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18화 (913/1,132)

< -- 918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

.

.

카렐은 바닥에 주저앉은 하페즈를 놓아둔 채 한 발 물러나 뜬금없이 차를 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도 죽일 듯 몰아붙이는 기세에 놀라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하페즈에겐 황당한 광경이었다.

“레몬밤이 진정제라지?”

차가운 차 두 잔을 내린 카렐이 한 잔을 벌컥 들이켰다.

“또다시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다시 말하지만, 널 현신으로 존중해주고 싶고, 네게서 위대한 현신으로 불리고 싶으니까.”

카렐은 나머지 한 잔을 하페즈에게 불쑥 내밀었다.

“너와 네 아비가 내 외증조부 자하크와 외조부 야푸르 아르잔에게 했듯이.”

하페즈가 흠칫 놀랐다. 상대가 이미 혈통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페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지못해 잔을 받아들었다.

“난 교단을 붕괴시킬 맘도, 핍박할 맘도 없다. 내 손에 두 떡이 다 있는데 뭣 하러 하나를 내버리나.”

“전……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찻잔을 든 채 벌벌 떨던 하페즈가 처음으로 말다운 말을 내놓았다.

“정권을 잃은 이후로 교단도 달라졌습니다. 과거엔 독립된 경제력과 조직, 군사력과 통치력을 모두 가진 12개 교단의 연합체였지만 이젠 그 모두를 가진 건 다하카르 교단 하나뿐입니다.”

“네 아비 살름이 교단의 재정과 수송을 담당하는 똘마니 노릇밖에 못 하고 있는 건 알아.”

황제가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데 당황한 하페즈가 입을 잠시 꾹 다물었다.

“요즘 황실의 압박이 심해져서 고생을 한다지?”

“…….”

“페스트에 뿌렸던 검은 재는 어디서 가져온 거냐.”

“검은 재는 가져온 게 아니고 만든 겁니다. 이전 고향행성의 재를 분석해 다하카르 교단에서 간이식 제조 플랜트를 만들었습니다. 그걸 페스트의 호드르 산에 가져가 만들고 있는 걸로 압니다.”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페즈는 아직 페스트에서 교단 세력이 패하고 쫓겨난 것을 모르고 있을 터였다. 황실군이 호드르 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 남은 건 그들이 떠나면서 제조 시설을 산산이 부수고 불태운 후 남은 잿더미뿐이었다.

카렐이 시치미를 뚝 떼고 계속 물었다.

“그 시설이 몇 개나 있지?”

“하나뿐입니다. 재의 품질이나 순도, 입도가 과거 고향 행성에서 가져온 샘플보다 크게 떨어져서 위대한 현신께서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그래서 한 대만 만들고 이후엔 아예 고향 행성의 단층에서 필요한 만큼만 수집해 가져오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 걸로 압니다.”

“제국에 기근을 일으키고 그걸 빌미로 오염된 곡물을 퍼뜨려 사람들의 수명개조를 최대한 깨뜨리는 데는 절반쯤 성공했군. 이젠 2단계로 너희 의도에 따르지 않는 지역엔 검은 재를 무차별적으로 뿌려서 떼죽음으로 응징한다?”

“…….”

“페스트는 시범 케이스였고? 그게 너희들이 제국 전체를 패닉에 빠지게 하는 계획이냐?”

하페즈는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대답이 없었지만 어차피 무언의 긍정이었다. 카렐이 그런 그에게 코끝이 닿을 만큼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다. 고향 행성이 어디냐.”

“아직은……저희도 모릅니다.”

“아직이라니?”

“위대한 현신께서 아버지께 이후 그곳에 긴급히 투입할 수송선단을 미리 확보해 놓으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카렐은 언젠가 마스터 케스난에게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살름이 요즘 준비하고 있는 ‘크고 비밀스런 수송 작전’을 이번에 따낼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던 터였다.

‘이거 잘만 하면 대박이겠군.’

하마터면 웃을 뻔했던 카렐이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운이 따른다면 케스난의 밀수 선단이 교단의 ‘검은 재 수송 작전’을 맡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질 테고, 더불어 고향 행성의 위치도 공짜로 알아낼 수 있을 테니 말 그대로 양수겸장이었다.

일단 만족할 답을 얻어낸 카렐이 다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질문 내용을 돌렸다.

“내가 노리는 건 가짜대신관 아스탈과 그 추종자들 뿐이다. 그들의 본거지가 대체 어디 있나.”

“크테시폰 궁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모릅니다.”

하페즈의 이번 대답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잘 나가다가 또 날 자극하는군.”

카렐이 빈 찻잔을 내던지며 천천히 돌아섰다.

“이미 입수한 너희 문서들에서 크테시폰 궁이라는 지명에 너의 부녀 이름이 방문자로 등장한 걸 백 번도 넘게 봤는데, 날 뭘로 보는 거냐.”

카렐의 큰 손이 목을 덥석 붙잡자 소스라치게 놀한 하페즈가 무심결에 비명을 질렀다.

“제, 제 말은……지금은 다른 곳에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크테시폰 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정된 건물이 아닙니다.”

“그럼 건물이 둥둥 떠다니기라도 하랴?”

“몇 척의 수송선과 프리깃, 대형 셔틀, 이동 플랜트가 그때그때 결합해서 세워집니다. 그래서 매번 위치와 모양, 크기도 달라집니다. 오늘은 코윈에 있다가 내일 아침엔 아케메니아의 황궁 앞에 다른 모양으로 세워져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뭐?”

순간 카렐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껏 아스탈의 본거지인 크테시폰 궁을 찾겠다며 수많은 요원들을 풀었고, 별의별 정보원들을 총동원했었지만 매번 이가 맞지 않는 보고들에 화만 냈던 터였다.

“그럼 나머지 교단들의 궁은?”

“지난번 보셨던 트라에타오나 교단 궁 같은 것을 말씀하신다면 더 이상 없습니다. 클리코브에 있던 저희 교단 궁은 호지 가에 빼앗겨 지금은 종가로 쓰이고 있습니다.”

“너희 교단은?”

“따로 정해진 곳 없이 각자 교단 신전과 시설들 사이를 옮겨 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마구스와 후계자는 같은 셔틀, 같은 프리깃에도 타지 않고 특별한 때가 아니면 같은 공간에도 있지 않습니다. 하마타처럼 몰살당하는 걸 피하려 만든 규칙이니까요. 그래서 저도 아버지의 일을 모두 파악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카렐이 하페즈의 목을 쥔 채 이를 빠득 갈았다. 그렇다면 크테시폰 궁의 위치를 찾아내 단숨에 그들을 발본색원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었다.

‘놈들을 대체 어떻게 잡아내지?’

하페즈를 심문관에게 넘겨주고 나온 카렐은 우울해진 기분으로 지하 동굴을 걸었다. 뒤따르는 니사도 그의 기분을 짐작한 듯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황제는 ‘중환자실’이라고 쓰인 표지를 따라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복잡한 동굴들 사이를 한참 돌아간 후, 모퉁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도착하시기 전에 꼭 확인할 보고내용이 있어 미처 마중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피곤에 쩐 표정의 자그룰라 모렌 박사가 눈에 낀 확대경을 급히 벗으며 말했다.

“아직 낯빛은 안 좋으시군요.”

모렌 박사는 발작에서 깬지 얼마 안 된 카렐을 올려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발작하며 쓰러진 내 모습에 놀라고 겁먹던 자네 얼굴이 기억나는데.”

카렐이 조금 전까지의 굳은 표정을 풀며 넉살을 부렸다.

“날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줄 몰랐어.”

“그래서 요즘 일에 더 열심이 되었나봅니다.”

“그나저나, 황제가 오는 걸 생깔 만큼 중요한 조사가 대체 뭐길래.”

카렐도 움푹해진 뺨에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실은 발견한지는 좀 됐는데……정확히 확인하고 보고드리려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모렌 박사는 누군가의 머리 내부 단면을 찍은 화면을 내보였다. 뇌의 정확히 중간, 깊숙한 곳의 간뇌가 있는 곳에 무언가 길쭉한 이물질이 보였다. 그리고 카렐도, 니사도 이 이물질이 무언지, 누구의 검사 결과인지를 바로 직감했다.

“폐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렌 박사가 표정이 잔뜩 굳어버린 황제에게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글자를 판독할 만큼 정밀 촬영을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혹시라도 전자파 때문에 오작동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인지라 촬영이 쉽지 않았습니다.”

모렌 박사가 그 ‘이물질’을 확대해 찍은 필름을 재차 내보였다. 긴 막대 모양의 무언가에 미세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11번이겠군요.”

옆에 있던 니사는 확대 필름은 보지도 않은 채 먼저 선수를 쳤다. 필름을 신중하게 살펴본 카렐이 낮은 한숨과 함께 모렌 박사에게 되돌려주었다.

“고향행성 사람들도 우리처럼 10진법을 썼다면 11번이 맞는 것 같다.”

모렌 박사가 산만하게 쌓인 파일 속을 뒤적거리며 보고를 이었다.

“두개골의 수술 흔적을 분석했더니 기원 40년에서 50년 무렵 정도에 설치된 것 같습니다.”

카렐이 황당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케메니아에서 야푸르 대신관이 죽고 오르마즈 경이 도망친 직후?”

표정이 잔뜩 굳어버린 카렐은 아무 말 없이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르마즈 경에게 12번이 이미 박혀 있으니 11번을 밀리타에게 선물했군. 허.”

“나중에라도 그분을 따르지 못하게 확실하게 못을 박아버렸군요.”

니사가 황제의 뒤를 따르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밀리타라면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던 니사에게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말년의 그분을 껴안고 자기는 어떡해야 하냐고 울곤 했었군요…….”

모렌 박사가 필름을 쥐고 급히 뒤를 따르며 물었다.

“밀리타를 이제 어쩌실 거죠?”

“……안전하게 살게 해 줘야지.”

카렐의 대답은 질문한 모렌 박사가 생각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박사가 아주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내명부에 들이기로 되어 있지 않았던가요. 대화는 못 했지만 눈치가 돌아와 기뻐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카렐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모렌 박사를 돌아보았다. 지난 며칠간 의사로 밀리타를 대하고 이런 일까지 알게 되면서 나름 동정심에 무언가 선처를 바라는 눈치였다.

“내 절반 이모라니 내명부 지명은 취소해야지.”

카렐이 짐짓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휙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모렌 박사가 그 뒤를 쫓아가며 계속 말을 이었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도 없지 않으십니까. 공식적으로 입궁 대기 중에 납치된 것으로 처리하셨는데 어렵게 탈출해 되돌아온 사람을 내치시면 폐하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줄 겁니다.”

“그만 하게나. 이번 일이 끝나면 공식 직함 정도는 주겠지만 그 이상은 안 돼.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세닉 가 쪽에 미혼의 R이 혹시 있나 알아봐야겠어.”

카렐이 억지로 단호한 척 했지만 말꼬리로 갈수록 점점 목소리의 자신감이 줄어들고 있었다.

“현직 황제에게 낙점을 받았던 사람을 세상에 누가 데려가겠습니까.”

“괜한 충격을 줄지 모르니 아직은 비밀로 해 두고.”

카렐이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갑자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모렌 박사는 잔딕이 박혀 있는 밀리타의 사진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며 내심 안쓰러운지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다.

“사에나 경과 쉐너 가에 연락해서 슈엘러 쉐너 경의 시체에 든 10번 잔딕을 거둬오라고 해야겠다. 11번이라 차라리 다행이군.”

“그럼 폐하와 한 배를 탄 셈인가요?”

“아스탈 그놈이 아주 묘한 인연을 만들어 줬군.”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밀리타의 목숨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르마즈의 시체에 든 12번 잔딕과 ‘사제의 키’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그놈 제발 죽지 말고 막판까지 살아남아서 내 훌륭한 답례를 해 줄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

단단한 보안문이 쳐진 중환자실 입구에도 조금 전 하페즈가 있던 곳처럼 엄중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카렐은 헤네티들 사이를 지나 그 안에 성큼 들어섰다. 굳은 표정으로 뒤따라온 모렌 박사가 힘없이 말했다.

“의식은 찾았지만 완전치는 않습니다. 기억을 되살리거나 의사 표현도 제대로 못 하고요. 감정 표현은 하지만 아직 격한 감정변화는 버텨내지 못할 겁니다.”

“알았네. 조심하지.”

“폐하께서 계속 함께 있어주시면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번 말에는 카렐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에어 샤워를 지나 들어선 아담한 병실 중간에는 머리를 짧게 밀어버린 여윈 여자 한 병이 병상에 맥없이 누워있었다. 코윈의 얼어붙은 호수에 빠져 저승문에 한 발을 들여놓았던 밀리타였다.

“으읍.”

보조 호흡장치를 끼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그 여인은 카렐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기를 쓰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보며 잠시 반가움을 보이는 듯 했던 밀리타는 뒤따라 들어오는 니사의 모습에 돌연 표정을 싹 지워버렸다.

“좋은 징후군요. 기억이 많이 손상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자신을 그리 반겨주지 않는 밀리타의 모습에 니사가 머쓱하게 웃었다.

“전 자리를 비우는 게 좋겠습니다. 이봐요, 나하고 할 말 있댔죠?”

니사는 환자 앞에서 눈치 없이 계속 한숨만 쉬고 있는 모렌 박사의 손을 덥석 붙들고 병실을 급히 나섰다.

“나가요, 어차피 잘 해결될 테니까.”

밀리타와 단둘이 남은 카렐은 병상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밀리타가 그에게 엷은 눈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세네피스의 그레이오팔만 익숙했던 카렐에게는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의’ 그레이오팔 눈빛이 퍽이나 낯설었다.

“당신 눈도 이렇게 아름다웠군요, 밀리타.”

카렐은 장갑을 벗고 밀리타의 뺨을 맨손으로 살며시 짚어주었다. 동시에 밀리타의 몸에 연결된 바이탈사인 계기가 짧게 경보음을 울렸지만 곧 안정되었다.

“당신을 되찾아 기쁩니다.”

카렐의 다정한 목소리에 밀리타의 통증과 스트레스를 나타내는 수치도 급격히 떨어져 거의 0에 가깝게 내려갔다. 그는 뺨을 만지는 카렐의 손길을 즐기는 듯 눈을 느리게 껌벅거리며 계속 눈웃음을 지었다. 기뻐하고 있는 그에게 ‘당신을 내명부에 들이지 않기로 했소.’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아요.”

카렐은 잔딕이 박혀 있을 밀리타의 이마를 만져주며 억지로 웃었다.

“그걸 머리에 박는 날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지도 말이요.”

밀리타는 멍하니 눈을 뜨고 카렐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니면 당신을 누가 이해하겠소.”

카렐이 밀리타의 손을 만져주며 작게 속삭였다. 카렐의 말뜻을 이해한 밀리타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렌 박사 앞에서는 갖은 차가운 말을 다 했었지만 막상 눈동자를 마주하고 손을 잡고 나니 그런 의지마저도 자꾸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당신과 오늘밤 함께 있어 주리다.”

아스탈의 침대에서 ‘아무 일 없이’ 일어난 이디나의 아침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하렘의 골방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 나키아가 모처럼 남편의 처소로 불려와 셋이 함께 아침식사를 했고, 그 조찬 와중에 몇몇 신관들이 찾아와 그에게 ‘검은 색 원피스’ 한 벌을 선물로 올렸다.

“위대한 현신의 진짜 일부가 되신 것을 축하하는 의미입니다. 아시다시피, 교단의 오랜 전통입니다.”

원피스를 가져온 야투 박사가 조금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상자를 슬쩍 열어보았던 이디나는 이 늙은 신관에게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그건 나도 아는데요, 내가 잘못 아는 게 아니라면 이건 현신과 첫 잠자리에 들 때 입으라고 선물해주는 게 아니었던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야투 박사가 진땀을 빼며 둘러댔다.

“워낙 갑작스레 연락을 받아서……어제는 미처 준비를 못 했습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디나는 납득당한 척 상자를 옆에 휙 치워놓고는 빵을 보란 듯 품위 없이 질겅질겅 씹어댔다.

“어쨌든 고마워요. 신관님들 모두에게요.”

이디나가 신관들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말로는 저러지만 저 원피스는 대신관 자녀들이 16세만 넘기면 미리 다 만들어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보나마나 ‘설마 저 못난 것을.’하는 생각에 그의 것은 아예 만들어 두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한바탕 곤욕을 치른 야투 박사와 신관들이 서둘러 나간 후, 세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엄마들은 자식 얼굴만 보면 어차피 다 안다지.”

아스탈이 빵을 뜯으며 나키아를 냉담한 시선으로 힐끔 쳐다보았다. 남편의 시선을 의식한 나키아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술집 무희 출신에 제대로 배운 것도 없지만, 이 여인 역시도 남편의 이 한 마디가 무얼 뜻하는지는 바로 눈치를 챌 만큼 충분히 영민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압니다.”

나키아가 테이블 밑에서 딸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척 해야 하는 딸을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어쨌든 못난 딸을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장녀는 장녀니까, 잘났든 못났든 나잇값은 해야지.”

이디나는 칭찬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아버지의 말에 일단은 기쁜 척 웃음을 지었다.

“내일 있을 네 제련소 화입식 준비는 잘 되어 가냐? 저녁 8시던가?”

“계획대로 실시할 예정이고요, 마구스들이 모두 모이는 만큼 보안에 최대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번 트라에타오나 궁에서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은 안 벌어질 겁니다.”

“사카가 갔으니 경비 문제는 확실히 잘 하겠지.”

“그곳만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앞으로 제국의 군수 소재산업까지 우리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이디나가 평소답지 않게 자신만만한 말투로 ‘자신의 제련소’ 가치를 추켜세웠다. 그렇지만 아스탈은 맞장구도, 부인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식사만 하고 있었다.

“거기만 돌아가면 황실 군수품 제조창에 납품하는 다른 제련소들은 모두 가격경쟁력을…….”

“너도 순혈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

“마구스들이 모두 모여서 축하해 주는 건 제련소가 정상 가동되는 거지 네 공이 아니니까. 주제넘게 굴지 마라.”

“……물론입니다.”

이디나는 이 정도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 지난 나딘 오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버지 아스탈은 자식들이 공을 내세울 때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한계를 주지시키곤 했다. 이디나도 자신이 ‘절대 후계자가 될 수는 없음을’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터였다. 오빠 나딘이 사라졌어도, 머리 위의 유리천장은 여전했다.

“이것 처음 먹는데 정말 맛있네.”

어색한 분위기에 불쑥 끼어든 나키아가 딸과 남편의 잔에 새 와인을 얼른 채워주었다. 물론 이디나는 어머니가 와인을 징그럽게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맛있네요.”

이디나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핏빛 붉은 와인으로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을 애써 지워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정말 맛있어요, 엄마. 역시 엄마뿐이에요.”

+++++++++++++++++++++++++++++++++++++++++++

* 화입식(火入式)은 제철소 혹은 제련소의 용광로에 첫 불을 당기는 행사를 말합니다.

용광로가 첫 쇳물을 내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행해지는 큰 행사로 일반 건물의 준공식과도 비슷합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주문게시판 :

http://www.tasawwuf.pe.kr

http://vein.zio.to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