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17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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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 밀실에 마주앉은 니사와 황제의 비밀스런 대화는 황제령을 출발해 시라즈 별궁이 있는 수베르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니사의 기대와는 달리, 카렐은 그의 말에 그리 크게 놀란 표정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오르마즈 경이 31대 아르잔 대신관이었다는 건 이미 알아.’라는 말로 눈치를 보던 니사를 당혹스럽게 했고, 야푸르 대신관이 내 외조부라는 것도.’ 라며 어느 선까지 말해야 하나 나름 저울질하던 니사의 기를 시작부터 완전히 죽여 놓았다.
결국 황제가 대체 어디까지 아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어진 니사는 오르마즈의 출생과 아스탈의 쿠데타, 교단의 몰락, 야푸르 대신관을 둘러싼 복잡한 혈통에 관해 그가 아는 개략적인 내용들을 술술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포커페이스를 짓고 있는지 니사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카렐은 듣는 내내 철저히 냉정함을 유지했다. 다만 두 부분에서만은 그러지 못했다. 오르마즈가 모진 고문 끝에 죽은 고향행성의 사제 카히나의 복제였고, 그레이오팔은 사제 혈통의 상징이었다는 말에 그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야푸르 대신관과 그 어머니 마샤나그의 은밀한 관계에 관해서 들을 때는 내내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내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보니 대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는 카렐의 깊은 한숨소리만 드문드문 니사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을 뿐이었다.
물론 니사는 야푸르의 비밀에 황제가 왜 그리 괴로워하는지 충분히 눈치를 채고 있었다. 황제는 손에서 식은땀이 나는지 장갑까지 벗어 몇 번이나 손수건에 닦곤 했다.
“내 조상들이 야속하겠군.”
교단의 몰락에 대한 니사의 탄식에 가까운 넋두리를 듣고 난 카렐이 직접 술잔을 권했다.
“황실이요? 이젠 그런 것도 다 잊었어요.”
“아니, 둘 다를 말하는 걸세. 내 아버지 조상과 어머니 조상 양쪽 모두.”
잔을 집어든 니사가 멈칫했다. 카렐이 술 대신 사과주스를 입에 대며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이젠 내가 누군지 안다네.”
니사가 입술에 잔을 댄 채 황제의 입술만 계속 응시했다.
“그러시면 뭐 하나요. 겉으로는 한 번도 말씀을 안 하시는데.”
“내 입으로 황제라 말하는 건 봤는가?”
카렐이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억지로 웃었다.
“제국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다면 대신관이 아니고 대마왕이라도 기꺼이 되어 줄 참이다. 난 학장이 아냐.”
“그럼 이제 ‘오르마즈 대신관’이라는 새 이름에도 익숙해지셔야 하겠군요.”
“푸훗, 그건 익숙해지기 쉽지 않겠는데.”
쓴웃음을 지은 카렐은 여전히 피곤한 듯 밀실의 접이식 간이침대에 몸을 기대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젠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함세. 13번 잔딕은 내 손목에, 12번 잔딕은 오르마즈 경 머리에 있다는 건 알아냈어. 14번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사제의 키가 어디 있는지만 알아내면 숙제에서 7할은 끝내는 셈이야. 그런데 그건 대체 감을 못 잡겠어. 혹시 생전의 오르마즈 그 양반이 조금이라도 힌트를 준 일 있나?”
“그분께서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하시는 근거가 있으신가요?”
“여길 보니 ‘사제의 키’는 ‘사제 카히나’가 가지고 있던 오팔 박힌 쇳덩이를 뜻하는 걸로 짐작되는데.”
카렐이 이번에 새로 구한 ‘타리프의 일지’ 2권을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카히나가 토벌대에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면 분명 교단 손에 들어갔겠지. 그런데 아스탈 그자의 무리도 그걸 찾고 있으니 놈들은 아냐. 그렇다면 첫 번째 용의자는 당연히 교단 재산과 세력의 상당부분을 가지고 독립해 나간 ‘또 다른 대신관’ 오르마즈가 되지 않겠는가.”
“그분께서 아케메니안 궁에서 탈출하시면서 가져간 보물과 자료는 크바르나 여단이 맡았습니다. 여단장 아샤드 경이 아라무트에서 가문 이름으로 보관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찾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니사가 무언가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쿠데타가 벌어졌던 그날 다하카르 신전에선 아르잔 님의 잔딕 제거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제거수술에 필요한 11, 13번 잔딕, 사제의 키도 분명 다하카르 신전에 있었을 겁니다. 잔딕은 아프라스 야투 박사가 관리했지만 사제의 키는…….”
“두 가지 모두를 한 사람이 관리하지는 않았겠지.”
“야푸르 대신관께서 육체를 떠나시면서 오르마즈 경, 아니 아르잔 대신관께 목에 거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물려주셨습니다. 각 교단 마구스들의 이마에서 떼어 바친 보석 조각들과 이상한 열쇠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대신관에게 대대로 물려지는 것이라는데 어쩌면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죽 주머니?”
카렐이 머릿속으로 당시 상황을 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대충 아귀가 맞는군. 그렇다면 오르마즈 경은 사제의 키는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머리에서 잔딕을 뽑아내는 데 꼭 필요한 11번과 13번을 못 구해 죽을 수밖에 없었고?”
‘13번’ 이라는 말을 하던 카렐이 갑자기 말을 멈추며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바로 자신에게 든 그 잔딕이었다.
“궁금한 게 있다.”
“예?”
니사가 갑자기 이상하리만큼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잔딕 1번부터 10번까지는 어디에 있지?”
“잔딕은 11번부터 16번까지 6개가 전부입니다. 다 하마피타 놈들이 갖고 있고요.”
카렐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에아 마구스 가오케레나를 납치강간하고 모욕한 슈엘러 쉐너 경에겐 대체 몇 번을 박았었지? 호지 가의 카산드라 경 아버지에겐?”
“그건…….”
말문이 막힌 니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미 30년 전에 황제가 한 번 물었던 것이었지만 그때는 굳게 입을 닫고 열지 않았던 터였다. 당시 마구스 후계자였던 가오케레나를 납치 강간해 딸 사에나를 낳게 했던 슈엘러 쉐너 경은 제국 제2개국공신에 명문 쉐너 가 종장이었고 총리까지 지낸 거물이었다.
“내 얕은 생각엔 잔딕을 가진 하마피타가 정의의 화신으로 나서서 하마타의 에아 교단 복수를 대신 해 줬을 것 같진 않거든?”
한참을 망설인 끝에 니사가 결국 입을 어렵사리 열었다.
“……저희가 사용한 건 10번입니다.”
“방금 자네 입으로 11번부터 있다고 하지 않았나?”
“타리프 신관이 고향행성에서 가져온 잔딕 중에 상태가 온전한 11번부터 16번은 하마피타에서 훔쳐갔고 불에 타 훼손된 10번까지만 남았습니다. 그 중 그나마 상태가 나았던 10번을 실험 차원에서 당시 사형수였던 호지 가 종장에게 설치했던 겁니다. 그런데……예상 밖으로 정상 작동했습니다.”
니사가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호지 가 종장이 자살한 후에 다시 거두어 가지고 있다가……에아 현신을 모욕한 슈엘러 전 총리에게 다시 설치했습니다.”
“오호, 재사용도 가능하다니, 이거 갑자기 솔깃해지네.”
카렐이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제국 개국공신의 머리에 칼을 대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가오케레나 현신의 자살 직후에 슈엘러 경이 낙마사고로 머리에 혈종이 생겨 응급환자로 실려 왔더군요. 분노한 에아 신의 벌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성직자들이 신의 뜻에 따랐을 뿐입니다.”
이번 니사의 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다른 말은 몰라도, 최소한 이번 말은 성직자로서 니사의 진심이 분명했다.
“그럼 10번은 여전히 슈엘러 경과 함께 쉐너 가 무덤에 있겠군?”
카렐이 황당함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제국 제2개국공신이고 최고 명문가의 종장이 양쪽 교단의 손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없다는 생각과 함께 묘한 두려움까지도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때 밀실 문을 누군가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베르에 거의 다 왔습니다.”
카렐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자이납이 방 안에 머리부터 쑥 들이밀었다. 그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니사를 보고는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미리 얘기하셨으면 훼방 안 놨을 텐데요, 헤헤헤.”
자이납의 장난스런 말에 니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안 그래도 황제 주치의로 있었을 당시, 카렐이 잠든 그를 장난삼아 자기 침대에 눕혀놓고 나가버린 일 때문에 ‘괜한 오해’가 아직까지도 내의원과 내명부에 떠돌고 있었다. 덕분에 ‘승은을 받은 게 분명한데 사교 성직자라 드러내지도 못하고 있나봐’라는 되도 않는 동정과 뒷말이 그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도무지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몇 시간인데 역시 폐하께선…….”
자이납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 방 안의 ‘흔적’이 어디 없나 열심히 뒤지는 모습에 니사가 더듬거리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아, 아니, 난 그런 게 아니고…….”
“역시 폐하의 잠자리 능력까지 알고 있는 게 우연이 아니라니까요. 킥킥.”
자이납의 말도 안 되는 농담에도 카렐은 반박도 없이 잠자코 서서 웃고만 있었다.
“폐하께서 웬일로 장갑까지 벗고 계시고.”
카렐의 맨손을 본 자이납이 앞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참. 그렇군.”
카렐은 그제야 생각이 난 척 얼른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웠다. 파충류의 피 덕분에 쓸데없는 감각신경이 너무 많은 그의 손끝은 거칠고 갈라져 보기 흉하기는 했지만 맛을 느끼는 건 물론이고 공기의 움직임까지 느낄 만큼 과민하다보니 잠자리에 들 때를 빼고는 얇은 뱀가죽 장갑을 항상 끼곤 했다. 그가 맨손으로 누군가를 만지는 건 ‘특별한 의도’가 있을 때뿐이었다.
“헤헤, 저도 못 만져 본 폐하 손 만져보니 느낌이 어때요?”
“아니, 무슨 말이에요!”
답답해진 니사가 이번엔 카렐에게 버럭 짜증을 냈다.
“제가 오해를 받고 있으면 먼저 풀어주셔야죠, 내의원하고 내명부에서도 사람들이 꼬치꼬치 캐물어서 얼마나 민망했는데요! 전 남자만 좋아한다고요! 전 폐하한테 털끝만큼도 관심 없어요!”
“…….”
“폐하 때문에 제가 시집도 못 가면 책임지실 거예요?”
“응.”
카렐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하자 자이납이 뒤로 발랑 주저앉아 깔깔 웃기 시작했다.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 있던 니사는 결국 한숨만 푹 내쉬며 짐을 주섬주섬 챙길 수밖에 없었다.
“내 팔자야, 그분 때도 저러시더니.”
시라즈 별궁 지하의 연구시설에 도착한 니사와 자이납을 거느리고는 카렐은 익숙한 걸음으로 미로 같은 굴을 이리저리 돌아 어디론가 향했다. 이곳에 처음 온 니사는 뭐가 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 거대한 지하궁전을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대체 이걸 언제 지으신 거죠?”
“제위전쟁 직후부터.”
“맙소사, 내각까지 모조리 속이시고요?”
“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따위는 묻지 말게나.”
“그런데……제가 와도 되는 곳인가요?”
“왜, 자넨 여기가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잖아.”
카렐이 니사를 돌아보며 킥킥거리고 웃었다.
“여기 연구소장인 모렌 박사도 자네한테 궁금한 게 많아. 뭐, 자네도 그 사람한테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보던지.”
“또요?”
또다시 심문 아닌 심문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한 니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힘없이 카렐의 뒤를 따랐다. 여전히 방정맞은 자이납이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그럼 오늘밤은 여기서 보내시고 내일 밤은 이디나인가 그 여자랑……큭큭.”
“이놈아, 정신 차려.”
카렐이 휙 돌아서며 자이납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내가 고작 여자랑 놀러가는 걸로 보이냐?”
“아참참.”
니사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이디나인가 그 이름이 왜 익숙했는지 알아봤어요.”
“음?”
카렐의 눈이 확 커졌지만 니사의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싱거웠다.
“아스탈 그자의 친어머니 이름이었어요. 야푸르 대신관님의 배 다른 여동생이었죠. 그러니까……5백년 쯤 전 사람이죠.”
니사의 대답에 카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차며 휙 돌아서서는 계속 앞장서 걸었다.
“그 여자가 아직까지 살아 있고, 박색에 숫처녀로 아스탈 낳았다는 말이라면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설마요.”
황제의 큰 걸음을 종종걸음으로 뒤따라가던 니사가 실소를 터뜨렸다.
“아버지 자하크 대신관께서 돌아가시고 야푸르 대신관께서 현신의 지위를 이으셨을 때 전통에 따라 도태 처리되었어요. 다른 모든 이복형제들과 함께요.”
“잠깐.”
카렐이 자리에 멈춰 서서 니사를 돌아보았다.
“대신관의 형제들은 모두 죽이지만 후계자를 낳은 경우는 하렘의 수장으로 남겨두는 것도 전통 아니었나? 후계자 아스탈을 낳은 여자가 야푸르 대신관의 1처가 되었어야 할 텐데 왜 죽여?”
“모르겠어요. 후계자의 친모를 죽인 건 이례적인 일이었거든요. 뒷구멍으로 들은 바로는 야푸르 대신관께선 후계자 때부터 순혈 형제들로부터 정치적인 압박을 받았었는데 여동생 이디나는 아버지를 닮은 미인인데다가 총애까지 받아서 권력도 막강했던 것 같아요.”
니사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일부에선 자하크 대신관께서 생전에 아들인 야푸르 후계자를 폐하고 딸 이디나와 손자 아스탈에게로의 새 후계 라인을 생각했었다는 풍문도 있었고요. 어쩌면 야푸르 대신관께서 등극하실 때 이미 위험천만한 모자를 권력 핵심에서 몰아낼 맘을 갖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어느 쪽이든 절세미녀라고 하니 내가 궁금해 하는 그 여자가 아닌 건 분명해지는군. 미녀라고? 허어어.”
허탈해하며 돌아서는 카렐에게 니사도 머쓱한 웃음으로 답했다.
“이디나는 신도들 사이에서도 흔한 여자 이름이라서 이름만으로 정체를 알아내시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골치아프지.”
카렐이 입을 삐죽거렸다.
카렐의 기분이 나름 좋아 보이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자이납이 다시 벼르던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그나저나, 그 여자가 정말로 하룻밤 함께 하자고 하면 어쩌시게요?”
“내가 미쳤나.”
카렐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날 남자로 알고 있는데 옷만 벗으면 바로 뽀록나잖아.”
“위만 벗으시던가요. 위엔 어차피 텅 비었잖아요……큭큭.”
자이납의 농담에 카렐이 눈을 흘겼다.
“문신은 어쩌고?”
이번엔 니사가 냉큼 자이납 편을 들고 나섰다.
“용문신이 대신관의 상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최측근 몇 명하고 일부 헤네티들밖에 없는데요 뭐.”
“20일 넘게 수도승 생활하셨으니 한번쯤 기분 푸시는 것도 좋잖아요.”
“이놈들이 진짜.”
갑자기 멈춰 선 카렐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자이납과 니사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미치겠네. 언제부터 이리 죽이 잘 맞았어? 자네 트라카 교단 제2신관 맞아?”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니사가 헛기침을 하며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죠?”
“만날 사람이 하나 있어서. 지금부터는 농담 따먹기 같은 건 하지 말고.”
갑자기 굳어진 황제의 표정에 재빨리 분위기를 파악한 자이납도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좁은 코너 몇 개를 돌아가며 니사의 방향감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카렐은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철문으로 향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시라즈 여단 젊은 헤네티들이 황제의 등장에 말없이 옆으로 휙 비켜섰다.
“열어.”
카렐의 손짓에 그 중 한 명이 철문 자물쇠를 열고 문을 안쪽으로 밀었다.
“씨이!”
문이 열리고 안에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웬 막대 하나가 문 안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붕 소리를 내며 휙 돌았다. 시민군이라면 제아무리 제대로 훈련받았어도 피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악!”
막대가 덥석 붙들리면서 자기 힘을 못 이긴 여자가 바닥에 벌렁 주저앉고 말았다.
“힘은 좋은데 싸움이라도 좀 배워두지 그랬나. 하페즈 빈트 샤마시.”
막대를 휙 빼앗아든 카렐이 바닥에 쓰러진 큰 키의 여자에게 슬쩍 웃음을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하페즈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엉거주춤 물러났다.
“다 나가 있어라.”
카렐은 뒤따라온 병사들과 니사, 자이납에게도 비키라며 눈짓을 보냈다. 문이 도로 잠기고 이 ‘괴물’과 단둘이 있게 된 하페즈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여기 있을만한가?……하긴 그럴 리가 없겠지만.”
카렐이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을 대충 둘러보았다. 침대와 케케묵은 책들, 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게임기구들과 갈아입을 옷까지 모두 갖춰져 있지만 그간 현신에 못지않게 떠받들어지며 호사스럽게 살았을 마구스 후계자가 혼자서 지내긴 지루해 까무러칠 만큼 단조로운 공간이었다.
“심문관들한테 순순히 털어놨으면 날 이렇게 다시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카렐이 하페즈를 일으켜서는 방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벽 귀퉁이까지 밀려난 하페즈가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항상 내려다보다가 올려보니 부담스럽냐?”
하페즈와 가슴을 맞대고 선 카렐이 음침하게 웃었다. 상대는 6척 반(195cm)에 가까운 장신에 단단하고 다부진 몸, 고운 흑발과 같은 빛깔 눈동자를 지닌 훌륭한 외모에 야무진 눈빛을 한 강인해 보이는 여자였다. 사실 카렐에게도 난생 처음 본 ‘완벽한 순혈’ 마구스 혈통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난 말로만 심문하는 데는 별반 소질이 없다.”
피 냄새가 섞인 황제의 낮은 숨결을 느낀 하페즈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이상하게 체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니 도리어 냉방기 바람처럼 습하고 차가운 것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명색이 마구스 후계자니 나름 존중해주려 애는 써 보겠지만 내 인내심이 끝까지 못 간다고 나무라지는 마라.”
까칠한 뱀 비늘이 돋은 카렐의 장갑 낀 손끝이 귀밑에 와 닿자 지레 놀란 하페즈가 짧게 비명소리를 냈다.
“너도 교단의 진짜 수장인 날 존중해 주면 좋겠구나.”
카렐이 하페즈에게 뺨을 맞대고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수장이라고?”
카렐을 휙 올려보았던 하페즈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카렐의 뺨과 뱀 같은 손끝은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산 사람이라기보다 분명 냉동된 시체의 느낌에 더 가까웠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하페즈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벼, 별 헛소리를 다 듣는구나. 천한 인간 같으니.”
“내 눈엔 그대와 ‘천한 인간’들이 정상적인 교배도 안 되는 나보다 훨씬 가까운 것 같구나.”
“뭐?”
발끈한 하페즈가 주먹을 쳐들려 했다.
“차라리 날 죽……!”
막 소리를 지르는 하페즈의 턱을 카렐이 덥석 붙들어 사정없이 꺾어버렸다. 쿵 소리를 내며 등이 벽에 부딪친 하페즈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의 턱을 쥔 카렐의 손에 조금만 힘이 더 들어갔다가는 그의 여린 목이 그대로 부서질 판이었다. 공포에 질린 하페즈의 이에서 따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걱정 마라. 500명 넘게 심문하면서 실수로 죽인 일은 한 번도 없으니.”
카렐이 하페즈의 귀에 입술을 닿을 만큼 바싹 대고 다시 속삭였다.
“전신마비로 보낸 놈들은 많지만.”
더 차가워진 느낌의 섬뜩한 속삭임에 긴장한 하페즈의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졌다.
“할일 많은 부하들한테 네 욕창이나 닦아내고 질질 흘리는 똥오줌이나 치우게 하고 싶지는 않아.”
카렐은 하페즈의 손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지만 그 꼴을 찍어서 네 교단에 보내 효과가 있다면.”
“미쳤어!”
거의 이성을 잃은 하페즈가 발버둥을 치며 카렐을 밀어내려 했다.
“싫으면 그만하라고 애원해 봐라.”
카렐이 그를 더 세게 벽에 밀어붙이며 속삭였다. 콧대 높은 마구스 혈통에게 가장 큰 약점이 죽음도, 매질도 아닌, 히스테리에 가까운 자존심이라는 것을 카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쉐너 가 노예 신분에서도 수백 년을 끈질기게 버텼던 에아 교단 후계자 가오케레나를 결국 스스로 목매달게 한 건 슈엘러의 학대도, 강간도 아닌, 자신의 처지가 ‘아랫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었다.
“그만, 그만이요. 제발요.”
카렐이 그제야 두말없이 턱을 놓아주었다. 다리가 풀린 하페즈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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