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16화 (911/1,132)

< -- 916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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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키아와 술 한 잔을 나누고 하렘을 나온 이디나는 아버지 아스탈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몇 시간 전, 피를 뽑아 검사를 맡겼던 그로서는 ‘혹시나’하는 공포에 발끝이 천근만근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쿠마르를 따라 아버지 아스탈의 개인 침소에 든 이디나는 일단 주변부터 빙 둘러보았다. 비록 초록이 우거진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어도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큰 창이 원형의 벽을 빙 감싸고 있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방이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교단 소유의 금광과 발전소, 중공업 기지가 웬만한 명화(名畵)나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보다 주인을 훨씬 흐뭇하게 해 주고 있었다.

“들어와라.”

여느 날처럼 방 중간에서 술잔을 쥐고 앉아있던 아스탈이 이디나에게 오라며 손짓을 해 보였다. 예상치도 못하고 불려온 이디나는 긴장감을 애써 감추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 방도 동생들과 종종 든 일이 있다 보니 낯선 공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의 맘에 불편한 건 주사위처럼 좁고 밀폐된 어머니의 방이 생각나서였고, 얼마 전 죽인 이복 여동생 킴메리가 바로 이곳에서 아버지의 품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술 냄새가 나는구나.”

이디나가 테이블에 다가가기 무섭게 아스탈이 한 마디 꺼냈다.

“네 어미가 주더냐.”

“가볍게 한잔 했습니다.”

아스탈은 내심 불쾌한지 눈가를 찡그리며 딸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빈 잔을 옆으로 휙 치워버렸다.

“모녀가 마주앉아 아버지 흉을 안주로 한잔씩 했구나.”

아스탈이 혼자서 잔을 들이키며 일갈했다.

“많이 외로워하고 계시더군요. 시간 나실 때 한 번이라도 좀 다독여 주셨으면…….”

“훗.”

아스탈이 코웃음을 치며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거기 여자들은 어차피 내가 없어도 지들끼리 잘 살아. 네 어미도 마찬가지고.”

이디나는 아버지의 무관심에 기가 막혔지만 잠자코 있기로 했다. 하렘은 대신관의 이름만 빌렸을 뿐 그가 한 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아웅다웅거리며 사는 작고 폐쇄된 커뮤니티였고, 남편의 존재감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난 그냥 먹여 살려주고 가끔 얼굴이나 비치는 손님일 뿐이지.”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아스탈은 식솔들에 무관심하고 권위적이긴 해도 최소한 아내들을 학대하는 형편없는 남편이거나 악질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하렘의 암투도 못 본 척했고, 그저 ‘승자’의 침실에 가물에 콩 나듯 가끔 들어가는 방식으로 그들이 알아서 정한 서열을 인정해 주는 수준에서 자신의 역할에 만족했다.

하렘의 여인들도 그저 예쁘기만 한 눈요깃감 인형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각 교단에서 보내 온 성직자 혹은 내로라하는 신도 가문에서 온 신심 깊은 엘리트들이었다. 그러니 애당초 서열 싸움에 끼어들 자격도 못 되는 싸구려 무희 출신의 어머니가 10년이 넘도록 아버지의 살냄새도 못 맡아 본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던 이디나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놓인 유전자 검사 결과 보고서에 딱 멎었다. 그의 시선을 눈치 챈 아스탈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네게도 R이 있더군. 믿어지지 않지만.”

이디나가 턱에 힘을 꽉 주었다. 그는 아버지가 R을 원하는 건지, 혐오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알기로는 아버지는 후계자 시절에만 해도 ‘잡종을 몰아내고 마구스 순혈을 지키자’며 앞장섰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레이오팔인 세네피스에 광적으로 집착했고, 또 다른 그레이오팔 밀리타도 끝까지 버리지 못했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아버지 스스로가 절반 R을 지닌 소위 ‘잡종’이었다.

“그건 아버지께서 물려주셨죠.”

이디나가 바보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아스탈이 보고서를 뒤적거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자식이 10명 넘지만 그 중에 R을 가진 건 너하고 죽은 킴메리하고 갓난쟁이 사내아기 둘 뿐이라니. 빌어먹을, 그런데 넌 왜…….”

딸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던 아스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싹 다가왔다. 아스탈은 멍하니 선 그의 얼굴과 귓가와 목, 심지어 가슴팍의 단추를 훤히 끄르고 옷깃 안쪽에까지 코를 대고 체취를 콧속 깊이 들이켰다.

“흐흡.”

바싹 긴장한 이디나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에 얼어붙었다. 맘만 같아서는 확 밀어내고 싶지만 결과를 생각한다면 분명 자살행위였다. 아버지가 혹시라도 그를 원한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내주어야 했다.

잔뜩 굳어있는 이디나의 얼굴을 힐끔 올려보았던 아스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래서 저놈의 보고서 쪼가리는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니까. 빌어먹을. 누굴 R만 보면 환장하는 발정난 개새끼로 보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스탈은 툴툴거리며 다시 이디나에게서 떨어졌다. 아스탈도 마구스들의 전통인 근친혼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30여년 전, 황태후인 뮤 세네피스에게 미친 듯 빠지기 전까지는 수도승이라고 해도 될 만큼 여자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 오죽했으면 야투 박사가 ‘손목을 잃으면서 남자로서 본능까지 잃으신 것 같다’고 탄식을 할 정도였다.

사실 같은 순간 이디나의 입 안에서도 ‘뮤 세네피스도 아버지를 소 닭 보듯 하지 않던가요.’라는 말이 당장이라도 나올 듯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 치안군 장교 새끼가 나보다 낫더냐?”

아스탈은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지만 그를 강제로 안거나 손찌검을 할 생각까지는 없어보였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빠져나갈까 고심하던 이디나가 아버지의 자존심을 안 건드리는 선에서 대충 둘러댔다.

“천한 인간들의 터부에 물든 모양입니다.”

“R을 물려받은 이상, 넌 이제 보통 사람과는 만나선 안 돼.”

“예?”

“내가 준 ‘타리프의 일지’ 3권은 읽어 봤냐?”

“아직 보는 중입니다.”

이디나는 일지 2권의 사본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괜히 매를 벌 소리는 접기로 했다.

“R과 S, X를 처음 만든 고향행성의 ‘감독관’들은 자기네 작품의 2세 문제를 철저히 통제하고 싶었던 게 분명해. 교잡되는 방식에 따라 자동으로 죽도록 갖은 함정을 여기저기 설치해 놓았더군.”

“…….”

“S들은 SS 호모가 되면 죽고, R과 X들은 몇 세대 이상 잡종이 반복되면 자가면역질환을 일으켜 자동적으로 죽게 해 놨더군. 고향행성의 ‘사제 무리’는 그걸 미리 알고 자기들끼리만 교접해서 자식을 낳았지만 멍청한 색골 황제놈은 일반인하고 들입다 결혼해 자식까지 줄줄 낳아서 그 꼴이 됐지. 두고 봐라, 황자 새끼들 조만간 다 죽을 테니. X 잡종 계집이 낳은 딸은 잘 모르겠다만.”

“저도 그렇다는 말씀이신가요.”

“분석해 보니 네 세대부터는 잡혼이 안 되더군. 낳아 봤자 자식새끼 죽는 흉한 꼴을 봐야 할 거다. 그래도 그놈이 끌리냐?”

이디나의 가슴 속이 순간 무언가로 콱 막힌 듯 먹먹해졌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그는 어쩔 수 없이 R혹은 S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남편감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스탈은 일그러진 딸의 표정을 못 본 척 빈 잔에 술을 더 담았다.

“그걸 밝혀냈던 게 죽은 타리프 카파키 신관이었으니 세상 참 얄궂지?”

“치료법은 없는 건가요?”

아스탈이 피익 웃으며 딸을 돌아보았다.

“그걸 궁금해 하는 자가 황제 말고 또 있었구나?”

“그냥 호기심에…….”

“타리프 신관이 생전에 연구했었지만 결과를 내지 못하고 죽었다. 그 노인네 덕분에 증세를 완화시키는 약까지는 찾아냈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은 몰라. 일지 3권에 연구 내용을 언급하면서 뭐라고 써 놓은 게 있긴 한데 이상한 문자라서 어차피 못 읽어.”

“이상한 문자라뇨?”

이디나는 그제야 가방을 뒤적거려 일지 3권을 꺼냈다. 익숙한 바람어가 빼곡하게 쓰인 두꺼운 노트의 거의 끝부분엔 필치가 완전히 다른 정체불명의 외래어 쪽지가 풀로 단단히 붙어있었다.

“타리프 신관의 필치가 아닌데요? 타리프 신관은 종이가 눌릴 만큼 꼭꼭 눌러 쓰는 악필인데, 이건……내용은 모르겠지만 빠르고 능숙하게 쓴 달필 같아 보이는데요?”

“전문가 말이 여자 필치일 가능성이 높다더군.”

“그 노인네가 고향 행성에서 몰래 가져온 문서 일부가 아닐까요?”

“아니, 콜로니에서 생산된 싸구려 습자지니 그럴 리가 없지. 여하튼 해독은 실패했고 치료법이 없으니 결론은 넌 일반 사람을 만나선 안 된다는 거야.”

아스탈이 딸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디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노트를 마지못해 가방에 도로 챙겨넣었다.

“제게 할 말은 다 끝내신 건가요?”

“아니.”

아스탈은 유전자 조사 보고서와 함께 있던 서류들을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묻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불렀다.”

“예?”

“혹시 네 광산이나 공사 중인 제련소 부근에서 이상한 조짐이나 수상한 자들을 보지 못했더냐?”

“……아뇨, 지난번 운송조합 시위 사건 이후로는 잠잠합니다. 조합과의 충돌도 잘 합의되어서 끝났고요.”

“정체불명의 침입자도 없고? 좀도둑이라도 상관없으니.”

“아뇨. 요즘 경비를 강화해서요. 무슨 안 좋은 정보라도 있나요?”

아스탈이 한 무더기의 서류를 휙 내놓았다.

“우리가 7년 전에 출혈열 퍼뜨린 게 대창궐 직전에 실패한 이유를 알지?”

“황제가 우리 연구소에 좀도둑처럼 숨어들어와 비상용 백신 종균을 훔쳐갔죠.”

“이번에도 황제가 며칠째 궁을 비우고 있다고 한다.”

“또요?”

이디나는 먼발치에서 내려다보았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리며 순간 전율을 느꼈다.

“그럼 그자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죠?”

“이제야 알아냈는데……지금은 황제령 모처에 있는데 곧 북부에 다시 올 것 같다고 한다. 북부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는 모양이다.”

아스탈은 어딘가에서 들어온 암호 전문 용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손가락만한 폭의 테이프에 새겨진 짧은 문장은 할룩스 잡음을 이용해 보내는 최고등급 보안암호문의 해독기에서 찍혀 나온 글이 분명했다. 이디나는 그 암호문을 누가 보냈는지를 바로 직감했다.

“정보원 치고는 멍청하네요, 황실 핵심에 있으면서 그 중요한 걸 이제야 알리다니.”

“이제야 알 수 있었다는 걸 어쩌나. 출혈열 때도 황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내각에서도 거의 없었다지. 그거에 비하면 이게 어디냐.”

아스탈은 전문을 테이블 한쪽의 작은 금고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보이지 않는 아주 사소한 구멍을 놓치지 마라. 지난번에도 우린 놈이 뭘 훔쳐갔었는지, 어떤 자료를 가져갔는지도 막판까지 거의 알지 못했어. 보이지 않게 접근하고 상대가 알지도 못한 새 등을 찌르고 사라지는 데는 가디언 때부터 도가 튼 놈이니까 놓치지 말고 기억 좀 해 봐.”

별 생각 없이 고개를 저으려던 이디나의 머릿속에 짧은 기억이 스쳤다. 하지만 표정과 입은 그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정말로 없습니다.”

이디나는  아버지가 소중히 간직하라고 엄포를 놓은 일지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때 만난 ‘치안군 장교’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혼란통에 없어진 그 책이 혹시라도 어딘가를 돌고 돌아 황제의 손에 들어가는 아찔한 상황이 머리에 스쳤을 뿐이었다.

“황제의 외모는 기억 나냐?”

“대충이요.”

“그럼 이게 낫겠군.”

아스탈은 셔틀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선명한 황제의 이미지를 그의 앞에 내놓았다. 친위군 사열을 할 때 찍은 듯, 머리에 조우관을 쓴 황제는 어깨에 은빛 늑대털을 걸치고 검은 말 위에 당당하게 올라 있었다.

“잘 기억해 둬라. 키는 7척에 가깝고 겉보긴 날씬하지만 몸의 밀도가 사람과 달라서 몸무게는 엄청 무거운 괴물이다. 나처럼 상체에 용 문신이 있고.”

아스탈이 옷깃을 풀고는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검은 용의 등줄기를 살짝 보여주었다.

“설마……자기 신분을 알고 새긴 건가요?”

“이라즈 그 놈한테 대신관의 검은 용 문신 도안을 보여준 게 나중에 황제에게 새겨주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되돌아보니 아주 일이 우습게 됐더군. 빌어먹을, 황제한테 그걸 새겨줬을 줄이야.”

아스탈이 황당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이디나는 ‘그것도 운명이죠.’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참기로 했다. 대신 아버지가 내민 황제의 이미지를 뚫어지게 살피며 기억에 담았다.

“흐음.”

날카로운 콧날과 예리한 눈빛, 깎은 듯한 턱선이 이상하리만큼 눈에 익숙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의 눈에 확 들어온 건 귓볼이 전혀 없는 긴 칼귀, 굵은 힘줄과 핏줄이 선명히 선 탄탄한 목과 넓은 어깨선이었다.

“황제도 전과는 달라졌다. 전에는 방어적이었지만 이번엔 공격적이다.”

아스탈은 이디나의 앞에 편지지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클리코브의 샤마시 신전 기도함에 누군가가 등록 안 된 할룩스와 함께 이걸 넣어놓고 갔다더군.”

쪽지엔 누군가 손으로 쓴 짧은 바람어 문장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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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윗선에 전달해라. 그분께서 너희 신의 다음 육신을 갖고 계신다.

너희 신께서 그 육신을 돌려받고 싶다고 하신다면 이 할룩스를 이용해서 기계에 남은 마지막 통화 코드로 연락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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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름 마구스에게 보냈군요.”

“황제가 딸 하페즈의 시체를 미끼로 살름과 접촉하려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우리 정보원이 중간에서 빼내서 안 들어갔지만.”

아스탈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이디나는 후계자 딸을 잃고 상심에 빠진 살름이 적당한 선에서 황제와 흥정을 할 수 있게 한쪽 눈을 모른 척 감아주지 그랬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평소처럼 입방정은 꾹 참았다. 스스로가 여러 번 배신을 저질렀던 만큼, 의심이 많은 아스탈이 그런 것을 쉽사리 용납할 것 같지는 않았다.

“명령조이긴 해도 어휘는 완전히 우리 사람들이 쓰는 패턴이군요.”

“그쪽에도 우리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아뇨, 이렇게 표현했다는 건 황제가 충분히 개방적이라는 뜻이죠.’

이디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도 일단 참았다. 아스탈이 초조한 듯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딸을 잃은 살름에게 이걸 보냈다면 아들을 잃은 아트위야 마구스에게도 분명 같은 걸 보냈을 거다. 그쪽 신전들을 계속 주시하고는 있는데 아직 잡아내지 못했다.”

“자신에게 올 문서를 우리가 가로챘다는 걸 알면 살름 마구스가 크게 화낼 겁니다.”

딸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아스탈은 자기 말만 계속했다.

“앞으로 마구스들도 단속을 제대로 해야겠어. 차라리 황제가 미쳐서 날뛰고 핍박하는 편이 낫지 이렇게 강온양면으로 나오면 우리로선 더 난처해진다. 너도 이제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 같은 하마피타라고 무조건 믿지 말고.”

“……알겠습니다.”

“너도 내키지 않아하는 건 알지만 오늘은 내 옆에서 자고 가라.”

아스탈이 피곤한 듯 잔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서는 오늘밤 네 머리 올려 준 걸로 해 둬. 나도 너 그냥 놔둔다고 여기저기서 잔소리 듣는 거 귀찮아 미칠 지경이니까.”

아스탈은 옷을 여기저기 바닥에 대충 벗어던지고는 침대에 혼자 벌렁 드러누웠다. 테이블 옆에 멍하니 서 있던 이디나는 방금 본 서류들과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뒤따라 침대로 향했다.

그는 정리해 놓은 서류들 사이에서 황제의 사진을 꺼내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무슨 이유엔지, 이 사진을 계속 다시 보고만 싶을 것만 같았다. 그는 아버지 반대편에 앉아 소리가 안 나게 조심조심 겉옷을 벗었다.

옆에서 눈을 감고 있던 아스탈이 잠들기 전 짜증스레 한 마디를 남겼다.

“난 잘 깨니까 코 골 거면 교정기 끼고 자.”

“안 곱니다. 걱정 마세요.”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누운 이디나는 비참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동생 킴메리도 지금의 자신처럼 그냥 안긴 척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느 것이 사실이든, 이따위 연극까지 해야 하는 지금의 자신도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아버지는 다행히 눕자마자 잠들었는지, 그새 옆에서 쌕쌕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자 이디나는 자리에서 도로 일어나 ‘타리프의 일지’ 3권을 꺼내들었다. 머리맡의 작은 불을 켠 그는 혹시 아버지가 깨지 않나 힐끔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는 전부터 계속 눈에 거슬렸던 ‘중간이 찢겨나간 부분’을 열어보았다. 내용 순서로 보아 없어진 부분은 분명 기원전 35년, 증조부 자하크 대신관이 다른 동료 마구스들과 갑작스레 죽음을 맞은 무렵의 것이었다.

사실 이전 대신관들이야 수명이 한정되어 있던 시기의 사람들이었으니 죽음에 따로 물음표가 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수명개조를 받았던 자하크 대신관을 포함한 11명의 늙은 마구스들이 아케메니안 궁, 현재 황궁 지하의 표본실에서 어쩌다 떼죽음을 당했는지, 그리고 야푸르와 햇병아리 마구스였던 수나, 자하크의 손자 아스탈과 갓난아기였던 밀리타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교단 역사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물론 그 일은 아직까지도 교단 내에서도 언급해서는 안 되는 터부 중 하나였다.

‘그 내용이 담긴 게 틀림없어.’

그는 빈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혼자서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짜 보았다. 하지만 궁금한 건 그 하나만도 아니었다. 자하크의 뒤를 이은 대신관 야푸르의 죽음도 미심쩍었다. 아스탈을 위시한 하마피타는 민병대 암살수의 임무를 잊지 않고 있던 오르마즈가 그를 죽였다고 주장했고, 이젠 쫓겨난 하마타와 대신관 친위대 크바르나 여단 생존자들은 아스탈이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디나도 어릴 때부터 오르마즈가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배웠고, 제국의 공식적인 역사도 그렇게 기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커가면서 그런 믿음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디나는 잠든 아버지 쪽을 돌아보았다. 뭐라 하더니 잠버릇은 도리어 아버지 쪽이 더 나쁜지, 그새 이불을 모두 걷어차고 옆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사람들 말로는 아버지의 곱상하고 잘생긴 얼굴은 역대 대신관 중 제일의 미남자였다던 증조부 자하크 대신관과 판박이처럼 닮았다고도 했다. 이디나가 보기에도 아버지 아스탈의 미소년 같은 얼굴이 퍽이나 잘생긴 건 사실이었다. 군살 하나 없이 잘 다듬어진 아버지의 벗은 상체엔 교단 제일의 예술가들이 정성을 다해 새겨 넣은 머리 셋 달린 용의 문신이 온통 휘감고 있었다. 저 문신은 대신관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가장 확실한 상징이었다.

‘황제도 저렇다고?’

이디나는 방금 가져온 황제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사진이 어딘지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계속 보고 싶어서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손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는 어느새 사진 속 황제의 벗은 몸과, 그곳에 새겨진 검은 용을 혼자서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사진을 더듬던 그의 시선이 갑자기 어느 한 곳에 딱 멎었다.

“미친년, 별 생각을 다 하네.”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했다는 생각에 이디나가 혼자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말고삐를 쥔 황제의 손은 그저 약간 큰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몽둥이만하잖아…….”

이디나는 아버지가 깨지 않게 최대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이전에 봤던 이런 비슷한 손을 떠올렸다.

“설마.”

그는 다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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