녀를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하겠지? 1회용 호신용 석궁 볼트엔 사용자 코드가 각인되어 있다는 걸 몰랐나 보더구나.”

“예?”

그제야 발각된 이유를 깨달은 아지드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자신의 멍청함에 머리를 쏘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길에서 발견된 변사체에 죽은 내 딸이 가지고 있던 석궁의 볼트가 꽂혀 있었으니 그거야말로 신의 뜻이 아니겠느냐.”

야푸르 대신관이 빈정거리며 무릎 위의 두툼한 파일을 탁 덮었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미리 조사를 안 했다면 넌지 알아보지도 못했겠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자리에 꿇어앉으려는 아지드에게 대신관이 그대로 있으라고 손짓했다.

“쉿. 가만히 있어.”

야푸르가 딸아이에게 손을 뻗는 모습에 잔뜩 긴장한 아지드가 숨을 딱 멈추었다.

“읽고 쓰기도 모를 만큼 미련한 아이 같지는 않은데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야푸르는 얼굴에 쓴 베일을 걷어내고 아이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칼라 렌즈구나. 벗어보겠니?”

아이를 향한 대신관의 목소리는 생각 외로 따뜻했다. 어린 오르는 당황한 듯 엄마를 휙 돌아보았다. 아지드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자 오르는 그제야 렌즈를 벗고 맑은 무지개빛 눈을 드러냈다.

‘신관님을 똑바로 보지 말라’는 엄마의 신신당부를 그새 또 까먹은 오르는 마주선 남자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홀의 휘황한 백열조명 아래 아이 눈동자의 무지개빛이 마치 색색의 보석을 박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카히나가 이런 얼굴이었나. 참 예쁘구나. 엄마를 하나도 안 닮았는데 누굴 닮았니.”

“…….”

야푸르가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말까지 해 주었지만 평소 같으면 먼저 말을 걸고 갖은 수다를 쉴 새 없이 쏟아놓았을 이 아이는 어딘지 달랐다. 이 덩치 큰 어른 남자의 모습에 잔뜩 주눅이 든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서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은 것인지 오르는 쉽사리 표정을 짓지도, 웃음을 보이지도 않았다.

“네 이름이 오르마즈라지?”

“……아뇨, 아프라시아에요. 그런 이름 몰라요.”

어린 오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아이를 쳐다보는 야푸르의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번졌다.

“그래, 아프라시아. 네가 너무 이뻐서 이 아저씨가 꼭 선물을 주고 싶구나.”

야푸르는 조금 전 오르가 비싸서 못 샀던 바로 그 단과자가 가득 든 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그가 이미 밖에서부터 모녀를 미행했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지드는 순간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이번에도 봉지를 받지 않고 한 발 물러나며 엄마부터 돌아보았다.

“엄마도 잘 아는 사람이니까 받으렴.”

긴장한 아이가 자꾸 대신관의 심기를 건드리자 두려워진 아지드가 딸에게 괜찮다고 눈짓을 했다.

“제발, 얘야, 친절하고 좋은 분이야. 네가 그러면 기분 나빠하실 거야.”

“정말?”

“응, 빨리.”

엄마가 억지로 웃으며 간곡하게 계속 말하자 그제야 아이가 경계를 풀고 이 낯선 아저씨에게서 과자봉지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아이는 과자를 받자마자 안을 뒤적거리더니 제일 비싸고 예쁜 과일절임 한 덩이를 꺼내 야푸르에게 불쑥 내밀었다.

“응?”

“엄마가 좋은 사람한테는 뭐든지 아끼지 말고 베풀랬어요.”

아이가 야푸르의 손에 과일절임을 쥐어주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는 야푸르를 따라온 수행원들, 심지어 문을 막고 선 암행 요원에게도 큰 사탕과 젤리를 하나씩 억지로 쥐어주었다.

“현신님?”

난처한 듯 대신관의 눈치를 보던 수행원들도 아이의 해사한 웃음에 마지못해 젤리를 받아들었다.

“근데 아저씨가 신관님이세요?”

꼬마의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아지드의 가슴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야푸르는 화를 내지 않고 짧은 웃음으로 반응했다.

“그래, 그렇다만, 할 말이라도 있니?”

“그럼 저 꼭 꼴찌 시켜 주세요.”

아이의 맹랑한 대답에 야푸르가 실소를 터뜨렸다.

“왜? 다들 일등 하려고 하는데 왜 꼴찌를 하려고?”

“엄마 저 꼴찌 만들려고 돈 많이 썼어요. 우리집 너무 가난한데 우리 엄마 저하고 동생들 키우느라 맨날 고생만 했어요. 오늘 저 꼴찌 못 하면 엄마 또 울지 몰라요.”

“훗, 그래?”

야푸르가 아이의 뺨에서 손을 떼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이번의 표정은 지금까지처럼 ‘다정한 신관 아저씨’의 미소는 절대 아니었다. 그는 문을 막고 선 암행요원의 눈을 힐끔 올려보았다.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못 들어주겠다.”

아이의 간곡한 부탁을 싸늘하게 무시해버린 야푸르는 다시 얼굴의 베일을 내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린애 놀음도 오랫동안 안 했더니 별 재미가 없다.”

착한 줄로 알았던 ‘신관 아저씨’의 갑작스런 변신에 무언가 이상한 감을 느낀 꼬마 오르가 뒤에 있는 엄마 손을 얼른 잡으려 했다. 그렇지만 대신관의 딱딱한 목소리가 그보다 빨랐다.

“이 꼬마 끌어내.”

그 말과 동시에, 부스 뒤에서 불쑥 나타난 검은 제복 차림의 요원들이 겁에 질려 엄마에게 매달리려는 자그만 소녀를 거칠게 떼어놓았다. 아이의 손에서 쏟아진 단과자 봉지들이 어른들의 거친 발에 온통 짓밟혀 바닥에 흩어졌다.

“오르!”

아이를 다시 안으려던 아지드는 이마에 와 닿은 석궁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같은 시간, 밖에서는 ‘701번 코윈에서 온 아프라시아 카파키가 최고신 다하카르에게서 선택을 받았습니다.’라는 선언이 홀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탄식과 부러워하는 목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지만 지금 부스 안의 상황은 바깥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이는 별관 지하 실험실로 데려가.”

야푸르가 아이를 빼앗긴 엄마에게서 매정하게 휙 돌아섰다.

“알겠습니다.”

건장한 남자요원이 발버둥치는 아이를 한 팔에 번쩍 안아들고 부스 뒤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놀란 아지드가 바닥에 엎드려 대신관의 옷자락을 붙들고 울부짖었다.

“무얼 하시려고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죄는 제가 지었고 아이는 아무 관계도 없지 않습니까. 절 백 번이라도 찢어 죽여주시고 아이는 제발 보내주소서.”

매정한 야푸르가 혀를 끌끌 차며 아지드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네 핏줄도 아니지 않나.”

“제 딸입니다! 그 앤 제 딸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실컷 믿어라. 말리지 않을 테니.”

야푸르가 코웃음을 쳤다.

“이 년도 끌고 따라와. 시끄럽지 못하게 하고.”

야푸르는 다하카르 부스 안쪽을 다른 성직자에게 내주고 그곳을 성큼성큼 나섰다. 요원들에게 양팔이 붙들린 아지드도 재갈이 채워진 채 그의 뒤를 따라 질질 끌려 나갔다. 앞장서는 대신관의 뒤를 따라 지하로 끌려 내려가며 아지드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8년 동안의 도망생활이 이제 여기서 어처구니없이 끝날 판이었다.

별관 지하와 연결된 음습한 지하 복도로 내려온 아지드는 반대편 어딘가에서 메아리쳐오는 딸의 울음소리에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 딸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하지만 매정한 대신관은 어린 소녀의 처절한 애원과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도 긴 로브자락을 바닥에 끌며 아무 반응 없이 앞장서 걷고 있었다.

대신관은 한참을 앞서 걸은 후에야 다리가 풀린 채 주저앉은 아지드를 무표정하게 돌아보았다. 그는 요원들에게 재갈을 벗기라고 손짓했다.

“네 딸이, 아니, 네 딸이라고 믿는 애가 저리 울고 있으니 가슴이 아프냐?”

아지드는 바닥에 얼굴을 기댄 채 계속 울고 있었다.

“제게는 어떤 벌이라도 주시옵소서. 허나 아이만은 제발…….”

“재밌구나, 내 자식 둘을 죽인 자가 지금 내게 자기 자식 목숨을 애원하고 있다니.”

야푸르가 엎드린 아지드에게 다가와 그의 뒤통수를 꾹 밟았다.

“아참, 혹시 오해할까봐 알려주마. 난 너와 뱃속의 아이를 안전한 곳에 빼돌리려 했던 거였고, 널 속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 한심한 자식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내 요원들보다 선수를 쳤더군. 보나마나 내 이름을 팔아서 너와 태아를 죽이려 들었겠지.”

“그땐……어쩔 수……아닙니다, 모두 다 제 죄입니다.”

아지드의 애원에 야푸르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죄? 천만에. 넌 죄가 없어. 나라도 그 자리에선 그 둘을 죽였을 거다. 그런데 말이다.”

야푸르가 발에 힘을 주어 아지드를 바닥에 꾹 내리눌렀다.

“자식 둘의 시체를 앞에 두고 보니 그렇게 합리적이지는 못하겠더군. 죄는 없지만 용서는 못 하겠으니 어쩌겠느냐.”

그때,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지하실 너머에서 다시 메아리쳐 들려왔다.

“오르!”

반쯤 이성을 잃은 아지드가 요원들을 떨치고 그리로 달려가려 했지만 다시 팔을 붙들리며 바닥에 팽개쳐졌다. 소중한 딸이, 8년간 그를 울며 웃겼던 소중한 아이가 산 채로 표본이 되어 유리병에 들어가는 끔찍한 상황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절망감에 주저앉은 그는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바닥을 긁었다.

“제발, 딸애는 해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계속 딸만 찾는 아지드를 내려다보며 혀를 차던 야푸르가 어느 순간,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악마처럼 웃기 시작했다.

“지금 네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생각을 바꿔야 하겠다.”

“예?”

야푸르는 로브 자락에 들어있던 투명한 상자를 천천히 꺼내보였다.

“이게 뭔지 알겠지?”

아지드는 억지로 고개를 쳐들고 대신관의 손에 들린 상자를 쳐다보았다. 낯선 문자가 새겨진 새끼손가락만한 황금빛 금속 막대가 안에서 빛을 뿜고 있었다.

“……잔딕입니까.”

“네게 설치하려 가져왔다.”

“알겠습니다. 당장 제게 꽂아주십시오.”

처벌을 각오한 아지드가 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죽는 날까지 수십, 수백 번 경험하게 하는 끔찍한 처벌이라는 건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벌도 저 같은 년에겐 과분하옵니다. 기꺼이…….”

“아니, 맘이 바뀌었어. 네겐 아무 벌도 안 내리마. 넌 그저 딸을 살리려고 발버둥치는 죄 없는 엄마였을 뿐이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야푸르는 아지드를 매정하게 차내고는 휙 돌아섰다.

“대신 널 그렇게 만든 네 딸에게 박아야겠다.”

“예에?”

충격을 받은 아지드가 갑자기 미친 여자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안돼요! 안된다고요! 제발! 잔딕 10개도 상관없으니 저한테 박으시라고요! 저 조그만 아이가 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요!”

요원들이 목이 찢어져라 악을 쓰는 아지드를 질질 끌고 다시 지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앞장서는 야푸르는 어린 오르에게 박을 ‘12번 잔딕’을 그의 눈앞에서 보란 듯 흔들며 걸었다. 이성을 잃은 아지드의 고함이 점점 격해졌다.

“미쳤습니까! 카히나를 그렇게 도살한 것도 모자라서 이젠 저 아이에게까지 몹쓸 짓을 하시다뇨!”

앞장서는 야푸르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신전 지하의 작은 수술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패닉이 된 아지드가 제정신이라면 절대 못 했을 고함을 버럭 지른 것도 그때였다.

“친언니 카히나를 되살려달라던 프사이 세네피스를 무슨 낯으로 보시려고요!”

“닥쳐라!”

순간, 갑자기 휙 돌아선 야푸르가 아지드의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정신이 혼미해진 아지드의 고개가 밑으로 뚝 떨어졌다.

“그 천한 주둥이에 함부로 그 이름을 올리다니.”

얼굴이 시뻘개진 야푸르가 어느새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버지 자하크의 첩이면서 그의 연인이 되어 결국 분노한 아버지 손에 산 채로 표본병에 넣어졌던 프사이 세네피스에 대한 죄책감에 지레 과한 반응을 보인 것이었지만 이젠 그도 스스로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정신 차리게 깨워 놔, 딸이 무슨 수술을 받는지 눈앞에서 똑똑히 보고 기억하게.”

그는 거추장스런 로브를 확 벗어던지고는 수술실에 성큼 들어서서 옷을 갈아입었다. 먼저 끌려온 꼬마 오르는 이미 수술대에 묶인 채 마취가 되어 거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야푸르는 조금 전 자신에게 과일절임을 내밀며 해맑게 웃던 소녀의 눈동자가 마취약 기운에 조금씩 흐려져가는 모습을 짐짓 무심한 척 지켜보았다.

“준비 끝났나? 아프라스?”

야푸르가 마취약을 놓은 늙은 남자 의사에게 물었다.

“야투 박사!”

꼬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 노인이 뒤늦게야 정신을 퍼뜩 차렸다.

“예? 예, 물론입니다. 갑자기 대상이 바뀌어서……좀 당황했을 뿐입니다.”

“왜, 너무 익숙해서?”

야푸르가 한때 ‘고향행성 구조대’에 몸담았던 이 노인을 슬쩍 흘겨보았다. 지금은 현실에 철저히 물든 괴팍하고 계산적인 노인이 되어버린 그도 한때는 학살이 벌어지던 고향 행성의 동굴에서 목숨 걸고 아기들을 구해냈을 만큼 젊고 의협심 넘치는 젊은이였었다.

야투 박사는 젊은 날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아이의 얼굴에서 줄곧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생전의 카히나를 코앞에서 보았던 몇 안 남은 생존자 중 하나였다.

야푸르가 확인차 다시 물었다.

“카히나가 맞나?”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습니다. 카히나가 분명합니다.”

야투 박사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됐군.”

수술 준비를 서두르는 야푸르에게 지금껏 수술 준비를 리드했던 여자 의사가 잔뜩 불만에 찬 얼굴로 물었다.

“설마, 위대한 현신께서 몸소 집도하시려고요?”

“그래, 내 직접 한다, 타바리스. 그대는 물러나 있어.”

야푸르는 그 여자의 손에서 메스와 수술용 드릴을 받아들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이런 건 신경외과의인 제가 하겠습니다. 어찌 위대한 현신께서 이런…….”

“자식들을 잃은 건 나니까 이 꼬마에게서 물러나 있으라고!”

야푸르의 무서운 눈길에 타바리스 델루지 박사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일단 물러났지만 뭔가 맘에 안 드는지 입으로는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잔딕은 어미에게 박고 이 아이는 전신 표본을 만들기로 약속하지 않으셨나요? 잔딕을 박는다는 건 당장은 안 죽인다는 뜻 아니십니까? 이 아이는 위험천만한…….”

“그래서?”

듣다 못한 야푸르는 자신의 제1첩이기도 한 이 성직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잔딕과 표본 중 어느 쪽이 더 큰 벌이냐? 타바리스 델루지 신관.”

뭐라 대답하려던 타바리스가 멈칫했다.

“허나……이 꼬마는 지금 안 없애면 크면서 점점 더 위험해질 겁니다. 그리고 살인자인 아지드 비스 모간도 처벌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저 어미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야푸르는 수술실의 강화유리를 손이 피가 날 만큼 두들기며 절규하고 있는 아지드를 가리키며 차갑게 웃었다.

“이걸 뺄 수단이 모두 우리에게 있으니 앞으로 도망도 못 갈 텐데.”

“하지만 위대한 현신이시여, 이 꼬마는…….”

타바리스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자 야푸르가 눈빛을 돌변하며 그에게 얼굴을 확 들이대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8년 전에 임신한 아지드가 숨어있는 곳의 정보를 아스탈 그 새끼에게 흘렸던 게 그대였다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어.”

“예에?”

창백해진 타바리스는 못 들은 척 엉뚱한 곳만 주시하고 있었다.

“세네피스 혈통의 R들을 모두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 대신관의 품과 후계자 지위까지 차지할 거라고 말했다는 것도 말이지.”

야푸르는 12번 잔딕, 이마에 박을 사파이어 조각을 침착하게 꺼내 수술대 옆에 정리하며 말했다.

“그대의 가문과 우리 교단과의 특별한 친교를 생각해 처벌하지는 않겠다. 그대가 내 자식들을 선동하는 그놈의 세치 혀만 앞으로 조심한다면.”

“무슨 말씀이신지…….”

“대신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이 아이를 표본병에 넣는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저어, 괜한 질문인지 모르겠으나.”

핏기가 싹 사라진 타바리스가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설마……저 모녀가 코윈 산골에 숨어있던 걸……제가 증거물 볼트를 가져다드리기 전부터 이미 알고 계셨던 건 아니겠지요?”

“…….”

“그래서 오늘도 저희에게 맡겨도 되는 걸 굳이 몸소 오신 건가요.”

야푸르는 대답도 생략한 채 타바리스에게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알겠습니다.”

타바리스는 그의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나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이의 이마에 박을 사파이어 조각을 확인하던 야푸르는 그 뒤에 새겨진 문장에 뜨끔했다. 아지드의 뱃속에서 이 아이가 자라고 있을 무렵, 저승에서 기뻐할 연인 세네피스를 생각하며 그가 미리 만들어 놓았던 이 조각엔 ‘간택자 오르마즈, 신의 이 특별하고도 위대한 선택과 영원히 함께하도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는 타바리스가 보지 못하도록 조각을 살며시 뒤집어 놓았다.

“난 이런 아이 따위 관심 없으니 네 걱정은 쓰잘데기 없는 거다. 알겠나.”

수술실 밖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있는 아지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그는 아이의 이마 중간을 그어 뼈를 드러내고 큰 수술용 드릴을 보란 듯 들이댔다. 조금 전 보았던 아이의 가슴 저리게 해맑은 얼굴도, 이 아이를 빼닮은 옛 사랑의 얼굴도, 이 아이가 커서 자신에게 어떤 존재가 될지 따위도 지금은 신경써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시작한다.”

드릴이 돌아가면서, 그의 보안경 위로 아이의 붉은 선혈이 튀어올라 큰 얼룩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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