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19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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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어색한 아침식사시간은 뒤이어 나타난 쿠마르 때문에 또 깨어져 버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한 나키아는 셋만의 오붓한 아침을 원했지만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일 중독자인 아스탈은 식사 시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렘 여인과의 잠자리 도중에도 ‘일거리’가 생겼다 하면 열일 젖혀놓고 나가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런 성향을 잘 아는 아랫사람들도 이젠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들락거리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
아스탈은 이번에도 아랫사람을 꾸짖는 대신, 바로 아버지에서 대신관의 모습으로 돌변했다. 자그만 쿠마르가 식탁 아래 무릎을 꿇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부의 세데스 델루지 쪽에 파견해 놓은 정보원에게서 긴급한 연락입니다.”
“그년이 왜?”
아스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디나도 관심이 없는 척 식사를 계속하며 한편으로는 이 보고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페스트에서의 패전 때문에 동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주변의 접촉을 피하기만 하더니 요즘은 중립적인 가문 원로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있고 쿠베가 요청한 신임 무장 선임건도 하루이틀 미루기만 하고 있습니다.”
아스탈이 식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손에서 벗어나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페 태자가 있는 감방에 찾아오는 것도 수상합니다. 오늘은 갑자기 태자에게 오락거리도 넣어주고 식사도 최대한 좋은 것으로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건 또 무슨 꿍꿍이야?”
아스탈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쿠마르가 서류를 올리며 보고를 이었다.
“군 인사건은 급합니다. 이번에 델루지 가 장군급 핵심보직 5자리가 순환 근무로 교체됩니다. 어떡해서든 우리 사람을 앉혀야 하는데 세데스 그자가 우리 무장들을 젖혀놓고 황제령 출신 중랑장급 무장들을 면담하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쿠베 그 멍청이는 대체 뭐 하고 있는 건데?”
아스탈의 화살이 대번 세데스를 맡고 있는 쿠베에게로 향했다.
“페스트의 호드르 산 전투로 잠시 그쪽 일이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전투 마무리를 맡아야 할 바에자 현신도 중상을 입었고 니딘투벨은 적에게 생포당했습니다.”
“빌어먹을, 인물이 부족해.”
아스탈이 투덜거렸다. 측근 상당수가 죽어도 부활하는 덕분에 위기에서도 빈 자리가 생기지 않은 것이 오랜 세월 교단을 버텨 온 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새 얼굴도 얼마 안 되고 인물이 항상 한정되어 있는 것이 흠이었다.
아스탈은 쉽사리 결정하기가 쉽지 않은지 턱만 괸 채 계속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옆에서 말없이 식사를 하던 이디나가 몇 번이나 그를 흘끔거리고 돌아보았지만 아버지의 결정은 평소처럼 이번에도 장고에 또 장고를 거치고 있었다.
“그냥 제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보다 못한 이디나가 결국 이번엔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생각을 방해당한 아스탈이 고개를 휙 돌렸다.
“뭐라고?”
“세데스는 죽은 아비와는 달라서 쉽게 다룰 인물이 아닙니다. 똑똑하고 현실적이라 어미를 잃은 충격에 오래 빠져있지는 않을 겁니다. 패전한 측에 미련하게 계속 붙어있을 리 없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니 일단 제거하고 다루기 쉬운 마누엘을 새 제후로 세우는 게 훨씬 현실적일 것 같습니다.”
“얘야.”
나키아가 딸의 허벅지를 얼른 꼬집었다. 어머니의 이 판단이 이디나의 이 갑작스런 만용보다 훨씬 현명했다.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냐.”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스탈이 이디나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끊어내 버렸다. 뭐라 더 말을 하려 했던 이디나는 어머니의 눈짓에 결국 말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결정을 내린 아스탈이 쿠마르에게 입을 열었다.
“쿠베는 페스트 쪽 일에서 손 떼게 하고 당장 비엔으로 보내서 세데스 그년한테 자기 처지를 제대로 상기시키라고 해.”
“협박……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더 반발하면 어쩌고요?”
“지 어미 시체도 우리 손에 있고 지 얼굴을 본 태자 놈도 우리 통제 하에 있으니 함부로 서툰 짓은 못 할 거다.”
‘멍청한 양반 같으니.’
이디나는 아버지의 우유부단함에 내심 짜증이 확 솟구쳤지만 더 이상은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이전처럼 ‘바보 행세’로 돌아간 그는 말없이 빵만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참자.’
이디나는 오늘 저녁에 있을 ‘제후군 장교 아프라시아’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울분과 망가진 자존심을 애써 달랬다.
명령을 받은 쿠마르가 자리를 비운 후, 다시 세 가족의 오붓한 오찬으로 되돌아왔지만 이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안정제를 맞고 밀리타의 곁에서 잠들었던 카렐이 눈을 떴을 때, 그가 제일 먼저 본 건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매서운 무지개빛 눈동자였다.
“밀리…….”
잠결에 밀리타인 줄로 생각했던 카렐의 눈이 어느 순간, 갑자기 확 커졌다.
“중요한 일로 떠난 줄 알았더니 고작.”
세네피스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밀리타의 어깨를 안고 있던 카렐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어머니?”
상상도 못 했던 상황에 놀라고 당황한 카렐은 혹시 악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리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하지만 분노한 세네피스의 얼굴은 분명 악몽이 아니었다.
“상께선 혹 변태십니까? 움직이지도 못 하는 환자 년을 안고 지금 대체……. 이 년은 대체 누굽니까!”
격분한 세네피스가 밀리타의 생명유지 장치를 뜯어내려 하는 모습에 잠이 확 깬 카렐이 벌떡 일어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다행히 독한 안정제를 맞고 잠든 밀리타는 카렐의 손이 떨어지자 약간 뒤척였을 뿐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잠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카렐은 악을 쓰려는 세네피스의 입을 확 틀어막고는 억지로 힘으로 밀어 병실 밖으로 향했다. 당혹스런 상황에 문가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모렌 박사도 얼른 옆으로 비켜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세네피스를 반강제로 병실 밖에 데리고 나왔지만 자다가 막 일어난 카렐의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이곳을 지을 당시 자금부족으로 카파키 가 비자금을 동원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의 존재를 귀띔해주긴 했지만 그가 직접 찾아온 건 준공 직후 호기심에 잠깐 얼굴을 보인 것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 십년이 넘게 묵묵히 모른 척 해주던 세네피스가 예고도 없이 난데없이 들이닥쳤으니 카렐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흰 잠깐 가 있어.”
병실 앞에서 웅성대던 사람들을 급히 복도 모퉁이 너머로 내보낸 카렐이 어머니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대체 여기엔 어떻게 오신 겁니까.”
“저년이 누군지부터 말씀하시죠! 제발 하루만 더 머물고 가시라는 이 어미의 애원도 매몰차게 거절하고 나가신 분이 고작 여기서 중병 환자나 끌어안고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세네피스는 어깨를 짚은 카렐의 맨손을 거칠게 쳐내며 다시 이를 빠득 갈았다.
“다른 년 품었던 더러운 손으로 절 만지지 마시란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 그 말을 어떻게!”
세네피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이번엔 아랫사람들도 상관 않고 목소리가 찢어져라 악을 썼다. 복도를 쩌렁 울리는 어머니의 고함에 당황한 카렐이 결국 그를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30년 전 교단에 납치되었던 밀리타 레즐린 부장입니다. 며칠 전 탈출하다 저렇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품 안에 묻힌 세네피스는 그의 설명에 파르르 떨었다.
“그럼 우리에게 이중첩자로 들어왔던 바로 그년 아닙니까?”
세네피스가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년 아비 행세했던 아스탈이라는 작자가 호드르 산에서 이 어미를 욕보이려 들었다는 건 압니까?”
세네피스가 옷깃을 확 벌려 보이고는 그때 아스탈에게 짓눌려 금이 간 쇄골을 내보였다. 카렐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저 꼴이 되어가며 도망쳐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요, 저 꼴로 도망쳐 온 게 가여워서 이제라도 귀인으로 들이겠다고 하시지는 않으시겠죠?”
“저 여인은…….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카렐은 ‘어머니의 이복언니입니다.’라는 말을 일단 목구멍 뒤로 꿀꺽 삼켜버렸다. 안 그래도 잔뜩 격앙되어 있는 어머니에게 차분히 설명할 수 있는 타이밍은 아닌 듯 싶었다.
“정말이죠?”
세네피스가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며 황제의 팔을 쓰다듬었다.
“세상 어떤 놈에게도 이 어미보다 더한 정을 주셔서는 안 됩니다. 아시죠?”
카렐의 가슴이 콱 막혀왔지만 일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에둘러 대답했다.
“지금도 어머니에게 드릴 수 있는 정은 다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대답이 불만스러운 듯 다시 쏘아붙이려던 세네피스는 카렐의 입술이 이마에 닿자 비로소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이 어미에겐 부족하단 말입니다.”
카렐은 세네피스의 등을 토닥여주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어머니의 끝도 없는 소유욕은 영원히 만족시켜 줄 수 없을 터였다.
“식사를 준비시키지요, 오랜만에 아침이나 함께하시죠.”
세네피스를 최대한 달래 돌려보낸 카렐은 모퉁이 너머에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모렌 박사에게 다시 다가갔다. 막 자다가 나왔는지 부스스한 얼굴의 모렌 박사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알고 여길 쫓아오신 거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갑자기……착륙 허가를 요청하셔서 저희도 놀랐습니다.”
“내 여기 있는 걸 알고 따라오셨다고?”
“아뇨, 처음엔 모르고 다른 일로 찾으신 것 같습니다. 저흰 모른 척 내빈으로 맞아드리려 했는데……폐하의 셔틀을 발견하시고는 느닷없이 계신 곳을 안내하라고 윽박지르셔서……모두가 너무 갑작스레 벌어져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모렌 박사가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카렐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10년 넘게 비밀을 지키다가 갑자기 오신 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냐.”
“그건 저도…….”
황제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모렌 박사가 이마를 짚고 자리를 빙빙 돌았다. 그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잠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어, 이게 관계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렌 박사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야근 연구원 한 놈이 유전자 검사를 하다가 약간 문제가 있었습니다. 데이터를 황실 유전자은행 자료와 비교하려고 접속을 했는데 갑자기 연결이 끊기고 오류가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황실 데이터베이스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보안국에 조사를 의뢰했더니 ‘윗선에서 막은 것 같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윗선? 아니, 황제가 여기 있는데 대체 무슨 윗선?”
카렐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황태후전에서 보안국에 접속자를 추적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카렐이 창백해진 얼굴로 세네피스가 사라진 복도 반대편을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신중하게 물었다.
“대체 누구의 유전자 조사를 하던 중이었냐.”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연구원을 추궁했는데 무얼 조사하던 중이었는지 도무지 대답을 하지 않아서 일단 감실에 처박아 놨습니다.”
그제야 무언가 떠오른 카렐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잠깐, ……혹시 흰 봉투에 가져온 갈색 머리카락 네 가닥 아니냐?”
황제의 물음에 모렌 박사가 화들짝 놀라며 도리어 되물었다.
“어떻게 아시죠?”
“이런. 빌어먹을.”
카렐이 얼굴을 싸쥐었다. 문제의 머리카락은 그가 얼마 전 ‘모렌 박사 모르게 부모를 찾아봐라’고 맡겼던 북부 길드마스터 케스난의 어린 양자 ‘발렌틴’의 것이었다.
“저어, 황태후께서 그것 때문에 오신 걸까요?”
여전히 죄인 같은 표정의 모렌 박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계속 물었다. 하지만 카렐은 창백해진 얼굴로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폐하?”
“……그 연구원은 아무 죄도 없으니 풀어줘라.”
카렐은 더 이상 모렌 박사를 추궁하지 않고 휙 돌아서서 멀어져갔다.
시라즈 별궁 지상의 호젓한 절벽 위 바오밥 나무 아래에 병사들이 큼직한 파라솔과 피크닉 테이블을 펼쳐놓는 중이었다. 병영 한쪽의 어딘지 생뚱맞은 곳에 황제와 나란히 앉은 세네피스는 마치 잔칫상 앞에 앉은 사람처럼 들뜨고 환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취사병들이 차려놓은 건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신분을 생각하면 초라하다 못해 기가 막힌 음식들이었다.
“고기가 좋아 보이네요, 갓 잡아서 내오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세네피스는 취사병들이 가져온 뜨끈한 생 양고기와 간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건조하고 선선한 아침의 사막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쳤다.
“이렇게 단둘이 식사를 함께한 게 얼마만이지요?”
세네피스는 카렐의 접시를 불쑥 가져가더니 생고기를 하나하나 먹을 만한 크기로 자르기 시작했다.
“글쎄요. 그나저나, 저야 먹는 게 빤하지만 어머니 드시긴 좀…….”
카렐은 세네피스 몫의 음식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삶은 채소와 기름진 양고기 구이, 거친 빵, 사과와 약간의 향유가 전부였다. 이 정도면 병영의 아침 식사로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명색이 제국 황태후의 식사라기엔 민망한 모양새였다. 세네피스가 워낙 갑작스레 들이닥친 덕분에 준비도 할 틈도 없던 모양이었다.
“빵 한 덩이에 기름 한 접시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 오지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이 군더더기 상전 때문에 쓸데없이 고생하면 쓰겠습니까.”
세네피스가 자른 고깃조각 하나를 손에 집어 카렐의 입에 불쑥 내밀었다.
“자요.”
“저도 손발 있습니다. 애도 아니고요.”
“이런 재미도 있어야지요.”
세네피스가 다시 고기를 권했다. 망설이던 카렐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벌리고 그가 내민 고기를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거 불공평하네요.”
세네피스는 자기 몫의 빵을 힐끔 곁눈질했다. 머뭇거리던 카렐은 하는 수 없이 장갑을 벗고는 빵을 찢어 향유에 살짝 담가 세네피스에게 내밀었다.
“갓 구워서 빵 맛은 좋군요. 이럴 땐 손끝에 혀가 있는 게 좋다니까요.”
카렐이 빵을 만지작거리며 농담을 했다. 세네피스는 그가 내민 빵을 살짝 입술로 받아먹으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잘생기고 멋들어진 애인도 아니고 고작 딸하고 이러고 계시다니, 쬐끔 안쓰러워 보인다고 생각 안 하세요?”
카렐이 다시 빵을 뜯으며 킥킥거리고 농담을 던졌다.
“사람들 풀어서 남극성당에서 알아보니 어머니를 광적으로 사모하는 남자 유생들 정말 많더군요. 그렇게 인기 좋으신 줄 몰랐어요. 익명의 러브레터가 하루 10통도 넘는다고요.”
“후훗, 왜 그런 쓸데없는 조사를 다 하셨나요.”
세네피스가 그에게 더 바싹 다가앉으며 속삭였다. 카렐이 소탈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어깨를 한 팔로 살짝 껴안았다.
“어머니가 뭐가 부족하셔서요. 이젠 즐기며 사셔야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조용히 만남 주선해 드릴 테니 말씀만 하세요. 자리 다 마련해서 소리소문없이 잡아다 드릴 테니까.”
“제가 오해한 게 아니라면 5일 전 학회 토론에서 계속 제 편을 들어주던 쉐너 가 출신 미남 유학자도 그런 비슷한 케이스겠죠?”
“…….”
“한 달쯤 전에 대제학실에 귀한 고서를 소개하러 왔던 서부 출신의 그 키 크고 잘생긴 사서 친구도요?”
“흐음.”
난처해진 카렐이 헛기침을 하며 사과 한 개를 집어 심지 째로 우걱 씹었다.
“이 어미가 세상 어느 남자에게도 만족 못했었다고 말씀드렸었던가요.”
“아버지는 빼고요.”
카렐의 대답에 세네피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는 고깃조각을 하나 더 집어 카렐에게 내밀며 짧게 말을 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랍니다.”
“…….”
세네피스의 표정은 이번엔 무척이나 진지했다. 잠시 경계를 했던 카렐은 다시 그에게서 고깃조각을 받아 씹기 시작했다.
세네피스는 고기의 피가 묻은 손가락을 빤히 보며 말했다.
“황상께는 죄송하지만 아무리 잘생기고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도 전부터도 아무 느낌이 없었어요. 같이 자란 언니들에게서 어떤 남자가 멋지다느니, 가슴이 설레느니 하는 말을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못 했죠. 다 자라서 첫 사람을 만날 때까지.”
카렐은 ‘당신은 그럴 수밖에 없답니다.’ 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첫 사람이 누구였을지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남자들 많이 만나셨다고 들었는데요.”
카렐이 빵을 향유에 적셔 이번엔 세네피스의 접시에 놓아주며 가볍게 말을 건넸다.
“남극성당 박사 끝낼 무렵에 가문 어른들 강요로 약혼 상견례에 끌려갔죠. 그날 남자와 처음 잤어요. 끔찍하게 아프고, 피를 너무 많이 쏟아서 결국 새벽엔 병원에 실려갔죠. 의사는 어떤 놈에게 이리 심한 강간을 당했냐고 할 정도였고요. 끔찍한 기억이긴 했지만 덕분에 그 뒤로는 강제로 상견례 끌려간 일은 없었으니 나름 넘어야 할 고비였을지도 모르겠어요.”
세네피스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도리어 오기가 나서 한동안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났어요. 수많은 사람들을 겪다 보면 내 맘을 흔드는 사람이 하나라도 걸리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지만 모두가 하룻밤으로 끝났죠. 날 사모한다고요? 하룻밤 지내고 나도 그런 말을 할지 정말 궁금하네요. 목각인형 끌어안고 자는 느낌이었다는 말 듣는 기분 아세요?”
“아버지는 빼고요.”
카렐이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세네피스는 카렐이 앞접시에 놓아준 빵 조각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래요, 그 남자는 날 소 닭 보듯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최고의 선물을 남겨줬죠.”
세네피스가 고개를 돌리며 카렐의 어깨에 살며시 얼굴을 기대어왔다. 카렐은 다시 빵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넬론 황제와도 각방을 쓰셨나요?”
“멍청한 사내가 그거 하난 빨리 눈치 채더군요.”
세네피스가 허탈한 듯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가 황후에서 폐위되고 감옥에 들어간 날…….”
카렐이 얼른 세네피스의 입술을 막았다.
“말씀 안 하셔도 압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뇨, 들으셔야 됩니다.”
세네피스가 야무지게 입술을 악물며 말을 이었다.
“가디언 쿠베 놈이 날 남자 간수 열댓 명 사이에 던져놓았어요. 아니, 이름만 간수였지 잡범 죄수 중에 악질들을 골라내 정치범들을 괴롭히게 맡겨 놓은 자들이었죠. 토로 경과 구완 경 같은 옛 심복들을 끌어내 옆에서 보게 하고 그 짐승들이 차례로 날 강간했죠. 그래요, 그땐 정말로 강간을 당했어요.”
“……압니다.”
카렐의 손에 쥐고 있던 빵 조각이 그대로 짓눌려 납작해졌다.
“쿠베 놈은 옆에서 웃어대고, 토로 경과 구완 경은 울부짖고. 난 아무 생각도 없었죠. 그저 고개를 돌리고는 전에 겪었던 남자들과 억지로 겪었던 일과 똑같은 거라고 계속 스스로에게 세뇌를 시키고.”
“…….”
“나중에 알았지만 오넬론 그자가 천장에 뚫은 창구멍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더군요. 그 일을 말리려 했던 사람이 근위대장 베흔 하나뿐이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죠? 황실의 품위가 망가진다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에서였지만.”
카렐이 떨고 있는 세네피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자들은 남김없이 잡아들여 산 채로 늑대밥으로 던져줬습니다. 쿠베 놈도 곧 대가를 치를 거고요. 이젠 다 잊어버리셔도 됩니다.”
“아뇨, 죽은 자들은 신경 안 써요.”
세네피스가 카렐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절 안으려는 남자들마다 그자들의 얼굴로 보이는 게 문제죠.”
카렐에게 속삭이는 세네피스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도 제가 다른 누군가에게 안기길 원하시나요?”
세네피스의 따뜻한 손끝이 카렐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고 내려갔다.
“그렇게까지 해서 황상의 맘이 편해지신다면야 그럴 수 있지만……진심으로 그걸 원하시나요?”
세네피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세네피스의 젖은 눈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던 카렐이 한참만에 어렵게 대답했다.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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