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21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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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저걸 타고 왔나?”
반쯤 멍해진 카렐이 여전히 시선을 셔틀에 고정한 채 물었다.
“웬 남자하고 둘이 왔던데요? 군인 같지는 않던데 키도 학장님만하고 정말 끝~내주는 미남이었어요. 세상에 고작 셔틀 조종사라는 게 아까워 돌아버릴 정도라니까요.”
“우베 빼면 네 눈에 누구는 미남이 아니었냐?”
“정말이라니까요! 학장님만큼…… 아니, 그보다는 아주아주 쬐끔 덜한 금발 미남이라니까요!”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여자가 ‘셔틀을 타고 가야 하니 조종할 사람 한 명이 더 있는 걸 이해해 달라.’며 쪽지를 보냈을 때만 해도 크게 염려를 안 했지만 셔틀을 본 순간 무언가 묘한 불안감이 덜컥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폐하, 오늘 약속 취소하고 그냥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이번엔 신중한 루스탐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카렐은 셔틀을 보며 군침만 삼키고 있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저걸 타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 교단의 셔틀 제조창에서 먼발치로만 보았던 ‘엄청난 발명품’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아니 잘만 하면 타 볼 수도 있을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괜찮다. 루스탐 넌 거기서 계속 스캐너 지키고 있고, 자이납 넌 상갑판 선수(船首) 쪽에 숨어서 혹시 누가 접근하지 않나 눈으로 확인하고 있어. 위장포라도 입고 접근할지 모르니까.”
“그런데 제가 보는 것보담은 폐하 눈이 훨씬 빠를 텐데요.”
“이놈의 칼라렌즈 때문에.”
카렐이 짜증을 내며 눈에 낀 푸른색 렌즈를 더듬었다. 신분을 감추려 어쩔 수 없이 끼기는 했지만 일반인보다 훨씬 넓은 파장대를 보는 그에게 렌즈는 평상시에 비해 시야를 심하게 왜곡시키곤 했다.
카렐은 셔틀을 몰아 문제의 셔틀 바로 옆에 조심스레 착륙시켰다. 엔진이 꺼지지가 무섭게 셔틀에서 훌쩍 뛰어내린 카렐이 두 대의 셔틀을 비교하며 혀를 찼다.
“제국 황제 꼬락서니 한 번 볼만하네.”
어디서도 눈에 확 띌만한 깜짝 놀랄 모양새의 최첨단 셔틀 바로 옆에 그 절반 크기나 될똥말똥한 싸구려 소형 렌트 셔틀을 세워놓으니 그 꼴이 더 안 되어 보였다.
“이런 멋진 물건을 대체 누가 만든 거지.”
주변에 누가 없는지를 얼른 확인한 카렐은 자신의 얼굴이 거울처럼 그대로 비치는 셔틀을 아주 조심스레 쓰다듬어 보았다. 13척(39m) 정도 길이의 이 아름다운 셔틀 동체는 모나게 돌출된 부분이 하나도 없는 매끄러운 곡선이었고, 날카로운 앞쪽부터 꽁무니까지 마치 거대한 물방울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노출된 엔진이 보이지 않는 걸 보아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추진체를 탑재한 것이 분명했다.
“셔틀광 학장이 보면 완전히 미치겠군.”
셔틀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본 카렐은 주변을 재차 확인하고는 안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첨단을 달리는 겉모양에 비해 내부는 좁고 단순했다. 속력을 위해 중량을 최대한 줄였는지 고급스런 편의시설은 거의 생략되어 있고, 조종석을 빼면 따로 구획도 되어 있지 않았다. 캐빈에는 완충장치가 몇 겹이나 달린 의자 6개와 테이블, 수납장 정도가 전부였다.
용기를 낸 카렐이 더 안쪽을 둘러보았다. 셔틀엔 당장 출발할 수 있도록 동력은 물론이고 조명과 각종 장치들도 모두 켜져 있었다. 카렐은 조종실에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게 뭐야.”
조종실 계기판은 그가 아는 보통의 셔틀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렇지만 주조종석 옆 작은 수납장에는 마치 보란 듯 ‘간이 매뉴얼’까지도 떡하니 놓여 있었다. 얼른 매뉴얼을 집어 후루룩 넘겨 내용들을 초고속으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카렐은 자신이 발현자라는 것을 정말로 하늘에 감사했다.
책 내용을 얼른 머리에 넣고 계기판을 다시 확인해 보니 셔틀 1등급에 프리깃 수송선 면허까지 있는 그의 조종실력 정도면 잘만 하면 서투르나마 띄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조금 낯설 뿐 조종법 자체가 완전히 다른 건 아니었다.
“그냥 이걸 가져가?”
카렐이 군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맘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조종석에 앉아 이것을 몰고 도망치고 싶어 손발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이 셔틀을 탈취하기만 한다면 제국 황실의 항공 기술을 수십 년은 앞으로 당겨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번 아트위야의 궁전을 덮쳤을 때 바로 이 셔틀 한 대를 추락시키기는 했지만 나중에 건진 건 산산이 흩어져 원형 복원은 완전히 불가능한 수많은 파편들―그나마 인근에서 추락한 다른 셔틀의 것들과 뒤섞여 버린―과 조각조각난 몇 구의 시체 뿐이었다.
시체라기보다 살덩이에 가까운 것들 사이에서 아스탈의 딸로 추정되는 여자의 머리 일부와 손발도 발견되었지만 아스탈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 정도 외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동승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는 근친혼이 많은 세대 반복된 것으로 보이는 금발 남자의 것도 있었지만 마구스인지, 아니면 그냥 마구스 혈통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조종간에 손끝을 댄 채 한참을 고민한 카렐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당장은 이런 셔틀에 목매기보다는 그 여자를 확실히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았다. 얻어 탔든 직접 탔든, 이 셔틀을 타고 올 정도라면 이디나라는 이 여자가 자신의 예상보다 교단 수뇌부에 훨씬 더 가까운 건 분명했다.
‘그놈들 때려잡으면 어차피 셔틀이야 따라오겠지.’
카렐은 미련을 애써 떨쳐내고 셔틀에서 나섰다. 그리고는 주기장과 이어진 브리지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카렐이 까마득히 높은 수송선 브리지를 올려보았다. 복잡한 수송선 내부라면 기습을 당할 가능성도 훨씬 높은 데다가 하다못해 이디나가 ‘은밀한 요구’를 해 올 가능성도 훨씬 높았다. 카렐도 그 여자가 어딘지 알 수 없게 끌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선을 넘고픈 맘도, 남자로 위장한 상황에서 그럴 수도 없었다.
“엇.”
몇 걸음 가지 않아 브리지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카렐은 얼른 무기벨트에 손을 가져가 자리에서 경계 태세를 잡았다. 랜턴 불빛에 주변을 둘러보던 여자가 어둠 속에서 보이는 덩치 큰 형상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오셨어요? 왜 안 들어오시고요.”
이디나가 바닥에 떨어뜨린 랜턴을 얼른 주워들고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지나치리만큼 요란스럽게 차려입었던 지난번 클럽에서의 만남과는 달리 단순하지만 세련된 원피스에 장신구도 딱 필요한 만큼만 했고 화장도 한 듯 만 듯 자연스러웠다.
매부리코에 비쩍 마르고 뾰족한 턱은 어차피 지난번 같은 진한 화장으로도 커버가 되지 않았으니 이번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조금 늦으셨네요.”
“처음 본 신기한 셔틀이 있어서요.”
카렐이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셔틀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당신 건가요? 경주용 같아 보이는데.”
“아니에요, 제가 그런 게 어딨겠어요. 믿을만한 친구 셔틀 빌려 타고 왔어요.”
이디나가 뒤따라 나오는 큰 키의 남자를 가리켰다. 브리지 안쪽에서 나타난 장신의 남자는 방금 본 셔틀만큼이나 카렐을 깜짝 놀라게 했다. 어둠 속에서 서 있었지만 남자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카렐의 눈에 대낮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허, 자이납이 잘못 본 건 아니네.’
남자는 자이납의 말대로 6척 반(195cm)이나 되는 호리호리하고 큰 키에 선명한 푸른 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대단한 미남자였다. 제위 전쟁 때 죽은 코리온의 옛 연인 샤드니가 울고 갈 만큼, 말 그대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였다.
남자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카렐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건넸다.
“셔틀 좀 볼 줄 아시는군요. 불릿이라는 놈이죠.”
남자의 억양은 북부보다는 남부, 그것도 비엔이나 이베르 쪽에 더 가깝게 들렸지만 워낙에 제국 전역의 혈통이 잡탕인 북부다보니 깊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불릿?”
“멋있죠? 본 일은 없지만 제국 최고 미녀라는 황비 네페티보다 저놈이 몇 배는 더 아름다울 겁니다.”
남자가 웃음을 지으며 카렐의 눈을 똑바로 올려보았다. 카렐의 눈빛을 전혀 기죽지 않고 똑바로 보는 모양새가 평범한 일개 셔틀 조종사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네페티 이야기에 발끈해 뭐라 반박을 할 뻔했던 카렐은 바로 입가에 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이디나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순전히 가식적인 미소를 지은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여자의 얼굴은 희한하게도 지난번 봤을 때보다 분명 예뻐 보였다.
“이런 매력적인 여인을 태우지 않았다면 멋진 셔틀도 그저 깡통일 뿐이죠.”
“어쩜 빤한 거짓말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그럴싸하게 하세요.”
얼굴이 발그스레해진 이디나는 얼굴을 만지는 카렐의 손등을 무심코 짚었다가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맨손으로 만져주시면 훨씬 좋았을 텐데. 이게 뭐에요.”
당황한 카렐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이디나가 그런 카렐의 팔을 가슴에 살짝 껴안으며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이젠 둘만 있을래. 태워줘서 고마워. 나중에 봐.”
이디나는 그 금발 남자에게 가 보라며 눈짓을 보냈다.
“이따 보자. 이디나.”
남자는 이디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셔틀에 훌쩍 뛰어올랐다. 잠시 카렐의 넋을 빼앗았던 셔틀은 지난번에 봤던 것처럼 공중으로 소리도 없이 떠올라서는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지평선 너머로 휙 사라졌다. 동시에 저 셔틀을 그토록 손에 넣고 싶었던 카렐의 바람도 함께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셔틀의 조명까지 사라지면서, 갑판 위는 그가 든 작은 랜턴 불빛을 빼면 온통 암흑이었다. 반쯤 넋 나간 얼굴로 셔틀이 떠난 자리를 쳐다보는 카렐의 어깨를 이디나가 살며시 짚었다.
“혹시 저 녀석하고 무슨 일 있었는지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
카렐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여자에게 다시 관심을 돌렸다.
“설마요.”
“혹시 오해하셨을까봐 말씀 드리는데요 ……저 녀석 남자만 좋아해요.”
“풉.”
카렐이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불쌍한 자이납, 또 헛발질했군.’
맘 같아서는 ‘그러니 저걸 감히 네페티와 비교하지.’라고 비웃고 싶었지만 그 말까지는 참기로 했다.
“그런데 저게 그리 신기하세요? 저보다요?”
“멋지고 빠른 셔틀은 남자의 로망이거든요.”
능청스레 대답하던 카렐은 자신의 귓가를 더듬는 이디나의 손끝에 멈칫하며 놀랐다.
“그래도 셔틀 얘기는 제 앞에선 그만 해요.”
어둠 속에 선 이디나는 귓불이 거의 없는 그의 칼귀를 마치 확인하듯 몇 번이나 계속 만지작거렸다. 계속 귀를 만지는 그의 손을 떼어낼까 고심하던 카렐은 그 정도는 용납해 주기로 했다.
“기다리기 너무 무서웠어요. 버려진 함선이 밤중에 이렇게까지 무서운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고작 셔틀 따위에 그렇게 관심 두시기예요?”
이디나가 랜턴을 끄고 카렐에게 가슴을 바싹 붙여왔다. 귓불에 이어 카렐의 목을 쓰다듬으려던 이디나는 턱밑까지 바싹 조여놓은 목깃에 걸리고 말았다. 이디나는 목깃 단추까지 풀려 했지만 카렐의 손이 이 성급한 아가씨의 손등을 살짝 떼어놓았다. 지나치리만큼 적극적인 이 여자에게 더 이상 접근을 허용하는 건 위험할 듯 싶었다.
“서두르지 말고요.”
카렐은 어깨에 걸친 두툼한 망토를 벗어 움츠러든 이디나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추운데 안에 들어가죠.”
카렐을 따라 브리지 안으로 향하던 이디나는 자신의 할룩스에 들어온 새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곳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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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에 손 안 댔더군. 괜히 자폭장치 다느라 고생만 했잖아.
수송선에 놀라는 기색도 없던데 정말 그놈 맞는 거야?
맞으면 당장 헤네티 투입하지 않고.
-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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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모르겠으니 몇 가지 더 확인하고.
내가 알릴 테니 기다려.
-이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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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쿠트라스에 간 동안 수베르의 시라즈 별궁에 남은 니사는 밀리타의 목에 꽂은 보조 호흡장치를 떼어내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 동안을 이 갑갑한 중환자실에 묶여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했던 밀리타는 아직은 의식이 온전치 않은지 눈을 가늘게 뜬 채 멍하니 천장만 올려보고 있었다.
“괜찮은가요, 델타 밀리타.”
밀리타는 아직 말을 하기 힘든지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끄덕거렸다. 니사를 보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언가 찾는 듯 계속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황상께선 중요한 볼일로 다른 곳에 가셨습니다.”
주변을 애타게 찾던 밀리타는 맥 빠진 얼굴로 병상 위에 축 늘어졌다.
“저보고 당신 회복하는 걸 계속 지키고 있으라 하셨고요.”
밀리타가 뭐라 답하려 했지만 아직 목이 온전치 않은지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니사는 그를 조금 일으켜서는 입에 물을 흘려주었다.
“어젯밤 내내 당신 옆을 지키셨죠. 그분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신데.”
니사는 ‘새벽에 황태후에게 들켜서 어쩔 수 없이 나가셨다.’라는 말은 일단 빼기로 했다.
“알아.”
밀리타가 쉬고 걸걸해진 목소리로 꺼낸 첫 말은 꽤나 냉담했다. 하지만 니사는 그의 이런 말투에 도리어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제대로 회복하고 계신 게 분명하니.”
발끈한 밀리타가 니사를 대뜸 흘겨보았다. 그는 이 짜증스런 라이벌과의 신경전을 일단 접고 자신의 행색부터 확인했다.
“꼴이 엉망이네.”
밀리타가 여윈 손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듣기싫게 갈라진 목소리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얼굴은 더하겠지.”
니사가 기다렸다는 듯 거울을 쑥 내밀었다. 그의 이 과잉친절에 속이 확 꼬여버린 밀리타가 다시 눈을 흘겼다. 니사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황상께선 아름답다고 하시던데요. 하기야, 눈에 콩깍지 쓰고 계신 분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그렇지만. 아참.”
맘껏 빈정거리던 니사는 무언가 생각난 듯 얼른 할룩스를 집었다.
“그분께서 깨는 대로 연락 달라고 하셨으니 직접 얘기 해 봐요. 기뻐하실 테니까.”
니사가 할룩스로 카렐을 찾았지만 바로 연결이 되지를 않았다. 잠시 신호가 간 후 누군가에게 우회 연결되면서 루스탐의 목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방금 들어가셨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곤란할 테니 급한 거 아니면 이따가 하세요.”
“그 여자를 벌써 만나셨다고?”
니사가 일부러 들으라며 크게 말했다. ‘여자’라는 말에 뾰로통해진 밀리타의 이맛살에 주름이 잔뜩 잡혔다.
“오늘 밤에 나오실 것 같아?”
“글쎄요, 오늘 분위기가 뭔가 좀 이상하긴 한데요.”
“이상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야릇하다는 거야?”
니사는 밀리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내심 즐기며 대화를 이상한 쪽으로 슬쩍 몰고 갔다. 하지만 루스탐은 그의 방향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냥 느낌인데요……그 여자는 더 적극적이 된 것 같은데 상께선 갑자기 조심스러워지신 것 같아요.”
“아하, 이디나인지 뭔지 그 여자가 황상한테 막 안기려 든다고?”
“이익!”
옆에 있던 밀리타가 갑자기 신음소리 비슷하게 내며 손을 번쩍 들자 소스라치게 놀란 니사는 하마터면 할룩스를 떨어뜨릴 뻔했다. 화가 난 그가 발작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니사가 얼른 비상벨을 울리고는 옆에 있던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미, 미안해요, 장난이었어요.”
버둥대던 밀리타가 주사기를 쥔 니사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방금 일어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손아귀 힘에 니사가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진정해요. 제 장난이었다고요.”
“이디나라고? 이디나라고 했어?”
순간적으로 큰 목소리를 냈던 밀리타가 아직 온전치 못한 목에서 통증을 느꼈는지 입을 얼른 가렸다. 자신의 놀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니사는 경보를 듣고 뛰어 들어온 의료 요원들에게 다가오지 말라 손짓했다.
“누군지 알아요?”
그제야 진지해진 니사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그분께서도 누군지 알아보러 가신 거예요. 이상한 의도가 아니었고……. 바하칼리에 있는 광산의 지배인이라고 들었어요. 비쩍 마른 여자인데 얼굴은 좀 못생겼고…….”
거칠게 숨을 헐떡이던 밀리타가 얼굴을 찡그리며 작은 소리로 답했다.
“이디나……빈트 다하카르?”
“당신 고모 말이에요? 그 사람은 이미 옛날에 죽었잖아요.”
니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스탈의……장녀 이름도 이디나야.”
“예에?”
니사가 놀라 입을 가렸다. 아스탈이 어머니 이디나의 이름을 장녀에게 주었으리라는 건 미처 생각 못했던 터였다. 카렐이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는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루스탐! 그 여자 화면 확보한 거 있어?”
“잠깐만 기다리세요.”
당황한 니사는 헐떡거리는 밀리타에게 다시 물을 먹여주고는 이번엔 더 진지하게 물었다.
“어떤 여자죠? 천천히 말해도 좋으니 자세히 알려줘 봐요!”
밀리타가 고통스러운 듯 침을 몇 번이나 삼키고는 짧게 끊어 대답했다.
“아트위야가 그러는데.”
“어떻게요?”
“겉으로만 순진하고 바보인 척 하는…….”
밀리타가 다시 침을 삼키며 겨우 말을 이었다.
“제 오빠도 목을 부러뜨려 죽였고.”
니사가 흠칫 놀랐다.
“제 할머니처럼 뭐든지 할 수 있을 여자.”
밀리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현장의 자이납이 보낸 영상이 전달되었다는 신호가 울렸다.
“이거 봐요.”
니사는 급히 밀리타의 앞에 영상을 열었다. 카렐과 웬 여자, 장신의 금발 남자가 불릿 옆에 마주서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이 여자 맞아요?”
밀리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그 옆에 있는 금발남자를 가리켰다.
“……타크티 마구스도?”
“어, 그렇네요?”
이 남자는 니사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화면을 바싹 확대시켜놓고 보니 어딘가 달랐다.
“아뇨, 타크티 현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머리색도 더 밝고 훨씬 길어요.”
“그럼 아들 네코로군. 그런데…….”
밀리타가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불릿은 마구스 전용기인데…… 왜 저기?”
“네코는 아직 후계자지 현신이 아닙니다. 아버지 타크티 현신께서 셔틀을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설마 아들에게 주셨을까요.”
무심코 대답하던 니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지난번 아트위야의 궁을 공격했을 때 추락했다던 ‘불릿’ 셔틀과, 그 잔해 속에서 찾아냈다는 금발의 ‘마구스 혹은 마구스 혈통으로 추정되는’ 유해 조각이 그의 머리를 휙 스쳤다.
“아니, 어쩌면……지금은 후계자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다급해진 니사가 다시 할룩스를 들었다. 당장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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