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24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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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칼리의 붉은 사막에 자리잡은 교단의 새 제련소 ‘81번 컴플렉스’는 북부 곳곳에서 화입식 행사 초대를 받고 온 사업가, 제후가의 관리들까지 수백 명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바로 이틀 전까지도 빡빡한 공사기한을 맞추려는 철야 작업자들의 고함과 소음이 가득했던 거대한 고로 건물 앞 광장에는 단 이틀만에 이 많은 내빈들을 위한 깔끔한 만찬장이 차려져 이 행사를 준비한 사람의 철저함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내빈들 사이에는 사업장 혹은 조합의 대표 신분으로 참석한 마구스와 신관들도 적지 않지만 제후나 황실 사람들이 이들의 정체까지 아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들 성직자들도 바깥 세상에선 여러 개의 ‘합법적인’ 이름을 가진 사업가, 각 분야의 권위 있는 학자들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이 화입식 행사도 교단 내부적으로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대외적으로는 북부에서 며칠에 한 번씩 지겹게 열리는 그저 ‘사업장 일을 빙자한 사교행사’의 하나일 뿐이었다. 마구스, 신관들이 신변에 별 걱정 없이 이곳에 모일 수 있는 것도 그 ‘평범함’속에 스며들 수 있는 덕분이었다. 어차피 교단 내부인들을 제외한 외부인들 중 이 행사에 감춰진 진짜 의미까지 꿰뚫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런 ‘외부인’ 중에는 황금색 갈고리를 반짝거리며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도발적인 외모의 미녀도 있었다. 그 역시 처음엔 평범한 저녁 초대인 줄로만 알았다가 얼떨결에 이곳까지 끌려 왔던 터였다.
그런 그의 곁에는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7척(210cm) 가까운 거구의 ‘남자 사업가’ 모습도 보였다. 여자도 아주 작은 건 아니지만 이 기골 장대한 남자 곁에서는 마치 꼬마 소녀처럼 보였다.
“저기 봐.”
갈고리 여자의 정체를 알아 본 북부 토박이들이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주변에서 황황히 모습을 감추었지만 눈치 없는 다른 지역 출신들은 여자에게 겁도 없이 대놓고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퍽이나 다행히도, 오늘 여자는 그런 수작 따위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여자는 갈고리에 핏빛 포도주잔을 능숙하게 걸어 한 모금 맛보고는 옆에 있는 그 ‘거구의 남자 사업가’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평소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치던 남자는 후계자인 딸 하페즈를 잃고 난 이후 신경이 부쩍 예민했고, 술과 여자에 집착하는 모습도 자주 보이곤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빈자리를 완전히 채워주지는 못했고, 심지어 갈고리를 낀 이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어젠 잘 주무셨나요?”
“날 희롱하는 데 맛 들린 거냐?”
살름 마구스가 마스터 케스난의 갈고리에서 잔을 휙 빼앗아들고는 짜증을 버럭 냈다.
“존귀한 현신께서 천한 인간 여자의 가슴을 탐하시니 그게 희롱이 아니고요?”
“입술 한 번 대 보려 했을 뿐인데 감히 날 밀치다니.”
“가슴은 여자의 자존심이거든요.”
케스난은 어깨에 걸친 숄을 가슴 위로 바싹 조였다.
“지켜야 할 자존심이 남자는 고작 하나지만 여자는 위아래 세 개나 되거든요.”
“오호, 지킬 자존심이라고는 위아래 하나도 없는 황제가 부럽겠어.”
살름의 심통맞은 대꾸에 케스난은 발끈하고 화를 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잠시 머뭇거렸다.
“듣자하니 황제는 ‘자존심’이 조금 다른 데 있다죠.”
케스난은 ‘당신 딸이 황제에게 잡혀 있는데?’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비슷한 수준의 농담으로 받아쳤다.
“오늘밤은 그 빌어먹을 자존심 좀 내 주는 게 어떠냐?”
몸이 단 살름이 한 팔로 케스난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다시 수작을 시작했다. 웬만한 사람 허벅지보다 굵고 무거운 팔이 어깨를 무자비하게 조여들자 케스난은 숨도 쉴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나도 내 하나뿐인 자존심 기꺼이 내줄테니까.”
살름은 케스난을 안은 채 그의 고운 흑발을 헤치고 귓불에 살짝 입술을 대며 주변에도 자신이 이 여자의 남자라는 것을 대놓고 과시했다.
“왜 이리 급하세요?”
케스난이 슬쩍 눈을 흘기며 살름의 무거운 팔을 힘껏 밀어냈다. 사실 무게나 힘으로 말하면 카렐 쪽이 더하겠지만 그는 이렇게 상대를 힘으로 거칠게 제압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급해? 10년이나 내 약을 올렸으면 된 거 아니냐?”
살름이 케스난을 다시 안으며 버럭 화를 냈다. 이미 몇 번을 거절당하면서 남자는 잔뜩 오기가 올라 있었고, 케스난도 슬슬 ‘빼는 데는’ 한계를 느껴가고 있었다. 사실 10년이면 남자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너 혹시 누구처럼 겉만 번드르르하지 여자구실도 못 하는 목석 아니냐? 그게 아니면 대체…….”
“뭐에요?”
순간 얼굴이 시뻘개진 케스난이 그의 뺨을 후려치려 손을 번쩍 쳐들었다. 물론 상대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만큼 느릿하게 움직인 것이었지만 자신의 분노를 전달하기는 충분했다. 케스난의 손목을 덥석 잡은 살름은 그제야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는지 더듬거리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 그게……얼마나 오래 기다렸으면 그런 생각까지 다…….”
그때,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나타나 난처해진 살름을―어쩌면 케스난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사람들 눈도 많은 데서 뭐 하는 겁니까.”
여자의 목소리에 당황한 살름은 얼른 옷매무새와 표정을 가다듬었다. 여자는 케스난보다 족히 한 뼘은 큰 키가 튀기는 했지만 진부한 스타일 비단포에 철강조합과 항공조합 문장의 짧은 머플러를 건 소박한 차림새였다. 여기에 모양새 별로 안 나는 두툼한 서류 가방까지 들고 있으니 실속 없는 체면보다는 돈 냄새에 치중하는 전형적인 사업가로 보였다.
하지만 케스난은 고양이처럼 차갑고 매서운 눈을 부릅뜬 이 여자가 그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일부러 눈에 안 띄게 스스로를 꾸몄다는 것을 바로 직감했다.
“작은 말다툼일 뿐이요, 아트.”
살름이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대가 마구스 아트위야라는 것을 깨달은 케스난은 얼른 표정 관리부터 해야 했다. 눈에 튀는 금색-하늘색 오드 아이를 오늘은 검은색 컬러 렌즈로 감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케스난이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 마구스는 바에자 하나만 남아있었다.
“현신이 체면도 없이 천한 인간에 홀린 것도 모자라서 말다툼 따위까지 하오?”
아트위야가 살름을 신경질적으로 몰아붙였다. 그의 핀잔에 발끈한 살름이 바로 되받아쳤다.
“‘천한 인간’ 이오타 요아킴에게 딱지맞고 앓아누웠던 그대가 할 말은 아닌 듯 싶소만.”
“뭐요?”
“아참, 요즘은 새 ‘천한 인간’ 남자한테 홀렸다지요. 그 사내는 홀몸에 아직 멀쩡히 살아있기까지 하니 누가 손대기 전에 냉큼 거두시구려. 내 그대가 그렇게 거친 남자를 좋아할 줄은 꿈에도 몰랐소만.”
“나 지금 농담하러 온 것 아니니 좀 따라와 봐요.”
아트위야가 짜증을 내며 살름의 옷자락을 냉큼 붙들고 잡아당겼다. 그의 눈총을 한 번 받은 살름은 큰 덩치가 무색하게 목줄 매인 개처럼 졸졸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케스난은 저들 사이에 무언가 중요한 대화가 오갈 것을 눈치 챘지만 일단은 가만히 남아있어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요?”
사람들 없는 연회장 구석으로 끌려온 살름이 아트위야의 손을 쳐내며 짜증을 냈다. 주변에 사람 없는 것을 확인한 아트위야가 그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내보였다.
“혹시 그대도 이거 받으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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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윗선에 전달해라. 그분께서 너희 신의 다음 육신을 갖고 계신다.
너희 신께서 그 육신을 돌려받고 싶다고 하신다면 이 할룩스를 이용해서 기계에 남은 마지막 통화 코드로 연락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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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를 본 살름이 화들짝 놀랐다. 지난 며칠간 죽었다고 단념하고 있던 딸 하페즈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의 표정이 대뜸 진지해졌다.
“이게 뭐요?”
“그대한테는 안 왔소? 이틀 전에 우리 신전 기도함에 들어있었는데.”
아트위야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난 처음 봤다니까.”
살름이 쪽지를 빼앗아들고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그분’이 대체 누구요? 누가 장난친 게 아니고?”
아트위야가 가방에서 웬 할룩스를 꺼내 살름에게 내보였다.
“정보원 통해서 기계 등록자를 찾아봤더니 황실에 등록된 관용 할룩스 맞소. 장난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이 쪽지하고 할룩스를 황제가 보냈다고?”
창백해진 살름이 주변에 누가 없는지 얼른 다시 확인했다.
“그럼 왜 나한테는 안 왔지? 그대 아들하고 내 딸이 거기 함께 있었다지 않았소?”
씩씩대는 살름에게 아트위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어쩌면 놈들이 내 아들 시체만 알아봤을 수도 있죠. 아니면 그쪽 교단 기도함 관리하는 놈이 장난 쪽지로 알고 내버렸을 수도 있지 않소?”
“빌어먹을. 왜 나만…….”
자신에게 올 쪽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살름은 괜한 운을 탓하며 혼자 씩씩거렸다. 많아야 30살 남짓 고만고만한 어린 자식들만 있는 아스탈과는 달리, 나머지 교단 후계자들은 이미 교단의 몰락과 제국의 성립을 모두 지켜보아 온 수백 살의 교단 원로였고 언제든 부모들의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는 준비된 마구스들이었다.
그런 금쪽같은 자식들을 잃었으니 이 두 마구스들의 미련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맘이 급해진 살름이 딸 하페즈를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연락은 해 봤소? 기왕이면 협상할 때 우리 교단도 함께 가게 해 주오. 보안국 프락치 놈하고 하마타 첩자 몇 잡아놨으니 교환용으로 내놓겠소이다. 그걸로 부족하면…….”
열심히 말을 잇던 살름의 입을 아트위야가 손가락으로 뚝 막아버렸다.
“그만요, 나도 아직 연락 못 했으니.”
아트위야가 쪽지를 접어 넣으며 입을 씰룩거렸다.
“왜요? 아이들 시체라도 거둬야 하지 않소!”
격앙된 감정에 목소리가 커졌던 살름이 얼른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트위야가 그를 보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어제 저녁에 맘먹고 연락하려고 보니 할룩스 회로가 손상되었더군요. 쇼트가 걸려서 복제도 불가능하게 홀랑 타 버렸어요. 다른 할룩스로 그 코드에 연락하려 했더니 안 되고요. 이놈으로만 연락 가능한 코드인 것 같아요.”
아트위야가 먹통이 된 할룩스를 보며 이를 갈았다.
“뭐요?”
발끈한 살름이 아트위야의 옷자락을 덥석 붙들었다.
“아니, 대체 관리를 얼마나 엉터리로 했길래…….”
“이 멍청한 현신 같으니.”
아트위야가 버럭 화를 내며 살름의 손을 휙 떨쳐냈다.
“그제까지 멀쩡하던 기계가 관리 잘못해서 하루 만에 그리 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왜 이렇게 단순해요?”
“그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살름이 자리에서 파르르 떨었다. 아트위야가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이 할룩스 코드 출처가 황실이라는 걸 검색해 준 정보원이 다하카르 쪽 사람이었어요, 쿠마르 놈 심복이지. 젠장, 그쪽을 통하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 무슨 말이에요?”
살름이 미심쩍은 눈길을 흘렸다. 아트위야가 그런 그에게 냉큼 대답했다.
“지난번 내 궁전이 다 불탄 후로 코런덤 X 세 놈이 파견 나와서 내 경호원을 맡고 있어요. 아무래도…… 크테시폰 쪽이 수상해요.”
“대신관이요? 설마요.”
살름이 말도 안 된다며 손을 저었지만 아트위야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허, 그게 아니면 내 불릿 금고에 숨겨놨던 할룩스를 대체 누가 손댄단 말이에요? 거기 있는 걸 딱 찝어 훼손한 걸 보면 그게 황실과 연결되는 할룩스라는 걸 미리 알았던 게 분명하다고요. 우리가 황실과 접촉하는 걸 어떡해서든 막으려는 걸지도 모른다고요!”
아트위야의 설득에도 살름은 거칠게 고개를 젓기만 했다.
“이봐요, 아트. 황실 할룩스 코드 검색을 부탁했다는 정도로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추리해서 당신이 보관한 할룩스까지 귀신같이 찾아내 훼손한다는 게 말이 돼요? 쓸데없는 생각 말아요. 어쨌든 황실이 우리와 접촉하려 한다는 건 알았으니 이제 다른 경로로라도…….”
“당신이 쪽지를 못 받은 것도 어쩌면 대신관 쪽에서 미리 손을…….”
아트위야가 막 예민한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연회장 쪽에서 화입식 행사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얼굴을 붉혔던 둘은 얼른 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환한 광장으로 나섰다.
“사람 불러와 놓고 이렇게 계속 혼자 놔두기에요?
여전히 자리에 남아있던 케스난이 굳은 얼굴로 돌아온 살름에게 짜증을 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름은 이제 이 미녀에 대한 관심도 잠시 잊어버린 듯했다. 그와 아트위야의 굳은 표정을 번갈아 쳐다본 케스난은 뭔가 중요한 대화가 오갔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성급하게 내용을 물어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다.
‘보아하니 제 입으로 곧 떠들겠군.’
케스난은 어딘지 심란해 보이는 살름에게서 관심을 떼고 연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단에 불이 켜지고, 침착하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
“앞으로 제국의 첨단 소재산업을 선도할 이 바하칼리 제련소의 화입식 행사장에 와 주신 여러분들께 북부 광공업조합, 그리고 그 산하의 철강금속조합 전체를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저게 누구지?”
연단에 나타난 남자 얼굴에 이번 제련소 공사와 오늘의 행사를 준비했던 실무진들 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연단에는 어제까지 이곳의 마무리 공사와 이 행사준비를 지휘했던 이디나 대신 금발의 웬 잘생긴 미남자가 절뚝거리며 올라와 서 있었다.
“네코?”
갑자기 얼굴이 바뀐 것에 당황했기는 살름과 아트위야도 마찬가지였다. 귀빈석에 있던 한 사람―명목상 북부 광공업조합장을 맡고 있는―이 연단으로 나와 그 금발남자 목에 철강금속조합의 정식 회원임을 상징하는 머플러를 걸어주자 살름이 당혹스런 얼굴로 물었다.
“저 녀석이 왜 저걸 받아? 여기 제련소는 이디나가 맡기로 한 거 아니었어?”
“저 뒤에 봐요.”
보통 사람보다 눈이 훨씬 좋은 아트위야가 살름에게 연단 뒤쪽 어두운 구석을 눈짓했다.
“안 보이는데 뭘 보라고요?”
‘보통 눈’을 지닌 살름이 암흑 속을 가리키는 아트위야에게 짜증을 냈다.
“내가 그쪽 같은 괭이 눈인줄 알아요?”
“그럼 보지 말던가.”
아트위야가 냉소적으로 답하며 혼자서 뚫어지게 그쪽을 살폈다. 그의 시야 속에서는 ‘이 행사의 진짜 주인공’으로 알고 있던 이디나가 마치 저승에라도 끌려온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서 있었고, 그 곁에는 대신관의 심복인 두 명의 X 헤네티들이 사복 차림으로 도끼눈을 번득이며 서 있었다.
“이디나가 저기 구석에 죽상을 하고 처박혀 있군요. 대신관께서 속 시커먼 위험천만 딸을 적당한 선에서 짜르신 모양이요.”
아트위야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속엔 여우가 백 마리여도 능력은 뛰어난 애인데, 꼭 저렇게까지 하셔야 했나.”
“뭔 말이요? 이디나 그 애가 짤렸다니? 어제 머리도 올려줬다고 들었는데 그래놓고 짜르는 게 어딨소?”
단순한 살름이 허 소리를 연발하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트위야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순진하시긴. 머리는 무슨 얼어 죽을. 그걸 진짜로 믿으셨소? 어차피 순혈도 아니잖소. 제 주제를 알고 적당한 선에 있어야지. 게다가……어?”
이디나 쪽을 계속 지켜보던 아트위야가 눈가를 찡그렸다. 이디나보다 더 뒤쪽, 조명도 없는 깜깜한 구석에서 한 여자가 입마개가 채워진 채 헤네티들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저건 또 누구지?”
“혼자만 좋은 구경 하지 말고 같이 좀 봅시다.”
살름이 다시 짜증을 냈다.
“에이, 참.”
아트위야는 경호원에게서 스코프를 넘겨받아 그에게 넘겨주었다. 스코프를 눈에 낀 살름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저 여자……이디나 어미 아니던가?”
지금까지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던 아트위야의 표정이 갑자기 확 굳었다.
“저 입마개한 여자가? 아니, 잠깐. 대신관 하렘에 있는 여자를 대체 그대가 어떻게 알아요?”
아트위야의 공격적인 물음에 지레 당황한 살름이 얼른 해명했다.
“그야…… 전쟁 끝나고 한동안 그 양반 하도 풀이 죽어 있어서 내 기분도 풀어 줄 겸 저자거리 술집 데려갔었는데…… 그때 만났던 싸구려 댄서였던 걸로 기억해요. 이름도 기억 안 나지만 그 양반 술김에 사고 한 번 치고 코 꿰셨지 뭐요.”
“허, 그 목석같은 양반이 어쩌다 술집 여자한테서 장녀를 얻었나 했더니……그랬던 거였소?”
아트위야가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살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술에 약한 양반이 아닌데 어쩌면 몰래 약이라도 탔는지 알 게 뭐요. 말로는 희귀한 자연임신이라지만 내 보긴 십중팔구 아기 미끼로 남자 하나 낚아 팔자 고쳐보려던 수작이었을 거요. 그래도 나름 선심 베푸셔서 모녀를 거두셨지만 그 뒤로 저자거리 술집은 절대 안 가시게 되었다죠.”
“그래, 남자 하나 잡으려던 게 아주 대박이 된 건 좋은데……지금 저건 뭔가 이상하잖소? 옛날 처벌을 지금 하자는 건 아닐 테고.”
아트위야가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어?”
어두운 곳에서는 분명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까지 끌려온 어머니 나키아의 모습을 본 이디나가 눈이 휘둥그레져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려다가 헤네티들에게 거칠게 저지당하고 있었다.
“이거, 다하카르 가문에 아무래도 뭔 일이 있었나본데?”
오지랖 넓기로 소문난 아트위야가 이번에도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는지, 눈가를 찡그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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