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20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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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고 류한 경도 죽었다는 말을 전해들은 세데스는 자신이 반란에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았던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반란에 병력을 보내지도 않았고, 한 일이라고는 굶주린 이그나토 가 민간인들에게 ‘인도적인 식량’을 지원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오늘도 여느 날처럼 슈발츠발트의 깊은 숲에 위치한 교단의 비밀 아지트에 와 있었다. 이곳의 교단 요원들은 여느 때처럼 그가 오든 말든 이제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도 이제 슬슬 발을 빼야 하나.”
어머니 오르테의 관 앞에 혼자 선 세데스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국 회의가 며칠 안 남은 상황에서 패전으로 궁지에 몰린 교단 편에 한 발을 걸친 상황이 어딘지 불안하고 영 맘에 들지를 않았다.
“태자가 문제군.”
그는 어머니의 관 위에 한 손을 얹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 교단이 이겼다면 나름 좋은 패가 되었을 주페 태자가 교단과 거리를 두려는 지금은 도리어 발을 빼는 데 제일 무거운 걸림돌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겐 한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헌병.”
그는 뒤에 서 있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가문 헌병들이 종장의 부름에 일제히 부동자세를 잡았다.
“어머니를 밖으로 모셔야겠다.”
“예?”
놀란 헌병들이 서로 마주보았다.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따로 장소를 구해 놨다. 지상에 셔틀 대 놨으니까 그리로 모셔.”
세데스는 재차 그들에게 바깥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헌병들은 죽은 종장 어머니의 관을 급히 짊어지고 일어섰다.
세데스는 어머니의 관을 뒤따라 이 습하고 침침한 방을 급히 나섰다.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의 시신을 교단 시설에 둔다는 것이 내내 맘이 편치 않았었다. 그의 치기와 반항을 모두 받아주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현실에서 이제 전보다 훨씬 신중하고 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 회의만 끝나면 장례를 치러드릴 테니 제발 용서해 주세요.’
세데스는 유리뚜껑 밑으로 보이는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며 몇 번이고 같은 다짐을 반복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변변히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관에 실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치 빠른 헌병대 장교가 세데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지하에 있는 태자는 어찌할까요? 이네들이 제후님께 넘겨드린 것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관을 따라가던 세데스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태자는 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흰 관을 모시고 먼저 올라가 있어.”
헌병들에게 어머니 관을 올려보낸 세데스는 좀 더 지하에 있는 유리방 감옥으로 돌아섰다. 복잡한 계단을 빙빙 돌아 내려가며 그도 만감이 교차했다. 교단에서는, 아니 쿠베가 섭섭히 여길지 모르지만, 기회주의자라는 비난 혹은 남자 하나 따위보다는 종장으로서 가문을 온전히 수호하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감방에 내려온 세데스는 문가를 지키는 헌병에게 손짓했다.
“열쇠 들고 따라와.”
주페의 감방 문 앞에 도착한 세데스는 안을 들여다보며 모질게 마음을 다졌다. 죽은 어머니가 한때 자신의 신랑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그 소년은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혼자 직소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었다. 어제 그가 넣어주라 지시했던 ‘오락거리’인 모양이었다.
“엉?”
태자도 유리 밖 방문객의 존재를 느꼈는지 반쯤 맞추다 만 퍼즐에서 손을 떼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문 열어라.”
세데스는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꽉 쥐었다. 그리고는 문이 열리자마자 사뭇 굳은 얼굴로 안에 성큼 들어섰다. 마치 기습하듯 들이닥친 세데스에게 주페가 엷게 웃음을 보였다.
“덕분에 식사가 한결 나아졌소. 경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겠지요?”
나름 모질게 다져놓았던 세데스의 맘은 소년의 해맑은 미소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당초 소년을 윽박지르며 끌어내려 했던 세데스는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낮추었다.
“저와 어디 좀 가셔야겠습니다.”
소년의 표정에 기대와 공포가 동시에 번졌다.
“어디로?”
“가시면 압니다.”
주페는 맞추다 만 퍼즐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는 가져가도 되나?”
주페의 교묘한 물음에 세데스가 당황했다. 이곳에 돌아올 건지, 아닌지를 떠보는 속셈이 분명했다.
“가져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도와드리죠.”
세데스는 바닥에 함께 쭈그려 앉아 그의 퍼즐 조각들을 상자에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했다. 직소퍼즐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림이 없고 제각각 다른 형태의 수천 개 작은 조각들뿐이었다.
“무슨 퍼즐이 이렇답니까?”
“그림을 지워서 이렇다네.”
“그림도 없이 퍼즐을 맞춥니까?”
“형태만으로 맞추는 거야. 조각들은 각 변의 모양이 모두 다르니까 각각의 경우의 수를 맞춰보면 가능하거든.”
순간 말문이 꽉 막힌 세데스가 소년을 휙 돌아보았다. 그림이 있어도 맞추기 힘든 수천 개의 퍼즐을 모양만으로 맞춘다는 게 과연 가능할지 쉽사리 믿어지지를 않았다.
‘발현자?’
세데스는 퍼즐 조각들을 상자에 주워 담는 소년의 곱고 선한 얼굴과 뽀얀 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잠시 넋이 팔렸던 그는 애써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그가 퍼즐을 함께 가져가려는 건 다른 이유는 없었다. 곧 죽여 없앨 소년에게 벌써부터 공포를 주고 싶지는 않아서, 그리고 시체를 소각로에 태울 때 무언가 함께 넣어주는 게 그래도 낫지 않을까 싶어서일 뿐이었다. 그도 내키는 건 아니지만, 교단과 손잡았던 흔적을 지워내려면 이젠 다른 수가 없었다. 그거 넣어 준 오락거리도, 하루 동안의 훌륭한 식사도 살인을 준비하는 마지막 호의일 뿐이었다.
“따라오십시오.”
세데스는 퍼즐 상자를 들고 앞장서 나섰다.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주페도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그를 따라 감방을 나섰다.
“나……송환되러 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압니다.”
앞장서던 세데스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날 죽이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장소만 옮기려는 건지 궁금해서였소. 그건 물어봤자 안 알려줄 테니까.”
“가시면 압니다.”
세데스는 주페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일단 앞장서 나아갔다. 감방은 쌀쌀했지만 소년의 손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세데스는 자꾸 맘이 약해져 미칠 것 같았다.
감방을 빠져나와 막 계단을 오르려던 그는 위에서 몰려 내려오는 사람들의 인기척에 멈칫하며 허리춤의 칼자루를 붙들었다.
“어딜 가십니까.”
아직 페스트에 있는 줄로 알았던 쿠베의 모습에 세데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황실 추격대에 쫓기느라 전투 때 입었던 옷을 아직 빨지도 못했는지 온몸이 흙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얼굴엔 잔뜩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그를 뒤따라온 교단 병사들의 표정들도 마찬가지로 심상치 않았다.
“어딜 가시냐고요.”
손에 정체모를 큰 봉지를 든 쿠베가 세데스의 계단 위를 막아서고 위협적으로 따져 물었다. 세데스도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태자는 어차피 내게 넘겨준 것 아니었나? 왜 멋대로 막는데?”
“이걸 보고도 제가 막지 않기를 바라시나요?”
쿠베는 손에 들고 온 봉지를 휙 내던졌다.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봉지 안에서 무언가 검붉은 것이 데구르르 굴러나왔다.
“익.”
창백해진 세데스가 주춤거리며 물러나 주페의 눈부터 얼른 가렸다. 방금 전, 어머니 오르테의 관을 들려 보냈던 헌병장교의 잘린 머리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주페를 구석으로 밀어놓은 세데스가 성을 내며 쿠베의 멱살을 붙잡으려 했지만 쿠베의 손이 그의 턱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힘에서 밀린 세데스가 벽에 세게 부딪혀 짓뭉개지며 짧은 비명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저질러놓은 일이 장난인 줄 알아? 이 풋내기야.”
쿠베가 세데스의 입을 꽉 틀어막고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세데스가 그를 떨치려 발버둥을 쳤지만 특등급 가디언을 그의 힘으로 당해내긴 역부족이었다.
“이제와 우릴 내치려고?”
숨이 꽉 막힌 세데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네 어미 시체는 여길 못 떠나. 이 꼬맹이도.”
세데스의 큰 눈이 쿠베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쿠베가 그에게 코를 맞대고 작게 말했다.
“넌 친어미를 죽이고 태자를 납치한 극악한 흉악범이니까.”
고통스러워진 세데스가 부들부들 떨며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가까스로 대꾸했다.
“닥쳐……우리 엄마는 암살을…….”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세데스에게 쿠베가 음산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봐, 네 어미를 죽인 비서가 살인을 하기 전에 남긴 자필 유서가 우리 손에 있는데? 네가 그 녀석을 잠자리로 끌어들이고 그걸 약점 잡아서 제 어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뭐?”
“그게 가문 원로들 손에 들어가면 어찌될지 알지?”
“네놈이, 네놈이 설마……우리 엄마를…….”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해진 세데스가 대꾸하는 것조차 잊은 채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지금껏 어머니의 살해 혐의를 놓고 별의별 용의자를 다 따져봤었지만 사랑하는, 아니 사랑했던 이 남자를 의심할 생각만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었다.
“네가 시킨 거였어?”
“네가 죽여 놓고 무슨 소리야?”
쿠베가 실실 웃기 시작했다.
“네가 우리와 손을 끊으려 했다가는…… 네 정치생명은 물론이고 진짜 생명까지 끝나는 줄 알아.”
“씨이!”
그동안 철저히 속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세데스가 악 하고 고함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쿠베를 거칠게 밀어냈다.
“이 살인자 새끼!”
이성을 잃은 세데스가 칼을 확 빼들며 힘껏 휘둘렀다. 그의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쿠베가 주춤거리며 물러났지만 세데스의 칼끝이 그의 턱과 코를 대각선으로 확 베어내며 공중을 휙 돌았다.
“이년이!”
얼굴을 베인 쿠베가 칼을 휘두르는 세데스의 어깨를 한 팔로 거칠게 낚아챘다. 그의 무쇠 같은 팔에 걸린 세데스는 공중으로 붕 치솟았다가 단단한 돌바닥에 쿵 소리를 내고 내리꽂혔다. 쿠베는 쓰러진 세데스의 명치를 무릎으로 꽉 내리누르고는 주먹으로 턱을 사정없이 후려졌다.
“흐읍!”
충격을 받은 세데스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칼을 쥔 그의 손이 경련으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놈! 뭐 하는 짓이냐!”
무심코 고개를 든 쿠베의 눈앞이 순간 번쩍 했다. 소년 주페가 수갑을 찬 채 양손을 깍지 끼고 휘두른 주먹이 관자놀이에 명중하면서 중심을 잃은 쿠베가 옆으로 벌렁 쓰러졌다. 작은 꼬마인데도 웬만한 어른 시민보다도 훨씬 강하고 매운 주먹이었다.
쿠베를 밀어낸 주페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세데스에게 손을 뻗었다.
“세데스 경? 괜찮소?”
세데스를 일으키려던 주페에게 교단 근위대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억지로 힘으로 떼어놓았다.
“씨이! 이젠 저 꼬마까지!”
얼굴을 얻어맞고 화가 솟구친 쿠베가 엉금엉금 일어나 주페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배를 차인 주페가 거친 비명을 지르며 세데스의 가슴 위에 나동그라졌다.
“꼬마 놈은 감방에 도로 쳐 넣어!”
쿠베가 씩씩대며 이번엔 쓰러진 세데스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속았다는 분통함과 자책감에 휩쓸린 세데스는 바닥에 쓰러진 채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이 자리에서 그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니 지켜주려 시도라도 했던 건 저승에 있는 어머니도, 가문도 아닌, 잠시나마 그가 죽이려 했던 작은 소년 뿐이었다.
주페를 끌어내고 씩씩대던 쿠베가 쓰러져 있는 세데스의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다시 말하지만, 딴생각 했다가는 끝인 줄 알아. 우린 너 따위 없어도 섭할 것 없거든? 너 대신 바보 마누엘 숙부 구워삶아도 손해 볼 거 하나도 없어. 그나마 내가 너한테 정이 남아서 널 계속 그 자리에 앉혀놓으려는 거니까 내 말 잘 들어.”
“어머니도 죽여 놓고 대체 뭘 더 원하는데?”
“별거 아냐. 제국회의에 결석하고 그 시간에 네 제후군으로 황실의 남부파견군을 공격하면 돼. 같은 시간에 우리 병력은 제국회의장에 모인 제후들을 싹 쓸어서 쑥대밭을 만들 테니까.”
“제후들을 다 죽인다고?”
세데스가 눈을 크게 뜨고 씩씩거렸다. 쿠베의 요구대로라면, 제국은 제국회의 시간에 맞춰 전국적인 내전에 빠진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 규모라면 호드르 산의 작은 반란 정도는 댈 바도 아닌, 역사상 본 일도 없는 큰 전쟁에 휘말릴 터였다.
“성공하면 넌 황제가 될 거야.”
쿠베의 사탕발림도 이젠 전혀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황제에게 ‘약간 저항하려 했던’ 그의 치기어린 시도는 결국 원치도 않았던 반란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흘러가고 있었다.
카렐을 태운 작은 임대 셔틀은 북부 쿠트라스의 대기권을 가로질러 바위산이 군데군데 널린 적도 평원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곳은 1년 내내 비도, 거친 바람도 없는데다가 정지(整地)공사조차 필요 없을 만큼 단단한 바위 지반의 평지도 많았고, 깊은 지하엔 과거에 이곳이 바다였을 때 스민 물도 제법 많았다.
게다가 주변에 산재한 수많은 철광과 금속 광산, 제련소와 제철소가 필요한 원료까지도 거의 무한대로 공급해 주고 있으니 이곳은 그 어떤 거대한 구조물도 기간에 맞춰 척척 만들어낼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보니 이곳이 제국을 통틀어 중공업 기지와 조선소들이 가장 선호하는 입지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풍요로운 곳이 과거엔 트라카 교단과 하마타의 근거지였지만 하마타와 카파키 가의 몰락이 이어지면서 알짜배기 사업장들이 거의 아스탈과 하마피타의 손에 넘어가 지금의 교단에 최대의 돈줄이 되어주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교단 소유가 된 곳들도 표면적으로는 종교색을 모조리 지워낸 후 이런저런 조합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성직자 로브 대신 사업가의 비단포로 갈아입은 이들에게 제후들끼리, 혹은 중앙의 정치싸움 따위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정치 현안에 무관하게 철저히 돈에만 움직였고, 사업에 있어서는 지극히 중립적이었다.
심지어 북부제후들을 몰락시켰던 2차 혼란기 당시 서부와 남부가 운용하던 군용 함선도 대부분 북부에서 건조되어 수출된 것들이었다.
그런 중립성이 이곳 사업가들이 돈만 아는 버러지로 욕을 먹은 이유였고, 한편으로는 제국의 제후들에게 신뢰를 얻어낸 무기였지만 유일한 흠집으로 남아있는 것이 바로 이 [99번 중공업 컴플렉스]였다.
이곳은 한때 제국에서 가장 큰 군용 수송선과 프리깃 제조창이었지만 이곳에서 건조된 ‘황제 전용 프리깃’이 정체불명의 사고로 스페이스에서 폭발하면서 그 명성도 함께 박살나고 말았다. 심지어 안전 구역에 피신했던 세나우스3세 오넬론 황제와 수많은 측근들까지도 형체로 못 알아볼 만큼 재가 된 것이 문제가 되어 근위대의 손에 강제 폐쇄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고, 지금은 일반의 출입이 봉쇄된 채 오랜 기간 버려져 있었다.
그렇게 이젠 거대한 유령의 집이 되어버린 심야의 조선소 위를 카렐이 모는 작은 셔틀이 한 바퀴 빙 돌았다. 조선소는 먼 과거에 심해저였던 U자 모양의 우묵한 분지에 십여 개의 대규모 도크와 버려진 건물들, 그리고 수십 년간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 언뜻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상태가 좋은 거대한 크레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 위치에 가 있지?”
“예, 물론입니다.”
카렐의 물음에 자이납과 루스탐의 반응이 바로 돌아왔다. 자이납은 이디나와의 약속장소 바로 옆에 숨어 상황을 녹화하며 지켜보는 중이었고, 루스탐은 조선소의 높은 크레인 꼭대기에서 스캐너로 주변에 혹 다른 자들이 없는지 감시하며 숨어있는 중이었다.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움직임 없었나?”
“1번 도크로 와 보시면 저희보다 더 놀라실 것 같은데요.”
자이납다운 반쯤 장난 섞인 대답이었다.
“명색이 황제 목숨이 걸렸는데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정말이라니까요. 직접 보세요.”
“이놈이 진짜.”
카렐이 버럭 짜증을 냈다. 안 그래도 이디나가 오늘 아침 ‘1번 도크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문 닫은 조선소의 휑한 도크에서 대체 뭘 하자는 건지 기가 막혀했던 터였다.
카렐이 탄 셔틀은 절벽 모퉁이를 돌아 이 조선소에서 가장 큰 1번 도크로 향했다.
“엇.”
카렐이 움찔했다. 이디나의 말이 헛말은 아니었는지, 그곳은 ‘휑하니 텅 빈’ 도크가 아니었다. 꽤 상태가 좋은 도크엔 어딘지 눈에 익은 초대형 항공 수송선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설마?”
카렐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난 제위전쟁 막판, 갑작스레 행방불명되면서 카렐 동맹군의 보급을 마비시키고 패전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바로 그 선종이었다.
당시 잃어버렸던 15척 중 중형 8척과 대형 3척은 케스난의 활약으로 전후에 어렵사리 되찾았지만 4척은 끝까지 찾아내지 못했었다. 조금 떨어진 2번과 3번, 4번 도크에도 똑같은 선종의 수송선들이 선명(船名)이 지워진 채 줄줄이 정박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정말로 놀라게 한 건 그보다 훨씬 작은 것이었다.
“저건 또 뭐야?”
수송선 상갑판의 주기장에 세워져 있는 셔틀을 본 순간, 카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밤중이지만 그 중간에서 번쩍이는 형상만은 유독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거봐요, 제가 놀라실 거랬죠.”
그곳엔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특이한 화살촉 모양의 셔틀―언젠가 아트위야의 궁전을 기습했을 때 보았던―이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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